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화.
증거를 인멸하지도 못하게 당장 들이닥치는 편이 좋을 거다. 소르니는 잭슨에게 길드원을 호위와 시종으로 변장시키고, 허름한 마차를 준비시켜 주길 요구했다. 잭슨은 흔쾌히 수락했다. 시각이 늦을수록 수월할 거다.
밤에는 지키고 있는 기사도, 하인들도 반 이상으로 줄어드니까. 넷째인 세리베즈를 불러 도와달라고 요청해도 될 것이다. 유일하게 소르니를 건들지 않았던 사람이니까. 작은 사업을 시작했다고 들었으니 이유도 충분하다. 붙잡고 매달리면 적어도 대화 정도는 해 주겠지.
계획을 정리한 소르니가 준비를 마치고 대기하고 있는 마차로 향했다. 정갈하지만 추레한 차림의 길드원들이 소르니를 따랐다.
할 수 있다. 해야 한다. 소르니가 귀걸이를 만지작거리며 숨을 골랐다.
*
여전히 나무 냄새가 났다. 벨리타는 흐릿한 눈을 떠 주위를 보았다. 푹신한 침대와 더불어 몸도 개운하다. 자신이 죽지 않는 몸이라는 걸 뼈저리게 인지하고 있는 벨리타가 주춤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깔끔하게 정돈된 차림새를 확인하고 목덜미를 더듬었다. 흔적도 없다.
팔찌는? 다행히도 손목에 잘 감싸져 있다. 잃지 않아서 천만다행이었다.
죽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벨리타는 이곳에 온 이후 처음으로 안도했다. 자기 생각에 놀랐음에도 잠시, 벨리타는 침대에서 일어나 방을 둘러봤다. 화려하지 않지만, 관리는 잘 되어 있다. 사용하는 방인 것처럼.
방을 가로질러 창문 밖을 확인했다. 숲. 산인지 숲 속인지 모르겠지만 무성한 나무들에 둘러싸인 저택은 귀족의 소유치고는 초라했고, 평민의 것이라기엔 호화로웠다. 아마 귀족이 피신용이나 조용한 뒷거래를 위해 마련한 장소 같았다.
3층 높이에 있는 벨리타는 뛰어내려도 즉시 회복하고 달아날 수 있을지 가늠해 보았다. 전이었다면 당연히 죽음을 택했을 텐데, 지금은 기필코 살아나가 삶을 이어 가고 싶다.
벨리타가 길게 늘어진 커튼을 붙잡았다. 엮어서 내려갈 수 있을까. 불가능해도 가능하게 하면 된다. 잡은 커튼을 당겨 뜯어내려고 하는 순간, 뒤에서 경쾌한 목소리가 들렸다.
벨리타가 놀라서 뒤를 돌아보자 에르테가 술을 마시고 어기적거리며 들어오고 있었다.
“일어났어?”
손에 와인이 가득 찬 잔을 들고 다른 손에는 와인 병을 들고 있다. 벨리타는 창문에 달라붙어 등을 기댔다. 이미 한 번 큰코다쳤던 과거가 있는지라 조심해야 했다.
에르테가 와인을 들이켜고 혀로 입가에 묻은 와인을 훔쳤다. 즐거워 보였다.
“너 어떻게 산 거야? 분명히 내가 확인했는데.”
대답할 생각은 없다. 취했으니 감정적으로 반응할 가능성이 있으니까. 벨리타는 신경을 곤두세웠다.
“하녀가 널 치우다가 헐레벌떡 달려와서 전하, 시체가 숨을 쉬어요~ 심장이 뛰어요~ 하는데 얼마나 놀랐는지. 정말 살아날까 싶어서 내버려 뒀건만, 웬걸. 진짜 살아났네?”
시시덕대며 작고 둥근 테이블에 걸터앉은 에르테가 와인 병을 내려놓았다. 연극을 하는 듯 과한 말투와 손짓을 이어 가며 호쾌하게 지껄였다.
활짝 웃으며 즐거워하던 에르테가 발끝을 까딱거렸다. 말투와 다르게 눈빛만은 침착하게 가라앉아 벨리타를 훑어본다.
“신력인가? 아니면 정말 흑마법이라도 사용해? 궁금해서 참을 수가 있어야지. 기사단도 이 능력이 있으면 전쟁에서 손쉽게 승리할 수 있을 거라고.”
하나하나 뜯어보며 저울질한다. 시선을 느낀 벨리타가 헛숨을 삼키고 커튼을 당겼다. 잘그락, 쇳소리가 울렸다.
“몇 번이나 죽어야 죽어? 끝도 없이 살아나? 실험해 보고 싶어~ 내가 생각을 해 봤는데, 죽지도 않고 다친 것도 회복되는 걸 형님도 안다면 분명 널 활용했을 거 같아. 형님의 길드원들처럼 말이야. 너, 사람도 죽였어? 응? 신분이 확실해서 안 했으려나?”
무슨 말도 안 되는 헛소리인지. 벨리타가 인상을 찌푸리자 에르테의 웃음이 환하게 피어났다. 천진난만한 미소로 끝도 없이 질문을 쏟아낸다.
더 상대할 필요를 못 느낀 벨리타가 커튼을 더 세게 당기자 커튼과 이어진 쇠가 부딪혀 소음을 냈다.
잘 뜯어지지 않네.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하나.
벨리타가 힐끔 커튼을 돌아보았다. 순식간에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어느새 왔지? 지척에서 인기척을 느껴 고개를 들자 에르테가 인상을 찌푸리며 벨리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집중해. 황자인 내가 말하고 있잖아.”
콱, 머리채가 잡혔다. 우악스러운 손길에 벨리타가 휘청거리며 비명을 질렀다. 반사적으로 손을 뻗어 고운 남자의 손을 할퀴고 잡아 뜯었다.
자신의 손아귀에서 반항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기에, 에르테는 화를 내며 벨리타를 벽에 밀어붙였다. 쿵,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감히 날 긁어? 황제가 될 날? 네가 감히?”
“이거 놔! 이 미친 새끼! 그냥 죽어!”
씨근덕거리는 거친 숨소리와 웅웅, 귓가를 울리는 기괴한 소리. 벨리타는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어졌다. 먹먹한 귀 너머로 전남편의 목소리가 새어 들어오는 것 같았다. 비수를 꽂는 말과 잔뜩 격양된 소름 끼치는 말투. 밑바닥까지 끌어내리고야 마는 비하.
무언가 발목을 붙잡고 지하 깊은 곳까지 끌고 가는 감각이 들었다. 머리가 멍해지고 시야가 흐리다. 힘없이 늘어지고야 만다.
다 내 탓이지. 그래, 이렇게 살기를 선택한 내 잘못이다.
으레 생각하고 포기했던 순간들. 발악해 보았자 달아날 수 없고, 악을 써도 파묻혀 숨을 막는다. 책임져야 할 어린 생명을 너무도 사랑하고 있어 견뎌야만 했던 시간. 자신의 탓으로 돌리면 좀 나아진다. 스스로 선택한 결과를 감당한다는 세뇌로 버거운 숨을 몰아쉴 수 있다.
도망쳐 봤자 얼마나 잘 살 수 있겠어. 배운 것도 없고 할 줄 아는 것도 없는 여자가 어떻게 벌어 먹고살아. 밑바닥, 그 아래까지 내려가 처참한 삶을 살겠지.
그때는 그랬다. 아이 둘을 감당할 자신이 없어서, 아빠 없는 아이라고 놀림 받는 게 싫어서, 남편 없는 이혼녀라고 손가락질받기 무서워서 자신을 포기했다.
새로운 도전을 하기에는, 도망치기에는 자신이 너무도 유약하고 볼품없다는 걸 알기 때문에. 찍어 누르는 폭력은 사람의 사고를 죽이기에 충분했다.
포기하면 편하잖아. 나만 참으면 다 좋으니까. 평화로워져.
에르테는 붉어진 손가락 관절을 훑어보다가 무기력하게 늘어진 벨리타를 보았다.
“그래, 이래야지.”
간헐적으로 앓는 소리를 토하며 몸을 떠는 벨리타의 앞에 쭈그리고 앉은 에르테가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머리카락을 살살, 빗어 내린다.
술기운도 올랐겠다, 에르테는 꽤 다정한 손길로 벨리타의 뺨을 쓸었다.
“체르핀 공작이 죽었대. 여기까지 오는 길에 마차 사고를 당했다네? 너는 모르지? 죽어 있어서. 큰일이야, 공작이 기사단을 빌려주기로 했는데. 공작 자식들은 아무것도 모르더라고. 혼자만 잘 먹고 잘살겠다 이거지. 웃기지 않아?”
신이 난 듯 쾌활한 웃음소리와 함께 떠들어댄다. 벨리타는 멍한 얼굴로 숨만 몰아쉬었다. 에르테가 벨리타의 허리를 둘러 안아 번쩍 들어 올리더니 침대에 내팽개쳤다. 충격에 바르작거리는 벨리타를 바라보며 에르테가 의자에 걸터앉았다.
헐떡거리는 벨리타를 구경하며 에르테는 남은 와인을 들이켰다. 에르테가 흥이 나서 조잘거린다.
“아니면 날 믿지 못해서 숨겼거나. 괘씸하지? 체르핀 백작도 죽이려고 이를 갈던데 성공도 못 하고. 간만에 얘기 들어 줄 사람이 생겨서 너무 신났나 봐. 너도 이런 얘기 좋아하지?”
말을 들을 상태가 아님을 알아도 에르테는 신경 쓰지 않았다. 오히려 힘겨워하는 모습이 재미있어 보였다. 에르테가 비워진 잔에 와인을 채우며 말을 이었다.
“수도 납치 사건, 내가 한 거야. 대단하지 않아? 공작이 릴페트 자작한테 웃돈을 주고 몰래 마정석을 구해왔는데, 술식까지 적어서 왔더라고. 너 마정석에 술식 새겨 넣으면 마법 쓸 수 있다는 거 알아? 내 호위가 어찌나 일을 잘하던지.”
아는 이름이 들리자, 벨리타의 정신이 점차 맑아졌다. 공작이 소르니를 죽이려고 했다. 릴페트 자작이 마정석을 내줬다. 돈에 홀려서. 수도 납치 사건이 에르테의 소행이고, 납치한 영애들은 모조리……. 머리끝까지 소름이 돋았다.
벨리타는 에르테가 자신의 뭘 믿고 떠들어대는지 모르겠지만, 잠자코 있으면 더한 사실도 까발려 줄 거라고 느꼈다. 본능적으로 숨을 죽이고 귀를 열었다.
여기서 나갈 수만 있다면 에르테를 고발하고 콩밥을 먹게 해 주리라.
기대한 바와 같이 에르테는 더한 것도 떠들었다. 벨리타가 달아나지 못하게 붙잡아 둘 수 있다고 자신하는 듯했다.
“덕분에 웬만한 귀족은 수도를 떠났어. 형님에게 무슨 일이 생겨도 도우러 오는 길에 끝나겠지. 딱 지금이 적기인데, 공작이 죽어선. 다른 귀족들은 공작만큼 기사단이 잘 갖춰져 있지 않단 말이야. 분명 기세 좋게 쳐들어갔다가 죽어 버리고 말걸.”
멍청하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벨리타가 뺨을 이불에서 떼어내며 에르테의 말을 곱씹었다. 소문만큼 멍청하지 않다. 아니, 남을 해치는 일에만 머리가 잘 돌아가는 걸까. 아마 그런 모양이다. 쓸데없는 곳에 머리가 비상하게 잘 돌아가는 이상한 녀석들이 있다.
“그래서 내가 생각한 게 뭐게? 듣고 놀라지 마.”
아이처럼 밝은 웃음을 터트린 에르테가 와인을 모두 비웠다. 빈 병을 허공에 흔들며 다 마셨음을 확인한 에르테는 취기가 오른 얼굴을 부드럽게 감쌌다.
“폭동을 일으키게 할 거야. 자기 자식만 귀한 줄 아는 귀족들이 가만히 있겠어? 사교계에서 이간질만 좀 해 주면 금세 난리가 날걸. 한 명이 주도하기 시작하면 휘둘리는 건 순식간이지. 그럼 난 체르핀 백작을 죽이기 위한 쇼였다는 걸 들먹이면서 공작을 범인으로 몰고, 형님을 끌어내리기만 하면 끝.”
웃기지도 않는 소리다. 하지만 자식을 잃은 부모라면 쉽게 선동될 수 있다. 벨리타가 애타게 신을 찾았듯이.
“증거는 다 있어. 나만 죽을 수는 없잖아. 공작은 어차피 박쥐 같아서, 내가 황제가 되어도 내 등을 노릴걸.”
하얗게 질린 벨리타가 들썩거리며 몸을 움직이자 에르테가 인상을 찌푸렸다. 병을 움켜쥔 채 벌떡 일어나 침대로 다가갔다. 벨리타의 위로 에르테의 그림자가 드리워진다. 하얀 이불 위로 병을 들어 올린 남자의 그림자가 빠르게 움직였다.
후, 짧게 호흡을 뱉은 에르테가 신경질적으로 중얼거렸다.
“죽은 듯이 있어. 내 신경 거슬리게 하지 말고.”
바닥에 병을 내리친 에르테가 욕설을 중얼거리며 방을 벗어났다. 대기하고 있던 하녀가 들어와 방을 정리한다.
*
소르니는 늦은 밤, 다짜고짜 공작 저택에 들이닥쳐 서럽게 울었다. 세리베즈를 불러 달라, 만나야만 한다고 매달렸다. 공작가에서 소르니의 위치는 매우 낮았기에 애타게 부르짖어도 무시를 당했다.
예상하지 못했던 반응이 아니다. 그러니 괜찮다. 소르니는 악을 쓰고 소리를 질렀다.
“내가 다시 폐하와 약혼하게 될지 모르는데, 감히 날 무시해도 되겠어?! 내가 황후가 되면 너희 목을 내놓아야 할 거다! 내가 내 오라비를 만나겠다는데 네까짓 것들이 날 막아?”
황제와 벨리타와 혼인할지도 모른다는 소문은 점차 가라앉아 가고 있었다. 벨리타가 기를 쓰고 아니라며 부인한 덕이었다. 그 덕에 소르니의 악다구니가 약간의 신빙성을 가졌다.
문지기는 눈치를 살피더니 슬그머니 세리베즈에게 알리러 떠났다.
황후가 될 귀족치고는 허름한 마차. 그에 비해 과시하는 듯 이끌고 온 많은 호위 기사. 어떻게든 있어 보이려는 가난한 귀족의 행색이었다.
심드렁하게 대기하고 있던 문지기는 허락의 신호가 떨어지자 문을 열어 주었다.
당당한 척, 호위의 반을 마차 곁에 대기시키고 응접실에 앉은 소르니는 세리베즈를 기다렸다. 지금쯤 마차 옆에 있던 길드원들이 알려 준 공작의 집무실과 침실을 헤집으러 떠났을 것이다.
이 지긋지긋한 공간이 곧 주인을 잃으리라 생각하니 기분이 좋아졌다. 벌컥, 붉은 머리를 헤집으며 나타난 세리베즈가 짙은 암갈색의 눈을 가늘게 떴다.
“네가 이 시각에 웬일이냐.”
“오라버니.”
시간을 끌어야 한다. 소르니가 자리에서 일어나 처연하고 불쌍한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