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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이 쓴 로판 소설에 빙의되어버렸다-145화 (145/150)
  • 145화.

    사실 벨리타와 데이비드, 오웬은 일을 도와줄 필요가 없었다. 이미 바쁘게 일하는 사람들이 수두룩했고 큰 도움도 되지 않았다. 벌써 마무리 단계였기에 힘을 보태 줄 필요도 없다.

    다만 집무실의 사람들이 원했던 건 벨리타가 있어 주는 것뿐이다. 소르니와 잭슨의 심기가 날카로웠기 때문이었다. 벨리타의 존재 자체만으로도 분위기가 한결 부드러워졌으니까.

    덕분에 하는 일 없이 차나 마시고 황궁의 최고급 디저트를 먹다가 오웬과 데이비드와 수다만 떨었다. 다음에 또 와 달라는 사람들의 권유를 무시하고 저택으로 돌아갔다.

    *

    보름이 지났다. 잭슨이 황제의 권한으로 첨탑에 갇혀 있는 에르테에게 매질을 해도 좋다고 허락했지만, 찾지 않았다. 딱히 얼굴을 보고 싶지도 않았고 더 할 욕도 없었던 탓이다.

    며칠 지나지 않아, 에르테에게 사형 선고가 내려졌다. 법원에 참석한 많은 귀족이 환호했다. 벨리타가 증인으로 참석해 에르테가 지껄인 말들은 죄 읊어 주었다.

    불쌍한 여인들을 납치한 천인공노할 범죄자를 체포한 잭슨은 덕분에 폭군에서 정의감 넘치는 황제로 인식이 서서히 바뀌기 시작했다.

    처형 전날, 에르테는 정말로 무르펜 한복판에 결박되어 돌을 맞아야 했고, 특히 피해자의 가족들이 이를 악물고 돌을 던졌다. 에르테는 내내 소리를 지르고 죽여 버리겠다 악담을 퍼붓다 돌에 맞아 기절했다.

    처형까지 순식간에 진행됐다. 소르니의 도움으로 체르핀 공작 가문의 일원도 함께 반역으로 처형당했다. 소르니는 가장 가까이에서 원수들의 죽음을 지켜봤다. 세리베즈가 배신감과 악에 받친 얼굴로 소르니에게 욕을 퍼부었지만 알 게 뭔가.

    소르니는 타린과 연애를 시작했다고 들었지만, 처형식에는 타린을 데려오지 않았다. 예쁘고 순수한 꽃사슴, 나쁜 거 보여 주면 충격받는다며 혼자 왔다나.

    벨리타도 에르테의 처형을 지켜보기 위해 소르니의 옆에 있었다.

    그리고 벨리타의 음식점이 장사를 시작했다. 귀족들 사이에서 벨리타의 좋은 인식이 있어 사람이 몰렸다. 경제를 휘어잡은 상단을 둘이나 운영하고 있고, 황제와도 친분이 있는 벨리타에게 눈도장이라도 찍기 위해 찾아온 걸 테지만.

    그 덕분에 첫날 만에 좋은 매출을 냈다. 평도 좋았다. 남들과는 다른 특별한 자신을 표출하고 싶어 하는 어린 귀족들이 많이 찾았다. 듣도 보도 못한 새로운 음식이었으니까. 수도의 명물로 입소문이 나는 것도 시간문제일 것이다.

    파텔 영지 뒷산에 만고라도 심었다. 데이비드와 논의한 끝에, 수익의 3퍼센트를 토지 대여비로 상납하기로 계약서까지 작성했다. 만고라가 다 자라날 즈음이 되면 벨리타는 파텔이 아닐 테니까.

    상단 운영은 고용한 사람들이 맡은 바를 다 하며 영역을 넓혀가고 있었다. 타국의 거래와도 성사시켜 며칠이나 경사였다.

    벨리타가 더 걱정할 건 없다. 마음고생하며 정신을 혹사할 필요도 없어졌다.

    몰아치는 사건과 피폐해진 정신은 벨리타를 갉아먹었으나 끝내 완전히 무너트리지 못했다.

    굴러떨어져 죽었음에도, 납치범에게 쫓겨 죽었어도 벨리타는 산에 오른다. 몇 번의 고통보다 좋았던 기억이 더 많았으니까.

    등산 모임에서 다 같이 산에 올라 사진을 찍고, 도시락을 먹고 커피를 마신 후 내려와 백숙을 먹던 기억이 좋아서. 한계까지 끌어올려 마침내 정상에 올랐던 희열감과 성취감이 좋아서.

    그 기억으로 벨리타는 또 산에 올랐다. 오웬과 함께.

    “나 더는 못 가. 마법으로 가면 될 걸 왜 굳이 걸어서 올라가는 건데?”

    수시로 벨리타가 올랐던 수도의 산이다. 오웬은 벨리타가 구해 준 굵은 나뭇가지로 바닥을 짚으며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체력이 나쁜 편도 아닌 오웬이었으나 가파른 산을 짐 가득 짊어지고 오른다는 건 노동에 가까웠다.

    벨리타는 가벼운 걸음으로 산을 오르다 뒤처진 오웬을 기다리기 위해 바위에 기댔다. 뭔가 익숙한데. 그래, 조슈아도 함께 등산했을 때 벨리타가 구해 준 나뭇가지를 짚으며 겨우 올라왔었다.

    그때는 바쁘게 살아 왔던 조슈아가 숨을 돌리고 여유를 갖게 되길 바랐지만. 사람 어떻게 될지 모른다더니. 벨리타는 팔찌를 내려다봤다. 금붙이가 볕을 받아 반짝거렸다.

    소이트 상단에 있는 조슈아의 집무실을 떠올렸다. 의자에 앉았을 때의 눈높이와 맞닿는 장식장. 가장 잘 보이는 곳에 놓여 있던 벨리타의 짧은 편지와 선물한 구두.

    단 한 번도 신지 않고 애지중지 모셔 놓은 신발이었다. 좋은 곳으로 간다기에 선물해 줬더니, 좀 신지 그랬어. 신고 어디든 달아나서 목숨을 부지하지 그랬니.

    곱게 장식되어 먼지도 앉지 않았던 신발을 끌어안고 한참을 울었었다. 너무 가련해서. 살아 있었더라면 함께할 수 있을 일들이 많았을 텐데. 같이 또 등산하고, 놀러도 가고, 여름에는 더위를 욕하며 시원한 음료수를 마시기도 했겠지.

    떠나고 나서야 조슈아가 얼마나 벨리타에게 큰 도움을 줬고 소중하게 여겨 주었는지 알았다. 벨리타도 조슈아를 아끼고 있다는 것도 알았다. 멀리 떠나보내고 나서야.

    지금 생각해 보면 조슈아는 충분히 떠날 여력이 되었을 거다. 빠져나갈 구실도 있었을 터. 그러지 않았던 건, 조슈아의 선택이다.

    그가 원해서 결정한 일이니까. 벨리타는 그의 선택을 원망하지 않고 받아들였다.

    “느리네, 빨리 올라와.”

    바위에 등을 기댄 벨리타가 뒤꿈치로 바닥을 여러 번 두드렸다. 오웬이 양손으로 나뭇가지를 짚으며 헐떡거린다.

    “너 이상하게 등산할 때만 체력이 좋아진다?”

    “이게 다, 비결이 있는 법이란다. 애송아.”

    비결은 무슨. 오웬이 벨리타를 올려다보며 천천히 걸음 했다.

    벨리타는 콧노래를 부르며 주위를 둘러봤다. 초록빛으로 물든 나무와 흙바닥. 군데군데 피어난 꽃과 젖은 풀냄새. 무성하게 자란 나뭇잎 덕에 드리워지는 그늘까지. 먼발치에서 매미 소리가 들렸다.

    벨리타가 크게 숨을 들이마시며 풀 냄새를 느꼈다. 완벽한 여름이다.

    딸이 살고 있을 현실도 여름이 왔을까. 아니면 아직도 봄일까. 아니, 가을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자신의 인생을 살고 있겠지. 집안일을 하다가 실수를 저질러 더 큰 뒤처리를 하게 될지도 모른다. 다음부터는 실수하지 말아야지, 깨닫기도 했을 거다.

    일하고 지친 몸으로 저녁을 먹겠지.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연애도 시작할지 모른다. 엄마의 죽음은 딸을 힘들고 괴롭게 만들겠지만, 벨리타가 그랬듯 딸도 살아갈 거다.

    많은 실수를 하고, 그로 인해 지식을 얻으며 나아간다. 어린 시절 벨리타가 겪었던 일들을 딸도 경험하며 성장하겠지. 언젠가는 딸도 엄마가 되고, 벨리타의 애정을 실감할 때가 올 거다.

    그랬으면 좋겠다. 힘들어하지 말고, 많은 사람에게 자문하며 더 나은 삶을 살길 바란다. 딸이 원하는 인생을, 행복을 찾기를.

    겨울이 지나고 봄을 스쳐 여름이 왔다. 이곳에 오고 겪었던 흐름과도 같았다. 몹시 긴 겨울이었지만, 반드시 봄은 찾아오기 마련이다.

    어느새 앞까지 도달한 오웬이 심통이 난 얼굴로 벨리타를 빤히 바라봤다.

    “나 두고 무슨 생각해. 또 나 버리고 먼저 올라갔단 봐. 굴러서 내려가 버릴 테니까.”

    “하하. 우습다, 애송이.”

    “그 말투 대체 뭐냐고. 어디서 배워 온 거야. 귀여워서 짜증 나.”

    벨리타의 어깨에 고개를 파묻었다. 벨리타는 오웬의 뺨을 감싸 쥐고 강제로 들어 올렸다. 잔뜩 짜증이 난 아이 같은 얼굴이 귀엽다. 감정 표현이 풍부해진 오웬이 무척 사랑스러웠다.

    입술을 맞대었다. 입을 맞추지 않고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귀여움이었다. 갑작스러운 입맞춤에 놀란 오웬이 뒤로 물러났다가 발을 잘못 디뎌 휘청거렸다. 벨리타가 콱, 오웬의 허리를 붙잡았다.

    “……나 이거 설레야 해?”

    허리가 휜 채, 벨리타의 품에 안긴 오웬이 난처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모습이 우스워서 그만 웃음을 터트린다.

    “설레면 좋지. 뽀뽀나 할까, 우리 자기?”

    “어맛, 부끄러워욧.”

    얼굴을 가까이 들이댄 벨리타가 능청스럽게 눈을 가늘게 뜨자, 오웬이 수줍은 체를 하며 고개를 돌렸다. 새침한 대사는 대체 언제 배워왔는지. 부끄럽다면서 입술을 내미는 오웬에게 다시 쪽쪽, 장난스럽게 입술을 마구 문질렀다.

    오웬이 파핫! 웃음을 터트렸다. 휘게 접힌 눈과 잔뜩 벌어진 입이 해맑았다. 벨리타도 따라 웃음을 터트렸다.

    그늘 사이로 내리는 빛과 초록색으로 어우러지는 산의 배경, 질끈 묶은 머리카락이 흘러내리며 바람을 타고 흔들렸다. 셔츠 차림의 벨리타가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옷은 투박하기 그지없음에도 화가가 공을 들여 그린 명화였다.

    “사랑해, 벨리타.”

    “나도. 사랑해, 오웬 메이지. 네가 있어서 행복해.”

    그토록 듣고 싶었던 말이다. 너뿐이야, 라는 말보다 기쁘다. 행복에 겨워서 진심으로 벅차올라 뱉은 말. 진심이 가득한 애정 표현이었다. 오웬은 여느 때보다 더 환하게 미소 지었다.

    “나도 네가 있어서 행복해.”

    “그럼 마저 올라가 볼까.”

    예? 오웬이 당황해도 아랑곳하지 않은 벨리타가 오웬의 허리를 놓고 손을 잡았다. 다정한 손길이었지만 왜인지 모르게 달아나지 못하게 붙잡아 놓은 기분이 들었다.

    아니, 서로의 애정도 확인했고 분홍빛 기류도 조성해 줬으면 산에서 내려가서 오붓한 데이트를 즐겨야 하지 않나? 근사한 식사도 하고 오페라나 연극을 보면서 단란한 시간을 보내야 하는 것 아니냐고.

    그렇다고 벨리타만 두고 혼자 내려갈 수도 없는 노릇이다. 오웬은 울며 겨자 먹기로 벨리타의 뒤를 따라 터덜터덜 산에 올랐다.

    힘들고 다리도 후들거린다. 모기에도 실컷 물렸다. 아마 모기들에게 완벽한 식사였을 것이다.

    오웬은 정상에 도달하는 순간까지 모기에게 피를 내줬고, 저택으로 돌아가면 모기에게서 몸을 지킬 술식을 만들어야겠다고 다짐했다.

    마법사 이 자식들은 마탑이나 실내에만 틀어박혀 있어서 모기의 무서움을 몰랐던 거다. 그러지 않고서야 아직도 술식이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게 말이 되지 않는다.

    오웬은 모기에 물린 목덜미를 벅벅 긁으며 벨리타에게 이끌려 산 정상에 올라섰다.

    시원한 바람이 불었다. 마법 덕분에 더위에서 벗어나 있는 상태지만, 상쾌한 바람이 느껴졌다. 공기도 맑은 것 같기도 하다. 아마 기분 탓이겠지만.

    강하게 내리쬐는 여름 햇볕을 온몸으로 감당하며 오웬이 벨리타의 옆에 섰다. 넓은 수도가 한눈에 보인다. 장난감 같기도 하다. 밟으면 발이 다치려나. 마법으로 메테오 내리꽂으면 볼만하겠는데. 얼마 만에 초토화가 날까. 정확히 몇 분 걸리나.

    실없는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벨리타가 오웬의 팔을 잡아끌었다.

    “밥 먹자. 김밥 쌌어.”

    “김밥?”

    소풍하면 김밥이 아니겠는가. 벨리타는 없는 재료를 어떻게든 구해와 김밥을 만들었다. 덕분에 꽤 현실과 밀접한 김밥이 탄생했다.

    벨리타가 천을 바닥에 깔고 그 위에 앉아 도시락을 꺼냈다. 여름이라 상할까 걱정했는데, 오웬의 보존 마법으로 지켜낼 수 있었다.

    마법이 최고다. 처음 듣는 새로운 음식에 흥미가 생긴 오웬이 냉큼 벨리타의 앞에 앉았다. 얌전하게 다리를 모으고 앉은 오웬이 눈을 빛낸다.

    “무슨 맛이야? 김치볶음밥이랑 맛이 비슷해?”

    “완전히 달라. 그래도 맛있으니까 먹어봐.”

    젓가락으로 김밥을 집어 오웬의 입에 넣어줬다. 우물거리며 맛을 음미한 오웬이 주먹을 짧게 흔든다. 맛있다는 표현이다. 흐뭇해진 벨리타가 닭강정도 꺼내 김밥 옆에 놓았다. 계란말이와 구운 햄도 꺼낸다.

    벨리타의 어린 시절, 초등학교에서 소풍을 갈 때면 김밥 한 줄 먹고 싶어서 떼를 썼다. 그때는 김밥마저 귀해서 아이들 사이에서 부의 상징으로 여기곤 했다.

    그게 한으로 남아 딸의 소풍에는 무조건 김밥을 싸 줬다. 어디 가서 기죽지 말라고, 다른 아이들 받는 것만큼은 해 주겠다는 오기였다. 그랬는데 지금은 애인을 위해 준비했다.

    세상 참 알다가도 모르겠다. 어쩌다 이런 어리고 앙큼한 남자에게 코 꿰여 결혼까지 생각하는지.

    닭강정이 정말 맛있다고 잔뜩 입안에 욱여넣어 볼이 빵빵해진 오웬을 보고 웃었다.

    “다음에는 더 맛있는 거 해 줄게.”

    “또 산에 오르라고……?”

    하얗게 질린 오웬이 눈썹을 늘어트렸다. 할 수만 있다면 살려 달라고 외치고 싶어졌다.

    *

    “저 토라졌어요.”

    곱게 꽃단장한 타린이 새침하게 고개를 돌렸다.

    소르니는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토라진 타린을 어떻게 달래 주어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그런데 자기 토라졌다고 하는 것도 귀엽지 않나. 왜 토라졌는지는 모르지만 우선 귀여우니 빌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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