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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이 쓴 로판 소설에 빙의되어버렸다-148화 (148/150)

148화.

벨리타의 재력과 신분이면 디자이너가 직접 올 만도 하지만, 데이트랍시고 직접 찾아 나서기로 했다. 때문에 무르펜에 있는 가게를 다 뒤졌다. 인기가 좋은 옷가게들은 이미 예약이 완료된 상태였고, 어느 정도 명망이 있는 곳들은 옷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넓은 무르펜을 하루 종일 돌아다니느라 다리가 욱신거린 탓에 우연히 발견한 옷가게로 바로 들어갔다. 개업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알려지지 않은 곳이었다.

마지막이다. 이번에도 실패하면 정말 잭슨을 찾아가 떼를 쓸 각오를 했다. 혹은 예약이 완료된 가게를 협박하거나.

오웬은 이미 지쳐서 넋을 놓았다. 몇 번이고 그냥 아무거나 입으면 안 되냐는 투정을 부렸지만, 귀족의 신분으로 처음 사교계에 발을 들이는 건데 어떻게 아무거나 입히랴.

벨리타의 애인이라고 옆에 끼우고 다닐 오웬인데 아무거나 입으면 면이 서질 않는다.

당당하게 가게 안으로 들어선 벨리타가 흐느적거리는 오웬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계산대에 지루한 분위기로 앉아 있던 여자가 벌떡 일어난다.

“어서 오세요!”

귀족들은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어서, 인맥도 없고 평도 없는 디자이너에게 맡기지 않는다. 때문에 벨리타가 첫 손님이다. 사장이자 종업원이며 디자이너인 그리셰가 초록색 눈을 빛내며 벨리타와 오웬을 소파로 모셨다.

“드레스, 정장 모두 가능합니다! 어느 분 옷을 고르시나요?”

상품 목록을 펼치고 테이블에 올렸다. 그림으로 그려진 정장 디자인 옆에 원단이 붙어 있었다. 벨리타는 심각할 정도로 진지하게 디자인을 훑어봤다.

“우선 정장을 사려고 하는데, 일주일 안에 만들어 주실 수 있나요?”

일주일이면 꽤 빠듯하다. 홀로 디자인부터 제작까지 모두 도맡아 하는 터라 다른 손님의 옷 제작과 병행하면 힘들지도 모른다. 손님이 더 올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그리셰가 눈치를 살피며 영업 미소를 지었다.

“기간이 촉박하면 값이 비싸지는데, 괜찮으신가요?”

“그럼요.”

고민도 하지 않고 대답한다. 그리셰는 슬금슬금 밀려오는 대박의 기운을 느끼고 친절히 디자인 설명에 들어갔다. 이 디자인은 작년 황실 파티에서 유행한 디자인이고, 저 디자인은 이번 연도 초봄에 유행하기 시작한 색과 디자인이다.

벨리타는 무감한 표정으로 종이를 넘겼다. 벨리타가 보기에는 썩 나쁘지 않았다. 유행에 민감하게 옷을 잘 챙겨입는 잭슨도 근래에 이런 유의 옷을 입었으니까. 유행을 따르면서도 자신의 특색을 드러내는 형태. 실력이 있는 사람이다.

정장 상품 목록을 다 살펴본 벨리타가 책을 덮었다. 곁눈질로 보고 있던 오웬은 어지간하면 그냥 사자는 반응이다.

벨리타는 눈을 빛내고 있는 그리셰를 훑어보곤, 드레스 상품 목록도 가져오라며 지시했다.

당연하다는 듯 뱉는 명령조. 그리셰는 묘하게 얕보인 기분이 들었다. 그렇지만 귀족이고, 첫 고객이어서 어쩔 도리 없이 드레스 상품 목록도 가져와 책장을 넘겼다.

“설명 부탁해요.”

그리셰가 정장의 설명과 마찬가지로 세세하게 상품에 관해 설명을 늘어놓았다. 정장이 주력이라고 생각했건만, 드레스 디자인도 실력이 괜찮았다. 지금은 연줄이 없어 주목받지 못하지만, 곧 크게 성장할 가게다.

벨리타가 턱을 톡톡, 손가락으로 두드리며 눈을 가늘게 떴다.

“드레스와 정장을 맞춤 제작 하고 싶은데. 일주일 안에 가능한가요?”

“예?”

드레스와 정장을 일주일 안에? 불가능하다. 잠도 자지 않고 내내 매달려야 겨우 완성할까 말까다. 그리셰가 에둘러 거절할 표현을 고민하는 동안, 벨리타는 손가락으로 턱을 짚었다.

“그만한 값을 줄게요. 당신이 만들어 준 옷을 입고 황궁 파티에 참석할 거예요.”

황궁 파티. 곧 거행될 즉위식 다음에 열리는 파티일 것이다. 그곳에 자신의 드레스와 정장이 귀족들의 눈에 띈다면. 그리셰가 눈을 번뜩거렸다.

벨리타는 덤덤한 태도로 책자를 들어 빠르게 넘겨본다.

“싫은가요?”

내려다보는 시선이 그리셰에게 꽂힌다. 앉아 있는 동안 기력을 약간 회복한 오웬이 벨리타를 곁눈질로 살펴보았다. 작년과 다르게 꽤 오만한 귀족 같은 태도를 보일 줄 안다. 혹은 자신의 능력과 명성을 충분히 알고 있는 거만한 사업가의 태도 같기도 했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더니. 오웬이 소파에 기대어 상황을 지켜봤다.

“아뇨. 하겠습니다. 어떤 디자인을 원하시나요?”

그리셰의 눈이 번들거렸다. 벨리타는 이런 눈을 꽤 좋아했다. 현실에서 음식점을 운영할 때, 자신의 요리 비법을 알아가기 위해 종업원으로 일하던 사람들의 눈을 기억한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은 자신의 성공을 위해 발악하는 법이다.

벨리타는 들고 있던 상품 목록을 내려놓고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당신이 가장 잘하는 디자인으로. 값은 상관없어요.”

금액 생각하지 않고 가장 자신 있는 상품을 내놓아라. 최선을 다해 완벽한 옷을 만들라는 뜻이다. 고객들에게 선보일 그리셰의 첫 작품을. 그리셰의 안색이 환하게 피어났다.

“그럼 치수를 재고 난 뒤, 디자인 스케치가 완성되면 보내드리겠습니다.”

“그럴 필요 없어요. 치수만 재.”

무엇을 입게 될지, 원하지 않는 디자인을 받게 되어도 상관없다는 태도였다. 그리셰가 놀란 듯 입을 벌렸다. 벨리타가 소파에서 일어났다.

“황궁 파티에서 날 숨게 하지는 않겠죠. 내 안목을 믿어요.”

아, 이런 거 해 보고 싶었다. 돈 생각 없이 펑펑 쓰고 다니는 거. 어색하지 않게 잘 말했으려나. 괜히 이런 시답잖은 거 해 본다고 창피당하면 곤란한데.

벨리타가 그리셰를 곁눈질로 흘겨보자, 그리셰가 흥분감에 달아오른 낯으로 외쳤다.

“완벽한 디자인으로 파티의 주인공으로 만들어드릴게요!”

“그래 주면 고맙고.”

“그럼 치수부터 재겠습니다.”

탈의실로 모시는 그리셰를 따라 걸으며, 벨리타가 오웬을 돌아봤다. 조금 멍하게 입을 벌리고 있는 오웬에게 입을 닫으라는 시늉을 하자 오웬의 입이 더 벌어졌다. 그 꼴을 본 벨리타가 작게 웃으며 등을 돌려 탈의실 안으로 들어갔다.

내 여자 친구 완전 멋있어. 언제 이렇게 돈 펑펑 쓰는 사업가가 됐지?

손으로 턱을 올려 입을 닫은 오웬이 붉게 물든 얼굴을 손바닥으로 감쌌다. 또 한 번 반한 것 같다. 큰일이다. 청혼해 버릴 것 같아.

벨리타를 위해 기다리기로 했지만, 자꾸 이렇게 반하게 만들면 홧김에 청혼해 버릴지도 모른다. 전남편 따위는 기억도 안 날 정도로 완벽한 청혼을 하고 싶은데. 감정에 휩쓸리면 완벽하기는커녕, 허술하고 엉망으로 할 게 분명하다.

자신의 허벅지를 주먹으로 내리치며 충동을 참아낸 오웬이 소파에 늘어졌다. 벨리타의 곁에 있으니 자꾸만 욕심이 늘어간다.

*

소르니가 궁정백들과 심혈을 기울여 준비한 즉위식은 화려하고 순탄했다. 찬란한 제복을 입은 잭슨이 모인 귀족들 앞에서 황관을 쓰고 세례를 받았다. 예전이었다면 큰 반응이 없었겠지만 귀족들의 적, 악당 에르테를 물리친 잭슨은 새로운 황제로서 큰 환영을 받았다.

환호를 들은 잭슨은 당황한 듯 보이기도 했다. 이렇게까지 자신을 인정해 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놀라서 사납게 찢어진 눈이 멍청하게 끔뻑거리는 꼴이란. 귀엽기까지 했다.

즉위식의 마지막인 행진은 호화롭게 트인 마차를 타고 무르펜을 도는 것이다. 제국민들에게 새로운 황제를 알리는 행위이자 세대 교체를 표현하기도 했다.

잭슨은 잘생긴 편이어서, 사람들의 반응이 열렬했다. 소르니가 잭슨의 평판을 신경 써 준 덕이기도 했다.

황제에게 빚을 지게 하려는 계산이기는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서로에게 이득을 낳은 꼴이다. 소르니는 체르핀 공작가의 군사력과 자금을 거두어들였다. 황실의 소유가 될 뻔했지만, 자신의 평판을 높여 준 소르니에게 잭슨이 보답으로 돌려준 것이다.

서로가 질색할 정도로 싫지만, 함께한 시간이 길었던 만큼 같은 편이 되면 얼마나 이익을 챙길 수 있을지 알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알았느냐면, 벨리타가 아이들에게 근황을 물은 덕이다.

형식적인 즉위식이 끝난 후, 파티가 시작됐다.

황궁 앞으로 무수히 많은 마차가 들어섰다. 하나씩 귀족이 내리며 입장을 알렸다. 즉위식 파티인 만큼 잭슨에게 잘 보이려는 귀족들이 빠짐없이 참석했다.

벨리타는 데이비드와 함께 마차에서 내렸다. 벨리타 릴레이나 파텔과 데이비드 네이선 파텔이 입장한다는 큰 목소리를 뒤로하고 벨리타는 데이비드의 에스코트를 받았다. 사람들의 시선이 집요하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품평하는 시선들. 흠집을 찾아내거나 몸에 두른 것들에 가치를 판단하는 눈들이 빼곡하다.

돈을 퍼부은 만큼, 그리셰는 걸작을 완성했다. 벨리타를 위한, 벨리타에게 완벽히 어울리는 드레스를 완성해 보내주었다. 분홍빛이 군데군데 어우러진 화려한 하얀 드레스는 철저히 벨리타의 것이었다. 조슈아의 팔찌와도 꽤 어울렸다.

품평을 당하는 만큼 드레스의 디자인도 눈에 띌 거다. 그리셰는 이제부터 바빠져서 일에 치이게 되겠지.

벨리타는 귀찮음을 느끼며 데이비드의 에스코트에 맞추어 높은 굽의 구두를 신고 걸었다.

홀 안에 자리를 잡고 서니 사람들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저번과 다를 바 없지만, 가문을 보고 다가오는 것이 아닌 벨리타를 보고 얼굴을 비추려는 사람들이 득실거렸다. 얼떨결에 해냈던 사건들이지만 결국은 지금의 벨리타가 이뤄 놓은 성공들.

그 성공을 보고 들이대는 사람들이다. 벨리타는 전과 다르지만, 여전히 귀찮은 인기가 거추장스러웠다. 부담스러운 시선에 데이비드의 뒤로 숨어 버린다.

작년의 황실 파티와 다를 바 없는 벨리타의 태도가 웃기기만 한 데이비드는 그때와 같이 벨리타를 뒤로 숨기고 사람들의 대화를 받아주었다.

혼자 다니면 분명 둘러싸인다. 그런 거 귀찮아서 싫다. 로엘린도 온다고 했으니 빨리 만나면 좋겠는데. 벨리타가 뚱하게 입술을 삐죽거렸다.

멀리서 소르니가 도착했다는 목소리가 들렸다. 벨리타가 반가운 기색으로 문을 향해 돌아봤다.

오웬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소르니가 들어오고 있었다. 백작인 소르니와 오웬 메이지 체르핀. 체르핀 백작 가문의 첫째 아들. 멀끔하게 차려입은 오웬이 새삼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단정한 얼굴이 평온하게 미소를 띠고 푸른 정장을 차려입은 남자는 혀를 내두를 정도로 멋있었다.

자연스럽게 절제된 행동과 기품 있는 걸음걸이. 이렇게나 시선이 쏠리는 경험은 처음일 텐데도 태연해 보였다. 원래부터 타고났다는 듯.

소르니 또한 자신의 아름다움을 극대화시킬 수 있는 법을 잘 알고 있어서, 눈이 부시게 찬란했다.

소르니와 오웬이 붙어 있는 모습은 한 폭의 그림 같기도 했다. 여전히 주황색의 귀걸이를 한 소르니가 귀신같이 벨리타를 발견하고 다가왔다.

“벨리타.”

“소르니야.”

사람들이 소르니의 앞을 터 주었다. 바다가 갈라지는 모습 같기도 했다. 소르니는 오웬의 팔을 잡아끌고 벨리타와 마주했다.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는지 평소 같은 신체 접촉은 없었다.

“오늘 정말 예쁘다. 원래도 예뻤지만, 지금 나 완전히 반할 뻔했어.”

“너는 남자 친구도 있는 애가, 오해할 말을 하고 그래.”

사람들의 이목은 황제와 가까운 사이인 벨리타와 소르니에게로 향해 있다. 둘의 대화 주제가 무엇인지, 둘의 관계는 얼마나 가까운지, 장신구부터 신은 신발까지 모조리 관심거리였다.

소르니는 익숙해 보였다. 살갑게 데이비드와 인사도 나누고, 오웬을 자신이 아들이라며 소개까지 해 준다.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한 행동이다. 차기 마탑주가 자기 아들이고, 유명한 벨리타와 각별한 사이라는 걸 티 내기 위한.

벨리타는 소르니의 계산을 알면서도 눈감아 주었다. 오웬이 처음 만난 사람인 척 예의 바른 태도를 보였다.

“오웬 메이지 체르핀입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파텔 영애.”

소름이 돋았다. 어제까지만 해도 누구 발가락이 더 물건을 잘 잡나 내기하며 놀았던 남자가 멀끔하게 차려입고 초면인 척 대하는 게 어색하다. 간질간질한 것이 민망한 것 같기도 하다.

예를 갖춰 인사해 주는 오웬을 따라 벨리타도 격식 있게 인사했다. 힐끗, 오웬의 얼굴을 보니 장난기가 가득한 게 벨리타의 민망함을 즐기고 있는 모양이었다.

“첫눈에 반할 만큼 아름다우십니다. 제 애인보다 사랑스러우시네요.”

아니, 아주 신나게 즐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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