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딸이 쓴 로판 소설에 빙의되어버렸다-132화 (132/150)

132화.

타인에게 애정을 받는다는 감각 자체가 생소했다. 손끝이 오므라들고 심장이 힘차게 움직인다. 목 아래 언저리가 울렁울렁거리며 뒤통수에 오싹한 소름이 돋는 감각은 전장에서 적의 목을 베었을 때와는 다른 유의 것이었다.

노타에게서도 받았던 이 감각이 낯설고 무서워서, 절벽에서 맨몸으로 뛰어내리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 정도로 애정을 받아 본 적 없는 잭슨이지만, 우정과 사랑을 구분하지 못하는 바보는 아니었다. 노타와 달리 벨리타를 향한 더 질척거리고 집요한 이 감정은, 분명한 사랑이다.

하지만 미움받고 싶지 않다.

옆에서 도와주겠다고, 함께 나아가자는 벨라타에게 결혼을 들이밀 정도로 눈치가 없는 편이 아니다. 또 선을 넘으면 화내고 떠날 거니까. 이번에는 분명 떠나버릴 테니까.

잭슨은 끓어오르는 충동을 억누르고 벨리타의 뺨에 자신의 뺨을 기대어 문질렀다. 말랑한 볼이 맞대어져 눌린다.

사람의 욕심이란 끝도 없어서 벨리타의 애정이 꾸덕꾸덕한 덩어리 같은 자신의 감정처럼 변하길 바란다. 그럼에도 참는 법은 아주 잘 알고 있으니까. 벨리타가 기회를 내줄 때까지 웅크리고 숨기며 때를 기다릴 수 있다.

“행복해져. 아가, 잭슨아. 나를 뺀 나머지들도 사랑해 봐. 네 주변을 행복으로 가득 채워. 질식해도 좋을 만큼, 아주 가득.”

“……응. 그러겠다.”

“착하다, 잭슨. 착해.”

다정하게 속삭이는 칭찬이 좋다. 잭슨은 벨리타의 뺨에 입술을 눌렀다. 벨리타가 기겁하며 밀어낸다.

“이런 거 그만해. 나 애인 있다니까 그러네.”

“친구끼리 이런 것도 못하나?”

순진한 척, 눈을 동그랗게 뜨고 끔뻑거린다. 정말 친구끼리 이러면 안 되느냐는 듯,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로 고개를 기울였다.

벨리타는 잭슨이 정말 무지해서 한 물음인지, 알고 한 짓인지 가늠해 보았다.

“안 돼.”

“왜 안 되는데?”

“안 되니까.”

“그러니까 왜?”

다섯 살짜리 어린애도 아니고. 벨리타가 눈을 가늘게 뜨고 잭슨의 뺨을 밀어냈다. 미는 대로 얌전히 얼굴을 뒤로 내뺐다.

“이런 건 애인 사이에서나 하는 거야. 우리는 친구잖아.”

“여인들끼리 곧잘 하던데.”

할 말이 없어진다. 황궁에서 하녀들이 장난치는 걸 보았던 거겠지만, 아마 연애질이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대체 어느 친구랑 볼을 빨면서 논단 말인가.

벨리타는 현실에 있는 친구와 이러는 상상을 했다가 진저리를 쳤다.

“걔네는 걔네고. 난 싫어.”

“……여태까지는 허락해 줬으면서…….”

그건 그렇다. 여태 볼과 입을 내주고 허벅지에 앉아 있기까지 하니 이제 와 거절하기도 모호하기는 했다. 어째 잭슨에게 휘둘리는 기분이 들지만.

벨리타는 진지하게 인상을 찌푸리며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조금만 해. 내가 그만하라고 하면 그만하는 거야. 알았어?”

“알겠다. 그런데 벨리타, 근래에 납치 사건이 있으니 조심해라. 수도만 나가도 안전해지니, 다른 영애들은 수도에서 떠나더군. 너도 잠시 영지로 돌아가 있는 건 어떤가?”

벨리타도 들었던 소문이다. 잭슨이 벨리타의 뺨을 조심스럽게 감쌌다. 굳은살이 느껴졌다. 거친 손이 벨리타의 눈가를 훑고 이마를 쓸어낸 뒤, 귓바퀴를 만지작거렸다.

“장례식이 있어서 가기는 가야겠는데……. 오래 있지는 않을걸? 무르펜에서 할 일도 많고.”

“장례식?”

“전에 편지로 말했잖아. 조슈아 말이야.”

조슈아? 누구인지 모르겠어서 고개를 까딱거렸다가, 로틀 남작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리자마자 인상을 찌푸린다.

다정하게 이름 부르지 마. 잭슨의 칭얼거림에 벨리타는 어허, 하고 으름장을 놓았다. 잭슨이 입을 다문다.

“네가 오기도 좀…… 그러니까. 며칠 있다가 올게.”

직접 목을 벤 당사자가 장례식에 찾아가면 그 꼴도 우스울 터다. 바쁜 일정에 며칠이나 자리를 비울 수도 없던 터라, 잭슨은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할 이야기도 끝났고 잭슨의 시간을 빼앗기도 미안해진 벨리타가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자 잭슨이 황급하게 벨리타를 붙잡았다. 허리가 붙들려 소파에 곤두박질친다.

머리카락이 소파 위로 흐트러지고 뒤통수가 얼얼하다. 벨리타가 인상을 찌푸리며 눈을 감았다가 뜨니, 잭슨이 양팔로 벨리타를 가두어 둔 채 내려다보고 있었다. 방금까지 잘 이야기하다가 또 이렇게 되나, 벨리타가 차게 식어가는 낯으로 잭슨을 바라보았다.

잭슨의 손이 소파의 가죽을 긁었다가 주먹을 쥔다.

“줄 게 있다. 가져가.”

저번에는 조슈아의 상단이었는데, 이번에는 또 어떤 선물로 놀라게 하려고 그러나. 벨리타가 잭슨의 가슴팍에 손을 얹고 천천히 밀었다. 잭슨이 주춤했다가 뒤로 물러났다.

곱게 물러나 준 잭슨 덕에 상체를 일으켜 앉은 벨리타가 흐트러진 머리를 정돈했다. 그사이 잭슨이 노타를 부른다. 밖에 서 있던 노타가 목소리를 듣고 바로 문을 열었다. 눈가가 촉촉하다. 둘의 대화를 들었던 모양이다.

“선물로 받았던 만다고, 남아 있나?”

“그럼요. 폐하 술안주로 하려고 손도 안 댔는걸요.”

“그걸 술안주로 한다고? 미쳤나? 됐으니 술안주로는 다른 거로 준비해.”

“그럼 이번엔 제가 좋아하는 거로 드셔 보실래요?”

마음대로 해라. 잭슨이 손을 휘저으며 만다고를 가져오라고 지시했다. 노타가 말갛게 웃으며 문을 닫았다.

가만히 지켜보던 벨리타가 노타가 나간 문과 잭슨을 번갈아 돌아봤다. 잭슨이 왜 그러냐는 듯 눈썹을 까딱거린다.

“둘이 뭐야? 언제 그렇게 친해졌어? 둘이 술도 마셔?”

“……그렇게 됐다.”

만다고가 뭔지도 모르지만 귀한 건 알겠고, 무엇보다 잭슨에게 친구가 생겼다는 사실이 무척이나 달가웠다.

벨리타가 잭슨의 손을 덥석 잡아 감쌌다. 빛나는 벨리타의 눈을 본 잭슨은 숨을 들이켜고 어깨를 떨었다.

“왜, 그렇게 보는 거야.”

“걱정 안 해도 되겠네. 언제 친해진 거야? 응?”

노타에게 그리 좋은 감정이 있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애가 싹싹하고 서글서글하니 사람 됨됨이는 좋아 보였다. 그런 아이가 잭슨과 친구를 해 준다면 벨리타로서는 기쁜 일이다.

잭슨은 누구와 친해졌다는 사실 하나로 신이 난 벨리타가 되레 신기했다. 왜 남의 일인데 자기 일처럼 기뻐하는지,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캐묻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썩 나쁜 기분은 아니어서 잭슨은 노타와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다.

감정은 쏙 빼놓고, 있었던 일만을 털어놓았더니 벨리타의 입꼬리가 하늘로 높게 치솟았다.

“재밌었겠네.”

재미있었던가? 그랬던 것 같기도 하다. 울다가 웃었더니 엉덩이에 털 난다는 소리를 듣고 열이 받기는 했지만, 그리 나쁜 기억은 아니었다.

잭슨이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벨리타가 말갛게 웃으며 잭슨의 손을 고쳐 잡았다.

“네가 좋았으면 된 거야. 편하고 즐거웠으면 충분해.”

그런 걸까. 잭슨이 코끝이 미어지는 기분을 느끼며 잡힌 손을 틀어 깍지를 꼈다. 순간 노타가 들어왔다.

“마저 하던 거 하실……래요? 나가드릴게요.”

“아뇨, 아니요. 들어오세요.”

뭔 오해를 하는 건지 너무 잘 알아서, 벨리타는 잭슨과 잡은 손을 빼고 소파 끄트머리에 앉았다. 잭슨이 서운해하는 눈치였지만 오해받고 싶지는 않다.

노타는 작은 상자를 들고 와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붉은 상자의 뚜껑이 열린다.

“만다고다. 만병통치약이지. 기력을 좋게 하고 체력을 늘려 주는 효과가 있다.”

잔디 같은 초록 잎들에 둘러싸인 물체를 바라봤다. 벨리타는 홀린 듯 머릿속에 떠오르는 단어를 뱉었다.

“이거 산삼이잖아.”

잭슨의 편지와 함께 받았던 삼이다. 다른 말도 없이 대뜸 오기도 했고, 너무 작아서 먹지도 못했는데, 이번엔 훨씬 컸다. 잊으려야 잊을 수가 없다. 키운다고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시부모의 시중을 들어가며 자는 애 둘러업고 재배했다. 이곳에서 지긋지긋한 산삼을 보게 될 줄이야.

벨리타의 말을 들은 잭슨은 눈을 가늘게 떴다. 벨리타의 세상에서도 있는 보약인 모양이다. 잭슨은 칭찬 듣고 싶은 마음에, 생색을 내보기로 했다. 크흠, 낮게 헛기침을 한다.

“돈 주고도 구하지 못할 약재다. 나보다는 네가 필요할 것 같아서.”

“나 주는 거야? 너 안 먹고?”

아들 취급 하지 않기로 했지만, 완전 효자처럼 굴잖아.

벨리타가 상자를 들어 만다고를 살펴봤다. 흠집이 조금 나기는 했지만, 상태가 나쁘지는 않다. 받아도 될는지 모르겠지만 벨리타는 받은 선물을 거절하는 법이 없다. 주는 건 거절하는 게 아니다.

상자의 뚜껑을 곱게 닫고 품에 끌어안은 벨리타가 해맑게 웃었다.

“고마워. 잘 먹을게. 챙겨 줘서 기뻐.”

감사 인사 하나만으로도 잭슨은 기분이 좋아졌다. 벨리타여서 그런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더 베풀어 주고 싶은 마음이 든다.

벨리타는 잭슨의 머리를 쓰다듬어 준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멀뚱히 서 있던 노타가 벨리타에게 다가갔다.

“또 올게. 밥 잘 챙겨 먹고 잠도 푹 자고, 무리하지 마.”

“……응. 또 와.”

몽글몽글, 가슴 안쪽에서 꽃이 피는 감각이다. 가슴을 쥐면 으스러질 것 같아서 애먼 소파만 긁었다.

잭슨이 소파를 그러쥔 채, 벨리타를 향해 미소 지었다. 벨리타도 마주 웃는다.

집무실을 나서는 벨리타를 뒤따르려던 노타가 휙, 고개를 돌려 잭슨을 보았다. 진지하게 굳은 얼굴인 탓에 잭슨도 덩달아 진지해졌다.

“오늘 술안주는 감바스로 하시죠. 그거 진짜 맛있거든요.”

“……알았으니 꺼져.”

“넵!”

경쾌한 대답과 함께 노타가 집무실을 나갔다. 잭슨은 맥없이 소파에 드러누워 울렁거리는 가슴께를 손바닥으로 조심스럽게 쓸어내렸다. 울렁울렁. 배운 것들이 너무 많아서,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그런 잭슨을 뒤로하고 벨리타는 상자를 소중하게 끌어안은 채 복도를 걸었다. 노타가 눈치를 보며 뒤를 따라온다. 워낙 차가운 태도를 보였던 벨리타였기에 노타도 쉽게 말을 걸지 못했다. 그러다가 애꿎은 천장을 노려보고 창문 너머를 흘겨보다 자리에 멈추어 기다리고 있던 벨리타와 부딪힐 뻔했다.

“……영애?”

“잭슨이랑 친구 했다면서요?”

“아, 뭐, 음, 따지자면 친구……이기는 하죠?”

주제를 알라고 하려나. 무슨 음습한 꾀가 있어서 잭슨에게 친한 척하려고 하냐고 몰아세울 수도 있다.

노타는 마른침을 삼키며 긴장했다. 벨리타는 상자의 모서리를 손톱으로 갉작거리다가 옅게 미소 지었다.

“고마워요. 잭슨이 같이 술 마셔 줘서 좋았다고 하더라고요. 재밌었대요.”

“……정말요? 폐하가요?”

“속고만 사셨나. 잭슨이 잘 모르는 게 많지만, 잘 부탁해요. 브루노 경이라면 분명 좋은 친구가 돼 주실 거라고 생각해요.”

새침하게 등을 돌린 벨리타의 발걸음이 가벼웠다. 잭슨과 가장 가까운 사이의 사람이 인정해 준 기분은 날아갈 듯 기뻐서. 노타가 벨리타의 뒤를 바짝 쫓아 걸었다.

*

기분이 늘어진다. 억지로 몸을 움직여도 바닥을 쳤다.

소르니의 소개대로 장의사는 알아서 장례식을 준비했다. 절차, 관 디자인, 관을 넣을 구멍을 파놓는 일까지.

잭슨과 만나고 난 후, 이틀 뒤에 바로 영지로 내려왔다. 장례식 날짜보다 하루 일찍 도착한 벨리타는 하루를 푹 쉬고 당일 아침, 장의사가 파놓은 구멍을 보았다. 깊고 넓다. 벨리타는 괜히 두려워졌다.

저 멀리서 오웬이 마법으로 날아 산에서 내려왔다. 사뿐히 딛는 발소리에 벨리타가 오웬을 돌아봤다. 단출한 셔츠 차림의 오웬이 더러워진 로브를 털어내고 있었다.

“벨리타, 산을 확인해 봤는데 산의 기울기도 그렇고 상태도 썩 괜찮아.”

“그래?”

벨리타가 저택 너머에 있는 산을 올려다봤다.

잭슨이 준 만다고. 이곳에서의 산삼은 재배법도 발견되지 않았고 굉장히 찾기조차 어려웠다. 부르는 게 값이고, 발견한 사람도 아쉬워서 팔지도 않는다. 귀하다 못해 희귀한 만병통치약이다.

그리고 벨리타는 시댁에서 삼을 키웠다. 베테랑은 아니지만 삼을 재배할 능력은 된다. 시중에서는 팔지도 않는 삼을 재배해서 소이트 상단에서 판매한다면 평생을 놀고먹어도 된다.

잭슨이 몸을 챙기라며 준 만다고지만, 돈의 유혹을 뿌리칠 수는 없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