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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이 쓴 로판 소설에 빙의되어버렸다-144화 (144/150)
  • 144화.

    연락하려고 하기는 했는데, 대체 언제 온 거지?

    벨리타가 당황한 낯으로 데이비드를 흘겨보았다. 데이비드가 억지로 화를 참으려는 듯, 가슴께를 주먹으로 힘차게 두드렸다. 살짝 고릴라 같았다.

    벨리타는 우선 데이비드에게 앉으라며 손짓했다. 태평해 보이기까지 한 누님에게 속 터질 것 같은 기분이 들면 실례일까. 아니, 당연한 반응일 거다.

    데이비드는 발을 크게 구르며 벨리타의 앞에 앉았다. 벨리타가 슬그머니 눈치를 보며 물을 홀짝거렸다.

    “얼마나 놀랐는지 아십니까? 어떻게 된 게, 누님은 항상 사건의 중심입니까? 아무 일 없으면 몸이 쑤십니까?”

    “내 탓은 아니잖아.”

    “아니……! ……하…….”

    뻔뻔한 반응에 속이 뒤집힌다. 데이비드는 마른세수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화를 낼 상대가 잘못되기는 했지만. 전부터 큰 사건은 죄다 벨리타와 연루되어 있다는 게 어이가 없을 지경이다.

    벨리타의 탓이 아니기는 하다. 발단은 항상 잭슨, 소르니, 그 외의 주변인들 때문이니까. 주인공의 숙명 같은 거랄까.

    데이비드가 숨을 몰아쉬고 침착함을 되찾았다. 그럼에도 눈썹이 자꾸만 찌푸려지는 건 어쩔 수 없다.

    “전서구를 받아보자마자 바로 달려왔습니다. 마법으로 다 때려 부쉈다죠.”

    “다 부수지는 않았는데.”

    그걸 어떻게 알았어? 벨리타가 천진난만하게 되물었다. 데이비드는 뒷목까지 뻐근해지는 감각을 느끼며 다시 숨을 몰아쉬었다. 호흡을 정돈하면 그나마 침착할 수 있기는 무슨. 저 태도가 어딜 봐서 납치당했다가 겨우 살아 돌아온 사람의 태도냐.

    테이블에 놓인 벨리타의 물을 빼앗아 마신 데이비드가 입가에 묻은 물을 닦았다.

    “소문이 파다합니다. 잠깐 들렀던 영지에서도, 수도 근처의 음식점에서도 하나같이 떠들어 댔단 말입니다. 납치를 당했는데도 멋지게 맞서 싸운 파텔 후작 영애. 악당 2황자에게 본때를 보여 주고 다 날려버린 파텔 후작 영애, 라고 말입니다.”

    “아이고, 부끄럽네잉.”

    “지금 부끄러워할 때입니까?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또 나왔다. 데이비드 특유의 한발 늦게 상황을 주도하려는 모습. 상황을 다 알아야 마음 편한 특성이다. 벨리타가 눈을 피하며 멋쩍게 웃었다.

    “알면 뒤집어질걸.”

    어지간해서 죄다 말해 주는 벨리타였기에 데이비드는 조금 두려워졌다. 무슨 일이어서 이렇게까지 회피하나.

    데이비드가 주춤거리며 대답을 망설이자, 벨리타가 눈을 가늘게 접으며 주제를 돌렸다.

    “안 그래도 오늘 일어나서 연락하려고 했는데. 내일쯤 황궁에 갈 예정이라서.”

    “거긴 또 왜 갑니까? 그리고 대화 주제 돌리지 마십시오.”

    육체 나이는 한 살밖에 차이가 안 나기는 하지만, 아직 어린 데이비드가 듣기에는 꽤 충격적인 사건인지라. 벨리타는 어색하게 물만 마시며 대답을 회피했다.

    데이비드가 독촉하며 테이블을 쿵, 내리쳤다.

    “야, 인마. 어딜 식탁을 쳐. 내가 그렇게 가르쳤냐?”

    “왜 가는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얘기하십시오. 제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아십니까? 정말 큰일이라도 났으면 어쩌나, 마음 졸였는지 아시느냐 말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데이비드의 표정은 진지하고 진솔했다. 자기 일로도 바쁠 텐데 걱정하는 마음 하나로 달려와 준 데이비드가 고마워져서 벨리타는 데이비드의 정신건강을 위해 아주 많이 간추려 설명하기로 했다.

    “2황자가 날 납치하고 가뒀어. 그래서 잭슨한테 혼내달라고 하려고.”

    “너무 많이 생략됐는데요. ……저도 가겠습니다. 가서 뼛가루도 남기지 말라고 부탁해야겠습니다.”

    벨리타가 생각해도 많이 줄이기는 했다. 그래도 틀린 말은 아니고 데이비드의 동심도 지켜주었으니 된 거 아닐까.

    데이비드는 벨리타의 얘기만 들었음에도 굉장히 분노했고 치를 떨었다.

    사지를 어쩌고, 불에 태워 저쩌고. 벨리타가 들어도 과하게 잔인한 처형법을 이야기하는 데이비드를 보니, 어쩌면 다 이야기해 줘도 괜찮지 않았을까 싶기는 하다. 가는 김에 부모님도 뵙고 오자는 대화도 나누고 있으려니 식사가 도착했다.

    벨리타의 입맛에 맞추어 갓 지은 쌀밥과 불고기, 겉절이와 된장국이 식탁에 올라왔다. 흰 쌀밥에 불고기를 얹고 겉절이로 감싼 뒤, 한입에 욱여넣는다. 참 복스럽게 먹는다.

    데이비드는 이미 식사를 하고 왔음에도 벨리타가 먹는 모습을 보니 자신도 먹고 싶어졌다.

    “오느라 고생했으니까 들어가서 쉬어.”

    “저도 한입만 주십시오.”

    “맞아. 나도 한입만.”

    갑작스럽게 난입한 익숙한 목소리에 놀란 벨리타와 데이비드는 동시에 근원지로 고개를 돌렸다. 식당 구석에서 풀어헤친 셔츠 차림에 머리에 까치집을 얹은 오웬이 뒷머리를 긁적거리고 있었다.

    순간이동으로 온 게 뻔했다. 깨어났는데 벨리타가 없으니 분명 밥을 먹고 있을 거라고 예상하고 바로 식당으로 온 거다. 그리고 그 예상은 틀리는 법이 없다.

    벨리타는 하녀에게 오웬과 데이비드의 식사도 준비하라고 말했다. 오웬은 늘어지게 하품하며 당연하게 벨리타의 옆에 앉았다. 곧장 벨리타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다. 벨리타는 엉망으로 뻗친 머리카락을 정돈해 준 뒤, 어깨를 털었다.

    악, 멀미, 아, 벨리타. 오웬의 머리가 정신없이 튀어 올랐지만, 데이비드는 말릴 생각 없이 시선을 돌렸다.

    오래간만에 평화로운 식사 시간이었다.

    *

    너무 무리해서 속이 울렁거린다. 잠을 제대로 잤던가. 강제로 입에 부어지는 포션만 들이켜며 일만 했다. 소르니는 덜덜 떨리는 손을 내려다봤다.

    수면 부족이야. 황제를 상대로 법정 싸움을 해도 되나?

    소르니는 확실히 도움이 되고 있었다. 그간 공작이 소르니를 폭행한 흔적과 증언을 모았고, 릴페트 자작에게 마정석을 사들인 명세도 정리했다. 납치당해 죽은 여인들의 신상을 확인해 해당 가문에 절절한 편지도 황실의 이름으로 적어 보냈다.

    너무 늦게 찾아서 미안하다, 몹시 안타깝게 느끼고 있으며 어쩌고저쩌고. 사교계 경력으로 애절하고 상냥한 말투로 잘 돌려 적었다. 2황자가 한 짓이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탓하려면 2황자를 탓하라는 듯이.

    많은 편지를 일일이 적는 동안, 잭슨도 바빴다. 에르테를 고문해서 수하들이 누구인지 뱉어내게 한 다음 처벌도 해야 했고, 법정에 세워 질타를 받게 하려고 시간도 맞추어야 했다.

    에르테가 있던 작은 저택은 체르핀 공작의 소유였다. 도망 다니는 신세였던 에르테를 찾아내 숨겨 주었고, 작은 저택의 용도는 더러운 거래와 대피용이었다.

    잭슨은 그 형태를 보고 화가 났다. 예전이었다면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을 텐데 이상하게도 분노했다. 에르테에게 당한 이들이 누군가에게 아주 소중한 사람이었다는 생각이 들어서. 마치 잭슨에게 벨리타가 소중한 것처럼 말이다.

    덕분에 잭슨도 분노를 힘의 원천 삼아 열심히 일했다. 소르니에게 도움을 받아 법정에 설 날짜도 귀족들에게 흘려 넣어뒀다. 분명 귀족들은 분개해서 에르테를 욕하러 찾아올 거다. 그리고 잭슨을 황제로 인정해 주겠지.

    최소한 저런 녀석보다 잭슨이 낫다는 판단을 할 수 있을 거다.

    집무실에 모여 문서를 작성하던 소르니와 잭슨이 동시에 한숨을 내쉬었다.

    “벨리타 보고 싶다.”

    한탄도 동시였다. 잭슨과 소르니가 놀라 서로를 바라봤다. 아, 역겹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같은 공간에서 일하는 건 죽어도 싫지만, 필요는 하니 함께 있기는 한다는 반응이었다.

    “그래서 데려왔습니다~”

    순간 푸른 빛이 번쩍거렸다. 눈이 부셔서 둘은 인상을 찌푸렸다. 낭랑한 목소리와 함께 등장한 건, 오웬과 데이비드, 벨리타였다. 이미 면회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다. 납치 사건에 관해 이야기해 주고 나니 테일러와 라빌이 분개하여 철창을 뜯고 나오려는 걸 겨우 말렸다.

    벨리타를 본 잭슨과 소르니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벨리타에게 뛰어들었다. 컥, 숨이 막힐 정도로 무식하게 들이받아 끌어안는다.

    잭슨과 소르니의 품에 갇힌 벨리타가 살려달라는 듯 데이비드와 오웬을 돌아봤다. 둘은 시선을 피했다.

    “괜찮니? 더 쉬지 않아도 되겠어? 아직도 상처가 가득한데…….”

    걱정이 가득 묻어나는 말투였다. 소르니는 눈썹을 늘어트리며 벨리타의 안색을 살폈다. 휙, 잭슨의 손이 벨리타의 볼을 잡고 돌렸다. 벨리타의 고개가 이리저리 정신없게도 돌아갔다. 서로 벨리타를 걱정하느라 여념이 없다.

    “어지간히 해! 목 빠지겠다!”

    목에서 뼈가 어긋나는 소리가 나자, 벨리타가 짜증을 내며 둘을 밀어냈다. 소르니와 잭슨이 얌전히 밀려난다.

    “그치만 걱정했는걸. 확인 정도는 해도 되잖니.”

    “난 얼굴 보고 싶어서 그랬다.”

    지극히 상식적인 소르니의 반응과 조금 맛이 간 잭슨의 반응이다. 벨리타는 반사적으로 손을 올렸다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손을 내렸다. 맞으리라 생각했지만 맞지 않았음에 놀란 잭슨과 소르니가 움츠러들었던 몸을 바르게 세웠다.

    “왜 안 때리나?”

    기대한 눈치인 것 같기도 했다. 벨리타는 손을 올리지 못하도록 뒷짐을 지고 고개를 저었다.

    “오늘부터 폭력 안 쓸 거야. 그리고 부탁할 게 있어서 찾아왔어.”

    “네 부탁이라면 뭐든.”

    결혼도 환영이다. 잭슨이 환하게 웃으며 팔을 벌렸다. 오웬이 은은하게 웃는 얼굴로 잭슨을 바라본다. 꿈도 크다는 듯이. 완벽한 승자의 여유였다.

    잭슨은 일부러 오웬을 무시하며 벨리타를 끌어안았다. 아, 가볍게 터지는 탄성과 함께 벨리타가 인상을 찌푸렸다. 어딜 보아도 아파서 내는 소리여서, 잭슨이 황급히 벨리타를 놓아주었다.

    “미안하다. 아픈 걸 알면서도…….”

    공기처럼 녹아 있던 노타가 펜을 떨어트렸다. 손을 덜덜 떨며 공포에 질린 듯 보이는 낯으로 기겁했다.

    “지금 사과하신 겁니까……? 폐하, 그런 것도 할 줄 아셨어요……?”

    “죽고 싶은가?”

    “아뇨. 그럴 리가요.”

    충격에 빠진 노타의 얼굴을 보니 짜증이 난다. 잭슨도 사과할 줄 알고 고맙다고도 할 줄 안다. 벨리타가 가르쳤으니까. 잭슨이 신경질적으로 뒷목을 긁적거렸다.

    “그래서. 벨리타, 부탁하고 싶은 게 뭐지?”

    “아. 별건 아니고.”

    발끝을 바닥에 툭툭, 치며 잠시 입을 다물었다. 벨리타가 잭슨을 향해 잔뜩 경계하고 혐오 짙은 낯을 하는 데이비드를 돌아보았다가 어색하게 웃었다. 데이비드 쟤는 왜 치와와같이 아르릉대냐.

    고라니 같은 동생에서 친숙한 반려견으로 성장한 데이비드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벨리타가 데이비드의 기운을 받아 멋쩍게 말했다.

    “2황자 처리해 달라고. 데이비드가 아주 길길이 날뛰면서 사지가 어쩌고저쩌고하던데. 그렇게까지는 모르겠고, 그냥 충분히 벌 받았으면 좋겠어서.”

    소르니와 잭슨이 멍청하게 굳었다. 벨리타는 너무 과한 부탁인가 싶어 어색한 웃음과 함께 신코를 바닥에 치댔다. 딱딱하게 굳어 있던 소르니가 벨리타의 어깨를 붙잡는다.

    “벨리타, 무슨 그런 당연한 부탁을 해? 어떤 방식으로 처형할까 논의까지 하고 있는데!”

    실제로 일하는 중간마다 넌지시 논의하기는 했다. 결국, 피해자 가족들을 모아놓고 투표를 할 계획으로 마무리 지었지만.

    말 나온 김에, 소르니는 벨리타까지 초대했다. 벨리타는 고개를 저어가며 거절했다.

    혼자 살아 돌아왔는데, 피해자의 가족들 얼굴을 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얼마나 부러워하고 슬퍼할지 가늠도 되지 않아서.

    데이비드가 벨리타의 어깨를 손가락으로 잡아 소르니와 떼어냈다. 떼어내자마자 손을 턴다.

    내가 더럽냐? 벨리타가 욕설이 섞인 시선으로 바라보자 예, 더럽습니다. 라는 시선으로 맞받아친다.

    할 이야기는 끝났는데, 이대로 돌아가기는 아쉬우니, 벨리타는 드레스 소매를 걷어붙였다.

    “일 도와주고 갈게. 오웬, 데이비드. 너희도 도와.”

    “예? 저도 영지에 일이 한가득 쌓여 있습니다만.”

    “나도 일이 잔뜩 있어. 아직 안 정해졌는데, 아무튼 많아.”

    한가하지만 핑계를 대려던 오웬이 벨리타의 아련한 눈빛에 결국 패배를 선언했다. 알았어. 도와줄게.

    집무실에 갇혀 일만 하던 사람들이 구원을 받은 듯 울먹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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