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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이 쓴 로판 소설에 빙의되어버렸다-150화 (완결) (150/150)
  • 150화.

    머리 위로는 샹들리에에 박힌 보석들이 온갖 색으로 빛나고, 발아래로는 잔디보다 보드라운 카펫이 붉게 펼쳐졌다. 잭슨의 손을 잡고, 어깨에 손을 얹어 몸을 맞댄다. 움직일 때마다 좋은 향이 넘실거렸다.

    크고 굵은 단단한 손이 이렇게 기분 좋았던가. 발놀림에 치마가 바스락거리는 소리, 웅장하면서도 은은한 음악과 사람들의 작고 큰 목소리가 사방에서 뒤섞여 귓바퀴에 새어 들어온다.

    기대하지 않았던 잭슨의 춤 실력은 대단했다. 그래도 황족이라고 춤도 열심히 배웠나 보다. 전쟁만 하고 어두운 면만 두드러지기에 이런 온건하고 부드러운 유의 것을 할 수 있을 줄 몰랐다. 편견이지. 잭슨이라고 검 휘두르는 법만 알고 있을 리 없으니까.

    잭슨의 손에 벨리타가 한 바퀴 돈다. 치렁치렁한 치마가 활짝 핀 꽃처럼 퍼졌다. 곱게 장식한 긴 머리카락이 비단을 펼친 것처럼 하늘거린다. 그 너머의 벨리타가 맑게 웃고 있었다.

    “너 춤 되게 잘 춘다.”

    음악 소리에 묻혀 다른 사람들은 듣지 못할 말이다. 잭슨과 벨리타만 듣고 뱉을 수 있는 대화였다. 잭슨은 순간 많은 후회를 곱씹었다. 겨우 춤 따위로, 이런 사소한 것으로 벨리타를 즐겁게 해 줄 수 있다는 걸 알았다면.

    그간 벨리타를 몰아붙이고 압박했던 행동이 후회됐다. 억지로 붙잡아 놓을 생각 말고 마음 편하게 함께 시간을 보낼 방법을 알았으면 좋았을 텐데. 너무 늦게 알았다. 춤으로도 이렇게까지 행복할 수 있는 것을. 강압적이지 않아도 됐었는데.

    잭슨은 벨리타를 놓지 못한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하지만 붙잡아두지도 않을 거다.

    벨리타가 없는 날에는 업무를 보고, 노타와 잡담을 나누고, 운동 겸 기사들과 검을 주고받기도 하며 시간을 보낼 테다. 잠이 들지 않는 날에는 책을 읽기도 하고 밤 산책하러 나가 흐드러지게 핀 꽃을 보며 계절을 실감할 것이다.

    비가 오면 짙어지는 종이 냄새에 질색하고, 날이 좋으면 테라스에서 차를 한잔 마시기도 하겠지. 가끔 술을 마시는 날에는 노타나 기사들과 시답잖은 이야기를 나누며 웃을 거다.

    벨리타가 없어도 잭슨은 잭슨의 시간을 보낼 테다. 일하고 휴식을 즐기기도 하면서.

    가끔 찾아와 줄 벨리타를 오매불망 기다리는 잭슨은 이제 없다. 잭슨은 이제야 집착이 아닌 사랑이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음악이 끝나갈 무렵, 잭슨은 벨리타와 몸을 밀착해 고개를 숙였다. 한껏 즐거워 보이는 벨리타가 웃음꽃이 만개한 얼굴로 느릿하게 발을 움직인다.

    “사랑하고 있다, 벨리타.”

    놀란 벨리타의 발이 꼬여 뒤로 넘어간다. 잭슨은 자신의 발이 밟히는 걸 고려하며 벨리타를 부둥켜안았다. 놀란 게 아니라 기겁하는 모양새인 것 같기도 했다.

    잭슨의 사랑은 언제나 일방적이고 강압적이었으니까. 벨리타의 반응을 탓할 생각은 없다.

    벨리타의 손이 잭슨을 밀어냈지만, 잭슨은 쉬이- 진정시키려는 듯 낮게 바람 소리를 뱉어낸다.

    “그러니 네가 행복하길 바란다. 나와 함께하지 않는 시간에도 행복하길 원해.”

    익히 알고 있던 그의 입에서 나올 리 없는 발언이다. 벨리타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잭슨을 보았다. 복숭아처럼 붉게 물든 뺨, 부드럽게 휜 입술, 애정이 녹아든 눈빛이 사랑에 빠진 남자의 것이었다.

    소유욕, 독점욕, 집착과 거만으로 물든 낯짝이 아닌 이십 대 초반의 수줍고 풋풋한 청년의 얼굴이다.

    벨리타는 힘을 주어 밀어내던 손을 떼고 남자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잭슨이 눈을 접어 해사하게 웃었다.

    “네 사랑을 응원할 수 없지만, 내가 어찌할 수 없다는 걸 알아. 그러니 기다리겠다. 네가 그 변태 녀석에게 질리고 마음이 뜬다면 내게 와. 제국의 황제로서 약속하지. 온 힘을 다해 행복하게 해 주겠다고.”

    “그럴 일은 없을걸.”

    “불확실한 미래를 확신하지 마라. 벨리타, 평생 날 돌아보지 않아도 좋다. 변태 녀석과 삶의 끝을 맞이해도 괜찮아. 친구로서 살아도 상관없다. ……기억해 둬. 널 정말 소중히 여기고 사랑하는 사람이 그 녀석 외에도 더 있다는 걸.”

    누가 널 이리 만들었을까. 확실한 건, 벨리타는 아니다. 벨리타가 한 것이라고는 고작 말 몇 문장 정도다. 걸음마를 도와준 게 벨리타라고 해도 걸을 수 있게 해 준 건 그 외의 것이다.

    언제 이렇게 자랐지. 눈 깜짝할 새 다 컸다.

    벨리타는 흐뭇하게 미소 지으며 잭슨의 어깨에 이마를 기댔다. 아이는 금방 자라서 어느새 자기 삶을 위해 떠난다. 당연한 걸 알면서도 시원섭섭한 기분은 어쩔 수 없다.

    목을 조르고 위압적으로 대하던 잭슨은 남을 위할 줄 알고 행복을 빌어줄 수 있는 아이로 컸다. 그것만으로도 대견하고 고마웠다.

    “고마워. 정말 잘 컸네. 몰라보게 컸어. 대단해. 장하다, 잭슨.”

    “또 놀러 와. 황궁 정원에 꽃이 곱게 피었다.”

    “꼭 갈게. 그럴게.”

    음악이 끝나자 바로 다음 곡이 이어진다. 벨리타는 잭슨을 놓고 인사하려는 찰나, 잭슨이 벨리타의 손을 잡아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으레 하는 인사법이기는 하지만, 잭슨은 인사치레를 중요시하는 사람이 아니어서 벨리타는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잭슨은 평온하게 웃으며 단상으로 돌아갔다. 벨리타가 잭슨의 뒷모습을 눈에 담으며 홀의 중앙에서 벗어났다. 사람들 사이에 섞여 소르니를 찾으려는데 덥석, 로엘린이 벨리타의 옷깃을 잡았다.

    로엘린 옆에 백작과 타린이 서 있었다. 벨리타는 두드러지게 반가워하며 셋을 반겼다. 로엘린이 방금 폐하와 단란하게 춤추는 거 다 봤다고, 둘이 언제 그런 사이가 되었느냐며 흥미로워했지만 해 줄 수 있는 말은 없었다.

    눈에 불을 켜고 타린을 찾아다닌 소르니가 다가와 타린의 팔을 툭툭, 건드렸다. 누가 보면 몇 년은 만나지 못한 애인처럼 반가워한다. 깨가 쏟아진다, 아주 콸콸. 데이비드가 본 벨리타와 오웬이 이랬을까. 데이비드에게 미안해졌다.

    “드디어 해방이네.”

    하도 떠들어 갈라진 목소리가 낮았다. 뒤에서 쏟아진 목소리를 따라 돌아보았다. 지친 오웬이 소르니를 원망 가득히 쳐다보다가 벨리타를 보곤 나른하게 웃었다.

    “춤 잘 추더라. 누구는 재미도 없는 대화한다고 고생했는데.”

    “누가 권해 주지 않아서 다른 남자랑 놀았지, 뭐.”

    “와. 그거 진짜 상처인데.”

    오웬이 바지 주머니에 손을 꽂아 넣으며 무료하게 앉아 있는 잭슨을 흘겨봤다. 잭슨이라서 그다지 감흥이 없기는 하다. 질투는커녕, 아들과 놀아 주고 돌아온 아내를 보는 느낌이다.

    오웬은 도란도란 떠드는 소르니와 타린 가족을 보곤 상체를 숙였다. 그리고 벨리타의 머리 언저리까지 내려와 귓가에 속삭였다.

    “잠깐 나갈까. 나 너무 피곤해서 쉬고 싶어.”

    “그러자.”

    괜히 어디 간다고 하면 호들갑을 떨게 분명해서 둘은 숨소리도 죽이고 슬금슬금 자리를 이탈했다. 테라스로 이동하는 건데도 도망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장난스럽게 시시덕거렸다.

    테라스로 나와 커튼을 치고 밤하늘을 올려다봤다. 무수히 박힌 별이 당장에라도 쏟아져 내릴 것 같다. 여름 밤공기는 눅눅하면서도 시원하다. 벨리타가 난간에 기대며 호쾌하게 웃었다. 굳게 친 커튼 사이로 파티장의 빛이 새어 나온다.

    “우리 첫 만남 생각나지 않아?”

    “첫 만남?”

    목을 죈 크라바트를 약하게 풀어 헤친 오웬이 반문했다. 편한 차림이 제일이던 오웬에게는 답답했을 만했다.

    벨리타는 로틀 영지의 음식점에서 봤던 건 건너뛰고, 조슈아의 파티에서 만났던 일을 떠들었다.

    “그때 코 박살 난 줄 알았잖아.”

    “그랬지. 그때 귀여웠는데. 가슴 보고 놀라고 얼굴 보고 놀라서 빨개지는데, 엄청나게 재밌었어.”

    이때부터 알고 있었구나. 벨리타가 오웬의 얼굴과 몸을 좋아하고 있다는 건 첫 만남 때부터 알고 있던 거였다. 여우 같은 녀석.

    후, 숨을 크게 뱉은 벨리타가 난간에 걸터앉았다. 오웬이 벨리타의 무릎을 잡아 뒤로 넘어가지 않게 고정했다.

    “그때는 이렇게 될 줄 몰랐지. 당연히 돌아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딸이 있는 곳으로, 내 삶이 있던 거기로…….”

    처참할 정도로 무너져내렸던 과거를 기억한다. 박탈감과 상실감에 몸부림치며 모든 걸 놓았던 감각과 온전하지 못한 정신으로 악을 내질렀던 참담함이 아직 뚜렷하다.

    지금도 이따금 울렁거리며 미련과 그리움으로 울기도 했다. 감정은 종이 자르듯 간결하고 확실하게 잘라낼 수 없으니까. 신발에 붙은 껌처럼 끈질기고 집요하다. 그래도 그마저도 내 감정이다. 나이기에 느끼고 감당해야 하는 것들.

    사람이니까. 기계나 수학처럼 한결같이 딱 맞아떨어지지 않는다. 감정은 언제나 양면을 띠고 복잡하다. 딸과의 추억을 그리워하면서도 슬퍼서 견디지 못하는 것처럼.

    아마 평생을 그렇게 살 거다. 자식이니까. 내 아이, 소중한 딸이니까. 슬픔이 흐려져도 사랑만은 영원할 거다.

    벨리타는 바람에 흩날리는 머리를 손안에 움켜쥐었다. 드러난 목선을 따라 갸름한 턱이 말을 고르는 듯 우물거린다. 벨리타의 뒤로 나무와 잘 다듬어진 화단이 펼쳐졌다.

    “정말 힘들었지만, 이제는 괜찮아. 나아지고 있어. 하고 싶은 것도 많이 생겼고 즐겁기도 해. 살아만 있으면 어떻게든 살아는 가니까. 그 과정에서 행복할 수 있는 걸 찾아가는 거지.”

    마주 선 오웬의 얼굴이 진중하게 가라앉았다. 무릎에 얹었던 손이 벨리타 옆의 난간을 잡고 양팔 사이로 가두었다. 벨리타는 머리카락을 잡고 있던 손을 뻗어 오웬의 뺨을 감쌌다.

    온화하고 부드러운 미소가 가득한 얼굴의 벨리타는 낭랑하게 말을 이어 갔다.

    “그중 하나가 너야, 오웬. 사랑해. 진심으로 아끼고 행복하게 해 주고 싶어.”

    차분하게 내려다보던 오웬의 낯이 일그러진다. 기쁘고 벅차올라서 되레 얼굴이 구겨졌다. 발끝까지 뜨겁게 달아오르는 것 같다. 몸에 불이 붙은 느낌이다. 여전히 표정은 일그러졌는데도 미소는 피어오른다.

    “내 대사 뺏어가지 마……. 바보야.”

    “누구더러 바보래. 나 좋아하는지도 몰랐으면서.”

    “지금은 잘 알고 있잖아. 그거면 됐지.”

    그래. 그거면 됐다. 벨리타가 고개를 꺾어 위를 올려다보았다가 오웬을 시야에 담았다.

    “내 이름, 궁금해했었지?”

    성인이 되었던 새해 첫날, 오웬이 물었던 이름. 벨리타는 이제 흔쾌히 대답할 수 있다. 어느 곳의 자신도 벨리타였으니까.

    “내 이름은…….”

    벨리타의 입술이 달싹거리며 단어를 뱉었다. 창문 안에서 사람들의 웃음소리와 음악이 한데 뒤섞였다. 오웬은 단어를 곱씹어 중얼거렸다.

    “발음하기 어렵네.”

    “부르지 않아도 돼.”

    어느 이름도 자신이니까. 벨리타는 자신이 너무 먼 길로 돌아가고 있다는 걸 알았다.

    이 사람이랑 함께 행복해지고 싶다. 함께 살면 좋겠다. 가치관이 맞지 않아 다투고 같잖은 일로 싸운 뒤에 화해하는 일상을 보내고 싶다. 서로를 너무 잘 알아서 말하지 않아도 이해하는 노년을 보내면 즐겁겠다.

    내 소설의 끝을 이 사람으로 장식하면 정말 좋을 것 같다.

    사랑이 변하지 않을 거라고는 장담할 수 없다. 그렇지만 맞춰나가면 된다. 사랑은 식고 정만 남아도 이 사람이라면 후회하지 않을 것 같았다.

    벨리타가 오웬의 뺨을 가까이 끌어당겼다. 힘을 주지 않았음에도 오웬은 쉽게 벨리타의 입술까지 도달했다. 부드럽게 입술이 닿고 떨어졌다. 그렇게 자주 맞췄던 입이어도 매번 기뻐하는 오웬이 좋아서.

    “결혼하자.”

    반지도, 꽃도 없다. 벨리타의 삶에서 가장 초라한 프러포즈였다. 그럼에도 닫힌 창문을 비집고 맴도는 음악 소리와 선선한 바람, 등 뒤로 펼쳐진 화려한 정원이면 충분하다. 달빛이 노랗게 아른거린다.

    “또 내 대사 뺏어가지.”

    붉게 물든 단정한 얼굴은 얄밉다는 듯 구겨졌다. 이렇게 청혼할 생각은 없었는데.

    오웬은 재킷 안주머니를 뒤져서 작은 상자를 꺼냈다. 동시에 벨리타의 발아래로 무릎을 굽혀 앉았다. 상자를 열자 푸르게 반짝거리는 보석이 박힌 반지가 드러났다.

    “저와 결혼해 주세요, 벨리타 릴레이나 파텔.”

    “좋아요, 오웬 메이지 체르핀.”

    손가락을 내미니 주저 없이 반지가 끼워졌다. 반지를 구경할 새도 없이 입술이 맞물렸다. 벨리타가 오웬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머리카락이 바람에 나부낀다.

    *

    나는 엄마다. 앞으로도 평생 내 딸의 엄마다. 동시에 나는 나다. 엄마이며, 누군가의 아내, 누군가의 친구이자 소중한 사람이다.

    사람으로서 미숙하고 완벽하지 않지만, 실수하고 잘못을 하며 나아간다. 모두가 그렇듯이. 나도 세상을 배우고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살아간다.

    지금도 읽고 있을지 모를 내 딸아. 우리 아가.

    엄마는 나로서 행복해지려고 해. 내 인생을 살아 보려고. 누구도 대신 살아 주지 않는 내 삶을 소중히 하고 즐기려고 해 볼 거야.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살면서 힘들고 지치는 순간도 오겠지만, 언제나 그랬듯이 이겨낼 거야. 인생이 원래 오락가락하잖아.

    그래도 우리 딸은 덜 고생하고 더 행복했으면 좋겠어. 곁에 있어 주지 못해도 언제나 사랑하고 있다는 걸 알아줘. 엄마는 항상 우리 아가 편이야.

    네 세상은 네 거야. 멋지게 살아. 후회 없이.

    엄마도 엄마의 세상을 멋지게 꾸려 볼 테니까.

    사랑해, 내 딸. 행복해라.

    『딸이 쓴 로판 소설에 빙의되어 버렸다』 완결

    By.[Y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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