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화.
“내가 미안해요. 잘못했어요.”
그리 말하면서 잘못했다는 태도는 아니었다. 소르니가 타린의 손을 잡고 나지막이 잘못을 빌었다. 자존심을 세워 봤자 타린의 화만 돋울 뿐이라는 걸 아니까. 자존심보다 타린이 더 중요하다.
“뭘 잘못했는지도 모르시면서.”
흥, 새침하게 고개를 돌렸지만 잡힌 손을 빼내지는 않는다. 타린은 잡은 손을 힐끗 보았다가 소르니를 흘겨봤다. 태연하게 미소 짓고 있는 얄미움도 매우 좋아서 큰일이다. 분명 화가 났는데 이미 다 풀려 버렸다.
소르니는 난처한 듯 시선을 이리저리 돌렸다. 이내 사랑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타린의 손을 양손으로 덮어 쥔다.
“왜 화가 났는데요? 저번에 영지에 홀로 두고 간 건, 이미 이야기 끝나지 않았던가요?”
벨리타 납치 사건으로 타린만 두고 홀라당 황궁으로 가 버린 일이다. 타린은 덩그러니 혼자 남아 소르니의 일을 처리해 줬다. 더 효율적인 처리 방식으로 바꾸기도 하고, 업무를 대신 보기도 했다.
소르니가 돌아온 건, 며칠 뒤였다. 혼자 두고 가서 미안하다고 싹싹 빌기에, 뭘 그렇게까지 사과하느냐며 만류했다. 사과하는 소르니가 너무도 절박해 보였다. 버려질까 봐 두려워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타린은 허망했을 뿐이지 화가 났던 게 아니어서 떠나지 말라고 붙잡는 소르니를 몇 시간이나 그럴 일 없다며 다독여 줘야 했다.
관계는 그리 쉽게 끊어지지 않으며 자신은 그리 가벼운 감정으로 만나고 있지 않다고, 화가 나면 대화로 풀 거니까 걱정하지 말라는 말을 했다. 소르니는 실수를 만회할 수 있다는 사실에 무척이나 감격스러워했다.
어떤 삶을 살았으면 실수를 극적으로 두려워하고 버려질까 봐 겁을 먹어야 했나, 염려되었다. 타린은 소르니에게 무서워하지 않고 애정을 받아들일 수 있는 법을 깨닫도록 도와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다. 타린은 소르니가 한 잘못을 직접 깨닫고 사과해 주길 바랐다. 다만 처음이니까. 알아주지 못한다면 말해서 알게 해 주면 된다. 타린이 소르니를 바라보며 화가 난 척, 얼굴을 굳혔다.
“황궁에서 체르핀 공작가 처형이 있었다면서요. 저를 두고 그곳에 홀로 가셔서 서운해요.”
미처 생각지도 못한 말이었다. 놀란 소르니는 다급하게 타린의 손을 끌어당겼다.
“그럼 그 잔혹한 현장을 꽃사슴 같은 당신에게 보여 주라는 말이에요?”
“예?”
꽃사슴이요? 누가요?
타린이 굳혔던 얼굴이 무색하게 멍한 태도를 보였다. 낯간지러운 말을 서슴없이 뱉은 소르니는 태연했다. 덕분에 타린의 얼굴만 붉어졌다.
“그럼 누가 있어요?”
너무도 당연하다는 대답이다. 이런 별명, 아니, 애칭은 처음인지라 타린이 당혹스러운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이러다 휘말리겠다. 타린은 황급히 잡힌 손을 빼고 손부채질을 했다.
“말, 돌리지 마시고요. 왜 저를 두고 가셨어요? 제가 그리 의지가 되지 못했나요? 참혹한 광경을 지켜보면서 힘드셨을 텐데, 곁을 내주지 않으시니…….”
말하면서도 서운함이 밀려왔다. 소문을 들었을 때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가족의 죽음을 직접 보며 어떤 감정을 느꼈을지. 학대를 당했다고 익히 들어왔으니, 다시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힘겨워했을 텐데.
소르니의 삶에 큰 영향을 주는 순간이었을 거다. 그 순간에 곁에 있지 못했다는 게 너무도 슬프고 섭섭했다. 함께해 달라고 권해 주지도 않았다. 그리 의지가 되지 못했나 싶어 서러웠다.
타린의 말을 들은 소르니는 아무렇지 않은 태도로 되레 놀라며 대꾸했다.
“통쾌했는데요? 웃음 참느라 얼마나 힘들었는지 몰라요.”
실수할 뻔했다. 너무 놀라서 마시던 차를 뱉을 뻔했다. 무르펜에 있는 찻집에서 백작 영식이 차를 뱉었다고 소문이 나면 창피하니까.
타린이 헛기침을 한 뒤, 눈을 가늘게 떴다.
“정말요? 정말 그 감정만 들었나요?”
“개운하기도 했죠. 글쎄요. 답답하기도 하고 그랬어요. 샤를로트 경, 제가 처형식에 데려가지 않아서 토라진 건가요? 그런 잔인한 걸 보는 게 취향이었나요?”
아까부터 자꾸 대화 주제가 어긋나는 기분인데. 타린이 고개를 거듭 저으며 강한 부정을 했다. 단 걸 좋아하는 소르니 쪽으로 그릇을 밀어 주며 타린이 진지하게 말했다.
“백작님에게 있어 큰일이었을 텐데, 함께하지 못해서 서운해요. 권해 주지도 않으셨잖아요. 제가 그리 못 미더우셨나요? 기댈 수 없으셨나요? 그래도 연인인데 말씀도 해 주지 않으셔서 무척 마음이 아팠어요.”
이해하지 못한 반응이다. 소르니는 타린의 말을 곱씹어 보다가 태평하게 대꾸했다.
“말했잖아요. 순수하고 여린 꽃사슴에게 어떻게 그리 무서운 장면을 보게 하나요?”
“저, 저는 순수하고 여린 꽃사슴이 아니에요!”
부끄럽고 수치스러워서 창문 밖으로 뛰어내리고 싶다. 차라리 어느 구멍이라도 있으면 머리라도 처박았을 텐데.
타린이 양손으로 얼굴을 파묻으며 수치심에 몸부림쳤다. 테이블이 들썩거려서 소르니가 찻잔을 들었다. 쏟아지면 아깝다.
“백작님에게 중요한 순간에 저를 찾아주지 않으셔서 서운해요. 만약, 제가 가주가 된다고 언질도 드리지 않고 가문을 물려받으면 서운하지 않으시겠어요? 저에게 힘든 일이 있었는데 털어놓지도 않고 홀로 해결하면 마음이 아프시겠죠?”
“…….”
“그래서 제가 토라졌던 거예요. 개운하셨든, 슬프셨든 큰 감정을 느끼셨을 텐데 제가 그 곁을 지키게 해 주지 않으셨잖아요. 거리감도 느껴지고, 제가 그리 중요한 사람이 아닌가 생각하게 돼요.”
이제야 소르니가 이해한 듯 눈을 크게 떴다. 몰라서 그랬으니 이해는 한다만, 그래도 감정이 상한 건 어쩔 수가 없다.
타린이 얼굴을 가렸던 손을 치우고 시폰 케이크 조각을 잘라 소르니의 입에 넣어 주었다. 소르니가 얌전히 받아먹는다.
“서로 의지하고, 돕고, 공유하고 싶어요. 힘든 일이 있으면 나누고, 기쁜 일이 있으면 두 배로 부풀리는, 그런 거요. 제 사랑은 이런 거예요. 부담스러우신가요?”
“아니요. 전혀요. 미처 생각하지 못했네요. 서운하게 해서 미안해요.”
아까와 크게 달라지지 않은 반응이지만 그래도 알고 하는 사과와 모르고 하는 사과의 차이는 크다.
타린은 이미 화가 풀린 지 오래였지만, 이제 알아주니 되었다며 마저 케이크를 잘라 먹여 줬다. 소르니의 볼이 빵빵하게 부푼다. 한가득 입에 넣은 채 우물거리는 모습이 소동물 같아서 귀엽다.
타린이 감상하든 말든 신경 쓰지 않고 차를 마신 소르니가 입안을 말끔히 비운 뒤, 감았던 눈을 떴다. 애정이 가득 묻어나는 시선에 당황한다. 귀여워 죽겠다는 눈으로 보고 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왜…… 그리 보시나요? 얼굴에 뭐라도 묻었나요?”
“아, 아니요. 정말 사랑스러우셔서…….”
주위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바퀴벌레 한 쌍이라고 생각하거나 말거나, 둘은 수줍어하고 부끄러워했다.
잔뜩 붉어진 뺨을 손바닥으로 감싼 소르니가 겨우 대화 주제를 돌렸다.
“곧 즉위식이 거행되는 거 아시죠?”
“물론이죠. 백작님께서 완벽하게 해내시려고 노력하셨잖아요. 옆에서 지켜봤는걸요.”
오전부터 낮까지 백성들에게 보여 주기식으로 진행되는 즉위식 다음에 파티가 이어진다. 타린은 벌써 예상되는 다음 말을 기다리며 마른침을 삼켰다.
소르니가 테이블에 올려 둔 부채를 어색하게 만지작거렸다.
“아시다시피, 제가 황태자비였다가 파혼해서 춤 한번 추지 못할 것 같은데…….”
부채를 폈다가 접었다가, 손목에 걸었다가 무릎 위에 올린다. 거절이 익숙해서, 연인이어도 거절당할까 봐 약간 겁이 나서 머뭇거리게 된다.
소르니가 힐끔, 타린의 눈치를 봤다. 타린은 평소와 다름없는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소르니를 보고 있었다.
“네, 그럴게요.”
주저 없는 대답이다. 놀란 눈치의 소르니에게 당연하다는 듯 입술로 호선을 그렸다. 왜 그리 놀라느냐는 태도 같기도 했다.
타린은 평온하게 소르니의 앞으로 자신의 케이크도 밀어 주었다.
“제가 춤 신청하고 싶어요. 그럴 수 있게 해 주시겠어요?”
“……특별히, 허락할게요.”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해 새침하게 대꾸하고 만다. 타린은 소르니가 좋으면서도 아닌 채 툴툴거리는 모습을 좋아했다. 타린이 말갛게 웃으며 말했다.
“이미 다 소문이 났겠지만, 즉위식 파티에서 공공연하게 모두가 알게 되겠군요. 우리 사이 말이에요.”
“……!”
소르니가 빠르게 고개를 숙였다. 붉은 귀를 보니 얼굴은 얼마나 더 빨개졌을지 짐작이 갔다. 이렇게 귀여운 모습을 독점할 수 있다는 게 새삼 고마워졌다. 다른 사람도 소르니의 사랑스러운 면을 안다면, 분명 모두가 소르니를 사랑하게 될 테니까.
모두에게 사랑받는 소르니도 좋지만, 소르니가 가장 사랑해 주는 사람은 자신이길 바란다. 소르니가 말한 첫 번째길 바란다는 말이 이런 뜻일까. 같은 마음이면 좋겠는데.
환하게 웃으며 타린은 다른 디저트도 주문했다. 벨리타 못지않게 소르니도 단 음식을 좋아했으니까.
*
벨리타는 이온이라는 사람도 좋아했고, 그의 섬세한 손끝에서 만들어진 투박하면서도 포근한, 과하게 달지 않은 디저트를 사랑했다. 작은 영지에서 낭비될 실력이 아님을 알았다.
그 사실을 이온에게 전해주었을 때, 이온은 그리 원치 않아 하는 눈치였다. 평생을 살아온 곳에서 떠나 새로운 대도시로 옮기는 건 대단한 모험이었으니까. 게다가 친구로만 남으면 좋을 관계가 고용주와 고용인의 관계로 바뀌게 된다면 사이가 멀어질까 봐 걱정이 됐다.
당연히 벨리타가 이온을 수도 저택의 주방에 취직시키리라 생각했지만, 벨리타는 되레 황당해했다.
“언니를 왜 내 밑으로 고용해?”
“엉?”
“내 가게 밑에 디저트 가게를 낼 거야. 계약하자고 온 건데?”
어떻게 보면 고용으로 볼 수도 있다. 벨리타는 이온에게 건물 1층을 내어주고 월세를 받을 요량이었다. 사람이 많이 드나드는 길목에 있는 건물을 통째로 사들인 벨리타는 1층에 디저트 가게가 있다면 참 좋겠다고 생각했다.
2층과 3층은 자신의 음식점이었으니까. 밥을 먹고 난 뒤면 무엇이겠는가, 간식이다. 이곳에 커피는 존재하지 않지만 차는 있으니, 밥을 먹고 차를 마시면 딱 맞다. 선순환이 따로 없다.
벨리타의 말에 멍하게 눈만 끔뻑거리던 이온은 곧장 헛웃음을 터트렸다. 멍한 얼굴로 허허, 웃고만 있으니 혼이 빠진 듯 보이기도 했다. 역시 로틀 영지에 남으려고 하려나.
벨리타가 설득할 말을 머릿속에서 고르던 순간, 이온이 한쪽 입꼬리만 어색하게 올리며 말했다.
“넌 돈이 썩어나냐? 뭘 그렇게 신경을 써 줘?”
투박하고 거친 이온의 말을 번역하자면, 정말 고마워서 어떻게 하느냐는 말이다. 찰떡같이 알아들은 벨리타가 환하게 웃었다.
벨리타는 계산대에 몸을 기댄 이온의 손을 꼭 잡으며 차분하게 대답했다.
“투자하는 거지, 투자. 그리고 친구 좋다는 게 뭐야.”
친구라서 해 준다고 하기에는 과하지 않나. 이온은 벨리타와의 급격하게 벌어진 거리감을 느꼈다. 분명 작년까지는 이렇게까지 먼 사람으로 느껴지지 않았는데.
이온은 잡은 벨리타의 손을 떼어냈다.
“난 됐어. 여기서 사는 게 편해.”
“왜? 수도로 가면 돈도 더 많이 벌 텐데.”
“귀족은 모르겠지만, 우리 같은 사람들은 돈 걱정 없이 배 채우고, 따뜻하게 자고, 계절에 맞게 입을 옷만 있으면 돼. 평범하게 살다가 평범하게 죽는 게 소원이야.”
지금도 그러고 있잖아, 라는 말은 차마 입에 담지 못했다. 오만한 대답이 아닐까 싶어졌다. 벨리타가 모르는 이온의 고민과 걱정이 있을 테지.
벨리타는 거절하는 이온에게 더 설득하지 않기로 했다.
그래도 아쉬운 마음이 들어서, 벨리타가 머뭇거리며 계산대를 짚었다. 이온은 벨리타를 흘겨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팡, 벨리타의 등을 아프지 않게 내리쳤다. 파드득, 벨리타가 놀라 이온을 바라봤다.
“그래도 우리 친구잖아, 아니야?”
“맞지. 친구지. 그래도 거리가 멀어서 너무 아쉽네.”
“네 애인이 마법사잖아. 순간이동 하면서, 뭘.”
벨리타의 양어깨를 붙잡은 이온이 밝게 웃었다. 호탕하고 쾌활한 웃음이었다.
“자주 와. 디저트 챙겨 줄게.”
“근데 애인인 거 어떻게 알았어?”
“모를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니지?”
고요해진 분위기 속에서, 엘라와 오웬만이 신나게 디저트를 주워 먹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