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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이 쓴 로판 소설에 빙의되어버렸다-137화 (137/150)

137화.

머리카락이 잡혀서 고개를 돌리지도, 몸을 버둥거리기도 요원했다. 에르테의 손아귀 가득 주황색의 곱슬곱슬한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엉켰다.

사납게 눈을 치켜뜨고 노려보는 벨리타를 찬찬히 훑어보던 에르테가 잡은 머리채를 거침없이 당겼다.

악! 외마디 비명이 터졌다. 머리가 공중에 뜨고 머리카락이 뽑혀 아프다.

벨리타가 몸을 버둥거리며 손길을 피하려 애를 썼다. 에르테가 즐거워하는 눈치로 내려다본다.

“눈빛이 무섭네. 생선 눈깔 같아.”

생선 눈깔이라니. 벨리타가 오만상을 찌푸리고 살기를 가득 담아 노려보자, 에르테는 바닥에 나뒹구는 천을 쥐었다.

쿵, 갑작스럽게 손을 놓아 바닥에 머리를 처박았다. 알싸한 고통 탓에 앓는 소리를 내며 몸을 웅크렸다. 에르테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벨리타의 눈 위에 천을 얹었다.

묶지도, 두르지도 않은 그저 올려놓기만 한 천을 떼어내고자 고개를 돌리니 위에서 호쾌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나, 전에 본 적 있거든. 생선 요리하는 거. 그때도 이렇게 물고기 눈을 가려 주고, 칼로 목을 바로 끊어 버렸어. 펄떡거리는 게 얼마나 웃기던지. 너도 본 적 있어?”

낭랑한 목소리로 조잘거린다. 생선 요리? 우습지도 않다. 벨리타는 생선 해체도 순식간에 해낼 수 있는 사람이다.

벨리타도 본 적 있다. 조폭 영화 같은 곳에서 남자 캐릭터가 비유랍시고 괴상한 소리 지껄이는 거. 딱 그런 장면과 비슷하다. 벨리타의 발악과 맞이할 죽음을 생선 따위에 빗대어 표현하고 있다는 걸 누가 모를까.

벨리타가 막힌 잇새로 소리를 지르며 눈에 덮인 천을 떨어트리려고 발버둥 치자, 에르테가 눈 위에 얹어진 천을 손가락으로 눌렀다.

“형님이 이 꼴을 보면 얼마나 놀랄까. 직접 보여 주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네. 아쉽게도.”

목 위로 차가운 감촉이 느껴졌다. 서늘하고 날카로운 것이 살갗에 닿았다. 놀란 벨리타가 숨을 몰아쉬며 움직임을 멈췄다. 에르테가 신이 난 듯 중얼거렸다.

“귀족 영애 연쇄 납치 사건도 해결하지 못하는 황제. 무능력해.”

검이 움직였다. 벨리타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축 늘어졌다.

창고에서 나온 에르테가 대기하고 있던 하녀에게 목욕 준비를 하라고 명령한 뒤, 약속 시각이 지났음에도 오지 않는 체르핀 공작을 탓하며 복도를 걸었다.

*

바닥에 손을 짚어 마력의 흐름을 가늠했다. 여러 마력이 실타래처럼 얽혀 뻗어 나가 있다. 어떤 마법을 사용했는지 조사해 보려고 했으나 시간이 흐른 뒤라 흐릿하기만 하다. 오웬은 마정석의 흔적을 찾으려 신경을 집중했다.

흔적이 있기는 하다만, 거창한 마법을 사용한 잔해가 아니었다. 오웬이 만든 주술서처럼 간단하고 쉬운 마법 같아 보였다. 물론 시간이 흐른 뒤여서 제대로 판별이 불가능했다.

오웬은 자신의 능력 부족을 한탄하며 머리를 헤집었다.

애초에 연구한다고 틀어박히지 않고 벨리타를 호위했으면 이런 일도 없었을 텐데. 하지만 주술서 제작도 끝났고 만다고의 씨앗도 추출했으니 복제만 성공하면 되는 상황이었다. 어려운 연구를 풀어가는 쾌감을 어떻게 막으랴. 그래도 조금만 더 벨리타에게 집중했다면.

벨리타를 만난 뒤, 후회의 연속이다. 언제나 완전할 줄 알았던 자신이 선택을 후회하는 보잘것없는 인간일 줄이야. 한심하기 이를 데가 없다.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헤집은 오웬은 자리에 쭈그리고 앉아 해결 방안을 떠올리려고 안간힘을 썼다. 분명히 마법으로 납치를 자행한 것이고, 흔적은 남아 있을 거다. 순간이동이 분명한데 자신의 미약한 실력으로는 확실한 증거를 찾을 수가 없다.

물론 순간이동을 한 흔적을 잡아내더라도 어디로 이동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래도 마법으로 순간이동을 했다는 흔적만 확실하게 찾으면 추적해야 하는 범위가 줄어든다.

마법이 불가한 신전 같은 곳. 마법사들을 노동시켜 마법의 흔적이 남은 부근을 찾아 조사만 해도 일이 수월해지는데.

6서클만 되었더라도. 오웬이 깊은 한숨을 내쉬며 짜증을 내자, 벨리타의 호위들이 눈치를 살폈다. 일대를 조사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벨리타를 지키지 않고 무얼 했느냐고 화를 낼 생각은 없다. 비효율적이니까. 화를 낼 시간에 머리를 굴려서 해결 방법을 찾는 게 더 낫다. 감정 소모는 시간 낭비다.

자리에서 일어난 오웬이 호위들에게 저택으로 돌아가서 데이비드에게 상황을 보고하라고 부탁했다. 돌아가는 호위를 바라보며 오웬이 황궁으로 순간이동을 했다.

잭슨은 집무실에 앉아 있었다. 초조한 얼굴로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푸른 빛과 함께 나타난 오웬이 소파에 걸터앉으며 마른세수를 했다. 말하지 않아도 망했다는 사실을 짐작한 잭슨이 의자에서 일어나 오웬에게 다가갔다.

“기사단과 마법사들을 대기시켜 두었다. 네가 지휘하면 된다.”

“폐하는…….”

뭐 한다고 나서지 않느냐고 일갈하려다가 말끝을 흐렸다. 벨리타가 사라졌다고 황제가 나서는 것도 말이 되지 않다. 다른 영애들이 납치되었을 때 가만히 있다가 이제 와 나서면 귀족들의 반발이 심하겠지. 조용히 진행했던 이유도 대대적으로 조사하면 정세가 어지러워지기 때문일 텐데. 잭슨의 입지가 위태로워질 거다. 이해는 간다. 이해는 가지만.

오웬이 쓰고 있던 안경을 벗어 셔츠에 걸쳤다. 남 탓 할 시간도 낭비였다.

“순간이동을 한 흔적은 못 찾았어요. 시간이 지나서 잔해가 거의 남지 않았어요. 마정석의 흔적이 있으니 마정석을 사용한 게 맞을지도 몰라요. 사건 현장마다 마정석의 흔적이 남아 있던가요?”

반대에 놓인 소파에 앉은 잭슨이 다리를 꼬았다.

“그래. 그래서 전담팀은 마정석을 사용한 납치라고 확정 지었더군.”

그렇단 말이지. 오웬이 낮게 중얼거리다가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단정한 얼굴이 도드라졌다.

“마정석이 값이 많이 나갈 텐데, 어디서 구했는지 조사는 해 보셨나요?”

“하는 중이다. 기존의 마정석 동굴을 가진 인물 중에는 없어. 최근에 소유했거나, 상단에서 빼돌린 걸 테지. 그 점을 중점적으로 조사하고 있다.”

벨리타의 독 사건에서도 느꼈지만, 잭슨은 영특한 편이다. 그나마 다행이다. 멍청해서 대화하다가 열 받을 필요는 없으니까.

오웬이 턱을 괴고 생각에 빠졌다. 잭슨도 독촉하지 않고 가만히 기다려 주었다.

생각을 대강 정리한 오웬이 말을 쏟아냈다.

“릴페트 자작을 조사해 보세요. 오늘 벨리타가 자작을 만나러 간다고 했거든요. 마정석 유통 계약으로요. 아무 일 없다가 갑자기 사라진 게 미심쩍어요. 마정석을 거래하는 상단들도 강압적으로라도 거래 내용을 조사해 보시고 신문해 보셔야겠어요. 그리고 순간이동을 했다는 전제하에, 제국을 뒤지겠습니다. 다른 마탑에도 황명으로 조사에 임해 달라고 전해 주시고요.”

쏟아지는 말을 다 이해한 잭슨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잭슨은 오웬이 왜 자신에게 영특해서 다행이라는 말을 했는지 이해하지 못했는데, 오웬의 일 처리 속도를 보니 납득이 되었다. 그는 유능하다.

잭슨은 순간 오웬을 황궁에 들여 일을 시킬까 고민까지 했다. 유능한 인재는 언제나 환영이니까.

잭슨도 생각해 보았던 방식이었지만 섣불리 결정하지 못했는데, 오웬은 거침없었다.

잭슨은 자리에서 일어나 책상으로 향했다. 작은 종이에 오웬에게 사건 조사의 지휘를 일임한다는 글과 서명까지 하고 건네주었다.

“기사단장과 마법단장이 모여서 대기하고 있을 거다. 밖에 나가면 노타가 안내해 줄 테니 따라가도록.”

종이를 받아 든 오웬이 고개를 숙이고 바로 집무실을 떠났다.

잭슨은 책상에 걸터앉아 숨을 내쉬었다. 사라진 영애들을 찾는 게 일 순위인 건 알지만, 잭슨에게는 벨리타 다음으로 범인 검거가 우선이었다. 범인을 유추해 보려고 해도 마땅히 떠오르는 인물이 없다.

에르테인가, 싶어도 그를 따르는 귀족들이 모조리 멸문당해 수족도 없는 상태인데 어떻게 해내겠는가. 후작위 이상의 귀족이 갑자기 에르테에게 붙지 않는 이상 큰 금액이 드는 마정석을 구할 수도, 납치할 인력을 구할 수도 없다.

에르테에게는 이미 죄명이 붙었다. 후작 영애 독살 혐의. 소르니가 벨리타에게 독을 먹인 그 사건을 황제가 된 후, 에르테에게 덮어씌웠다. 소르니를 타국으로 보내려고 했다가 실패했으니 에르테를 짓밟을 용도로 활용할 수밖에.

혐의가 생긴 에르테에게 어느 귀족이 붙어 준단 말인가. 잭슨이 짜증이 섞인 손길로 셔츠의 단추를 풀었다. 답답하다. 조금만 더 하면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체르핀 공작의 살해를 사주했지만, 감감무소식이고, 근래에 자주 자리를 비운다는 수상한 소식까지 들린다.

혹시.

내가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잭슨이 벌떡 일어나 집무실을 빙글빙글 돌아다녔다. 다른 곳에 정신이 팔려서 체르핀 공작을 의심하지 못했다. 욕심 많은 영감이 언제든 등을 돌리고 잭슨의 뒤에 칼을 꽂을 자라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무방비했다.

잭슨이 호위를 불러 체르핀 공작의 둘째 아들, 테르시안을 데려오라고 소리쳤다.

*

소르니에게 입양되어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기사단장은 오웬이 백작 영식이라는 사실을 알자마자 공손하게 굴었고, 마법단장은 수도 마탑주의 아들인 오웬에게 꽤 살가웠다. 메이지 남작이 일궈 놓은 업적을 생각하면 당연한 대우였다.

응접실 소파에 걸터앉은 오웬이 제국의 지도를 테이블에 펼치며 하나하나 지시를 내렸다.

“영지마다 마법사 최소 스무 명, 기사 쉰 명을 배치할 겁니다. 마법사는 구역을 나누어서 마정석의 흔적을 찾으시면 됩니다. 만약 찾았다면, 기사들이 일대를 수색하는 방식으로 할 거예요. 사람이 오갔는지, 시체가 있는지 확인해 주시면 됩니다. 순간이동을 사용했을 거라고 추정되니 가지 못할 곳이 없어요. 산이든 바닷가든 놓치는 곳 없이 찾으세요.”

인원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인원 대비 비효율적인 방법이긴 하지만 어쩌겠는가.

오웬이 펜으로 구역을 지정해 주며 꼼꼼하게 인원을 배치했다. 기사단장과 마법단장이 고개를 끄덕거리며 경청한다.

“순간이동이 가능한 마법사들은 많이 없으니까, 주술서 제작 방법을 알려드리겠습니다. 판매 목적의 주술서니까 사건이 해결된 후에 발견되는 일 없길 바랍니다. 법정에서 뵙고 싶진 않거든요.”

피눈물이 난다. 벨리타를 위한 순간이동 주술서였는데, 분명 엄청나게 비싼 값에 팔릴 텐데. 마법사들의 머릿속에 들어가는 순간부터 오웬의 소유가 아니다. 어디에 공유하지 말고 잊으라는 말을 해도 분석하고 더 개발해 보겠지. 소이트 상단에 엄청난 이익을 가져다줄 주술서인데!

이를 악문 오웬이 주술서를 그려 주었다. 마법단장이 초롱초롱해진 눈으로 주술서를 받아 들었다.

“마법사들에게 보여 주시고, 기사들에게도 나누어 주세요. 보고가 필요하거나 소통이 필요하면 쉽게 사용할 수 있도록.”

기사들에게도 나누어 주라는 소리에 기사단장의 눈도 빛났다. 오웬은 값싼 종이에 주술서를 만들어 주며 빠르게 나머지 지시사항도 지껄였다.

*

수도에서 전서구가 도착했다. 소르니는 타린과 영지 경영에 관해 공부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나름의 데이트였다. 밤이 무르익어서 떨어지기 아쉬워하는 순간, 집사장이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렸다.

“데르슈밀 후작 부인께서 보내신 전서구입니다.”

수도에 눈과 귀가 많은 소르니는 수시로 제국의 근황을 접할 수 있었다. 소르니가 잭슨과 약혼한 상태일 때 연을 만들어 놓았던 황궁의 사람에게서 전서구가 도착했다. 그렇다는 건 황궁에서 일이 생겼다는 뜻이다. 소르니가 자리에서 일어나 쪽지를 낚아챘다.

[연쇄 납치 사건의 조사가 크게 이뤄지고 있어요. 이번에 파텔 후작 영애도 납치되었다는 말을 들었답니다. 친밀하게 지내시던데 상심이 크시겠어요.]

다리가 풀린다. 그 자리에 주저앉은 소르니를 보고 놀란 타린이 헐레벌떡 다가왔다.

“무슨 일이에요? 괜찮으세요?”

소르니는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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