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화.
엘라는 호위의 부축을 받으며 저택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저택에 도착하자마자 마차에서 뛰어내려 오웬의 연구실로 들이닥쳤다. 오웬은 눈 밑이 거무죽죽한 상태로 초췌하게 엘라를 맞이했다.
“갑자기 무슨 일이야?”
연구실 안으로 뛰어 들어온 엘라가 발을 헛디뎌 넘어졌다. 얼굴로 들이받아서 아픈 건지, 몸을 웅크리고 소리 내 울음을 터트렸다.
오웬이 당황해서 엘라에게 다가갔다. 콧물을 줄줄 흘리며 서럽게도 우는 엘라를 일으켜 세운 오웬은 순간 이상한 낌새를 감지했다.
“……벨리타는 어디 있어?”
벨리타가 독을 먹었을 때, 혼자 저택으로 돌아와 서럽게 울던 엘라가 떠올랐다. 엘라가 혼자 돌아왔더라도 울면서 오웬을 찾을 리 없다. 분명 벨리타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거다.
안경을 고쳐 쓴 오웬이 헝클어진 자신의 머리를 벅벅 헤집었다. 상황 설명을 들어야 대응할 수 있는데.
정신없이 우는 엘라를 달래 줘야 하나, 잠시 고민에 빠진 오웬은 호위 기사를 떠올렸다. 자작 영애인 엘라가 호위 기사도 없이 혼자서 돌아왔을 리 없으니까.
바닥에 다시 엎어져 우는 엘라를 두고 오웬이 연구실을 뛰쳐나갔다.
계단을 내려가며 호위 기사를 찾으니, 하녀장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있던 호위 기사가 아는 체를 했다. 세 칸씩 뜀박질로 내려와 오웬이 소리쳤다.
“벨리타는 어디 있죠?”
호위는 하녀장과 오웬을 번갈아 보다가 고개를 숙였다. 오웬도 엄연히 호위였으며 벨리타의 애인이었으니 면이 서지 않았던 탓이다.
순식간에 계단을 내려온 오웬이 호위의 앞에 섰다. 하녀장이 한 걸음 뒤로 물러나 자리를 양보했다.
뜀박질 때문에 숨이 거칠어졌다.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다듬을 새도 없이 오웬이 상황 설명을 요구했다. 호위는 입을 달싹거리다가 자초지종을 이야기했다.
무르펜에서 벨리타가 납치당했다. 지켜보고 있었음에도 순식간에 사라져서 어쩔 도리가 없었다. 현재 다른 호위가 주위를 샅샅이 뒤지고 있다. 아마 연쇄 납치가 아닌가 싶다.
설명을 들을수록 가슴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사람이 많은 곳에서 호위들과 엘라가 지켜보고 있었는데도 납치를 당했다고.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마법사가 아닌 이상 불가능의 영역이다.
마법사.
오웬이 호위 기사의 어깨를 붙잡았다. 평소의 오웬답지 않은 다급함이었다.
“누구와 부딪치거나 마법의 흔적이 남지 않았어요? 이상한 부분이 있을 거예요. 잘 떠올려 봐요.”
이상한 부분. 호위 기사는 눈알을 굴리며 기억을 정리했다. 갑자기 사라진 것 외에는 없는데. 부딪쳤다라…….
검은 로브를 눌러쓴 사람이 스쳐 갔다는 기억이 떠오른 호위 기사가 소리쳤다.
“검은 로브요! 검은 로브를 쓴 남자가 스쳐 지나가자마자 감쪽같이 사라졌습니다!”
마법사다. 최소한 마정석이라도 활용했으리라. 오웬은 호위 기사에게 벨리타가 사라진 정확한 지점과 시간대를 확인하고 순간이동 했다.
오웬이 도착한 곳은 황궁이었다. 황제 궁의 집무실로 순간이동 한 오웬은 일정을 소화하고 있는 잭슨과 마주쳤다. 펜을 쥐고 있던 잭슨이 오웬의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불쾌함을 드러내며 펜을 부수었다. 잭슨이 펜을 부수든 갈아 마시든 상관없다.
추레한 꼴인 오웬이 갑자기 찾아온 이유가 궁금하지도 않은 잭슨은 품 안에 있는 단도를 꺼내 들었다. 마침 잘 만났다. 죽여 버려야겠다고 다짐하고 있었는데 직접 찾아와 주니 이리 고마울 데가 없다.
심장을 겨냥한 단도가 뻗어 나가려는 순간, 오웬이 소리쳤다.
“벨리타가 납치당했어요. 연쇄 납치 사건, 그거요. 벨리타도 당했다고요.”
단도가 툭, 책상 위로 떨어졌다. 하얗게 질린 잭슨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오웬에게 다가갔다.
잭슨이 초조하게 중얼거리는 오웬의 멱살을 움켜쥐고 살기를 억누르며 뇌까린다.
“호위라는 자가, 주인 하나를 못 지켜?”
“난 그 자리에 없었어요.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고요. 당장 추적해야 해요.”
생각을 정리하며 입술을 잘근거리며 씹던 오웬이 차분하게 가라앉은 노란 눈으로 잭슨을 바라봤다. 잭슨이 주춤, 뒤로 물러나 잡았던 멱살을 놓았다.
“실력 좋은 마법사와 기사단에 지시를 내리세요. 현장에 가서 제대로 확인해 봐야겠지만, 분명 마법을 사용했을 거예요. 제국 전체를 뒤져야 합니다. 산이든 시골이든 다요. 지금 당장 지시하세요. 현장 확인하고 바로 돌아와서 보고할게요.”
평소와 다르다. 여유롭고 능청스러운 태도가 아닌 무거운 침착함. 연인이 납치를 당했는데 이다지도 냉철하게 판단할 여력이 있나? 잭슨조차 벨리타가 납치당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머리가 어지럽고 속이 메스꺼워 제대로 된 생각도 나지 않는데.
혹여 무슨 해코지라도 당할까 봐 걱정되어 울렁거리는데 오웬은 어떻게 이리 담담할 수가 있지. 잭슨이 인상을 찌푸렸다. 오웬이 아니꼽지만 벨리타를 찾기 위해서 어쩔 도리가 없다.
잭슨이 노타를 부르곤 머리를 헤집었다.
“마정석을 사용했을 거다. 마력의 흔적이 없어. 무력을 행사한 흔적도 없고.”
“참고할게요. 어디 가지 말고 여기 계세요.”
“명령하지 마.”
말이 끝나기도 전에 사라졌다. 푸른 빛이 남은 바닥을 바라보다 잭슨이 뒷걸음질 쳐서 책상에 걸터앉았다. 울렁거린다. 세상이 자신을 두고 어지럽게 도는 감각이 느껴졌다. 땅이 솟고 천장이 일그러진다.
입을 틀어막고 숨을 들이켰다. 안일하게 생각했다. 벨리타는 언제나 누군가와 함께 다니니 납치를 당하지 않을 거라고 은연중에 단정 짓고 있었다. 언제든 표적이 될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이럴 줄 알았으면 무리해서라도 범인을 잡아내는 건데.
멍청한 잭슨 위비에 세르트제.
황제가 되어서도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지 못하는 멍청이. 벨리타를 괴롭혔던 작년의 그때와 달라진 게 하나도 없다. 자신에게 화가 나고 경멸을 느낀다. 쾅, 책상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노크하고 들어온 노타가 잭슨의 상태에 놀라 무의식적으로 뒷걸음질 쳤다. 잭슨이 흉흉한 눈으로 노타를 노려봤다. 최근에 잠잠하더니 살기등등한 이유가 뭔가.
멀찍이 거리를 벌린 채, 노타가 어색하게 웃었다.
“무슨 일 있으세요?”
“마법사들과 기사단을 준비해라. 제국 전체를 뒤져서라도 납치 사건을 해결해야겠다.”
언제는 해결하려고 안 했던 것처럼 이야기한다. 매일 붙어 있던 노타가 보아도 잭슨은 사건을 해결하려고 부단히도 애를 썼다. 새벽이 되어서도 보고를 받고 정리하던 사람이 누군데. 물론 미뤄진 즉위식 탓에 신경 쓴 걸 테지만.
노타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네. 더 지시하실 사항은요?”
“마법사들이 필요해. 부족하다면 마탑의 마법사들을 고용해서라도 사건을 처리한다.”
수도 마탑의 마법사들. 어지간히 흥미가 생기는 일 아니면 돈을 퍼 줘도 하지 않는 족속들이다. 작위도 필요 없고 명예도 불필요한 마법사. 그 인간들을 어떻게 구슬리라고.
노타가 눈을 가늘게 뜨고 바라보자, 잭슨은 한 손으로 얼굴을 짚어 마른세수했다.
“마법을 사용했는데 흔적도 없다. 황궁 마법사도 범인을 찾지 못하는 완전범죄라고 흘려. 녀석들은 분명 아니라는 걸 증명하러 들 거다. 그리고 기사단은 마법사를 보조한다. 군말하지 말고 시키는 대로 하라고 해.”
사건의 중심이 마법이라면 마법사들이 가장 잘 알 거다. 마탑주의 아들인 오웬에게 지휘를 맡긴다면 분명 나서서 해내겠지. 이번에 소르니의 양아들로 입적되었으니 기사들도 신분에 대해 왈가왈부하지 않을 터다.
노타가 고개를 끄덕거리고 물러났다. 고요해진 집무실 안에 잭슨의 앓는 소리만 울렸다.
*
나무 냄새가 났다. 바람을 타고 나뭇잎이 부대끼는 소리가 들린다. 벨리타는 눈을 떠 보았지만, 시야는 어두웠다. 얼굴을 덮은 천이 느껴졌다. 입을 달싹여도 단단히 둘러싸인 천이 소리를 막았고, 팔과 다리가 결박되어 움직임에 제재를 가했다.
벨리타는 덜컥 찾아온 공포에 숨을 몰아쉬었다.
이곳은 어디인지, 누가 데려왔는지. 벨리타가 눈을 감고 기억을 회상했다. 분명 무르펜에서 엘라에게 꼬치를 사 주려고 했는데, 누군가와 닿자마자 기억이 끊겼다. 그 이후의 일은 떠오르지 않는다.
벨리타가 덜덜 떨리는 몸을 움츠리고 무작위로 떠오르는 생각을 정리했다.
개중 공포와 한탄이 거듭 수면으로 떠올랐다. 벨리타는 무서웠다. 어디인지 모를 이곳이, 감각이 차단되어 소리와 냄새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앞으로 일어날 일들이.
살다 살다 납치까지 당해 본다. 주인공의 숙명이라기엔 너무 엿 같지 않나. 독도 먹고 삶도 잃고 죽을 고비도 몇 번이나 넘겼는데 더 박복할 일이 남아 있다는 게 우습기까지 했다. 파란만장도 하다. 이렇게 고단하기도 힘든데.
벨리타는 자신에게 벌어진 일이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지었다.
어차피 죽지도 못하는 거. 죽음은 두렵지 않다. 죽지 못해 벌어질 일이 두려운 거다. 공포에 질려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가 잠시 뒤, 언제까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시간을 버릴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벨리타가 바닥에 드러누워 볼을 기댔다.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눈 위로 둘린 천을 밀어냈다. 점차 두꺼운 천이 눈썹 위로 밀려 올라가고 끝내 얼굴을 벗어났다. 벨리타가 감았던 눈을 떴다.
컴컴하고 좁은 실내. 창고인지 모를 작은 공간이었다. 잡다한 물건이 쌓여 있고 작게 트인 창 너머로 달빛이 겨우 방을 비췄다.
벨리타는 고개를 돌려 손목을 감은 밧줄을 보았다. 무언가 끊어 줄 만한 물건이 있으면 좋을 텐데. 나무 상자 따위만 가득 쌓여 있어 마땅한 게 없었다.
함부로 소리치고 난동을 부리면 일이 커진다. 벨리타는 숨을 죽이고 날카로운 물건을 찾아 눈을 굴렸다.
“뭐야, 깼네?”
산뜻한 목소리. 벨리타는 목소리의 근원지로 시선을 돌렸다. 굳게 닫힌 문에 네모나게 뚫린 구멍으로 누군가가 벨리타를 바라보고 있었다.
순간 공포심에 심장이 내려앉았다. 붉은 눈이 집요하게 벨리타를 바라보고 있었다. 언제부터 보고 있었지?
벨리타는 거세게 뛰는 심장 탓에 입 밖으로 심장 소리가 튀어나오는 게 아닐까 걱정됐다. 무서워서, 아무 생각도 들지 않는다.
벨리타가 몸을 버둥거려 뒤로 물러났다. 네모난 구멍 너머로 붉은 눈이 가늘게 접혔다.
“깼으면 말을 해 줬어야지. 몰랐잖아.”
낡은 문이 열리며 기괴한 소리가 났다. 열린 문 너머로 밝은 빛이 넘실거렸다. 벨리타는 눈이 부셔서 인상을 찌푸렸다.
가늘어진 시야로 보이는 남자의 발. 그 위에 긴 다리와 화려한 차림새. 벨리타가 앞에 선 남자의 얼굴을 보았다.
익숙하다. 어디서 본 얼굴이다. 어디서 보았지? 너무 옛 기억이라 기억이 나지 않는다.
벨리타가 막힌 잇새로 앓는 소리를 내며 벽 끝까지 몸을 물렸다. 남자가 더 가까이 다가왔다.
“네가 벨리타 릴레이나 파텔이지? 얘기 많이 들었어.”
어딜 봐도 납치한 사람의 태도다. 경계가 짙은 벨리타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남자가 살갑게 미소 지었다. 웃는 얼굴이 화려하고 아름다웠다. 고생 한 번 해 보지 않았을 고운 남자의 손이 벨리타의 머리카락을 움켜잡았다.
“우리 형님이 널 참 아낀다고 해서. 죽이기 전에 얼굴 좀 보고 싶었거든.”
죽여? 누가? 네가? 벨리타가 헛웃음을 지었다.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한 게 몇 번인지 모른다.
순간 머릿속에서 연쇄 납치 사건이 지나갔다. 자신은 안전할 줄 알았다. 한국인은 안전불감증이라고, 위험하다고 해도 위험한 줄 모른다고 했던 딸의 목소리가 스쳤다. 딸의 말이 다 맞다. 벨리타는 편하게 모든 사건이 자신을 피해갈 줄 알았다.
벨리타는 남자의 말을 곱씹었다. 우리 형님. 아낀다. 검은 머리. 순식간에 남자가 누구인지 눈치챈 벨리타가 질린 낯으로 남자를 올려다봤다.
주황색의 머리카락을 거칠게 잡아당기며 에르테가 웃음소리를 냈다.
“잭슨 형님이 좋아하는 얼굴이구나, 이게. 썩 예쁘지는 않네?”
감히 우리 딸이 만든 여주인공 얼굴에 왈가왈부하다니. 입이 막히지 않았다면 웃는 얼굴에 침을 뱉었을 벨리타가 인상을 찌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