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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이 쓴 로판 소설에 빙의되어버렸다-142화 (142/150)
  • 142화.

    제르미는 호기롭게 달려들어 검을 휘둘렀지만, 잭슨의 뒤에 있는 기사들의 대응이 더 빨랐다. 순식간에 잭슨의 앞을 둘러싸 보호한 기사들은 제르미의 발악을 제지했다.

    잭슨에게 다다르지도 못한 제르미는 속절없이 무너져 바닥에 엎어졌다. 에르테는 명령을 수행하지 못한 제르미를 원망하며 욕했다.

    에르테는 도주를 포기하고 가만히 앉아 잭슨을 바라보았다. 모든 게 제 손안에 들어올 수 있었는데. 모든 게 에르테의 것이었다. 이렇게 허무하게 망칠 줄이야. 달아난 벨리타의 탓이고, 돌연 죽어 버린 체르핀 공작의 탓이며, 제 앞길을 막은 잭슨의 잘못이다.

    “아…… 짜증 나네.”

    에르테는 신경질적으로 뒷목을 긁적거렸다. 어떤 변수를 일으킬지 모르는 에르테였으니, 기사들은 긴장감을 유지했다. 가만히 바라보던 잭슨은 무력해진 에르테를 보곤 포박 명령을 내렸다. 기사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와 에르테를 제압하고 밧줄로 동여맨다.

    잭슨이 한숨을 내쉬었다. 지긋지긋한 싸움도 이젠 끝이다.

    *

    마력을 쏟아부었음에도 벨리타는 기절하지 않았다. 신력과 마력의 차이가 크게 벌어진 덕이었다. 틈틈이 마법을 사용하기도 했고, 이미 소모한 신력이 얕아져 있던 덕분이었다.

    오웬은 산 아래에 대기하고 있던 기사의 도움을 받아 인근의 의원을 찾아갔다.

    야밤에 영업하지 않는다는 의원을 붙잡고 매달린 덕분에 벨리타는 제때 치료받을 수 있었다.

    붕대를 온몸에 휘감은 벨리타가 치료에 도움을 주었던 의원 부인의 나이트가운을 강탈했다. 옷이 해지고 찢어져 더는 입을 수 없었던 탓이었다. 오웬은 급구 사과를 하며 다음에 더 좋은 옷을 선물로 보내겠다고 타협했다.

    꾸준히 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의원의 당부를 들으며 벨리타가 오웬에게 손을 뻗었다. 오웬이 조심스럽게 벨리타를 안았다. 둘의 미묘한 기류를 눈치챈 의원은 부인을 데려가 자리를 피해 주었다.

    “보고 싶었어.”

    벨리타가 오웬의 어깨에 팔을 두르며 얼굴을 기댔다. 다친 구석이 없는 얼굴은 오웬의 품에 파묻혔다. 오웬이 벨리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도. 얼마나 걱정했는지 몰라. 그래도 네가 마법을 써 준 덕분에 빨리 찾을 수 있었어. 정말 고마워. 정말…….”

    산에서 그리 울었으면서도 아직도 나올 눈물이 남아 있었다. 오웬이 훌쩍거리며 벨리타의 머리에 기댔다. 온몸이 욱신거리고 저렸지만 오웬의 품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아서 어깨에 두른 팔에 힘을 줬다.

    “구하러 와 줘서 고마워. 너 아니었으면 난 또 죽었을 거야.”

    “또?”

    오웬이 하얗게 질린 낯으로 인상을 찌푸렸다. 이틀 사이에 무슨 일이 있기는 한 모양이었다. 안고 있던 팔에 힘을 풀어 벨리타를 간이침대에 눕혔다. 매달리려고 팔을 뻗는 벨리타를 제지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 줘. 들어야겠어.”

    “지금 그게 중요해? 우리가 다시 만난 게 중요하지.”

    “아니…….”

    할 말이 있었는데. 벨리타가 오웬의 멱살을 낚아채 끌어당겼다. 미약한 힘이었으나 갑작스러워서 오웬의 상체가 숙어졌다. 벨리타는 무수히 오웬의 입에 입맞춤을 퍼부었다. 이야기가 끝났나 싶어 치료실을 들여다보았던 의원의 부인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도로 고개를 넣었다.

    “푸하, 벨리타, 그만……!”

    “이리 와. 안 끝났어.”

    이렇게 막무가내여도 되는 거냐고. 박력 있어서 멋지긴 하지만!

    그때, 굳게 닫혀 있던 문이 열렸다. 일을 끝내고 남은 일들은 기사단장과 마법사단장에게 몰아준 잭슨이 기사의 보고를 받아 들이닥쳤다. 잭슨이 벨리타와 오웬을 보고 험상궂게 얼굴을 찌푸렸다.

    “뭐 하는 거지?”

    “아이고 세상에.”

    부끄러운 모습을 들켜 버렸다. 오웬을 잡아먹을 태세였던 벨리타가 화들짝 놀라 몸을 물렸다.

    오웬이 벨리타와 잭슨을 번갈아 보다가 잭슨을 향해 태연하게 손짓했다.

    “하던 거 하게 자리 좀 비켜 줘요. 폐하한테는 내가 나중에 뽀뽀 실컷 해 줄게.”

    “미쳤나?”

    “좋으면서 아닌 척하지 마세요.”

    “진짜 죽고 싶은 건가?”

    흥이 다 깨졌다며 입술을 부루퉁하게 내민 오웬이 앉은 자세를 바르게 고쳤다. 이를 빠득 간 잭슨이 검을 꺼낼까 고민하며 의원의 의자에 걸터앉았다.

    낯선 목소리에 놀란 의원과 부인이 상황을 확인하러 나왔다가 잭슨을 보고 어리둥절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즉위식도 하지 못한 황제이고 이들은 평민의 신분이니 잭슨을 못 알아볼 만하다. 오웬은 평온한 태도로 잭슨을 가리키며 소개했다.

    “제국의 태양, 황제 폐하세요. 폐하, 이쪽은 벨리타를 고쳐 준 의원과 도와준 부인이시고.”

    황제라는 소리를 들은 의원과 부인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주저앉았다. 잭슨은 눈길도 주지 않고 벨리타를 곧게 바라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가운을 입어서 제대로 보이지 않지만, 꽤 다친 모양이었다.

    “벨리타. 얼마나 다친 거지? 심각한가? 신관을 불러야 할 정도인가?”

    “치료 잘 끝났어. 2황자는? 어떻게 됐어?”

    잭슨이 거만하게 다리를 꼬고 피곤한 눈가를 주물렀다. 치료가 잘 끝났다니 한시름 놓았지만.

    “체포했다. 달아날 틈도 없이 순간이동으로 황궁 첨탑에 가두어 놓았어. 사형집행일만 정하면 된다.”

    자신이 손을 더럽히지 않아도 에르테는 죽을 목숨이다. 다른 나라 옛말에 그런 말도 있지 않던가. 해악을 끼친 사람에게 앙갚음하려 하지 말고 강가에 앉아 가만히 기다리면 머지않아 그의 시체가 떠내려올 거라고.

    그렇다고 얌전히 사형당하는 순간만 기다릴 수도 없어서. 벨리타는 에르테가 지껄인 말들을 죄다 줄줄이 읊어 주었다. 자신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까지.

    걱정시킬 생각은 없었지만, 그래도 곱게 죽게 될 거 더 힘들게 죽지 않겠는가. 오웬과 잭슨의 표정만 봐도 얼마나 괴로운 벌을 받고 사형이 될지 짐작이 갔다.

    잭슨이 쾅, 테이블을 내리쳤다. 의원과 부인이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무르펜 한복판에 세워 돌팔매질을 당하게 해야겠군.”

    “그럼 저 불 쏴도 돼요?”

    “안 돼.”

    사람들이 모일 무르펜에서 에르테에게 불을 쏘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일단 공개적으로 형을 집행하면 에르테의 오만하고 자존심 높은 성정에 얼마나 모욕적일까.

    허락을 구하는 듯, 잭슨이 벨리타를 보았다. 벨리타가 알아서 하라며 손을 저었다.

    “우선 황궁으로 이동할까요? 백작님도 거기 계시나?”

    “그래. 체르핀 공작가의 범행 증거를 정리하고 있다.”

    하얗게 질린 의원과 의원 부인을 돌아본 오웬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자리에서 일어나 의원에게 나중에 큰 보상을 약속하고 밖에서 대기 중이던 기사들에게 산으로 돌아가 뒤처리를 부탁했다.

    그사이, 잭슨이 벨리타의 앞에 앉아 벨리타의 손을 잡았다.

    절절할 정도로 가라앉은 잭슨의 모습은 비에 젖은 강아지와 비슷했다. 벨리타가 얌전히 손을 내어주었다.

    “다 내 불찰이다. 내가 조금 더 빨리 해결했다면…….”

    “아냐. 괜찮아. 2황자 그 새끼가 잘못한 거야……. 힘들긴 했지만, 잘 끝났잖아.”

    “……미안해. 벨리타, 난 결국 너에게 아무 도움도 되지 못했다. 제국민들도 보호하지 못했어.”

    얼마나 자책했기에. 벨리타는 잔뜩 움츠러든 잭슨을 보았다. 워낙 자주 혼나고 실망도 시켰던 녀석이지만 부딪힌 만큼 정도 많이 들었다. 옛날 같았으면 이런 모습도 보이지 않았겠지. 잭슨도 많이 달라졌다.

    벨리타가 잭슨의 손을 겹쳐 잡았다.

    “큰 도움이 됐어. 날 위해 애써 준 거 다 알아. 고마워. 범인을 찾으려고 노력도 했잖아.”

    “벨리타…….”

    눈 밑에 내려온 눈그늘과 피곤한 얼굴이 얼마나 고생했는지 보여 줬다. 벨리타는 진심으로 잭슨이 고마웠다.

    잭슨이 벨리타를 끌어안으려고 손을 뻗자, 오웬의 팔이 둘 사이를 가로막았다. 눈을 가늘게 접어 웃으며 오웬이 벨리타를 재빠르게 안아 들었다.

    “돌아갈까요? 벨리타의 증언을 토대로 죄목을 붙이셔야죠.”

    “내가 언젠간 너를 꼭 죽이겠다.”

    “세상에, 너무 무섭다.”

    이를 갈며 노려보는 잭슨에도 대수롭지 않게 대꾸한 오웬이 잭슨에게 벨리타를 건넸다. 잭슨이 얼떨떨하게 받아 안았다.

    “오늘만 봐줍니다. 아시겠죠?”

    벨리타는 자신의 애인이지만, 동시에 잭슨에게도 소중한 사람인 걸 알고 있다. 연정을 제외하더라도 잭슨에게 벨리타는 둘도 없이 소중하다. 이런 상황에서 자신만 독점하고 있는 것도 우스우니까. 독점할 권리도 없고. 소중하게 벨리타를 안아 든 잭슨이 울먹거리며 벨리타를 보았다.

    벨리타도 다정하게 웃으며 잭슨의 품에 안겼다. 오웬이 주문을 작게 읊조리며 잭슨과 벨리타의 위에 손을 얹는다. 푸른 빛이 셋을 휘감아 황궁으로 데려다주었다.

    새벽이 되었음에도 집무실은 밝았다. 야근의 빛이다. 소르니와 노타가 포션을 들이켜며 문서를 작성하고 서류를 넘기고 있었다. 궁정백들도 모여 에르테의 혐의를 확인하고 죄목을 작성했다.

    업무를 보고 있던 소르니가 벌떡 일어나 울고 불며 벨리타를 힘껏 끌어안았다. 아픈 몸이 비명을 지르며 펄떡거린다.

    아프다고 소리치자 소르니가 깜짝 놀라 벨리타를 놓아주었다. 돌아와서 다행이다, 정말 걱정했다, 얼마나 다쳤냐, 등등 온갖 걱정을 쏟아냈다.

    유일하게 살아 돌아온 피해자인 벨리타는 궁정백들에게 붙들려 쉬지 못하고 증언을 해야 했다. 오웬이 나서서 벨리타는 소르니의 얼굴을 보러 온 것이며 더 무리할 수 없다, 증언은 이미 자신과 폐하가 들었으니 더는 무의미하다고 벨리타를 보호했다.

    잭슨의 품에 안겨 멀뚱멀뚱하게 눈만 끔뻑거리던 벨리타는 노타와 어색한 눈인사를 하고 오웬을 찾아 팔을 휘적거렸다. 오웬이 손을 내밀어 잡았다.

    “온 김에 제대로 치료받고 가라. 의원을 준비시켜 두마.”

    “저택에도 의원 있어. 집에서 쉴래. 집에 가고 싶어.”

    언제부터 그곳이 집이 되었는지. 정말 간절하게도 돌아가고 싶었다. 오매불망 기다리고 있을 엘라도 만나야 하고, 데이비드에게 자신은 잘 돌아왔다는 전서구도 보내줘야 한다.

    지친 기색의 벨리타를 더 붙잡아 둘 마음이 들지 않은 잭슨은 벨리타를 놓아주었다. 쉽게 자신을 놓아줄 줄은 몰라서, 벨리타가 잭슨을 돌아봤다. 잭슨이 흐리게 웃었다.

    “푹 쉬어라. 고생했으니. 우리는 또 보면 돼.”

    아이는 금세 자란다. 잭슨도 그랬다. 벨리타는 오웬의 품에 안겨 소르니와 잭슨에게 손 인사를 했다.

    눈 깜짝할 새에 저택으로 돌아왔다. 벨리타가 돌아왔음을 안 사람들은 자다 일어나서 달려왔다. 엘라도 마찬가지였다. 벨리타의 옷자락을 붙잡고 엉엉 울고 난리가 났다.

    콧물 방울을 만들어 낸 엘라의 머리를 투박하게 쓰다듬은 벨리타가 아침에 보자며 돌려보냈다.

    감회가 새로웠다. 언제 자신이 이렇게나 많은 사람에게 소중한 존재가 되었는가. 고용주를 위해 자다가 달려 나올 정도로 각별한 취급을 받게 되었다는 사실이 약간은 감격스러웠다. 남에게 피해만 끼치며 이곳에서 지냈다는 감상이 있었지만, 그렇지 않았다.

    문득, 가족이 보고 싶어졌다. 딸에게 아주 잘 적응했다고, 이곳에서도 잘 살아가고 있다고 자랑하고 싶었다. 더는 이 소설에 간섭할 수 없게 되었을지 모르지만, 더는 읽을 수 없게 되었을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엄마는 괜찮다고. 더 걱정하지 말라고 알려 주고 싶어졌다.

    그러니 이제 더 신경 쓰지 말고 딸 인생을 살아. 엄마가 없어도 행복하게 살아.

    벨리타가 오웬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여태껏 너무도 고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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