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화.
시체조차 찾지 못했다는 연쇄 사건이다. 잭슨이 잠도 줄여가며 신경 써도 해결하지 못했는데. 자신만 피해 있는 게 아니라 벨리타도 영지에 머무르게 해야 했다. 수도로 돌아가지 못하게 막았어야 했다. 워낙 저택에서 나가지 않는 편이라 괜찮을 줄 알았다.
소르니는 쪽지를 움켜쥐고 거칠게 숨을 내쉬었다. 이상한 반응에 놀란 타린이 걱정하는 기색을 내비치며 손등을 감싸 쥐었다.
소르니의 손이 차갑다. 타린은 집사장에게 담요와 따뜻한 차라도 준비해 오라고 소리쳤다. 집사장이 황급히 나가고 타린이 어쩔 줄 몰라 하며 소르니의 손을 녹여 주었다.
“전서구에 무슨 말이 적혀 있기에 그리 놀라시나요. 우선 바닥에서 이럴 게 아니라…….”
부축해도 될까. 함부로 손을 대면 싫어하지 않을까.
타린이 소르니의 무릎 뒤로 손을 뻗으려다가 멈칫했다. 소르니의 앞에 무릎 꿇고 앉은 타린이 고개를 숙여 올려다보며 눈을 맞췄다.
“백작님. 제가 부축해드려도 될까요?”
걱정 가득한 물음에 소르니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제야 타린은 조심스럽게 소르니의 무릎 밑으로 손을 밀어 넣어 들어 올렸다.
여리게만 보았던 타린이 꽤 든든해서, 소르니는 타린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멀지 않은 곳에 놓인 소파 위로 소르니를 앉혔다. 소르니는 타린에게서 손을 떼지 못했다. 여전히 붙들린 어깨 탓에 소르니와 가까워진 타린은 잠시 숨을 멈추었다. 걱정하느라 몰랐는데 너무 가깝지 않은가. 볼 뽀뽀도 한 사이지만, 손도 잡은 사이지만 그래도!
상황을 모르는 타린이 어깨에 얹어진 작은 손을 겹쳐 잡았다. 순하고 귀여운 얼굴이 진지하게 굳어진다.
“백작님, 무슨 일인지 말해 주실 수 없으신가요? 도움을 드릴 수 있다면 힘을 보태드릴게요.”
도움. 소르니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타린을 돌아봤다. 심각한 타린의 분위기가 익히 알고 있던 그와 다르다. 그리 애 같은 사람은 아니었구나.
타린도 벨리타와 가까운 사이였으니 알아도 괜찮다. 숨을 몰아쉰 소르니가 손아귀에 구겨진 쪽지를 내밀었다.
쪽지를 받아 읽은 타린의 낯도 희게 질려 일그러졌다. 감정이 북받친 소르니가 눈물을 한 방울씩 떨어트리기 시작했다. 애꿎은 치마를 그러쥐고 상체를 숙인다.
타린이 소르니의 어깨를 잡아 넘어지지 않도록 지지했다.
“어떡, 어떡하죠. 벨리타가 죽으면, 무슨 일이라도 당하면…….”
“……아무 일 없을 거예요. 괜찮아요. 걱정하지 말아요.”
소르니를 다독인다고 뱉은 말에 확신이 서지 않는다. 타린도 알고 있다. 얌전히 납치만 당하고 있는 상태라면 더 바랄 게 없겠지만 그럴 리 없다는 거. 가만히 내버려 둘 거면 납치도 하지 않았겠지.
타린은 가진 게 많지만, 용기도 없고 무능력하다. 자신의 소심함과 겁이 많은 면모를 한탄하며 괴로워한 적도 많다. 하지만 소르니에게 의지가 되어 주고 싶다. 어쩔 줄 몰라 하며 힘겨워하는 연인에게 힘을 북돋워 주고 싶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타린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떠올렸다.
연인을 진정시켜 주는 것. 정신을 차릴 수 있게 옆을 지키며 응원하는 것.
눈물이 가득한 눈가를 닦아 주고 조심스럽게 끌어안았다. 등을 토닥거리는 손길이 부드럽고 세심했다.
“벨리타는 강하잖아요. 폐하도 열심히 찾고 계실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백작님. 백작님이 하실 수 있는 걸 하세요. 후회하지 않도록이요.”
후회하지 않을 선택. 소르니는 자신이 할 수 있는 걸 떠올려 보았다. 무능한 자신이 할 수 있는 게 있을까. 벨리타를 위해 사교계에서나 도움을 줄 수 있지 목숨이 달린 위급한 상황에서 해 줄 만한 게 없었다. 권력도 돈도 없다. 이제 막 생긴 가문이 도움되겠는가.
소르니가 타린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자신의 처지가 나아졌다고 생각했는데, 결국 타인을 돕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타린은 소르니의 등을 천천히 두드리고 조곤조곤하게 속삭였다. 미성의 목소리가 온화하다.
“백작님. 벨리타와 폐하를 위해 해 줄 수 있는 게 있잖아요.”
소르니도 모르는 자신의 능력이 있을 리가 없다. 소르니가 품에 파묻은 고개를 들고 타린을 보았다.
소르니의 얼굴을 무척 사랑스러운 듯 바라보던 타린이 소르니의 눈물을 거듭 닦았다.
“대체 내가 할 수 있는 게 뭐니. 내가, 뭘 할 수 있어.”
“최소한 사교계에서 귀족들이 혼란스럽지 않게 다독여 주실 수 있겠죠. 그 외에도 무궁무진하게 있을 거예요. 폐하와 머리를 맞대고 범인을 유추한다든가, 피해를 보상할 방법을 찾는다든가, 그런 실질적인 보탬을 주실 수 있잖아요.”
귀족들은 이미 잭슨에게 반감을 품었다. 황제와 황후를 죽인 것으로도 모자라 그들의 편인 귀족도 죄다 멸문시켰으니 두려워하고 있다. 납치 사건으로 인해 더욱 반발이 심하다.
여기서 소르니가 무얼 해 줄 수 있단 말인가. 소르니는 이간질을 하면 했지, 위로하고 다독일 줄 모른다.
배운 적 없으니까. 그렇게 살았다. 범인을 유추해 봤자 한낱 사이 나쁜 백작의 의견을 받아들이겠는가. 그 잭슨이.
소르니는 한탄하며 타린의 어깨에 기댔다. 황후가 될 노력만 하지 말고 더 많은 것을 배울 걸 그랬다. 바늘과 실보다 검을 쥐고, 그림을 보는 능력보다 정세를 파악하는 능력을 기를걸.
기세가 죽어 자신을 탓하기만 하는 소르니를 안타깝게 바라보다가 뒷머리를 쓰다듬었다. 이런 사람이었구나. 이렇게 유약한 사람이 밖에서는 어떻게든 당당해 보이려고 애쓰고 있었다.
타린은 소르니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깨닫게 해 주고 싶었다. 타린이 소르니의 머리에 볼을 기대어 문질렀다. 부드러운 붉은 머리카락이 볼에 쓸렸다.
“지금이라도 황궁에 가 보시는 게 좋겠어요. 그래도 약혼한 사이였고 벨리타와도 가까운 관계인데 아무것도 알려 주지 않고 내치실까요. 막상 가 보시면 할 수 있는 게 보이실 거예요. 너무 겁먹지 마세요. 백작님은 대단한 사람이에요. 홀로 가문을 성장시키는 것도 엄청나신걸요.”
“완벽하지 않으면, 어쩌지. 나 겁이 나요. 샤를로트 경, 내가 일을 그르치면 어쩌죠?”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다른 분들이 수습해 줄 거고, 백작님이 망치실 거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어르고 달래며 칭찬하는 미성을 들으니 홀리기라도 한 듯 수긍하게 된다. 그래. 난 꽤 대단한 사람이야, 라고.
실상은 허접하고 별 볼 것 없을지 모르지만, 타린이 온 정성을 다해 속삭여 주면 신뢰하게 되는 것이다.
소르니는 입술을 짓씹었다. 정말 자신이 해낼 게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타린의 어깨에 눈가를 문질러 눈물을 닦은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타린도 덩달아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금 늦어진다 싶었던 집사장이 다급하게 문을 열고 들어왔다. 차와 담요를 들고 있었지만, 그보다 더 급박한 상황이 생긴 모양이다. 소르니가 이상한 분위기를 눈치채고 집사장에게 다가갔다.
“무슨 일이죠?”
“백작님, 지금 황실 기사단과 마법사단이 순간이동으로 방문했습니다. 영지를 뒤지겠다는데, 만나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벨리타를 찾는구나. 소르니가 고개를 끄덕거리곤 집사장의 안내를 따라 저택의 대문으로 나왔다. 이미 조를 나누어 조사하는 모양인지 철문 앞에 서 있는 인원의 수는 적었다.
소르니가 단아한 발걸음으로 문 앞에 서자, 기사들과 마법사가 예를 갖춰 인사했다.
“사건의 조사를 위해 나오신 거죠? 얼마든지 헤집어도 좋으니 영애들을 찾아주세요.”
깔끔한 소르니의 말을 들은 이들의 얼굴에 화색에 돌았다. 긴 설명으로 시간을 낭비할 필요도 없어서 다행이었다.
뒤늦게 타린이 쫓아 나와 소르니의 옆에 섰다. 타린을 등 뒤에 둔 소르니가 철문을 손톱으로 길게 긁었다.
“대신 부탁이 있어요. 순간이동으로 찾아왔다고 했죠? 날 황궁으로 보내 줘요.”
우물쭈물, 갑자기 황궁에 쳐들어갈 거라는 말은 난감하다. 소르니의 뭘 믿고 황궁에 보내 주겠는가.
마법사가 쉽게 입을 열지 못하자, 소르니는 철문을 손톱 끝으로 두드렸다. 쇳소리가 울렸다.
“폐하를 도울 수 있어요. 나 알잖아요, 폐하의 약혼자였던 거. 당신들도 빨리 사건을 끝내고 싶잖아요? 책임은 내가 질 테니 당신들은 조사에 열중하면 돼요.”
빨리 사건을 끝내면 좋기야 하다. 먼 타지로 와서 고생하지 않아도 되니까.
마법사는 눈치를 살피며 소르니에게 여분의 주술서를 내밀었다. 소르니가 주술서를 받아 들고 인상을 찌푸렸다.
“이게 뭐죠? 겨우 이런 종이 쪼…….”
마법사가 지팡이로 소르니가 든 종이를 찢자 순식간에 소르니가 사라졌다. 덩그러니 남의 집에 남은 타린이 허망한 얼굴로 소르니가 사라진 자리를 쳐다봤다. 집사장도 허망하게 타린과 빈자리를 번갈아 바라봤다.
잭슨의 집무실 앞에 덩그러니 놓인 소르니는 잠시 주위를 둘러봤다. 황궁이다. 순간이동을 처음 경험해 본 소르니는 얼떨떨하게 문을 두드렸다. 들어오라는 잭슨의 대답을 듣고 문을 열고 들어섰다. 잭슨이 소르니의 얼굴을 보고 오만상을 찌푸린다.
“갑자기 뭐냐?”
“폐하.”
노타와 논의하고 있던 잭슨이 나가라는 듯 손을 저었다. 소르니는 물러서지 않고 집무실 안으로 발을 디뎠다.
부드럽게 문이 닫히며 소르니가 어깨를 폈다. 할 수 있다. 소르니가 얼굴을 굳히고 당당하게 입을 열었다.
“도움, 제가 드릴 수 있을 것 같은데요.”
불필요하다고 나가라는 말을 하려던 잭슨이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헤집었다. 노타가 덤덤하게 문서를 넘겼다.
“젠장…….”
“잘 오셨어요, 체르핀 백작님. 마침 도움이 필요했거든요.”
노타가 눈웃음을 지으며 잭슨의 말을 끊었다. 당황한 소르니의 반응에도 노타는 뻔뻔하게 말을 이어 나갔다.
“범인을 유추하는 과정에서 체르핀 공작님이 관여한 흔적이 드러났어요. 폐하께서도 진작 눈치 못 챘다면서 부끄러워하시는데, 신경 쓰지 마시고. 공작님에 대한 정보가 필요하거든요.”
순식간에 상황 파악이 끝난 소르니가 헛웃음을 지었다. 소르니는 어찌 되었건 자신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말을 기분 좋게 받아들이고 소파에 걸터앉았다. 주황색의 귀걸이를 만지작거렸다.
“공작님을 잡아들이면 되지 않나요? 저에게 물어보시는 건, 공작님을 찾을 수 없거나 해를 당했다는 뜻으로 생각해도 되겠죠? 폐하께서 전에 공작님을 처리한다고 하셨는데, 연관이 있나요?”
“……그래. 둘째가 오늘 공작을 죽였더군. 마차 사고로 위장해서 말이야.”
아. 그 멍청이. 단번에 테르시안을 떠올렸다. 권력욕에 눈이 멀어 타국의 왕녀와 결혼하겠노라 날뛰다 결국 아무도 받아 주지 않아서 땅을 쳤더랬지.
테르시안이라면 연달아 암살에 실패하다가 이제야 성공했을 것이다. 다만 공작이 눈치 못 챌 리가 없는데 테르시안이 멀쩡할까 싶어졌다.
“테르시안에게 묻지 않고 저한테 물으시는 이유는?”
“……그 자식도 죽었다.”
역시! 시체를 보지 못해 안타깝지만 서로가 서로를 죽인 꼴이니 만족하기로 했다. 너무 우습지 않은가. 권력을 탐하다 가족끼리 숨을 앗아가다니.
소르니가 소리 내 웃음을 터트리자 잭슨이 신경질적으로 인상을 찌푸렸다. 쿵, 책상을 주먹으로 내리쳐 이목을 집중시켰다.
“체르핀 공작이 릴페트 자작에게 뒷돈을 주고 마정석을 사들였다. 그 마정석으로 범행을 저지른 것 같다. 다만, 공작이 나서서 수도의 영애들을 납치할 이유가 없어. 누군가와 내통하고 있을 게 뻔한데……. 저택을 뒤질 수가 없다. 그러니 네가 필요해.”
황명이라고 해도 명백한 증거가 없는 이상 공작가의 저택을 함부로 헤집을 수 없다. 그러니 공작 저택을 드나들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 그리고 현 시점에서 그런 사람은 가문에서 떠났지만 소르니가 유일하다.
소르니는 자신의 손으로 직접 원수들을 엿 먹이고 사형대로 보낼 생각에 환하게 미소 지었다.
“제가 시기에 맞춰 잘 온 것 같네요.”
가문이 어려워 도움을 청하러 왔다는 핑계를 대면 가능하다. 저택 안에 들어가기만 한다면 나머지는 잭슨의 길드원들이 알아서 찾아낼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