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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이 쓴 로판 소설에 빙의되어버렸다-143화 (143/150)
  • 143화.

    품에 파고든 벨리타를 고쳐 안은 오웬이 모인 사람들을 돌려보내고 계단을 올랐다. 벨리타가 돌려보냈던 엘라는 부메랑처럼 돌아와 근처를 맴돌았다. 울고불고, 우리 아가씨 몸 상태는 어떠시냐, 밥은 챙겨 드셨냐, 어디 아픈 곳은 없으시냐고 질문을 쏟아낸다.

    무시하려고 했지만, 침실까지 함께 들어오려는 엘라를 막아선 오웬이 눈을 접어 살갑게 웃었다.

    “청소년은 여기까지.”

    “예?”

    무슨 말이냐는 얼굴로 오웬을 올려다보던 엘라가 말을 곱씹어 보았다. 어. 어?! 엘라가 화들짝 놀라 벨리타와 오웬을 번갈아 봤다. 점점 얼굴이 붉게 물들어 간다.

    무슨 오해를 하는지 알겠지만, 굳이 정정해 주고 싶지는 않아서 오웬은 말없이 미소만 지었다.

    “너, 너무 무리하시면 아가씨 또 쓰러지세요!”

    “하하.”

    “아니. 웃지만 말고요!”

    “하하하.”

    얼굴이 붉다 못해 터질 것 같다. 엘라는 능청스럽게 웃고만 있는 오웬을 노려보며 벨리타의 팔을 붙잡았다. 엘라가 서럽고 서운해서 미칠 것 같다는 분위기를 풍기며 소리친다.

    “왜 저런 놈팡이를 만나셔서 고생하시는 거예요! 어딜 봐도 제가 낫지 않나요?!”

    “아, 웃기다. 아쉽게도 우리 아가씨께서는 마법사에 돈 많고 똑똑한 데다 몸도 좋은, 잘생긴 남자가 좋다 시네요~”

    “아가씨! 저 능구렁이예요, 저예요?!”

    피곤해서 가만히 눈만 뜨고 있던 벨리타가 넋을 놓기 시작했다. 오웬은 어딜 봐도 엘라를 놀리고 있고, 엘라는 도발당해서 어쩔 줄 모르는데 굳이 끼어들어 삼파전을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귀찮다. 다 쫓아내고 쉬고 싶다.

    벨리타가 작게 한숨을 내쉬자, 오웬이 몸통으로 가볍게 엘라를 밀어냈다. 잔뜩 토라져 있던 엘라가 속수무책으로 밀려났다. 약이 잔뜩 오른 엘라가 사납게 고개를 치켜들기도 전에 오웬은 이미 문을 꼭꼭 걸어 잠갔다.

    허망하게 닫힌 문을 바라보며 상황을 파악하던 엘라가 얼마 못 가 소리를 지르고 짜증을 냈다. 쿵쿵, 화가 잔뜩 난 발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문에 등을 기대고 장난스럽게 실실 웃던 오웬이 엘라가 완벽히 사라지고 나서야 벨리타를 침대에 내려놓았다. 푹신하고 햇볕에 보송보송하게 말려 좋은 냄새가 나는 이불에 둘러싸인다. 벨리타가 기분이 좋은 듯 눈을 감고 미소를 지으며 이불에 얼굴을 비비적거렸다.

    썩 고양이 같기도 한 모양새였다. 오웬이 벨리타의 옆에 걸터앉는다.

    “고생했어. 며칠은 푹 쉬자.”

    “……그래야겠어. 너무 피곤하네. 데이비드한테도 연락해 줘야 하는데.”

    “내가 내일 아침에 소식 전해 주고 올게. 걱정하지 마.”

    순간이동은 이런 면에서 참 편리하다. 전화나 문자 메시지와 다른 신속함과 정확성이 있다고 할까.

    벨리타가 감았던 눈을 뜨고 오웬을 올려다봤다. 눈이 마주쳤다. 오웬도 벨리타를 곧게 바라보고 있었다.

    애정이 가득 녹아 있는 다정한 눈. 보고만 있어도 좋다는 듯 올라가 있는 입매. 오웬의 행동, 태도 하나하나가 모두 애정 표현이었다.

    벨리타는 사랑받는 감각이 기분 좋았다. 고맙고 기쁘다.

    상처가 군데군데 남은 손을 오웬의 손등에 얹었다. 부드럽고 매끈한 수려한 손이 그새를 못 참고 깍지를 낀다.

    벨리타는 테라스 너머로 시선을 돌렸다. 해가 뜨고 있었다. 붉은 하늘이 화려하면서도 차분했다. 벨리타가 푸념하듯 중얼거렸다.

    “죽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응.”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

    말하면서 다시 오웬에게로 고개가 돌아갔다. 오웬은 꽤 놀란 표정이었다. 기쁘고 감격스러운데, 너무 놀라서 멍청한 표정. 죽고 싶어 했고 삶에 미련도 없었던 벨리타였기에 당연한 반응처럼 느껴졌다.

    벨리타가 괜히 깍지 낀 손에 들어가지 않는 힘을 줘 봤다. 미미한 악력뿐이다.

    “두고 온 가족 생각이 나더라. 전남편 생각도 나고.”

    “그랬구나.”

    그랬지. 벨리타가 낮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손에 힘이 잘 들어가지 않아서, 벨리타는 오웬의 손등을 손가락 끝으로 간질이는 게 고작이었다.

    “네 생각도 났어. 애들 생각도 좀 들었고.”

    “서운할 뻔했네.”

    “네가 날 살린 거야.”

    당황해서 되묻는 목소리가 달았다. 벨리타는 오웬의 목소리를 사랑했다. 달고 묵직해서 질리지 않는 다크 초콜릿 같았다.

    벨리타가 옆에 누우라는 듯, 손을 휘저었다. 오웬이 바르작거리며 옆에 누웠다.

    “있잖아, 오웬. 내가 전에 네가 날 무력하게 만든다고 했던 거 기억나?”

    “다 잊었다고 하면 거짓말이지.”

    베개도 베지 않고 푹신한 침대와 이불에 기대어 서로를 향해 돌아누웠다. 별다른 접촉 없이 손만 잡은 채, 피곤함이 가득한 얼굴로 바라만 보았다. 붉은 하늘이 테라스와 창문 너머로 내리쬔다. 약간은 타들어 갈 것 같은 감각이 들었다.

    “가끔 보면 넌 상황을 제어하려고 해. 멀리서 지켜보면서. 난 네 그런 점이 조금 오싹했어.”

    “미안해. 널 위해서였지만, 핑계겠지. 다음부터 그럴 일은 없을 거야.”

    “응, 앞으로 그냥 말해 줬으면 좋겠어. 나랑 같이 의논하고 결정했으면 해.”

    같은 주제로 언성을 높이고 몰아세웠던 지난 기억을 떠올렸다. 오웬은 곧잘 울컥하고 화를 내는 벨리타지만, 감정 표현에서 솔직한 점이 좋았다. 조금만 침착해도 이렇게 평온하게 대화를 나누고 조율할 수 있는데 그러지 못했던 게 아쉽다.

    벨리타는 잡았던 손을 놓고 오웬의 머리카락을 빗었다. 결 좋은 보라색의 머리카락. 벨리타가 있던 곳에서는 염색 외에 절대 볼 수 없는 색. 사랑스러워서 한 입 베어 물고 싶을 정도다.

    “그래도 네가 가르쳐 준 마법 덕분에 난 살 수 있었어. 날 지킬 힘을 갖게 해 줬어, 네가. 네가 전에 그랬지. 왜 그렇게 자책하고 걱정도 많고 겁도 많으냐고. 전남편 때문이었더라고. 난 몰랐지. 여태 모르고 살았어.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내 탓인 줄 알았어.”

    피곤함에 뇌까지 눅진눅진하게 늘어지는 느낌이 든다. 벨리타는 자꾸만 감기는 눈을 애써 부릅뜨고 오웬의 머리카락을 헤집었다. 오웬은 말을 얹지 않고 벨리타만 바라보았다.

    “진작 알았으면 좋았을 텐데……. 입에 풀칠하는 것만으로도 벅차서 날 돌아볼 시간이 없더라고. 폭력을 그렇게 무서워하면서도 정작 내가 폭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것도 이제 알았어. 얼마나 무식하고 없어 보이던지. 그래도 나 때는 소리 지르고 때리면서 훈육하는 게 일상이었어.”

    오웬은 벨리타가 수시로 휘두르던 손바닥과 얼얼했던 등짝을 떠올렸다. 좋은 손버릇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혐오스럽거나 밉지는 않았다.

    벨리타는 오웬의 머리카락에서 뺨으로 손을 내려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오웬이 눈을 가늘게 접어 웃는다.

    “못 배워서 그랬던 거더라고. 천박한 것도, 미개한 것도 몰라서 부끄러운지도 몰랐던 거야. 나는…… 사실 더 배우고 싶었어. 그 잘났다는 대학도 가 보고 싶었고, 고등학교도 가고 싶었어. 유학도 가고 싶었지.”

    대학이라든가, 고등학교라든가 알지 못하는 단어지만 오웬은 물어보지 않았다. 벨리타의 푸념이니까. 혼자 말하고 혼자 깨닫기도 하는 과정이다. 오웬의 할 일은 가만히 들어 주면서 이상하게 튀어 나가는 관념에 대해 꼬투리를 잡는 것이다.

    벨리타가 오웬의 팔을 잡아 올렸다. 그 위에 벨리타의 머리가 얹어진다. 오웬의 팔베개를 하고 벨리타는 반쯤 감긴 눈으로 느릿하게 말했다.

    “그걸 여기 와서 알았어. 네가 도와줘서, 옆을 지켜주면서 내가 바라는 게 뭔지 알 수 있도록 도와줬으니까. 너 없었으면 난 얼마나 무너졌을까. 회복도 하지 못하고 망가졌을지도 몰라.”

    “아니야. 내가 없었어도 넌 찾았을 거야.”

    오웬이 벨리타의 허리에 팔을 둘러 가까이 끌어당겼다. 몸이 맞닿는 거리다. 벨리타는 조용히 오웬의 가슴에 귀를 댔다. 심장이 뛰는 소리에 안정감이 들었다.

    “네가 바라는 건, 내가 결정해 줄 수도 없고 간섭할 수도 없어. 내가 해 준 건 그냥, 네게 다양한 선택지를 보여 줬던 것뿐이야. 벨리타, 네가 바라는 건 너 스스로 찾은 거야. 너도 알잖아.”

    “……그런가?”

    “그럼. 당연하지. 넌 네 생각보다 더 대단한 사람인걸.”

    눈이 감긴다. 벨리타가 오웬의 품에 파고들며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그래도 네가 있어서 좋아. 너여서 좋아. 결혼도 나쁘진 않…….”

    “……?”

    말끝을 흐린 뒤, 문장이 이어지지 않자 오웬이 벨리타를 내려다봤다. 벨리타? 이름을 불러보았지만,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다. 새근거리는 숨소리가 가슴께에 닿는다.

    오웬은 피로감이 달아난 것을 느끼며 잠들어 버린 벨리타를 여러 번 더 불러봤다.

    “미치겠네……. 그래서 결혼을 하겠다는 거야, 말겠다는 거야.”

    고단한 시간을 보낸 벨리타를 부득불 흔들어 깨울 마음은 들지 않는다. 그래도 그냥. 말은 끝까지 해 주지. 결혼해도 좋겠다는 말만 끝까지 해 줬어도 당장 맞춰 뒀던 반지와 함께 꽃다발을 내밀 텐데.

    답답하기는 하지만 괜찮다. 언제나 자식의 이야기만 중점적으로 조잘거렸던 벨리타가 자신의 삶과 바람, 잘못을 떠올리고 자신에 대해 알아갔으니까. 드디어 벨리타는 자신을 돌아볼 여유가 생긴 것이다. 오웬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시간은 많으니까. 결혼은 천천히 해도 늦지 않다. 아니, 약혼이라도 해 둘까. 전에 보니 남자들이 만나 보자고 편지를 산처럼 쌓아 놨던데.

    한숨을 내쉰 오웬이 은은한 미소를 띠며 벨리타를 꼭 끌어안았다. 오늘은 온종일 잠만 자자. 붉은 하늘이 점점 푸르게 물들어갔다.

    *

    정말 잠만 잤다. 비척대며 일어나니 저녁 시간이었다. 부스스하게 부풀어 오른 머리카락을 빗으며 세상모르고 자고 있는 오웬을 내려다봤다. 연구한다고 무리했는데 납치당해서 더 고생했으니 종일 잠만 잘 만도 하다.

    벨리타는 오웬을 깨우지 않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바닥에 발을 딛으려는 순간, 오웬이 벨리타의 허리를 잡아끌었다.

    다시 침대에 드러누운 벨리타가 당황스러움에 오웬을 돌아봤다. 눈도 뜨지 못하고 잠결에 웅얼거린다.

    “어디 가……. 마저 자…….”

    년 초에는 이러지 않았는데. 그새 서로에게 익숙해져 버린 걸까. 벨리타가 오웬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낮게 속삭였다.

    “밥 먹어야지. 넌 마저 자. 나중에 볶음밥 해 줄게.”

    “……좋아.”

    전에 야식으로 해 준 김치볶음밥이 썩 입맛에 맞았나 보다. 배시시 웃으며 입맛까지 다신다. 귀여운 녀석.

    벨리타가 거칠게 오웬의 머리를 쓰다듬은 후, 오웬의 팔을 내치곤 침대에서 벗어났다.

    씻지도 못했고 제대로 된 밥도 못 먹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려면 의식주, 청결 모두 충족해야 하는 법이거늘.

    욕실에서 한참이나 씻고 나왔다. 오래간만에 맡은 향유의 향이 아주 좋아서 넋을 놓고 물에 잠겨 있었던 탓이다. 옷까지 제대로 갖춰 입고 나니 기분마저 상쾌했다. 저녁이었지만 이른 아침에 일어난 느낌이다.

    이틀간 사람의 꼴이 아니었기 때문이겠지. 벨리타가 오웬이 깨지 않도록 조심조심, 발소리를 죽여 침실을 벗어났다. 계단을 내려가자마자 어찌 찾았는지 엘라가 호들갑을 떨며 달려왔다.

    품에 와락 안기는 엘라를 감당하지 못해 뒤로 물러나자, 엘라가 힘을 주어 벨리타를 들어 올렸다.

    아니 일 년 사이에 너무 큰 거 아니냐고. 어떻게 성인 여자를 들어 올리냐.

    벨리타가 무력하게 엘라의 품에 안겨들어 올려지니 주위를 지나가는 하녀들이 함박웃음을 지었다. 너희가 봐도 웃기냐. 나도 웃기다.

    멍청한 표정이 된 벨리타를 몇 분간 둥개둥개한 엘라가 벨리타를 내려 주었다.

    그리고 초췌하게 흐느적거리는 벨리타의 팔짱을 끼고 식사를 준비하겠다며 끌고 간다. 벨리타는 힘없이 질질 끌려가 식탁 의자에 앉았다.

    엘라가 물도 직접 먹여 주려고 하기에 미쳤냐며 뿌리쳤다. 시무룩한 엘라 뒤로 식당의 문이 열렸다.

    “네가 왜 여기서 나와?”

    “누님.”

    데이비드가 얼굴을 잔뜩 구겨 험악한 표정으로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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