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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이 쓴 로판 소설에 빙의되어버렸다-149화 (149/150)
  • 149화.

    애인이 눈앞에 있는데, 애인보다 예쁘다니. 웃기지도 않는 소리다.

    벨리타는 미간을 찌푸리고 한쪽 눈썹을 올렸다. 오웬이 짓궂은 낯짝으로 실실 웃는다. 데이비드와 소르니는 이미 언제 사고를 칠지 모르는 벨리타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당하기만 한다면 벨리타가 아니다. 태도를 바꿔 방긋 미소를 지었다. 타인의 시선으로 보건대, 꽤 사랑스러웠다.

    오웬은 어떤 반응을 보여 줄지 기대하는 모양새로 벨리타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저도 결혼을 고민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분보다 훨씬 멋지시네요.”

    많은 사람 앞에서 대놓고 맞바람을 피우자는 대화를 스스럼없이 나누고 있다. 벨리타에게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사람들이 헛숨을 들이켰다. 곧장 자기들끼리 수군거린다.

    오웬은 순간 자기가 잘못 들었는지 의심해야 했다. 결혼을 고민해? 안 할 것 같은 태도더니 염두에 두고 있기는 했나 보다.

    오웬이 활짝 웃었다. 눈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환한 웃음이었다.

    “결혼하실 분이 들으면 섭섭하시겠어요.”

    “그러는 체르핀 백작 영식의 애인분께서도 무척 속상해하시겠는걸요.”

    사람들은 갈피를 잡지 못했다. 방금까지만 해도 바람을 피울 것처럼 서로의 외모를 극찬해 놓고, 시비를 걸고 있다. 무엇보다 충격인 것은 벨리타가 결혼을 고민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자택에서 두문불출하는 벨리타였다. 남자를 만날 여력도 되지 않았을 텐데 어떻게 결혼을 고민하는 사람이 생겼다는 말인가. 연애는 아닐 거다. 그렇다면 당연히 혼처를 알아본 것이 된다. 들어오는 혼담도 죄다 거절하더니, 이미 찾아 둔 걸까.

    사람들은 일제히 한창 사교계를 떠들썩하게 만든 소문을 떠올렸다. 벨리타와 잭슨의 결혼. 벨리타가 나서서 극구 부인했다고 하지만, 모르는 일이다. 그새 눈이 맞아서 결혼을 고민하는 걸지도.

    귀를 열고 둘의 대화를 듣는 귀족들은 속으로 열심히 가늠해 보았다. 지금이라도 벨리타와 친밀한 사이가 되면 황후의 친우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정까지 도달한다.

    사람들의 속마음 따위에는 관심도 없는 벨리타가 농담할 다음 말을 고르는 사이, 오웬이 먼저 대화를 이어 나갔다.

    “그래서 속상하신가요?”

    아닌 척 듣고 있던 귀족들의 고개가 일제히 오웬을 향해 돌아갔다. 속상하냐고? 벨리타에게? 그렇다는 말은…….

    대답을 기다리는 듯, 귀족들이 숨을 죽이고 귀를 기울였다. 벨리타는 새침하게 고개를 돌리며 데이비드의 옷자락을 당겼다.

    “네, 속상하네요. 정말 결혼에 대해 고민하게 하시는군요.”

    “에이, 그냥 질러 버리세요. 좋은 사람 같던데요.”

    “체르핀 백작 영식이 뭘 아신다고.”

    만화의 한 장면이었다면 귀족들의 턱이 일제히 바닥까지 곤두박질쳤을 거다. 대화의 말투는 날이 서 있었지만, 막상 둘은 즐거워하고 있었다. 분위기가 화기애애했다. 돌려 말하고 어떻게든 꼬아서 지껄이는 귀족들이 보기에, 둘의 관계는 분명히 애인 사이다.

    잭슨과 연인 사이도, 결혼할 사이는 더더욱 아닌 벨리타. 귀족들이 작게 혀를 차며 고개를 돌렸다. 황후가 되지는 못해도 영향력이 있는 사람이니 친해져서 나쁠 건 없지만. 그래도 아쉬운 건 아쉬운 거다.

    말꼬리를 잡고 늘어서는 벨리타와 오웬을 아니꼽게 보던 데이비드가 사이에 끼어들어 가로막았다. 지긋지긋한 사랑놀이, 여기서까지 보고 싶지 않다는 태도였다. 소르니도 가지가지 한다는 반응이다.

    몸으로 시야를 가린 데이비드의 옆으로 벨리타가 고개를 내밀자 귀가 붉어진 데이비드는 이를 악물고 말했다.

    “창피하게 하지 마십시오. 가만히 좀 계시란 말입니다, 가만히 좀.”

    목소리는 작아서 벨리타만 겨우 들었다. 한 자, 한 자, 짓씹듯 뱉은 말에 벨리타는 입을 꾹 다물고 얌전히 데이비드의 등 뒤로 돌아왔다. 소르니도 오웬의 팔을 약하게 잡아당기며 눈치를 줬다.

    능청스럽게 어깨를 으쓱거린 오웬이 입을 다물었다. 소르니는 벨리타에게 다정하게 미소 지으며 다른 사람들에게 오웬을 소개해 주고 오겠다고 했다.

    벨리타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거리자 소르니는 귀엽다고 호들갑 떨며 오웬의 팔을 가볍게 두드리고는 이내 질질 끌고 간다. 오웬은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상태로 소르니의 팔심에 이끌려 사람들 틈으로 사라졌다.

    오웬 성격에 사람들에게 일일이 웃어 주고 사람 좋은 체하기는 힘들 텐데. 벨리타가 안쓰럽다는 듯 오웬이 사라진 곳을 바라보았다.

    순간, 우렁찬 목소리가 들렸다. 황제 폐하가 도착했다는 소식이다. 귀족들은 하던 대화를 멈추고 단상 위를 바라봤다.

    붉은 망토가 휘날렸다. 바닥까지 늘어진 두꺼운 천은 걸음을 걸을 때마다 금빛으로 수 놓인 자수의 찬란함을 드러냈다. 화려한 어두운 보라색 정장에 황금 휘장, 보석이 촘촘히 박힌 황관. 어느 곳 하나 눈부시지 않은 곳이 없었다.

    잭슨의 얼굴까지도. 모두 조화롭게 어울렸다. 평소에도 잘 차려입고 다녔던 잭슨이었지만, 근엄하게 입을 다물고 황제답게 구색을 갖춰 입으니 다른 사람 같았다. 잭슨의 앞과 뒤로 시중을 들 하녀와 기사들이 따라붙었다.

    작년의 승전 파티에서 피떡을 만든 귀족을 질질 끌고 온 사람이라고 생각지도 못할 모습이다. 그때에 비해서 잭슨도 참, 사람 됐지. 벨리타는 흐뭇하게 잭슨을 보았다.

    단상 위에 황제의 의자만 덩그러니 놓여있다. 황후가 없는 탓이다. 잭슨이 의자에 걸터앉자, 귀족들은 일제히 예를 갖춰 인사를 올렸다. 벨리타도 엉겁결에 따라 인사했다. 무심한 낯으로 고개를 끄덕거린 잭슨이 파티의 시작을 알렸다.

    구구절절하게 황제가 된 기쁨을 떠들지도 않고 간결히 잘 즐기다 가시오, 라는 말만 했다. 너무 짧고 간단해서 끝났음을 눈치채지 못한 궁중 악단이 다급한 노타의 손짓을 보고 연주를 시작했다.

    시중을 들기 위해 잭슨의 뒤에 선 노타가 작게 속삭였다.

    “제가 외우시라고 글까지 적어 드렸는데, 정말 이럴 거예요?”

    “길게 말해 봤자 번거롭기만 하지.”

    심드렁한 잭슨의 태도에 노타가 주먹으로 의자 뒷면을 약하게 쿵쿵 쳤다. 잭슨이 눈을 흘기며 노타를 노려본다. 노타는 자신의 처지를 한탄한 뒤, 대화를 이어 나갔다.

    “제발, 정말 제발. 순탄하게 파티 끝내요, 우리. 인사 온 분들한테 모욕하지 마시고, 칼 들이대지 마세요. 아시겠죠? 제 평생 소원이에요.”

    “시끄럽다.”

    여태 보아 온 잭슨은 그러고도 남는다. 방금까지만 해도 망토 거치적거린다고 뜯어 버리려고 했던 잭슨이었으니까. 어르고 달래서 겨우 입혀 놓은 거다.

    노타는 아무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요즘은 부탁하면 들어는 주니까 다행이긴 하다만. 갈 길이 멀다.

    약간의 시간이 흘렀다. 벨리타는 춤 신청을 거절하며 데이비드의 뒤에 붙어 있었는데, 자꾸만 느껴지는 집요한 시선이 부담스러워졌다. 누가 보는 건지 안다. 너무 잘 알아서 탈이었다.

    벨리타가 데이비드의 옷깃을 약하게 잡아당기며 작게 귓속말했다.

    “데이비드, 잭슨이 자꾸 나 쳐다봐. 저거 분명 왜 자기한테 안 오냐고 노려보는 거지?”

    “예. 아주 집요해서 기분 나쁩니다. 어련히 갈 텐데 뭐가 그리 급한지.”

    순탄한 귓속말을 위해 상체를 숙인 데이비드가 인상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데이비드는 여전히 잭슨이 싫다. 여태 한 짓거리를 보면 좋아해 줄 수가 없다. 빨리 결혼이나 하지, 구질구질하게 누님을 찾는 것도 짜증 난다.

    짝사랑 참 질기고 질척거린다. 쯧, 데이비드가 혀를 차자 잭슨의 낯이 형형하게 사나워졌다.

    벨리타는 다시 데이비드의 옷깃을 잡아당겼다. 데이비드가 숙였던 상체를 더욱 낮게 수그렸다.

    “잭슨한테 인사하고, 넌 춤 좀 추고 와. 너도 결혼할 사람 찾아봐야지. 참한 사람 있으면 홀라당 낚아 버려. 알았지?”

    뭘 낚는다는 말인가. 사람이 물고기도 아니고. 데이비드가 떨떠름하게 벨리타를 바라보자 의기양양하게 고개를 치켜든다.

    “넌 사람 보는 눈이 있으니까, 분명 좋은 사람 찾을 거야. 물론 나중에 나한테 인사시키는 거 잊지 마.”

    “누님이나 잘하십시오. 누님 애인 되시는 분은 결혼하려고 난리시던데.”

    벨리타가 가볍게 뱉은 말이 썩 듣기 좋다. 나중에 인사시키라는 말도 꼭 신경 써 주는 가족 같아서 기쁘기도 하다. 데이비드는 들뜨는 기분을 숨기고 툴툴거렸다.

    “티 나?”

    좋으면서 비꼬는 데이비드를 이미 파악하다 못해 자연스럽게 무시할 수준에 통달한 벨리타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벨리타야 오웬이 이미 여러 번 결혼에 대해 언급했으니 눈치챌 수밖에 없었다고 해도, 데이비드는 어떻게 알았단 말인가.

    데이비드야말로 환장할 노릇이었다. 파티를 위해 이틀 전 수도에 도착했던 데이비드는 오웬이 준비한 반지를 몇 번이고 들여다보는 걸 목격했다. 복도를 거닐다가 꺼내 보고, 간만에 대화 나누다가 또 꺼내 보고, 정원을 산책하면서 또 꺼내 보는 걸 봤다.

    정말 보고 싶지 않았다. 궁금하지도 않았다. 누님의 애인이 청혼을 준비하는 걸 알고 싶지도 않았다. 데이비드가 알 게 뭔가. 둘이 결혼을 하든, 산책하다가 꽃을 꺾어 누가 꽃이게, 하는 꼴값을 떨든 데이비드는 전혀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오웬이야 꽤 괜찮은 사람이고 벨리타에 여간 잘해주는 게 아니니 걱정할 게 없다. 그러니 제발 좀 자신 모르게 연애했으면 좋겠다. 누님의 연애질을 보는 기분은 징글징글하다. 소름 끼친다.

    질색한 데이비드가 벨리타에게 대답했다.

    “제발 티 좀 내지 마십시오. 알고 싶지 않단 말입니다.”

    “거 진짜, 연애 좀 할 수 있지. 아무튼, 난 오웬이랑 있을 테니까 너도 연애 좀 해.”

    연애할 시간이 있어야 하지. 데이비드가 지지 않고 반박하려 입을 열자, 벨리타가 데이비드의 손목을 잡아 앞장섰다. 잭슨에게 빨리 인사하고 소르니의 옆에서 기력이 쇠해가는 오웬에게 가려는 속셈이다.

    속내를 눈치챈 데이비드가 벨리타의 손을 자신의 팔 위에 얹었다.

    군더더기 없는 에스코트다. 벨리타와 데이비드는 서로에게서 떨어지기 위해 잭슨에게 빠른 걸음으로 다가갔다. 뚱하게 지켜보고 있던 잭슨의 안색이 밝아진다.

    단상 아래에 선 둘은 예의를 갖춰 인사했다. 잭슨이 환한 낯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태 엉덩이를 들썩거린 적조차 없는 잭슨의 행보에 사람들이 주목했다.

    여태 부동의 자세였던 황제가 단상 아래에 내려오기까지 했다. 고작 그것 하나로도 벨리타와 잭슨의 각별한 사이가 증명됐다. 잭슨이 벨리타의 앞에 선 뒤, 벨리타의 손을 잡았다.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 보이더라. 너무 쳐다봐서 나 뚫리는 줄 알았어.”

    볼을 붉힌 잭슨이 벨리타의 차림을 보았다. 데이비드는 빨리 자리를 뜨고 싶었다.

    “오늘 정말, 아름다워. 원래도 그랬지만, 오늘은 눈이 부실 정도로군.”

    “너도 고와. 들어오는데 진짜 멋지더라.”

    미소가 떠나질 않는다. 벨리타에게는 익숙한 잭슨의 웃음이지만, 다른 사람들은 아니다. 주위가 술렁거린다. 데이비드는 진심으로 이 자리에서 사라지고 싶어졌다.

    잭슨이 벨리타의 손등을 간지럽히며 수줍게 입술을 달싹거렸다. 이내 상체를 숙이며 격식을 갖춰 청한다. 그간 들짐승 같았던 잭슨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공손함이었다.

    “나와 춤을 출 영광을 줘.”

    그러고 보니 잭슨과 춤을 춰 본 적이 없다. 벨리타가 환하게 웃으며 수락했다. 잭슨이 데이비드를 파리 쫓듯 손을 휘저어 쫓아내고 벨리타를 에스코트한다. 잭슨에게 받아 본 건 처음이다. 할 줄 알았는데 여태껏 안 했다는 게 어이가 없다.

    홀의 중앙으로 다다른 벨리타와 잭슨은 마주 서서 음악에 맞추어 걸음을 디뎠다. 벨리타의 하얀 치마가 하늘거리며 허공에 퍼진다.

    황홀하다. 이대로 시간이 멈추었으면 좋겠다. 잭슨은 벨리타를 눈에 아로새기며 쿵쾅거리는 심장 소리가 음악에 파묻혀 들리지 않기를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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