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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이 쓴 로판 소설에 빙의되어버렸다-141화 (141/150)
  • 141화.

    천막 밖으로 나오니 마법사가 위치를 지정해 놓은 주술서를 내밀었다. 오웬은 주술서를 받아 들고 찢기 직전, 마법사에게 말했다.

    “제가 돌아오면 바로 움직일 수 있게 준비해 둬요. 금방 돌아올 테니까.”

    “네, 그렇게 할게요.”

    대답을 듣자마자 주술서를 찢었다. 옅은 빛과 함께 오웬은 순간이동을 했다.

    체르핀 공작령, 높은 산 밑. 오웬이 도착한 곳이었다. 이미 기사들과 마법사들이 모여 올라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오웬은 이상 현상을 확인하기 위해 주위를 둘러보았다. 주변은 별 이상이 없는데. 고개를 들자 산 중간 부근에서 하얀 빛이 허공을 떠도는 걸 목격했다.

    익숙한 하얀 빛. 벨리타의 마력이 내는 색이다. 빛을 밝히는 마법일지도 모르지만 확인해서 나쁜 건 없다. 늦은 밤에 대체 누가 공작의 영지에 있는 산 중턱에서 마법을 발현한다는 말인가.

    오웬은 기사들에게 잠시 기다리라는 손짓을 취한 뒤, 빛이 맴도는 부근을 지정하여 주문을 읊었다. 푸른 빛이 번쩍거렸다가 사라진다.

    순간이동을 해서 도착한 곳은 나무들이 빼곡했다. 오웬은 엉망으로 자란 잡초를 밟으며 빛이 있는 곳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동시에 마력의 흐름을 느끼기 위해 신경을 곤두세웠다. 마력이 느껴진다. 익숙한 벨리타의 마력과 마정석의 정제되지 않은 기운이다.

    마력의 흔적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걸음을 내디뎠더니, 나무 사이에 가려져 있던 작은 집이 드러났다. 저택이라기엔 작고 평민들의 집보다는 크다.

    오웬은 몸을 숨기며 집을 훑어봤다. 기사들의 우렁찬 목소리가 들리고 허겁지겁 다른 방향으로 내려가는 모습이 보였다. 어수선했다.

    벨리타의 마력이 느껴진 순간 울컥하고 치밀어 오르는 분노 탓에 일을 그르칠 뻔했지만, 납치범의 거처를 발견했으니 벨리타를 구하기 위해서 진정했다. 침착하자.

    오웬은 정확한 위치를 확인하고 잭슨의 집무실로 순간이동을 했다.

    오웬과 마찬가지로 밤을 지새운 잭슨은 오웬을 반길 기력도 없었다. 눈만 굴려 오웬을 확인한 잭슨은 할 말이 있으면 하라는 듯 의자 등받이에 등을 기댔다.

    오웬은 거침없이 잭슨의 앞에 서서 펜을 빼앗고 여분의 종이에 숫자를 적으며 빠르게 말을 쏟아냈다. 알아서 들으라는 듯, 전혀 배려 없는 속도였다.

    “벨리타가 마력을 사용한 흔적을 찾았어요. 체르핀 공작령 산 중간 부근이고, 정확한 위치는 여기. 마법사에게 말하면 알아서 순간이동 시켜 줄 테니까 걱정하지 마시고. 공작 영지에 있는 인원은 이미 대기시켜 놓았으니 저는 벨리타를 구하고, 남은 인원은 납치범을 체포하라고 할 거예요.”

    “……뭐?”

    “다시 말씀드릴 시간 없어요. 수도 인근에 있는 회의 장소 알죠? 제가 있던 곳. 마법사 한 명한테 시켜서 모두 제가 적어 준 곳으로 오라고 하세요. 도망갈 틈 없이 바로 둘러싸서 잡아야 해요.”

    잭슨은 오웬이 날려 적은 글을 보았다. 지렁이가 기어가는 건지. 숫자의 형태가 없다. 마법사들은 이런 글씨여도 알아보나? 잭슨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나도 간다.”

    “예? 폐하는 황궁을 지키셔야죠. 자리를 어떻게 비워요?”

    맞는 말이긴 하다. 이 상황에 황제가 자리를 비우면 일어날 수 있는 변수들이 많다.

    황제는 황좌에서 굳건하다는 걸 보여 줘야 하는 게 옳겠지만, 다른 이도 아닌 벨리타 아니던가. 벨리타를 찾을 수 있다는데 어떻게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있나.

    잭슨이 반박하려고 입을 달싹이려는 순간, 오웬이 뒷머리를 벅벅 헤집으며 긁었다.

    “더 말할 시간 없고요. 저는 갑니다. 말씀드린 대로 실행해 줘요.”

    “난…….”

    없다. 눈 깜빡했더니 사라졌다. 예의는 수프 끓여 먹은 녀석.

    잭슨이 쾅, 테이블을 내리쳤다. 공기처럼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있던 노타가 화들짝 놀라 돌아본다.

    “지금 마법사 부르러 가겠습니다.”

    “그래. 그리고 나도 간다.”

    “네?”

    오웬의 말을 듣지 않았느냐는 질문을 하려던 노타는 입을 다물었다. 살벌하게 눈을 치켜뜨고 살기를 흉흉하게 띤 잭슨 탓이었다.

    그래, 황제를 어떻게 말리겠어. 지레 포기한 노타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집무실을 벗어났다. 잭슨이 나가지 않은 것으로 보이면 되는 거 아니겠는가. 발걸음을 서두르며 대기하고 있는 마법사를 찾아 복도를 가로질렀다.

    *

    얼마나 뛰었는지 모르겠다. 이미 구겨 신었던 신발은 어딘가로 사라져 버렸고, 뛰어내리느라 다친 몸이 물에 젖은 솜처럼 무거웠다.

    여느 때 같았으면 밤의 산이라고 운치를 즐겼을 텐데 다시 잡히지나 않으면 다행이다.

    마법을 사용할 마력도 없다. 이미 하늘 높이 띄워 놓은 빛을 유지하는 것도 고작이다. 벨리타는 정신없이 나무 사이를 비집고 가파른 언덕을 뛰어 내려갔다.

    뒤를 돌아볼 여유도 없었지만, 누군가 뒤쫓아 오지 않을까 겁을 먹어 자꾸 돌아보게 된다. 벨리타가 울퉁불퉁한 나무를 짚으며 고개를 돌렸다. 멀리서 여러 불빛이 보였다. 분명 에르테의 기사들일 것이다.

    여기서 마법을 더 사용했다가는 그대로 기절할 것 같았다. 반항도 하지 못하고 잡힐 거라는 생각이 들자 벨리타의 발걸음이 더욱더 빨라졌다. 맨발과 거추장스러운 치마 탓에 점점 불빛이 가까워졌다.

    제발. 이번에 잡히면 온전하지 못할 거다. 숨이 가빠서 폐가 터질 것 같고 무리한 다리는 찢어질 것 같았다. 죽을힘을 다해 뛰어도 허약한 몸은 생각과 마음처럼 따라주지 못했다. 산사태라도 일으킬 마력이 있었다면, 다 쓸어버리고 홀로 살아나갈 수 있는데.

    무력한 자신이 너무나도 원망스러웠다. 남자들의 거친 목소리와 무거운 발소리가 귀에 때려 박혔다. 잡힌다. 이렇게 한심하게 붙잡히고 싶지 않았다.

    어느새 벨리타를 따라잡은 기사가 그녀를 끌어당겼다. 비명이 터져 나온다. 몸이 기울어 기사 쪽으로 휘청거렸다. 악의가 가득한 난폭한 손길.

    벨리타는 악에 받친 비명을 지르며 남자의 손을 밀어내고 온 힘을 다해 후려쳤다.

    거센 발악으로 인해 벨리타의 기사의 손이 떨어져 나갔다. 벨리타는 머릿속에 술식을 그렸다. 죽더라도 같이 죽는다. 다 터트리고 다 죽는 거다.

    마력을 긁어모아 술식을 마무리하는 찰나에 푸른 빛이 명멸했다.

    푸른 빛. 몇 번이나 보았던 푸른 오웬의 마법. 벨리타가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려 빛을 보았다. 더벅머리에 안경을 쓰고 풀어헤친 셔츠를 입은 채 다급하게 손을 뻗는 오웬이 있었다.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다. 이제 살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머릿속에서 다 그려진 술식이 벨리타의 손끝에서 뻗어져 거대한 폭발을 일으켰다. 간단한 술식인지라 오웬을 확인하는 것보다 술식을 그리는 게 빨랐다. 오웬은 거대한 폭발을 피하지 않고 벨리타를 끌어안았다.

    계산도 하지 않고 행한 무의식적인 행동이었다. 눈 깜짝할 순간 벌어진 폭발에 오웬이 단단한 쉴드를 둘렀다.

    귀가 먹을 것 같은 폭발음. 흔적도 없이 터져 나가는 나무와 바위, 잔디. 폭발에 휩쓸려 날아가는 나무 조각과 돌덩이. 희뿌연 연기가 매캐하게 둘러쌌다. 거대하게 바닥이 패고 검은 재가 남았다. 팬 곳 끄트머리에는 불이 붙어 번져 간다.

    벨리타는 자신을 단단히 감싸 안은 팔을 느끼며 얼떨떨하게 주위를 둘러봤다. 벨리타와 오웬을 남겨두고 모조리 타 버렸다.

    허억,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아직도 긴장한 몸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아무 말도 나오지 않는다. 살았다.

    “……벨리타.”

    물비린내가 나는 목소리가 귓가에 쏟아졌다. 벨리타는 멍하게 고개를 돌려 우는 오웬을 보았다. 안경에 물방울이 맺혀 흘러내린다. 코끝이 붉다. 엉망진창이 된 손을 들어 오웬의 뺨에 얹었다.

    “괜찮아? 괜찮은 거지?”

    만나자마자 한 질문은 벨리타의 안전이다. 예전의 오웬이었다면 하지 않았을 질문이기도 했다. 벨리타의 안전보다 범인을 찾을 증거를 물었을 거다. 그랬던 사람이 울면서 걱정을 하고 안전을 묻는다는 사실에 커다란 애정이 느껴졌다.

    “……어. 괜찮, 큼, 괜찮아.”

    버석하게 말라 갈라진 목을 가다듬었다. 별일이 많았지만 우선 지금이 괜찮으니 됐다. 살았으니까. 그런데 왜 눈물이 나지.

    벨리타는 멍한 낯으로 눈물을 떨어트렸다. 고작 이틀 동안 크게 고생한 것뿐인데 왜 이렇게 서럽고 화가 나는 걸까.

    에르테에게 화가 났고, 살아서 오웬을 만나 기뻤다. 왜 서러운지 모르겠다. 복잡하게 얽혀서 가슴이 먹먹하고 울컥거린다. 긴장이 풀려 다쳤던 몸이 욱신거리기 시작했다.

    차라리 기절하고 싶을 만큼 아프다. 동시에 좋았다. 벗어났다는 생각이 들자마자 기뻐서 견딜 수가 없어졌다.

    다리가 풀린다. 가시와 돌이 박힌 발바닥이 고통스러웠다. 벨리타가 맥없이 몸을 늘어트리자, 오웬은 눈물로 얼룩진 안경 너머로 벨리타의 상태를 확인했다. 이곳까지 달아난 게 기적일 정도로 다쳐 있었다.

    당장 치료를 받아야 한다. 오웬이 한 품에 가득 끌어안은 팔을 내리고 조심스럽게 벨리타를 안아 들었다. 산 아래에 있는 마을로 가기만 해도 의원이 있으니까. 산 아래에서 대기하고 있는 기사들에게 의원이 어디 있는지 물어보면 된다. 은은한 푸른 빛이 부드럽게 둘을 감쌌다.

    *

    저택 근처에 도달한 잭슨과 기사단, 마법사단들은 소리 없이 저택을 둘러쌌다. 저택 위를 밝히는 하얀 빛이 꺼지는 걸 확인하자마자 잭슨이 휘파람을 불어 돌격을 명령했다. 기사들이 우르르 저택을 향해 쏟아졌다.

    제복 차림의 잭슨은 장검을 들고 기사의 뒤를 따라 저택으로 뛰었다. 길드원이 가져온 증거들은 공작의 짓임이 확실했다. 하지만 공작이 할 짓이 아니다. 조금 더 교묘하고 간접적인 방법을 선호하는 공작이 대놓고 수도에서 납치를 자행하지 않았을 거다.

    누군가 지시한 범행이다. 그리고 잭슨은 그 누군가가 에르테임을 확신했다. 이 저택 안에는 에르테가 숨죽이고 있을 것이다.

    에르테의 기사들은 집 안으로 들이닥친 황실 기사단에 대응하지 못했다. 애초에 저택 안에 남은 기사의 수도 많지 않았다. 잭슨은 전투를 벌이고 있지 않은 기사들과 함께 2층을 수색했다.

    막아서는 기사를 무찌르고 하녀와 시종들은 포박했다. 2층을 수색해도 에르테는 없었다.

    잭슨은 주저 없이 3층으로 올라갔다. 계단과 맞닿은 방 옆, 침실로 추정되는 방문 너머로 앓는 소리가 들렸다.

    잭슨이 숨을 죽이고 기사들에게 손짓으로 대기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기사단장이 문 옆에 붙어 있다가 쾅, 문을 걷어찼다. 문이 떨어져 멀리까지 날아갔다. 비명이 들린다.

    빠르게 방 안으로 들어서서 검을 겨눈 잭슨이 돌연 선뜩하게 웃었다.

    “드디어 찾았군, 에르테.”

    “아-. 안녕, 형님?”

    에르테가 손을 들었다. 엉망이 된 방 가운데에서 침대 끄트머리에 걸터앉아 태평하게 손을 흔든다. 에르테가 뒤에 서 있던 호위 기사에게 손짓했다.

    “파텔가의 그 계집, 마법사였더라? 감히 황자의 몸을 해친 벌을 내려야겠는데.”

    에르테가 붉은 눈을 번뜩거린다. 형형한 붉은 눈이 잭슨의 것과 비슷했다. 잭슨은 에르테의 눈이 혐오스럽게 느껴졌다.

    “근데 나는 형 목도 치고 싶어. 동생을 위해 그렇게 해 줄 거지?”

    “못 본 새 굉장히 거만해졌군. 어림도 없다.”

    그럴 줄 알았어. 작게 중얼거린 에르테가 호위 기사 제르미에게 대응하라고 명령했다. 제르미는 검을 빼 들고 잭슨을 향해 돌진했다. 자신이 죽을 걸 알면서도.

    검을 고쳐 쥔 잭슨이 섬뜩하게 미소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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