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화.
속 편하게 잘도 먹는구나. 벨리타는 엘라와 오웬을 노려봤다가 이온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이온과 마지막으로 만났던 시기가 잭슨이 달아나라고 편지를 보냈던 날이다. 그때는 오웬과 연인 관계가 아니었다.
친구 이상, 연인 이하의 모호한 관계이기는 했지만. 숨기려고 했던 적은 없었다. 하지만 만나는 사람마다 모두 알고 있는 수준이면 티를 내도 너무 낸 게 아니었을까 싶다. 조금 부끄럽다. 벨리타가 헛웃음을 짓고는 이온의 팔을 끌어당겼다.
거리가 가까워지고 벨리타가 얼굴을 들이댔다. 이온은 눈을 느릿하게 감았다가 떴다. 시선이 느껴진다. 오웬이 눈을 부릅뜨고 이온과 벨리타를 바라보고 있었다.
벨리타는 볼에 입이라도 맞출 기세로 얼굴을 밀착했고, 이내 숨이 닿을 거리까지 다다랐다. 오웬의 눈이 희번뜩하게 뜨인다.
“나 고민이 있어, 언니.”
귓속말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오웬만 거칠게 슈를 물어뜯으며 벨리타를 노려봤다. 이온은 허어, 어이가 없는 듯 숨을 내쉬었다. 질투해도 나이 먹은 아줌마를 질투하다니. 웃기지도 않지.
“뭔데?”
“나 쟤랑 결혼할까 말까, 고민이야.”
시선은 벨리타도 느끼고 있었다. 오웬이 왜 저리 쳐다보고 있는지 안다. 질투가 맞다. 잭슨과 소르니에게는 관대하면서, 왜 이온에게만 질투를 하는지 모르겠다.
벨리타의 고민을 들은 이온은 놀란 기색을 보였다.
와작, 타르트가 오웬의 손에서 부서졌다. 정말 뽀뽀라도 받은 줄 아는 모양이었다. 벨리타는 그런 오웬을 차게 식어 버린 눈으로 바라보았다가 다시 이온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이온은 당황했지만 애써 침착함을 유지했다. 귓속말이 오간다.
“귀족들은 결혼 후에 연애한다며? 난 이미 너희가 결혼 날짜 잡아둔 줄 알았는데?”
“뭐? 아니야. 연애 시작한 것도 얼마 안 됐고……. 여기저기서 결혼하라고 난리이긴 한데. 아직 잘 모르겠어서.”
이온은 벨리타의 고민이 이해되지 않았다. 무릇 귀족들은 결혼 후 연애를 했고, 사이가 좋지 못한 귀족들은 맞바람을 피우는 것이 일상이었기 때문이다. 귀족과 거리가 먼 이온도 알고 있는 사실이다.
결혼하고 난 후에 마음이 식으면 다른 사람과 연애를 하면 되는 것 아닌가? 무엇보다 벨리타와 오웬의 아이라면 분명 곱고 영특할 텐데. 귀족들은 하나하나 따져가며 결혼하지 않던가.
이온이 머뭇거리며 말을 고르다가 이내 벨리타의 귀에 작게 속삭였다.
“결혼하고 다른 연애를 해도 되잖아. 다들 그러던데.”
“어떻게 그래. 그럴 거면 결혼 안 하지.”
그런가? 이온이 미간을 찌푸리며 고민했다. 그렇다면 벨리타의 고민이 무엇인지 짐작되지 않는다.
이온은 곁눈질로 오웬을 훑어봤다. 귀족치고는 추레했던 차림새. 격식 없는 태도. 하나씩 아귀가 맞아떨어지는 느낌에 이온은 탄성을 뱉었다.
“애인이랑 신분이 안 맞아? 귀족들은 귀족끼리만 만나잖아. 그래서 그래?”
“에이, 쟤도 백작가 사람인걸.”
“그럼 대체 뭐가 문제야?”
유추해 보려고 했지만, 답이 나오지 않았다. 결국, 이온은 짜증 섞인 말투로 쏘아붙였다.
벨리타는 아직도 집요하게 쳐다보고 있는 오웬을 확인하고 이온의 팔짱을 꼈다. 곧장 주방으로 끌고 간다.
“들어가서 얘기하자. 응?”
“뭘 들어가기까지야.”
그렇게 말했지만 오웬의 시선이 오죽 부담스러운 게 아니다. 이온은 바로 자신의 말을 철회하고 벨리타를 따라 주방으로 들어왔다.
계산대와 이어진 주방은 꽤 좁았다. 벨리타는 구석까지 자리를 이동해 목소리를 낮췄다.
“나는 내 일이 너무 좋단 말이야. 결혼하고 나면 어느 정도 포기해야 하잖아. 난 그게 싫어.”
출근하기 싫어서 오늘도 늦장을 부렸던 이온은 약간 이해되지 않는 발언이었다. 일이 좋다고? 정말 죽어도 이해가 되지 않지만 그러려니 해 보겠다.
이온이 만들고 남은 빵을 벨리타의 입에 물려 줬다. 고분고분하게 받아먹은 벨리타가 벽에 어깨를 기댔다.
“이제 와서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아졌어. 여행도 가 보고 싶고, 해외 무역도 규모를 늘리고 싶어. 음식점도 다른 영지에 가맹점을 내고 싶고 다른 사업도 할 거야. 악기도 배우고 더 많은 마법도 해 보고 검도 다뤄 보고 싶어. 근데 결혼하면 못하잖아.”
확실히 할 게 많기는 하다. 아마 평생에 걸쳐서 해야 하지 않을까. 이온에게는 다른 세상 이야기였지만, 결혼하기에 도전하고 싶은 것을 포기해야 한다는 심정은 이해가 갔다. 다만 귀족들에게는 가능한 이야기가 아닌가.
돈도 많고 시간도 많다. 인력이 많아 집안일에 시간을 쏟을 필요도 없다. 결혼한다고 귀족이 평민처럼 살지는 않는다.
이온은 눈을 가늘게 뜨고 고개를 기울였다. 벨리타를 따라 벽에 어깨를 기댄다.
“왜 못하는데? 누가 막아? 저 새끼가 하지 말래? 언니가 혼 좀 내줘?”
“아니, 그런 건 아닌데…….”
“그럼 그냥 해. 하고 싶은 거 다 하면서. 쟤가 그런 것도 이해 못 해 준대?”
그건 아니다. 오웬이라면 분명 하고 싶은 일 죄다 하라며 도와줄 거다. 새로운 도전을 하면 함께하려고 하겠지. 하지만 애를 가지면 포기해야 할 일들이 많으니까. 그게 무서운 거다. 이미 최악으로 겪어 봤던 결혼 생활이었다.
꼭 할 필요가 있을까 싶기도 하다. 결혼 후에는 상대의 밑바닥까지 보게 되고 몰랐던 부분까지 날것으로 지켜보게 된다.
오웬을 바람둥이로 보았고 오해였다는 걸 알았지만, 언제 다른 사람에게 눈을 돌릴지도 모르는 일이다. 전남편은 그랬으니까.
모든 사람이 그렇다는 것은 아니지만, 겪어 본 이상 겁부터 먹게 되는 건 어쩔 도리가 없어서. 벨리타는 이온에게 할 말을 골라 입을 달싹거렸지만 결국 할 수 있는 말은 없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벨리타를 바라보던 이온은 팔을 뻗었다. 겁을 먹고 걱정부터 하는 벨리타가 안쓰러워서 품에 가득 끌어안는다. 이온도 겪어 보았던 일이다. 결혼 전날 밤, 두려움과 기대로 잠을 설쳤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하다.
이온은 벨리타의 등을 토닥이며 작게 속삭였다.
“그렇게 걱정되면 그냥 하지 마. 누가 너한테 뭐라고 하겠어. 폐하께서 널 그렇게 아끼신다는데, 저 녀석이 영 별로면 폐하한테 가 버려라. 아니면 그냥 나랑 놀면서 늙든가. 늙는 거 별거 아니더라고.”
“꼬부랑 할머니 돼도 나랑 놀아 줄 거야?”
품에 파고들어 웅얼거리는 목소리가 수그러든다. 이온은 늙어서 골골거리는 자신을 상상했다가 고개를 저었다. 벨리타의 머리에 자신의 머리를 기댄다.
“내가 심심하면 놀아 주고. 너도 친구 좀 만들어라. 무슨 후작 영애가 친구가 그리 없어서야.”
친구 만들라는 말은 처음 듣는다. 벨리타가 웃음을 터트리며 이온의 머리에 비비적거린다. 까칠하게 보이기까지 하는 말투가 좋다. 투박한 만큼 진심이 느껴져서. 친밀하고 거친 이온이 현실에 두고 온 친구들과 비슷하다. 자신을 잃지 않게 해 주는 이온이 좋다.
“인생 뭐 있어. 사는 대로 살면 그게 인생이지 뭐. 복잡하게 생각하지 마. 난 머리 쓰는 거 영 질색이야.”
어렵게 생각할 필요 없다. 원하는 대로 살면 후회는 하지 않는다. 이온이 덧붙인 말은 벨리타의 마음에 남았다. 그래, 급하게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 조금 더 지내 보고 정말 이 사람이다, 싶을 때 결혼해도 늦지 않다.
조금은 마음이 가벼워졌다. 현실에서의 벨리타보다 지금의 벨리타는 훨씬 발전했고 성장했다. 현실에서 겪었던 결혼 생활이 되풀이된다고 해도, 벨리타는 대처할 수 있다. 더 나은 선택을 하고 자신을 지킬 수 있다.
벨리타에게 지식이, 돈이, 권력이 있으니까. 자신을 보호할 힘이 있다.
그걸로 충분하다. 벨리타가 이온을 힘주어 끌어안았다가 놓았다. 이온이 벨리타의 어깨를 두드리며 호쾌하게 웃었다.
“네가 사람 보는 눈이 없는 것도 아니고, 어련히 잘하겠지. 결혼이 뭐 그리 중요해? 살다가 아니면 새 남편 들여 버려.”
이온이 있어서 다행이다. 벨리타는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고 대답하며 손을 잡고 주방에서 나왔다. 오웬과 엘라는 이미 돌아갈 채비를 끝마친 상태였다.
벌써 돌아갈 준비를 하느냐는 물음에, 오웬은 샐쭉하게 입술을 내밀고 대답했다.
“즉위식도 일주일 뒤인데 드레스도 맞추고 장신구도 사놔야지. 내 정장 사는 거 봐준다며?”
제작을 맡길 것도 아닌데 뭐가 그리 급한지. 물론 오웬이 맞춤 정장을 입는다면 정말 예쁠 것 같지만……. 맞출까?
솔깃한 상상이 들어서 벨리타는 바로 정장을 맞춰야겠다고 다짐했다. 오랜만에 황궁 파티인지라 여기저기서 예약을 해 놓아 경쟁이 치열하겠지만, 벨리타니까 괜찮다.
여차하면 잭슨에게 부탁해 황실 재단사에게 맡겨도 되니까. 잭슨 입는 옷 보면 정말 잘해 줄 것 같기는 하다.
그래도 이온과 더 있고 싶은 마음이 큰 탓에 벨리타는 이온의 눈치를 봤다. 이온은 벨리타의 등을 떠밀어 오웬의 앞까지 모셔다드렸다.
“빨리 가, 이 계집애야. 나도 장사해야 될 거 아니야.”
“또 올게, 언니.”
“그래. 자주 와.”
냉큼 벨리타를 끌어안은 오웬이 순하게 웃었다. 엘리의 정수리에 손을 얹고, 벨리타의 허리를 감싸 안은 오웬이 주문을 읊었다. 벨리타가 손을 흔들며 사라진다.
저택으로 돌아왔다. 벨리타는 편리한 순간이동에 여전히 감탄하며 오웬을 올려다봤다. 엘라는 가득 산 간식 정리를 맡기러 떠났다. 벨리타의 집무실에 덩그러니 남은 둘은 한참을 서로 바라봤다.
“이온한테 질투해서 뭐해?”
“안 했는데?”
“했잖아.”
“안 했다니까.”
어딜 봐도 질투였는데 안 했다고 발뺌이다. 벨리타가 눈을 가늘게 뜨고 집요하게 바라보자, 오웬이 고개를 돌리며 실토했다. 그렇게 귀엽게 보면 말할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면서. 물론 벨리타는 귀엽게 본 적 없다.
오웬이 능청스럽게 벨리타의 어깨를 끌어안고 머리에 턱을 기대며 말했다.
“둘이 뽀뽀하는 줄 알았잖아, 난. 엄청나게 놀랐다고.”
“내가 왜 이온한테 뽀뽀를 해? 잭슨이나 소르니한테는 질투 안 하면서.”
“걔들은 자식 같은 애들이잖아. 이온 씨는 네가 엄청나게 의지하고 각별하게 여기니까.”
그렇다고 해도 설명이 되지 않는다. 질투는 잘 하지 않는 오웬 아니던가.
벨리타가 오웬의 품에서 빠져나와 마주 섰다. 오웬은 벨리타를 피해 고개를 돌리다가 얼마 가지 못해 양손을 들어 올리며 졌다는 시늉을 했다.
“그래, 말할게. 너는 남자한테는 물론이고 여자한테도 인기가 좋으니까 걱정할 수밖에 없잖아. 게다가…… 이건 부끄러워서 말하기 싫은데, 너의 가장 소중한 사람이 나였으면…… 좋겠거든. 가장 의지하고 좋아하는 사람이 나였으면 좋겠단 말이야.”
솔직하게 자신의 감정을 털어놓는 오웬은 이미 새빨갛게 물들어 있는 상태였다. 부끄럽다는 듯, 머리를 우악스럽게 헤집고는 곁눈질로 벨리타를 내려다봤다. 집착은 물론이고 별다른 애정도 가져 본 적 없는 오웬에게는 큰 감정의 변화였다.
잭슨과 함께 있는 상황에서도 질투는커녕, 벨리타의 안위에 대해 걱정만 하는 편이었으니까. 벨리타는 오웬이 질투라는 감정이 없는 사람인 줄 알았다. 그런데 이온에게는 질투를 느낀다니. 편견이 없어도 너무 없지 않은가. 벨리타가 웃음을 터트렸다.
“웃지 마…….”
웃음이 멈추질 않는다. 귀여워 죽겠다. 할 수만 있다면 입에 가득 욱여넣고 우물우물, 씹고 싶을 지경이다.
오웬은 눈을 질끈 감고 부끄러움을 견뎌보려고 했지만, 몇 분 지나지 못해 상체를 숙여 눈높이를 맞췄다.
“그래서. 아니야? 나보다 이온 씨가 더 소중해? 이렇게 추잡하게 질투해서 싫어?”
어느새 진지한 분위기가 되었다. 노란 눈이 약간의 불안감과 기대가 뒤섞여 벨리타를 담았다. 벨리타는 오웬의 멱살을 잡아당겼다. 쪽, 입술이 닿았다가 떨어진다.
“난 내가 제일 소중한데?”
언제나 예상을 빗나가는 벨리타의 대답이다. 오웬은 허탈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난 네가 제일 소중한데.”
“고오맙다. 옷이나 보러 가자. 정장 맞추려면 시간 빠듯하겠어.”
당연하게 받아치는 대답마저 벨리타답다. 벨리타는 자신을 아낄 필요가 있다는 걸 충분히 알고 있는 오웬은, 섭섭하지 않았다. 그저 평소의 능글맞은 미소를 지으며 벨리타에게 입을 맞추고 순간이동을 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