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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이 쓴 로판 소설에 빙의되어버렸다-134화 (134/150)
  • 134화.

    더 머물러 달라는 데이비드의 요청을 뒤로한 벨리타는 돌아갈 채비를 끝마쳤다. 소르니는 가는 길에 자신의 영지에 들르고 타린도 만난다고 먼저 떠났다.

    오웬도 벨리타가 더 머무르길 바라는 눈치였으나, 벨리타는 수도에서 해야 할 일들이 많았다. 음식점의 시공도 곧 끝이 난다고 하니 확인할 필요도 있었고, 상단의 보고서도 확인하고 서명해 줘야 했다.

    머무르는 동안 일에서 손을 놓고 있었던 덕분에 망쳐 가던 건강도 꽤 좋아졌다. 물론 기분 탓이겠지만. 역시 사람은 쉬어 가며 일을 해야 한다.

    수도로 갈 인원은 마차에 태우고, 벨리타는 오웬의 옆에 섰다. 데이비드가 벨리타의 옷깃을 잡는다.

    “자주 놀러 오십시오. 그래도 여기는 집이잖습니까.”

    “그래, 그럴게. 너도 수도 종종 놀러 와. 졸업해서 올 일은 없겠지만, 부모님 얼굴도 봐야지.”

    “귀족 회의나 파티 같은 게 있으니 자주 갈 겁니다. 오웬도 잘 가십시오.”

    살가운 인사를 마치고 데이비드가 오웬에게도 인사를 건넸다. 오웬이 벨리타의 어깨에 팔을 두르며 웃었다.

    “응, 알겠어. 처남.”

    “아, 진짜.”

    질색하는 데이비드에게 잘 있어, 처남 소리를 했다가 타박을 들었다. 오웬이 낮게 주문을 읊었다. 푸른 빛과 함께 둘은 수도 저택으로 돌아왔다.

    수도로 돌아온 둘은 저녁 식사 때 보자는 대화만 나누고 일터에 틀어박혔다. 오웬은 주술서 연구와 만다고 연구를 해야 했고, 벨리타는 쌓여 있을 결재 서류를 확인해야 했다.

    연인 사이지만 연인이 되기 전보다 건조하다. 바짝 말라서 마른 나뭇잎 같다. 단둘이 데이트를 한 것도 꽤 전이니, 벨리타는 오웬과의 시간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집무실에 들어온 벨리타가 의자에 앉아 서류를 들춰 보자, 하녀 하나가 조심스럽게 들어왔다.

    “아가씨, 편지가 도착했어요. 이건 폐하께서 보내신 거고, 이건 체르핀 백작님께서 보내주셨어요. 그리고 이건 릴페트 자작님께서 보내신 거예요.”

    “고마워. 차랑 과일 좀 가져다줘.”

    알겠다는 대답과 함께 하녀가 물러났다.

    하녀가 나가자마자, 벨리타는 주저 없이 릴페트 자작의 편지를 먼저 확인했다.

    [소이트 상단에서 독점 유통을 맡고 싶다고 하셨지만, 주인이 바뀌어서 걱정되는군요. 만나서 이야기해 보는 게 좋겠습니다.]

    장황하게 적힌 편지였지만 줄이자면 이런 내용이었다. 조슈아가 권했다면 냉큼 응했을 거지만, 벨리타의 운영 실력을 믿지 못한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상단을 운영하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애송이니까 말로 몰아붙이면 이득을 챙길 수 있을 것이라 셈을 한 거겠지.

    벨리타가 알겠으니 언제 만날 건지 얘기해 달라는 내용을 길게 편지에 적었다. 귀족들은 이래서 싫다. 깔끔하게 할 얘기만 간결하게 하면 얼마나 좋은가. 쓸데없이 빙빙 돌리고 비유하고. 아주 고상한 인간들 납셨다.

    실링 왁스로 편지 봉투를 봉한 벨리타가 책상 끄트머리에 그것을 놓았다. 다음은 소르니의 편지.

    [오웬 메이지의 입양 절차가 끝났단다. 이제 오웬 메이지 체르핀이야. 만나서 전해 주고 싶었는데, 내가 좀 오래 머무를 거라 편지로 전해 주게 됐네. 돌아오면 연락해 줘. 보고 싶어.]

    짧은 편지라서 안도했다. 불필요한 내용이 가득했으면 분명 짜증 났을 텐데.

    벨리타가 대충 답장한 편지를 릴페트 자작에게 보낼 편지 위에 얹었다. 일이 산더미인데 편지를 확인하는 것도 바쁘다. 잭슨의 편지도 빠르게 읽어 보았다.

    [보고 싶어. 언제 와?]

    진짜 짧네. 거의 문자 메시지 수준이다. 벨리타가 감탄을 뱉었다. 이 정도 길이면 종이가 아까운 수준이 아닌가. 물론 짧아서 좋기는 하다.

    벨리타는 답장을 쓰기보다 직접 찾아가는 게 좋겠다는 판단을 내렸다.

    만다고를 받기도 했고 이번에 영지에서 담근 마늘장아찌가 아주 맛있게 만들어져서 전해주어야 했다. 전에 준 김치는 다 먹었으려나.

    소르니의 몫인 마늘장아찌도 남겨 두었으니 소르니가 찾아올 때 주면 되겠고.

    생각을 정리하며 벨리타가 밀린 일을 시작했다.

    중간에 과일과 차를 들고 온 하녀가 슬그머니 음식을 내려놓고 보내야 할 편지를 챙겨서 돌아갔다.

    이곳에 온 후부터 줄곧 감정 소모만 하고 지치는 나날만 이어졌는데 이제야 좀 사는 것 같다. 새로운 지식을 배우고, 활용하고, 벨리타만이 할 수 있는 일을 한다.

    벨리타는 오웬이 예전에 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새로운 인생이라고 생각하고 즐기면 되지 않느냐는 말.

    그때는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저주나 다름없다고 한탄만 했는데.

    벨리타는 인정하기로 했다. 이곳에서의 삶은 썩 나쁘지 않고 벨리타가 일구어낸 관계들도 좋았다. 늦은 나이에 시작하는 도전은 무섭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새롭고, 무서운 만큼 즐거우며 설렌다.

    꽃다운 나이의 몸은 쉽게 지치는 법이 없고, 말랑한 뇌는 지식을 빠르게 흡수했다. 이미 낡아 버려 잔뜩 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자극은 언제나 생소하고 두근거린다. 받아들일 여유가 되지 않아 도로 뱉어냈을 뿐이다. 진작 알았다면 더 재미있는 삶을 즐길 수 있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나이를 먹을수록 세상은 넓어지고, 넓은 만큼 보이는 것도 많아 매일 새로울 수 있다는 걸 이제야 알았다.

    벨리타는 서류에 도장을 찍곤 기지개를 켰다. 하얀 햇볕이 넓게 트인 창문으로 넘실거려 포근하게 덮는다. 초여름, 기분 좋은 낮이었다.

    *

    마차가 정돈된 길을 내달렸다. 자잘하게 덜컹거리는 마차 속에서 타린은 조심스럽게 양손을 그러모았다. 고요한 적막 속에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끊임없이 고뇌하다가, 눈치를 보고 입을 닫기를 반복했다. 타린은 어쩌다 상황이 이렇게 됐는지 떠올렸다.

    갑작스럽게 방문한 소르니가 타린을 찾았고, 타린은 집무를 보고 있다가 뛰쳐나왔다. 소르니와의 데이트도 아직인데 흐트러진 꼴을 보이고야 만 타린은 수치스러워서 얼굴이 새빨개졌다.

    로엘린은 사교 활동을 하러 자리를 비웠고, 백작은 영지의 일을 확인하러 마을로 갔다. 따라서 저택에는 타린뿐이었다.

    소르니는 가는 길에 얼굴 보러 들렀을 뿐이고, 영지로 돌아가야 한다는 이야기를 했다. 타린은 솔직히 무척 기뻤다.

    백작님이 날 보러 와 주셨어! 연애의 시작인 걸까? 아냐, 너무 성급해하지 말자. 그렇지만, 백작님이 굳이 보러 와 주셨는데!

    기쁨을 못 이기고 차라도 마시고 가라는 제의를 했다가 가는 길 바쁘다며 거절당한 타린은 서운한 티를 숨기지 못하고 어색하게 웃었다.

    그를 본 소르니가 썩 귀여워하며 말하길.

    ‘그냥 얼굴만 봐도 충분했는데, 그리 서운해하시니……. 샤를로트 경, 저와 가시겠어요?’

    어떻게 거절할 수 있으랴. 가는 길 지옥이라도 따라갈 수 있다.

    타린은 주저 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그대로 납치당해 마차에 태워졌다.

    그리고 현재. 타린은 재치 있는 말을 건네기 위해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리는 중이었다. 소극적이고 진지하기만 한 타린은 재미라고는 눈 씻고 찾아봐도 없다는 특성이 있다. 그렇기에 소르니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 주어야 하는데 쉽지 않았다.

    바보 같은 나! 백작님을 웃게 해드려야 다음에도 만날 수 있잖아!

    타린의 속마음은 꽤 표정에 잘 드러나서, 즉위식에 관한 서류를 훑어보던 소르니가 타린을 보고 웃음을 터트리는 건 당연했다.

    소르니가 서류를 봉투 안에 잘 넣어놓고 턱을 괴었다.

    “제가 너무 일만 했나요? 섭섭하셨겠네요.”

    “아, 아니요. 아닙니다! 보는 것만으로도 재미있, 아니, 얼굴이 재밌……. 으으…….”

    왜 좋아하는 사람 앞에만 서면 바보가 되는 걸까. 더 듣기 좋은 말도 많은데, 얼굴이 재미있다니. 물론 아름다워서 보고만 있어도 웃음이 나고, 눈을 씻은 듯 개운해지기까지 하지만 너무 무례하지 않나.

    타린은 곱게 모은 손을 꽉 쥐고 붉어진 고개를 숙였다. 소르니가 웃음소리를 참았지만, 잇새로 새어 나왔다.

    부끄러워서 죽을 것만 같다. 타린은 달리는 마차에서 뛰어내리면 죽으려나, 따위를 생각하며 수치스러움에 몸부림쳤다.

    소르니가 웃음 탓에 갈라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름답다는 이야기는 들어 봤어도 재미있다는 이야기는 처음 들어 보네요. 그래서 그리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날 보셨나?”

    “……솔직히 말씀드리면, 네……. 맞습니다. 그, 치만 외모만 보고 좋아하는 건 아니에요! 진심입니다!”

    “알아요. 그냥 꽤…… 귀여워서 그랬어요.”

    귀엽다니. 타린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바짓단을 움켜쥐고 눈만 이리저리 굴린다.

    소르니는 턱을 괸 손을 틀어 자신의 얼굴을 감싸고 타린을 빤히 바라봤다.

    “경의 얼굴도 재미있네요. 매일 봐도 질릴 것 같지는 않아요.”

    “매, 매일이요?”

    프러포즈인가? 선 넘는 건가? 이럴 때만큼은 돌려 말하는 귀족 언어가 환멸스럽기까지 하다.

    열까지 오르는 얼굴 탓에 황급히 손으로 감싼 타린은 긴 속눈썹을 팔랑대며 푸른 눈을 반짝거렸다.

    덤덤한 듯 말한 소르니도 볼이 붉었다. 큼, 헛기침한 소르니가 창문 너머로 시선을 돌렸다.

    “하나씩 천천히 알아가려면 매일 보아도 부족하잖아요.”

    소극적이고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 한정적으로 멍청해지는 타린마저 알아들었다. 이거 연애하자는 뜻이다.

    타린이 멍하니 얼굴을 감싼 채 굳어 버리자, 소르니가 눈치를 살폈다.

    “……내가 첫 번째라면서요? 이제 와 싫으신가요?”

    반응이 없는 타린을 보며 거절당할까 봐 무서워하는 소르니에게 타린이 해 줄 수 있는 말은 하나였다.

    “아니요. 너무 좋습니다. 그럼 오늘부터 진지하게 만나는 건가요?”

    걱정하던 소르니의 얼굴이 환해졌다. 무의식적으로 입가에 웃음꽃이 피고 귀까지 붉게 물들었다.

    소르니는 자신의 밝은 표정도 인지하지 못하고 새침하게 고개를 돌렸다. 다리도 꼬고 꽤 오만한 태도를 보이려고 했지만, 얼굴 탓에 완전히 실패했다.

    “그러고 싶으시다면서요? 제가 언제나 우선이라고 하시니, 매번 거절하기도 미안하니까요. 어쩔 수 없죠.”

    말은 그렇게 해도 들떠 하는 게 타린의 눈에도 보였다. 타린은 소르니의 소문을 안다. 황후로 키워진 장기짝. 그 과정에서 애정을 받고 자랐을 리 만무하다. 그러니 타린의 애정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어떻게 되돌려줘야 하는지도 모른다. 그래도 타린은 괜찮았다.

    애정을 받고 베푸는 건 어렵지 않고 배우기도 쉬우니까. 하나씩 깨닫고 보면 어느새 마음을 나누어 주고 받아들이고 있을 거다.

    타린은 자신이 가르쳐 주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감히, 백작님에게 그럴 수야. 그저 곁에서 응원해 주고 혹여 지칠 때 옆을 지켜 주고 손을 잡아 주고 싶은 마음이다.

    자신도 사랑을 충분히 받아 오며 자랐지만, 완벽하지 않다. 부족하고 앞으로도 모자랄 것이다. 소르니와 함께 더 나은 사랑을 배우고 나누고 싶어졌다.

    타린이 밝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소르니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소르니가 화들짝 놀라 손을 뻗자, 타린이 소르니의 손을 잡아 손등에 입을 맞춘다. 소르니를 바라보는 푸른 눈이 맑은 하늘처럼, 빛이 반짝거리는 바다처럼 청량했다.

    타린은 소르니의 손을 소중하게 잡고 말했다.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체르핀 백작님. 앞으로도, 먼 미래에도 백작님을 사랑할 거예요. 제 우선은 언제나 백작님이고 변하지 않을 겁니다. 약속합니다.”

    약속은 쉽게 하는 게 아니라는 걸 안다. 몇 번 만나지 않은 사람에게 평생을 약속하는 허무맹랑한 행동이 어리석다는 것도 충분히 안다. 하지만 전혀 가볍지 않다. 절대 쉽게 변하는 감정이 아니다.

    타린은 고운 얼굴을 진지하게 굳히고 소르니의 손을 양손으로 감싸 쥐었다. 작고 여린 손. 평생을 아낄 사람의 손.

    “충분히 서로를 알아가고, 사랑해 봐요. 뜨겁지 않아도 좋아요. 천천히, 시간을 들여서 공들여 사랑하고 아낄게요. 백작님에게 제 사랑이 전해진다면, 제 감정을 신뢰할 수 있게 된다면 저를 사랑해 주세요. 독촉하지 않아요. 백작님의 속도에 맞출게요.”

    소르니의 손이 타린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와 얼굴을 감쌌다. 타린의 얼굴이 들린다.

    그 순간, 소르니가 고개를 숙여 타린의 볼에 입을 맞췄다. 입술이 닿은 곳에 불에 탄 듯 뜨겁다. 소르니의 얼굴과 타린의 얼굴, 둘 다 타오르는 불과 같았다.

    “네, 그래요. 그렇게 해요, 우리.”

    우리. 그 말 한마디가 얼마나 벅차오르던지. 소르니가 터지는 눈물을 참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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