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화.
평생 누군가의 사랑을 받지 못하리라고 생각했다. 폭력과 멸시에 노출되어 살아온 아이는 일찍이 자신을 포기해 내던졌다.
뺨을 맞는 건 아프지만, 계속 맞다 보면 덜 아프게 맞는 방법을 찾을 수 있다. 다리를, 머리를, 흉부를 덜 아프게 맞을 수 있는 법을 찾아내곤 했다.
폭력은 사람을 좀먹고 무력하게 만든다. 소르니는 무능한 삶을 살았다.
성급한 실수로 유일한 친구와 같던 하녀를 잃었고, 늙은 왕자에게 노리개로 팔려갈 뻔했으며, 삶의 도착점이었던 황후도 되지 못했다. 보잘것없는 인생이다.
소르니는 아직도 사랑을 깨우치지 못했고 앞으로도 오래 걸릴 거다.
타린이 지쳐 떠날 때까지 깨닫지 못할지도 모른다. 겁이 났지만 믿고 싶어졌다. 누군가에게 일 순위가 된다는 감각, 넘칠 만큼 받아도 한참이나 남은 애정을 확인한 감상, 괴로울 때 손을 잡아 주는 감촉 등의 경험을 해 보고 싶다. 속도에 맞추어 준다는 말이 무척이나 고마워졌다.
소르니가 타린을 끌어당겨 옆자리에 앉혔다. 타린이 조심스럽게 소르니의 옆에 붙어 앉아 쭈뼛거리며 손을 뻗었다. 소르니가 모르는 척하며 타린의 어깨에 고개를 기댔다.
타린은 소르니의 손을 부드럽게 겹쳐 쥐고 맑게 웃었다.
“샤를로트 경, 땀이 많으시네요.”
“……좋아하는 사람 옆이니까, 긴장해서 그렇습니다…….”
벨리타. 네가 그랬지. 날 우선으로 해 주는 사람을 만나라고. 잘 만난 것 같아. 이 사람이라면 사랑하는 법을 배울 수 있을 것 같아.
긴장해서 굳은 어깨와 땀이 배어나는 손아귀. 붉게 달아올라 뜨거운 뺨. 심기를 거스르지 않으려고 몇 번이나 고르는 말. 넘치는 배려. 타린이 온몸으로 설명하는 사랑이다.
소르니는 이런 사랑이라면 평생에 걸쳐 배워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
음식점도 평탄하게 개장 준비를 마쳐가고 있다. 두 상단도 세분화시켜 팀을 나누니 더욱 완벽하고 효율적으로 일을 처리했다.
벨리타가 걱정할 건 릴페트 자작과의 계약이다. 언제 만나는 게 좋겠냐고 편지를 보내자마자, 다음 날 만나자고 회신이 돌아왔다. 그게 어제 일이다.
망할 영감탱. 마음만 급해서.
벨리타는 고용한 경영자 루미르와 비서 제니에를 데리고 깔끔하고 고아한 드레스를 챙겨 입었다. 편하게 입으면 얕보이고, 과하게 입으면 하찮게 보기 때문이다.
벨리타가 루미르와 계약서에 추가할 내용과 수정할 부분을 논의하며 마차로 향했다. 오웬은 연구한다고 바빠서 다른 호위 기사를 데려가기로 했다.
근래 들어 납치 사건이 기승이라던데, 무심코 스쳐 지나가는 생각을 접어두고 마차에 탔다. 릴페트 자작의 수도 저택은 무르펜 근처에 있어서 꽤 가까운 거리였다. 예상보다 더 빠른 시간에 도착한 덕분에 멀미를 추스를 수 있었다.
울렁거려서 입을 틀어막자 제니에가 등을 토닥여 주었다. 엘라도 챙겨 온 물을 들이밀어 주어서 금세 속을 진정시켰다.
이 녀석들 없으면 어떻게 살까. 벨리타가 제니에의 어깨를 토닥여 주고 엘라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엘라가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기에 놀라서 욕을 했더니 볼까지 붉어진다.
역시 엘라, 좀. 그래. 음.
벨리타가 머리를 정돈하곤 릴페트 자작의 저택으로 들어섰다. 많은 사람이 마중을 나왔다. 릴페트 자작도 나와 반겨 준다. 후작 영애의 힘인가, 두 상단을 가진 돈의 힘인가. 뭐든 좋다. 대접받는 기분이 짜릿했으니까.
벨리타는 예의상 인사하고 응접실로 이동했다.
릴페트 자작은 나이에 비해 무척 노안이어서, 주름진 눈가가 접힐 때면 웃는 하회탈처럼 보였다.
벨리타는 준비한 계약서를 꺼내 테이블에 올렸다. 릴페트 자작은 이미 받아 본 계약서였지만 다시 꼼꼼히 읽었다. 벨리타는 다리를 꼬고 정갈한 자세로 입을 열었다.
“계약서는 보시는 대로입니다. 저 길게 얘기하는 거 싫으니까 본론만 짚겠습니다. 소이트 상단에서 독점으로 유통하고자 해요. 수수료도 10퍼센트면 다른 상단보다 적은 편이고, 월말마다 판매 현황도 투명하게 공개해드려요. 손해 보실 계약은 아닙니다.”
릴페트는 하얗게 센 턱수염을 매만지며 계약서와 벨리타를 번갈아 보았다. 확실히 벨리타가 제안한 계약서는 흠잡을 데 없이 철두철미하고 서로의 이익만을 따졌다. 릴페트가 손해를 보지도, 벨리타가 손해를 보지도 않는다.
소문에 의하면 로틀 남작은 인정사정없이 자신의 이득을 챙겼다는데 그에 비해 벨리타의 계약서는 적선과 다름없었다.
다른 상단보다 대우도 좋다. 하지만 사람의 욕심이 끝도 없어서. 결코, 손해 보는 계약이 아님에도 더 이득을 챙기고 싶어지는 것이다.
릴페트는 눈을 가늘게 뜨고 가식적인 웃음을 지었다.
“마정석 하나의 가격도 높은데, 수익을 10퍼센트나 가져가신다니……. 다른 상단보다 수수료가 높네요. 이거 어찌해야 하나……. 독점 기간도 너무 길지 않습니까? 5년이라니요.”
루미르의 웃음에 금이 갔다. 전부터 투정을 부려 왔기에 양보를 해 주었더니 계속 욕심을 부린다.
루미르가 안경을 가운뎃손가락으로 쳐올렸다. 릴페트의 투정을 들은 벨리타가 여유롭게 고개를 까딱거렸다.
“그럼 그 상단에서 거래하시죠.”
“네?”
초강수를 뒀다. 루미르와 제니에, 릴페트가 동시에 벨리타를 놀란 눈으로 보았다. 벨리타는 대수롭지도 않다는 태도로 어깨를 으쓱거렸다.
“아시다시피 파텔 상단에서 이미 마정석을 거래하고 있으니 저에게는 그리 손해가 아니랍니다. 최근에 타국과의 거래도 활발하게 진행하고 있으니 그곳과 거래해도 나쁘지는 않겠네요. 그렇죠, 루미르 씨?”
“네, 맞습니다.”
벨리타가 루미르를 부르자 언제 당황했냐는 듯, 침착한 낯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벨리타의 말은 사실이다. 최근에 외국어가 가능한 직원을 고용했고, 거래가 활발해지고 있었다. 릴페트 자작과 계약한 마정석을 수출할 계획이었지만 타국에서 유통해도 괜찮다. 조금의 손해는 보겠지만.
루미르는 곁눈질로 릴페트 자작을 흘겨보았다. 안색이 조금 질리는 게, 조금만 더 하면 낚일 것 같았다.
루미르가 빠르게 눈을 굴려 릴페트와 벨리타를 번갈아 보자 벨리타는 이해했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오만하게 턱을 괴고 완전한 갑으로 둔갑한 벨리타가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타국에 수출하면 수입이 상당할 텐데 아쉽게 되었네요. 그럼 릴페트 자작, 다른 상단과 좋은 계약 하시기를 바랍니다.”
이대로 보내면 거래는 완전히 망친다. 간을 볼 수도 없이 다른 상단과 계약을 해야 한다. 어느 상단을 가서도 소이트 상단만큼 큰 수입을 안겨 줄 곳도 없다.
릴페트 자작은 등 뒤에 흐르는 식은땀을 무시하고 일어나려는 벨리타를 불러 세웠다.
“계약서는 지금 도장을 찍어도 되겠지요?”
간신배 같은 미소. 어색한 행동. 벨리타는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고개를 돌려 릴페트를 바라본 벨리타의 낯은 평온했다. 덤덤하고 여유가 가득하다.
“그 전에, 계약서 수정이 필요하겠네요.”
뒤에 서 있던 루미르가 조용히 주먹을 쥐었다. 사장님 나이스샷.
벨리타는 릴페트를 털어먹었다. 수수료도 5퍼센트나 올리고 유통권과 마정석의 품질에 이상이 있을 시 일방적으로 계약을 파기해도 좋다는 등의 내용도 추가하고 수정했다. 릴페트는 하얗게 재만 남아서 소파에 늘어졌다.
“좋은 거래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좋은 인연이 되길 바라요.”
본전을 되찾은 벨리타가 산뜻하게 웃으며 날인이 완료된 계약서를 챙기고 일어섰다. 릴페트는 배웅을 할 기력도 남아 있지 않아 집사장이 벨리타를 안내했다.
먼저 나서는 벨리타를 따라 루미르가 양 주먹을 불끈 쥐고 일어났고, 엘라는 이미 감격해서 주먹을 입안에 욱여넣고 있었다.
마차에 탄 벨리타가 등받이에 늘어지며 한숨을 내쉬었다. 얼렁뚱땅 넘어가서 다행이지, 릴페트 자작이 조금만 더 영악했으면 되레 다 털릴 뻔했다.
하지만 후회도 잠시, 벨리타는 성취감에 얼굴을 붉혔다. 해냈다. 내가 거래를 성사시켰다.
기쁨이 벅차오른다. 벨리타는 주먹으로 소파를 마구 내리쳤다. 엘라가 먼지 날린다며 창문을 열었다.
벨리타는 두근거리는 가슴께를 손바닥으로 지그시 누르며 오웬에게 달려가 조잘거리고 싶은 마음을 참았다.
가는 길에 꽃이라도 사다 줄까. 오웬의 성정으로 봐서는 분명 불필요한 꽃을 왜 사 왔느냐고 하겠지만.
벨리타가 엘라에게 꽃집으로 가자고 요구했다. 엘라는 냉큼 꽃집으로 가자고 소리쳤다. 마부가 급히 말머리를 틀었다.
근처에 있는 작은 꽃집에 도착해서 꽃을 골랐다. 오웬의 눈을 닮은 노란 장미와 머리를 닮은 아이리스를 꽃다발로 구매했다.
꽃말마저 좋아서, 벨리타는 꽃다발을 끌어안았다. 향도 좋다.
주인에게 값을 치러 주고 가게를 나서자, 저물어 가는 노을이 보였다. 그 풍경을 보면서 무르펜을 산책해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홀로 무르펜을 돌아다녀 본 적도 없고 데이비드와 먹었던 길거리 음식도 썩 맛있었으니까.
머리카락 색과 똑 닮은 노을이 높은 건물 지붕에 걸쳐 운치 있었다. 벨리타는 돌아가자는 엘라에게 조금만 산책하고 가자며 졸랐다.
엘라는 조르는 벨리타를 무척 사랑스러워했기 때문에 주저 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호위가 줄줄이 내려 벨리타의 뒤를 따랐다.
루미르와 제니에는 먼저 보내주었다. 사장이 산책한다고 따라올 이유는 없다. 산책하면서까지 직장 사람을 보고 싶지도 않다.
벨리타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꽃다발을 안고 엘라와 손을 잡았다. 엘라가 무척 기뻐하며 맞잡은 손에 힘을 준다.
호위가 일제히 벨리타의 뒤를 따랐지만, 워낙 조용해서 존재감도 없었다. 땋은 갈색 머리를 넘긴 엘라가 붉게 상기된 낯으로 조잘거렸다.
“아가씨, 요새 좋아 보이셔서 정말 다행이에요.”
“갑자기 무슨 말이야?”
“힘들어하셨잖아요. 원체 밝지 않은 분이시기도 했고……. 그치만 요새는 정말 좋아 보이세요. 잘 웃고, 일도 열심히 하시고……. 여유가 없어 보이셨는데 지금은 바쁘셔도 행복해 보여요.”
어리다고 보는 눈이 없는 건 아니다. 엘라는 열여섯이 된 아이였고 가까운 사람의 변화를 재빠르게 눈치챘다.
벨리타는 그간의 기억을 되짚었다. 정말 힘들어했다. 가족을 잃고, 현실에서 일궈 놓은 모든 걸 잃었다. 아직도 상실감이 떠나지 않았지만, 점차 나아지고 있다. 확실히 좋아지고 있다.
사후세계라고 생각하니 조금은 포기하게 되더라. 딸이 만든 세계, 완전히 틀어진 원작이어도 나름 재미있지 않은가. 딸이 계속 보고 있을지 모르지만 그래도 괜찮다. 걱정하지 않도록, 엄마가 이곳에 있다는 사실도 잊게 될 정도로 잘살고 있는 걸 보여 주면 되니까.
벨리타가 은은하게 피어나는 웃음을 짓고 엘라의 손을 고쳐 잡았다. 엘라가 바짝 붙어 팔을 문지른다. 은근히 감촉이 소름 끼쳐서 벨리타가 황급히 손을 놓고 떨어졌다.
“어후, 왜 이래. 아, 엘라야. 너 꼬치 먹어 봤냐? 사 줄게.”
“네? 아가씨! 벨리타 아가씨!”
훌쩍 뒷걸음질을 친 벨리타가 광장으로 앞서 걸었다. 사람이 많아서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순간 머릿속으로 연쇄 납치 사건이 떠오른 엘라가 다급하게 벨리타를 따라 뛰었다.
많은 인파 속에 벨리타가 섞여들었다. 호위 기사들이 벨리타를 쫓아 뛰어나갔다.
찰나였다. 멀쩡히 엘라를 향해 웃고 있던 벨리타의 앞으로 검은 로브를 뒤집어쓴 누군가가 지나갔다. 인파 속에서, 많은 사람 사이에서 벨리타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사람이 이렇게나 많은데. 대체 어떻게. 지켜보고 있었는데도.
하얗게 질린 엘라가 인파를 헤집고 벨리타가 서 있던 곳으로 뛰어갔다. 호위도 엘라를 따라 왔다.
없다. 꽃잎 몇 장만 바닥에 내려앉아 살랑거렸다. 다리에 힘이 풀린 엘라를 부축한 호위가 기사들에게 소리쳤다.
“일대를 뒤진다! 엘라 씨는 당장 저택으로 돌아가 알리십시오.”
방금까지도 눈앞에 있었는데. 해맑게 웃고 계셨는데.
덜덜 떠는 손을 움켜쥐며 엘라가 혼이 빠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