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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이 쓴 로판 소설에 빙의되어버렸다-133화 (133/150)
  • 133화.

    오웬이 벨리타의 시선을 따라 산을 올려다봤다. 벨리타가 만다고를 재배하겠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벨리타의 정신상태를 의심했다. 찾기조차 쉽지 않다는 만다고를 키운다고? 그것도 대량으로?

    우스갯소리로 넘겼으나 진지하게 대화해 본 결과, 벨리타는 재배법을 확실히 알고 있었다.

    씨앗만 얻으면 되는 상황에서 오웬이 해결하겠다고 나섰다. 마법사로서 굉장히 들뜰 수밖에 없는 일이다. 평생 볼까 말까 한 만다고를 직접 연구하고 씨앗까지 만들어 낼 기회가 다시는 없을 거라고 장담할 수 있으니까.

    덕분에 오웬의 연구실에는 마법으로 보존된 만다고가 곱게 모셔져 있었다.

    예전이었으면 당장 연구실에 처박혀 있었겠지만, 지금은 장례식이 우선이다.

    오웬 자신도 놀라운 변화이기는 했다. 연구보다 사람 된 도리가 우선이라니. 오웬이 멀거니 서 있는 벨리타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정신을 차린 벨리타가 돌아가서 장례식 준비를 하자며 오웬의 로브를 당겼다.

    오늘, 조슈아의 장례식이 이뤄진다.

    조슈아의 영지에서 장례식을 치르려고 했지만, 새로운 영주가 기를 쓰며 거절했다.

    반역을 꾀한 자를 위해 장례를 치를 수 없는 건 물론이고, 묻어 줄 생각도 없다고. 범법이라 어쩔 수 없는 반응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섭섭하다.

    오웬의 도움으로 로틀 영지까지 다녀왔지만 조슈아의 물건들은 이미 버려지고 없었다. 부정 탄다며 죄다 태워 버렸다고 했다. 좀 일찍 올걸. 그럴 걸 그랬다.

    때문에 조슈아의 장례식과 묻을 장소는 파텔 영지가 되었다. 그래도 귀족이고 벨리타가 정을 주었던 아이인데 공동묘지에 묻을 수는 없어서, 벨리타가 집사장과 사람들의 만류를 무릅쓰고 가문 사람들의 묘지에 묻기로 했다.

    데이비드는 장례식을 준비하는 내내 우울해했다. 벨리타는 가장 바쁘게 움직였다. 장의사가 대부분을 해결한 덕에 많은 일을 할 필요는 없었지만, 마지막 확인은 벨리타가 마무리 지어야 했다.

    검은 드레스에 베일을 쓰고 하얀 국화 다발, 크라바트 장식과 그림책을 챙겼다. 맑은 소리의 종이 울린다. 벨리타가 다급하게 저택의 계단을 내려갔다.

    낮 세 시. 장례식의 시작이다.

    저택 뒤, 언덕의 가장 높은 곳 구석에는 파텔 가문의 개인 묘지가 있었는데, 이따금 정원사들이 정돈해 놓아서 잡초가 뒤덮거나 묘비가 더러워지지 않았다. 데이비드가 먼저 소르니와 오웬을 데리고 도착해 있었고, 가장 늦은 건 벨리타였다.

    장의사는 시체도 없는 관을 앞에 두고 절차대로 장례식을 진행했다. 신관 대신 장의사가 기도했고 짧은 연설을 했다.

    짧게 진행하자는 벨리타의 요구 때문에 장례식은 길지 않았다. 추모 연설도 없었다. 그저 각자 조슈아의 명복을 빌어주기로 했다.

    허무할 정도로 짧은 장례식이다.

    벨리타는 그저 가만히, 못 박힌 듯 서서 품에 안은 꽃다발만 힘주어 쥐었다. 화려한 관에 비해 내부는 초라했다.

    벨리타가 참았던 숨을 들이쉬었다.

    크고 화려한 관에 들어간 건 고작 크라바트 장식. 덩그러니 놓인 보석이다.

    기도하고, 짧게 연설하고 꽃과 흙을 던지고 묻는다.

    데이비드가 화려한 꽃다발에서 하나씩 꽃을 뽑아 던져 주었고, 오웬은 나름의 성의를 담아 꽃다발의 포장지를 풀어헤쳐 꽃을 쏟아부었다. 소르니는 꽃다발째로 던져 넣었다.

    벨리타가 꽃다발의 반을 꺼내 하나씩 흩뿌렸다. 한참을 채워도 턱없이 부족해서, 관은 황량했다.

    벨리타는 시간이 멈춘 것처럼 가만히 서 있었다. 조슈아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 것처럼 굴었던 데이비드는 거칠게 호흡하며 목을 놓아 울었고, 오웬은 침잠한 낯으로 무덤을 바라보았다. 소르니도 쓰게 웃으며 부채로 입을 가렸다. 삽으로 흙을 퍼담는 소리가 거슬렸다.

    착한 아이였는데. 정말 착해서 꼭 행복하길 바랐는데.

    선을 그으면 그대로 순응하고 돌아봐 주길 기다리던, 나를 위해 안간힘을 써 주던 아이였는데.

    처음 만났던 소설 속 캐릭터. 가장 들떠서 만난 주연.

    밀어내기도 했고 귀찮아하기도 했지만, 아끼지 않았던 건 아니다. 오히려 정을 주고 싶지 않았음에도 자꾸만 정이 가서 곤혹스럽기까지 했다.

    조슈아가 벨리타를 사랑했다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그 사랑은 신자와 다르지 않은 맹목적인 유의 것이어서, 벨리타는 답해 줄 수 없었다. 차라리 잭슨이나 소르니처럼 사랑을 갈구했다면 다른 결말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불쌍하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동정하지 않기로 했지만, 너무도 일찍 져버린 봄꽃이 안타까웠다.

    조슈아는 언덕에 핀 사랑스러운 들꽃 같았다. 온실 속에서 가꾸어지며 자란 꽃이 아닌, 궂은 겨울을 이겨내고 기어이 피어난 단단하고 작지만 강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이렇게 빨리 떠났을까. 한철 꽃이어서, 언덕에서 자란 들꽃이어서, 보호해 줄 정원사가 없어서.

    벨리타가 정원사가 되어 줄 수 있었다. 좋은 정원사가 되지는 못하겠지만, 적어도 쉽게 꺾이지 않도록 보호해 줄 수 있었는데.

    단단히 덮인 흙더미 위에 손을 얹었다. 기어코 착용하고 나온 팔찌가 햇볕을 받아 반짝거렸다. 반사된 빛이 눈이 부셔서, 벨리타는 속절없이 눈을 감았다.

    조슈아가 마음 편히 눈 감았길 바랐다.

    *

    조슈아의 장례식을 끝내고 모두를 돌려보냈다. 장의사도, 그의 일꾼들과 오웬, 소르니까지. 언덕에 벨리타와 데이비드만 남았다.

    벨리타는 반 이상이 빈 꽃다발을 내려놓고 품속에서 동화책을 꺼내 꽃다발 옆에 놓았다. 조슈아의 무덤 옆에 쭈그리고 앉아 맨손으로 흙을 퍼내기 시작했다. 마르고 보드라운 손에 날카로운 돌과 흙이 긁혀 생채기가 나도 벨리타는 쉼 없이 흙을 펐다.

    데이비드가 도우려고 소매를 걷었지만 벨리타가 만류했다.

    깊지도, 넓지도 않은 구멍에 동화책을 넣었다. 그리고 남은 국화를 모조리 쏟아부었다.

    벨리타를 따라 데이비드도 흙을 던져 주었다. 진짜 누님의 동화책을 묻을 줄은 몰랐던 터라, 꽃다발은 모조리 조슈아를 위해 사용되었다. 알았다면 아마 한 바구니를 쏟아부었겠지.

    빛바랜 동화책 위로 꽃이 흩어졌다. 벨리타가 바닥을 짚었다.

    “행복해라, 벨리타. 네가 힘들게 살았어도 마지막은 편하게 갔잖아.”

    기억 속에 잔류하는 어린 벨리타가 애지중지하던 동화책이었다. 아프지 않은 날마다 하녀를 붙잡고 읽어 달라고 채근했던 동화책.

    묻어 줄 수 있는 게 이것뿐이다. 벨리타가 흙을 한 움큼 쥐고 움직임을 멈췄다.

    국화 위로 물방울이 무수히 떨어졌다. 거칠어지는 호흡을 애써 정돈해 보려고 했지만 악문 잇새로 울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손가락 사이로 흙이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미안해. 미안하다……. 빼앗아서 미안해……. 네 사람을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해…….”

    욕심쟁이처럼 손안에 가득 쥐어도 모래처럼 흘러내린다. 몸 주인이 가족과 행복하길 바란 욕심, 서브 남자 주인공이 행복해지길 바란 욕심, 죽은 몸 주인을 두고 아직도 돌아가고 싶은 욕심이.

    결국, 손에 남은 건 아무것도 없다.

    데이비드는 이미 주저앉아서 통곡하고 있었다. 혼자 치르려고 했던 벨리타의 장례인데 데이비드를 부르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데이비드는 벨리타가 죽었다는 걸 몰랐던 터라, 억장이 무너졌다. 충격적이고 괴로울 거다. 아마 데이비드에게 자신이 벨리타를 죽였다는 이야기는 할 수 없겠지. 서럽게 우는 데이비드를 뒤로하고 벨리타가 우악스럽게 흙을 그러모아 구멍 위를 덮었다.

    제대로 된 무덤조차 갖지 못한 벨리타가 너무도 불쌍하고 미안했다. 장례식도 치르지 못하고 부모보다 먼저 떠난 아이가 안타까웠다. 아무도 죽음을 알아주지 않는 비통함과 살인자가 만든 조악한 무덤이 유일하다는 사실도 가긍해서.

    벨리타가 목을 놓아 울었다.

    행복해질 수 있었는데. 조금만 더 버텼다면 건강을 되찾고 넓은 세상을 배워 가며 찬란하게 청춘을 피울 수 있었을 것이다. 벨리타가 빼앗지만 않았어도.

    “……불쌍한 것.”

    조금이라도 반항했어야지. 살고 싶다고 발악했어야지. 자신을 지키려고 발버둥 쳤어야지. 가족들이 자기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는 알고 갔어야지.

    미련하게.

    미련한 건 벨리타다. 몸의 주인은 너무도 쉽게 자신을 포기했다. 떠난 사람을 붙잡고 놓아주지 못하는 건 벨리타였다.

    그러니 딱 지금까지만.

    진짜 벨리타에게는 우습겠지만 포기해 준 몸으로 행복하게 살아 보려고 한다.

    사랑하는 사람과 일상을 보내고, 아이들에게 세상이 얼마나 넓고 아름다운지 알려주려고 한다. 좋은 사람들과 좋은 시간을 보내고 작은 행복에도 기뻐하며 네가 준 새 삶을 누려 보려고 해.

    감히 응원해 달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통보일 뿐이다. 그러겠다는 다짐이었다.

    죽은 사람은 들을 수도, 볼 수도 없으니까. 오로지 자기만족.

    힘을 주어 덮은 흙을 두드렸다. 텅 빈 꽃다발 종이가 바람을 타고 저만치로 굴러 사라졌다.

    한참을 울고 저택으로 돌아왔다. 퉁퉁 부은 눈을 한 채 흙으로 엉망이 된 몸을 이끌고 비척거리며 안으로 들어섰다. 그래도 감정을 쏟아내고 나니 조금은 속이 후련했다.

    데이비드는 너무 울어 눈이 사라져 있었다. 사라진 눈으로 용케 저택까지 돌아온 둘을 반기는 건 오웬과 소르니, 엘라와 저택의 사람들이다.

    흙투성이인 둘을 본 사람들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걱정했다. 벨리타의 옆에 엘라가 바짝 붙어 손을 잡아주었다.

    “아가씨, 남작님의 장례식이 그렇게 슬프셨어요? 저희 앞에서는 눈물 한 번 안 흘리시더니.”

    사람들 앞이라고 울지 않았던 것으로 짐작한 엘라가 그래도 속이 여린 우리 아가씨, 내가 보듬어 주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사람들이 한마디씩 걱정의 말을 건네고 떠난다. 벨리타가 코를 훌쩍거렸다.

    소르니가 기겁해서 벨리타의 뺨을 감싸고 눈가를 문질렀다. 다급한 손길임에도 조심스러웠다.

    “어떡해. 눈이 다 부었잖아. 불어터졌네! 너, 가서 목욕 준비하렴.”

    “예? 저는 아가씨 옆에 있을 건데요?”

    “안 가?”

    서슬 퍼렇게 노려보는 소르니 때문에 엘라가 꿍얼거리며 돌아섰다. 공녀였을 때도 말대답을 할 수 없었지만 백작이 된 지금도 말대답을 할 수 없다. 여전히 엘라보다 작위가 높아서. 엘라는 서러워하며 목욕물을 받으러 떠났다.

    벨리타의 몰골을 훑어본 소르니가 자신이 다 슬프다는 얼굴을 했다. 곧장 벨리타를 끌어안는다. 더러운 것이라면 질색하고, 깔끔 떨기로는 세계 제일인 소르니가 흙투성이 벨리타를 안은 채 등을 토닥거렸다.

    “벨리타, 괜찮아. 얼마나 슬펐니. 실컷 운만큼 로틀 남작도 감동했을 거야.”

    “그래, 벨리타. 로틀 남작도 만족하고 떠났을걸.”

    오웬이 마법으로 벨리타의 상태를 깔끔하게 돌려주었다. 푸른빛이 반짝거렸다가 사그라든다.

    애인이 위로해 줄 시간이라며 마법으로 벨리타와 소르니를 떨어트린 오웬이 벨리타의 팔을 잡아끌었다. 벨리타가 맥없이 오웬의 품에 가두어진다.

    단단한 팔이 어깨를 감고 뒷머리를 받친다. 처박은 가슴팍에서 희미하게 심장 뛰는 소리가 들렸다. 벨리타가 눈을 감고 오웬의 심장 부근에 볼을 기댔다.

    “잘 보내줬어?”

    “……응.”

    벨리타를 다시 내놓으라며 팔을 뻗는 소르니를 피해 물러난 오웬이 능청스럽게 웃었다.

    그리고 고개를 숙여 벨리타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몸 주인도 만족하고 갔을 거야.”

    누구도 들을 수 없을 정도로 작은 말이어서, 벨리타만 들었다. 오웬에게 말도 해 주지 않았는데 어떻게 눈치챈 건지. 간질거리는 목소리가 다정하게 속삭이자 정말 그렇게 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벨리타가 미약하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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