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화.
유행이 지난 값비싼 옷을 입었고, 주위에 서 있는 호위의 제복도 좋아 보이지 않는다.
세리베즈는 막 잠에서 깨어났음에도 세심하게 소르니를 구석구석 평가했다. 단정한 걸음으로 소파에 앉은 세리베즈가 덤덤하게 앉으라는 손짓을 했다. 소르니가 그제야 자리에 앉았다.
“네가 이유 없이 이 늦은 시각에 찾아왔을 리는 없고……. 들어 보니 다시 폐하와 약혼할지 모른다고 이야기했다던데.”
무해하고 나약한 척하며 자신의 입가를 손으로 가린 소르니는 힐끔거리며 세리베즈를 살폈다. 황후가 될지 모른다는 말을 듣고 친히 내려와 준 모양이었다.
그리 권력에 관심 없는 체하더니 체르핀 가문 사람이 다 똑같다. 우습기도 하지.
자꾸만 웃음이 새어 나와서 어떻게든 입을 가렸다. 소르니가 웃음 탓에 목을 가다듬었다. 울먹이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예, 맞아요. 제국의 상황이 상황인지라, 마땅한 결혼 상대를 찾을 수 없다고 하시더라고요. 오라버니도 아시잖아요.”
세리베즈도 익히 들어 알고 있다. 사라진 영애의 수가 삼십 명이 익히 넘는다고 했다. 수도로 모이는 사교 시즌을 노린 범행이라는 소문도 들었다. 그 탓에 결혼 적령기인 영식들이 발을 동동 구르고 있다고.
황제 또한 다른 처지는 아닌 모양이다. 귀족들이 나서서 들들 볶았겠지. 황제가 되었는데 아직도 결혼하지 않느냐고 종마 취급을 했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결혼 상대를 찾아 나서는 꼴도 우습기는 하다.
그래서 소르니를 다시 들이려는 셈인가. 5년이나 얽혔던 관계인데 다른 영애보다 소르니가 편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파혼한 이유도 세간에서는 소르니가 기약 없는 약혼 관계에 지쳐 그만하자고 매달렸다는 말이 돌았으니까. 황제의 집무실 앞에서 몇 시간이고 무릎을 꿇고 빌었다지.
아마 폭력성에 혀를 내두르며 달아나려고 했을 거다. 황제의 무자비한 성정은 모두가 알고 있으니까. 황제가 소르니를 용서하고 곁에 들이려는 게 믿기지 않긴 하지만.
세리베즈는 하녀를 시켜 차를 내오라고 지시했다. 그래도 황후가 될 사람이 다른 사람도 아닌 자신에게 찾아왔다는 것은 황후의 밑에 자신을 끼워 주겠다는 소리였으니까. 달가운 소식이다.
세리베즈가 다리를 꼬며 턱을 까딱거렸다.
이해했으니 찾아온 이유를 말하라는 의미였다. 소르니는 다른 가족보다 살갑지만, 여전히 싹수가 없는 세리베즈를 속으로 씹어대며 슬픈 생각을 했다. 슬픈 생각. 벨리타를 떠올리자마자 눈물이 그렁그렁하다.
“도움을 요청하려고 왔어요. 아시다시피, 저는 갓 백작이 된 계집이라 할 줄 아는 게 없어서……. 돈을 죄 탕진해 버리고 말았어요. 돈도 없고 권력도 없는 백작이 황후가 되면 다른 귀족들의 반발이 생길 텐데…….”
“그래서?”
“폐하의 평판이 썩 좋은 편은 아니잖아요. 입지도 좋지 않은 편이시고……. 다른 혼처를 알아보라며 저를 반대하면, 아무 발악도 못 하고 밀려나게 돼요.”
이 정도만 말해도 충분히 알아들었을 거다. 세리베즈는 멍청한 사람이 아니니까.
소르니가 눈가에 맺힌 눈물을 처연하게 닦았다. 지금쯤 머릿속에서 계산하고 있을 거다. 자신을 도와주면 얼마나 이득을 보게 될지, 얼마큼 도움을 줘야 소르니가 고마움을 느껴 줄지.
세상에 이유 없는 호의는 없다. 벨리타가 소르니를 챙겨 주었던 것도 연민과 죄책감에서 기인한 것이고, 소르니가 벨리타를 돕고 아끼는 이유는 벨리타가 호의를 베풀어 주었기 때문이다. 소르니의 삶에는 조건 없는 호의와 도움은 없다.
그러니 황후가 될 소르니가 세리베즈에게 찾아가 자신의 밑에 끼워 넣어 권력과 이득을 챙겨줄 테니 돈과 권력을 나누어 달라는 거래를 요청한 거다. 물론 소르니는 황후가 될 생각은 추호도 없지만. 세리베즈가 무얼 알겠는가.
향기로운 차의 향이 응접실을 가득 채웠다. 코끝까지 달게 절이는 감각이다. 한참이나 고민에 빠져 있던 세리베즈가 고개를 끄덕거리며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내가 뭘 하면 되지?”
소르니가 생명의 은인을 보듯 환하게 웃으며 뒤에 서 있던 호위에게 종이와 펜을 요구했다. 질이 좋지 않은 종이를 테이블에 올리고 싸구려 펜을 든 소르니가 상냥하게 말했다.
“제가 백작이 된 후 배신을 여러 번 당해서……. 증거를 남겨 두어도 괜찮을까요?”
같잖고 만만하게 보고 있는 계집에게 증거를 내준다고 얼마나 후환이 있으랴. 세리베즈는 거만하게 웃으며 고개를 까딱거렸다.
“마음대로 해라.”
“고마워요. 정말, 오라버니는 좋은 분이세요……. 오라버니를 찾아오길 정말 잘했어요.”
자신이 똑똑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사기를 잘 당하는 법이다. 똑똑한 내가 사기를 당할 리 없다고 생각하니까.
소르니는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펜을 휘갈겼다. 공작의 범죄 흔적을 찾는 건 길드원들이 할 테니, 소르니는 따로 할 일이 있다. 세리베즈를 아주 뼛속까지 벗겨 먹어 주는 것.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소르니는 세리베즈의 서명이 적힌 종이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돈도 뜯고 특수한 상황이 닥쳤을 때 세리베즈가 연 옷가게의 운영권을 양도받기로 했다. 추가로 사교계에 소르니에 대한 미담을 풀어놓기로 약속받았다.
그래 봤자 몇 번 이용하지 못하고 부러질 목이지만.
알뜰하게 털어먹은 소르니가 세리베즈에게 인사를 하고 응접실에서 나갔다. 약속한 시각보다 많이 지난 후여서, 길드원들은 이미 마차에 돌아와 있었다.
마차에 타고 저택을 벗어나자 소르니가 심드렁하게 물었다.
“다 찾아왔나요?”
“……예. 충분히 멸문시킬 증거는 됩니다.”
“다행이네요.”
멍청한 체르핀. 권력에 눈이 멀어 상황을 분간도 할 줄 모르는 오만한 작자들.
소르니가 피곤한 눈을 느릿하게 끔뻑거리며 미소 지었다. 공작가에서 벗어나 이토록 다행인 적은 없었다.
*
살다 살다 이런 꼴도 다 당해 본다. 벨리타가 신력으로 회복된 몸을 확인하고 헛웃음을 지었다. 마력을 많이 성장시키기는 한 모양인지 신력을 사용해도 하루 만에 깨어났다.
벨리타는 식사를 가져다준 하녀에게 죽었다가 깨어난 지 2일 지났고 이곳이 어디인지는 말할 수 없다는 대답을 들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확인한 것만으로도 큰 도움이다.
벨리타가 간결한 식사를 마치고 침대에 드러누웠다. 이딴 식으로 마력이 향상된 걸 실감하고 싶지 않았는데.
밤이 된 숲을 보았다. 스산해서 소름이 끼친다. 밤의 산은 무섭다. 쉽게 길을 잃고 다치기도 한다.
벨리타는 무심코 굴러떨어질 때의 기억을 회상했다가 소름이 돋았다. 팔뚝을 무신경하게 문지른다.
낡은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벨리타는 팔뚝에 얹었던 손을 내리고 문으로 시선을 돌렸다. 말갛게 웃으며 손을 흔드는 에르테가 성큼성큼 다가왔다. 빈 그릇을 정리하던 하녀가 겁에 질려 서둘러 자리를 떠났다.
“왜 왔어? 너 할 거나 하러 가.”
“무슨 말을 그렇게 섭섭하게 해? 나 오늘 피곤했단 말이야.”
그게 내 알 바인가. 벨리타가 이불을 끌어당겨 어깨를 덮었다. 에르테의 붉은 눈이 서늘하게 빛났다. 순식간에 벨리타의 팔목을 잡아채고 훑어본다.
“다 나았네?”
오싹했다. 붉은 눈이 형형하게 번뜩거리며 팔을 훑고 자신을 뚫어지라 쳐다보니 불쾌한 감정이 들었다.
벨리타가 팔을 빼내고 침대 끝으로 몸을 물렸다. 경계심과 적대감이 두드러지는 반응을 본 에르테가 인상을 찌푸리고 다시 손을 뻗었다.
문득 무식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황자씩이나 되는 사람이, 이 큰 나라에서 귀한 대접을 받고 모든 권리와 대우를 누리며 자란 사람이 한다는 게 고작 폭력이라니.
배운 것 없고, 가진 것 없는 자신보다 못나 보였다. 에르테에 대한 평가가 달라지니 순간적으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왜 이런 꼴을 당해야 하지?
잘못한 것도 없다. 아니, 잘못했어도 이게 옳은가? 이렇게 무식하게 약자를 힘으로, 권력으로 찍어 내리는 행위가 옳다고 할 수 있나?
자신이 무의식적으로 휘둘렀던 손찌검을 떠올렸다. 논리가 달려서, 열이 받아서, 말싸움보다 폭력이 편하니까. 자신이 몰상식한 사람이라는 걸 공공연하게 떠벌리는 것과 다름없지 않나. 자신이 부끄러웠다. 창피하고 같잖게 느껴졌다.
폭력은 옳지 않다. 옳지 않지만, 폭력에 의존하는 사람에게 말을 해 보았자 듣지 않는다. 이미 숱하게 겪어서 체감하고 있으니까.
포기하지 않아도 된다. 자신을 놓지 않는 게 맞는 거다. 폭력을 감당할 이유는 없었다.
벨리타는 버둥거렸다. 뭐라도 해야 한다. 뭘 할 수 있지? 마법. 마법을 할 수 있다. 체격에 영향을 받지 않는 기술.
벨리타가 머리를 쥐어짜 냈다. 대응할 수 있는 마법이 뭐가 있을까. 빛을 밝히는 마법? 건조 마법? 아니다. 더 확실한 게 있을 거다.
아, 떠올랐다. 오웬이 가장 처음 알려 준 마법. 벨리타를 위해 만든, 벨리타가 큰일을 당했을 때 자신을 지킬 힘.
고통을 느끼며 벨리타는 몸을 웅크렸다. 간단한 술식을 머릿속으로 그렸다. 후에 어찌 될지 모르니 모든 힘을 쏟아부어서는 안 된다. 나무를 날려 버렸을 때보다 작게, 얕게 마력을 늘리고 술식을 그렸다.
그와 동시에 숙였던 머리를 들고 에르테를 노려봤다. 대가리를 날리면 죽으니까, 다리 한쪽을. 빠르게 이동하는 시선 끝에 에르테가 들고 있는 다리가 꽂혔다.
터트린다, 라는 생각을 하자마자 에르테의 다리에 폭발이 일었다. 가까운 거리에 있던 터라 벨리타도 피해를 받았지만, 괜찮았다. 신력으로 회복할 수 있으니까.
거세게 터져나가는 폭발과 함께 에르테가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았다. 뒤로 나가떨어진다.
우위를 선점했을 때에는 그리 기고만장하고 오만한 꼴이더니. 다리를 움켜잡고 바닥을 뒹구는 꼴이 꼴사나웠다.
벨리타는 침대에서 서둘러 일어나 슬리퍼를 꾸겨 신고 뛰쳐나갔다. 창문으로 뛰어내릴 수는 없다. 적어도 2층 높이만 된다면. 폭발 소리를 듣고 다가오는 사람들을 피해 계단을 내려갔다.
벨리타가 달아나고 있음을 눈치챈 사람들이 벨리타를 붙잡으려고 하자, 벨리타는 지나간 계단을 폭파했다. 쫓아 내려갈 계단이 무너지자, 벨리타를 잡으라며 소리를 지른다.
굵고 낮은 남자들의 외침을 들으며 벨리타가 계단 끝에 이어진 창문을 보았다. 2층 높이, 뛰어내려도 죽지는 않는다. 계단을 내려와 곧장 창문으로 돌진했다. 커튼을 몸에 두르고 그대로 창문에 들이받았다.
유리가 산산조각이 나며 깨지고 커튼은 뜯어져 벨리타를 어쭙잖게 보호했다. 벨리타의 몸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친다. 계단을 올라오던 기사들이 벨리타를 따라 뛰어내리려고 했다.
쿵, 잔디 바닥에 떨어진 벨리타가 부서질 것 같은 몸을 애써 일으켜서 뒤를 돌아봤다. 다시 폭발. 창문에 폭발이 일며 기사들이 휘말렸다. 비명이 터져 나온다.
지금 달아나지 못하면 붙잡힌다. 그 전에 누군가 이곳을 알아준다면. 두르고 있던 커튼을 내던지고 빛을 밝히는 마법을 하늘에 쏘아 올렸다. 누군가가 다스리고 있는 영지라면 기현상을 목격하고 황제에게 보고를 할 테다.
마법을 유지하며 벨리타가 다리를 질질 끌어 뛰었다. 1층에 있던 기사들이 저택에서 나와 쫓아온다. 온몸이 소리를 지르며 파업을 선언했지만 들어줄 시간이 없다.
벨리타는 나무 사이를 능숙하게 가로지르며 단단한 지반을 밟아 산에서 내려갔다.
산은 벨리타에게 너무도 익숙하다. 밤의 산은 위험하지만, 이곳보다 위험하지 않으니까.
살고 싶다. 살아야 한다. 하고 싶은 일도, 보고 싶은 사람도 있다. 반드시 살아서 멀쩡하게 돌아가리라.
*
밤을 새워 눈 밑이 퀭하다. 마법으로 청결을 유지하고는 있지만 초췌함은 숨길 수가 없었다. 오웬은 제국의 지도를 짚어 가며 지시를 하다가 눈앞이 흐려지는 감각을 느끼고 테이블에 기댔다.
연구로 인해 좋지 않은 상태였는데 회복할 시간도 없이 무리했다. 안경을 고쳐 쓴 오웬이 마저 입을 여는 순간, 천막이 걷혔다. 체르핀 공작령 담당의 마법사였다.
“의도를 알 수 없는 마법이 포착되었습니다! 확인하셔야 할 것 같아요!”
“……당장 안내해.”
오웬은 로브를 두를 새도 없이 풀어 헤쳐진 셔츠 차림으로 다급하게 천막 밖으로 뛰어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