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딸이 쓴 로판 소설에 빙의되어버렸다-131화 (131/150)

131화.

행복은 거창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갓 내린 차 향이 좋아서 행복해질 수 있고,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창문 너머로 내리쬐는 햇볕에 행복해질 수 있다.

벨리타는 나른하게 늘어지는 오후 두 시에 먹는 단 디저트에 행복해졌고, 목욕할 때 물에 풀어놓는 향유의 향에 행복해졌다.

작고 사소한 것으로 쉽게 만족을 느끼게 되는 게 사람이다.

여태 처한 상황에 벅차고 힘겨워서 둔감해졌을 뿐이다. 궁지에 몰리면 여유는 물론이고 주위를 둘러볼 시야조차 좁아지니까.

그래서 자신을 기쁘게 해 줄 무언가를 찾지 못하는 거다.

마음가짐 하나로 이다지도 기분이 좋아질 수 있는데.

좁은 창문에서 흘러들어오는 햇볕과 퀴퀴한 먼지 냄새, 붉은 기가 도는 둥근 머리들의 애정이 기쁘다. 벨리타는 지금 이 순간조차도 꽤 벅차올랐다.

지나온 시간 속 실수들도, 잘못들도 많지만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한 발돋움이다. 그러니 괜찮다. 더 잘하면 된다. 불행이 지나면 행복이 찾아온다. 인생은 굽이진 언덕길이니까. 가파른 언덕이어도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며 걸으면 곱게 핀 꽃과 푸른 하늘, 힘겹게 올라왔던 길이 보일 테니까. 두려워할 필요 없다.

벨리타가 옅은 미소를 지으며 오웬과 맞잡은 손을 들었다.

힘든 시간 곁을 지켜 준 사람을, 이곳에서의 행복을 알려 준 사람을 가족에게 소개해 주고 싶어졌다.

테이블 아래에 감춰져 있던 손을 본 라빌과 테일러의 눈이 두드러지게 커졌다.

“저 연애해요. 여기 이 사람이랑요.”

얼떨결에 손이 들린 오웬의 눈도 커졌다. 물론 그렇고 그런 사이가 되었다고 인사를 드릴 겸 찾아온 건 맞는데, 너무 갑작스럽지 않나. 곱게 단장해서 오길 정말 잘했다.

오웬이 들린 손을 내리고 순식간에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다.

“오웬 메이지 체르핀입니다. 어머님, 아버님, 잘 지내셨어요?”

라빌과 테일러도 어렴풋이 눈치는 채고 있었다. 너무 붙어 다녔으니까.

테일러가 어색하게 미소 지으며 오웬의 성에 의문을 가지고 질문했다.

오웬은 당황하지 않고 테일러와 라빌이 갇혀 있는 동안 무슨 일이 있었고 정세가 어떻게 흐르고 있는지 전부 설명해 준 뒤, 여차여차해서 소르니의 양아들이 되었다고 말했다. 아직 서류가 통과되지 않아서 법적인 가족은 아니지만, 곧 그렇게 될 테니까.

라빌이 무표정한 얼굴로 데이비드와 잡은 손을 고쳐 쥐더니, 떨리는 목소리로 질문을 건넸다.

“그럼, 둘이 결혼……할 거니?”

“네, 허락만 해 주신다면.”

“아직 안 정했어요.”

오웬이 냉큼 허락만 해 준다면 결혼식을 올리고 싶다는 말을 하자마자, 벨리타가 치고 들어왔다.

콧물을 훌쩍거리며 붉어진 눈썹을 문지른 벨리타가 덤덤하게 대꾸하니 오웬이 눈에 띄게 시무룩해졌다.

백작 영식이 된 오웬을 두고 보고 사위로 결정하려고 했던 라빌과 테일러가 오웬을 위로했다. 애인의 부모에게 위로받는 처지가 된 오웬은 정말 서글퍼졌다.

그러건 말건, 벨리타는 오웬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말갛게 웃었다.

“하고 싶은 게 많거든요.”

사위보다 딸이 더 소중한 둘이 할 수 있는 건 오웬을 위로해 주는 것뿐이다. 우리 딸이 하고 싶은 게 많다는데 어쩌겠니. 기다리면 결혼해 주겠지.

가만히 지켜보던 데이비드가 벨리타를 따라 미소 지었다. 예전에 나누었던 대화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자신은 하고 싶은 게 있으니 가주가 되라고 했던 그 대화. 그리 말해 놓고선 정작 무엇을 할지 정하지 못했었는데, 지금은 정해졌나 보다.

다행이다. 데이비드는 자신이 행복해진 만큼 벨리타도 행복해지길 바랐다.

함께 도란도란 근황과 미래 계획에 대해 떠들고 나니 시간이 순식간에 훌쩍 흘렀다. 벨리타가 챙겨 온 돈주머니를 하나씩 쥐여 주었다. 라빌과 테일러가 난감해하며 돈을 거절하려고 했다. 벨리타가 얼굴을 굳히고 억지로 품에 돈주머니를 몰아넣는다.

“저 돈 진짜 많아요. 이 정도는 용돈도 안 되니까 받으세요. 고생하는 모습 보고 싶지 않단 말이에요.”

딸의 걱정을 어떻게 거절할 수 있을까. 라빌과 테일러는 두둑한 돈주머니를 받고 첨탑의 기사들에게 끌려 올라갔다.

벨리타와 일행은 그들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지켜보고 나서야 첨탑을 빠져나왔다.

벨리타가 개운한 낯으로 기지개를 켰다.

“데이비드야, 가주된 거 축하해.”

“……네.”

기쁘면서도 울적해지는 기분 탓에 데이비드는 미묘한 태도로 대답했다. 대기하고 있던 마차에 데이비드가 올라탔다. 에스코트하려고 데이비드가 손을 뻗으니, 벨리타가 손사래를 치며 거절했다.

“잭슨 좀 만났다가 가려고. 먼저 가.”

“그 새, 아니, 폐하를 왜 만나고 가십니까? 만날 필요 없잖습니까.”

“해 줄 말이 있어서. 마차는 돌려보내 줘. 오웬, 너도 먼저 가.”

뒤에 서 있던 오웬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벨리타를 믿지만, 잭슨은 믿지 못하는 탓이다. 탐탁지 않은 반응이 돌아오자, 벨리타는 오웬의 등을 떠밀어 마차 안으로 몰아넣었다.

“여차하면 네가 알려 준 폭발 마법 쓸게. 걱정 하덜덜 마.”

“진짜지? 약속했다? 폐하가 이상한 짓 하면 바로 그냥 터트려 버리기다?”

걱정하지 마. 굳건한 태도 덕에 결국 마차 안에 처박힌 오웬이 우는 시늉을 했다. 마차는 벨리타를 두고 바로 출발했다.

마차가 사라지는 걸 확인한 후, 벨리타는 고개를 치켜들었다. 여름 하늘. 특유의 말갛고 푸른 하늘이다.

이번에야말로 잭슨에게 휘둘리지 않고 전하고 싶은 말을 다 전해야겠다. 벨리타가 으랏차차! 소리치며 팔을 뻗고는 이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힘차게 황제 궁으로 걸어갔다.

갑작스러운 방문에 기사들이 막아섰지만, 잭슨의 언질 덕에 벨리타인 것을 확인하자마자 바로 집무실로 안내해 줬다.

노크 몇 번 두드린 후, 바로 문을 열었다. 놀란 잭슨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하던 일도 팽개치고 벨리타에게 달려가 덥석 끌어안았다. 벨리타는 얌전히 품을 내어 줬다.

“첨탑에 갔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날 찾아올 줄은 몰랐는데.”

“해 줄 말이 있어서 왔어. 시간 돼?”

잭슨은 고개를 돌려 쌓인 서류를 봤다. 그러고는 벨리타를 번쩍 안아 들고는 허벅지 위에 앉혔다. 소파가 커서 앉을 공간이 많은데도 잭슨은 집요하게 벨리타를 자신의 위에 앉힌다.

“응. 시간 많다.”

“다행이네. 다른 게 아니고, 결혼 얘기 때문에.”

“시간 없어졌다.”

달갑지 않은 주제였다. 잭슨이 말을 바꾸자 벨리타가 씁, 잭슨의 어깨를 두드렸다.

“나 애인 있어. 그래서 너랑 결혼 못 해.”

청천벽력이다. 잭슨의 얼굴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애인이라면 당연히 그 변태 마법사겠지. 진작에 죽였어야 했는데. 굳이 말하지 않아도 표정으로 모든 생각이 읽혔다.

벨리타가 잭슨의 머리를 힘주어 마구 헝클어트렸다. 머리를 내어 준 잭슨이 당황하며 숙였던 고개를 든다. 벨리타가 잭슨의 어깨를 감싸고 웃음을 지었다.

“우리 친구 하기로 했잖아. 결혼보다 더 좋은 거. 잊지 않았지?”

“친구 하자고 해 놓고 챙겨 주지도 않았지 않나.”

“너도 알잖아, 나 힘들었던 거. 나 챙길 여력도 없었어.”

퉁명스럽게 입술을 삐죽, 내민 잭슨이 입술을 도로 집어넣었다. 벨리타가 힘들어했던 건 안다. 원인 중 일부가 자신인 것도 인지하고 있다. 탓을 하는 줄 알았지만, 태도를 보니 그렇지는 않아 보였다.

무슨 말이 나올까? 조금 긴장이 됐다.

잭슨이 마른침을 삼키는 동안, 벨리타는 엉망이 된 잭슨의 머리를 다시 정돈했다. 낭랑한 목소리가 이어진다.

“그래도 이제는 좀 괜찮아져서, 친구 관계에 신경 써 보려고 해. 잭슨, 아가야. 난 이미 죽은 아들이 있어. 그게 너는 아니지. 너는 너야. 난 내 아들이 아닌 잭슨 너와 친해지고 싶어.”

아들처럼 대해 주겠다고 했으면서, 말을 바꾸다니. 잭슨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벨리타는 평온한 낯으로 잭슨의 미간을 손가락으로 둥글게 문질렀다.

잭슨은 벨리타 특유의 투박하면서도 다정한 손길을 좋아했기에 속절없이 굳은 표정이 풀어졌다.

“난 너 자체를 볼 거야. 내 아들이 아닌 잭슨 네가 뭘 좋아하는지, 무엇에 흥미가 있고 즐거워하는지 알아가고 싶어.”

잭슨은 무심코 벨리타와 보냈던 시간을 떠올렸다. 벨리타의 등을 받친 손이 여린 어깨를 감쌌다가 놓기를 반복했다. 멍한 시선이 품에 안긴 여인만을 향한다. 시야에 담기는 이 사람은 한참이나 작고 가녀리면서도 당차고 다정하다. 강한 사람이다. 자신이 무너트리려고 애써도 결국은 굳건하게 버티고야 마는 사람. 그래서 잭슨이 부러져 기대게 된다.

벨리타는 잭슨의 앞머리를 쓸어 넘기고 뺨을 가득 쥐었다. 가느다란 손가락이 말랑한 살을 천천히 주물렀다.

“같이 알아가자. 서로에 대해서. 그리고 더 넓은 세상을 보는 거야. 많은 걸 사랑하고 싫어도 해 보면서 네 안을 채웠으면 좋겠어. 네가 정의하는 좋아하는 색, 싫어하는 날씨, 그저 그런 음식. 그런 게 알고 싶어.”

완벽한 어른은 아니지만 좋은 사람은 되어 주길 바란다. 덜 자란 아이의 옆에서 오늘의 세상은 어떤지, 내일의 세상은 어떠길 바라는지 물어보고 싶다.

벨리타가 천천히 일그러지는 잭슨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잭슨에게 필요한 건 어머니가 아니다. 곁을 지켜주고 올바른 길로 나아가게 도와주는 사람이 필요한 거다.

굽이치는 언덕을 오르는 게 힘겨워 잠시 쉬고 싶을 때, 어깨를 빌려줄 수 있는 사람. 함께 풍경을 둘러보며 감상을 나눌 수 있는 친구.

그런 관계가 되고 싶어졌다. 결혼만이 정답이 아니고, 상실한 사람을 빗대어 의지하는 관계도 옳은 길이 아니기에.

잭슨은 벨리타의 어깨를 힘주어 잡은 채 어느새 울 것 같은 얼굴을 하고 흐트러지는 숨을 고르고 있었다.

“난 좋은 어른은 아니야. 하지만 함께 나아가다 보면 그 비슷한 건 될 수 있을 것 같아. 아가, 나는 궁금해. 네가 어떤 미래를 만들어갈지도, 너만의 세계는 어떻게 이루어질지도. 너무 기대돼서 설레기까지 해.”

너도 그래? 덧붙여 속삭이는 말에, 잭슨은 입술을 물었다.

벨리타만 존재했던 세상이었다. 영원히 그러리라고 생각했다. 그런 줄 알았는데, 노타가 견고하게 쌓은 벽을 엎고 들어섰다. 엎어진 벽 위로 다른 것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연어를 좋아하는 줄도 몰랐고 술에 약한 줄도 몰랐다. 하나를 들이니 우르르, 파도처럼 밀려왔다.

허물어진 벽을 다시 세우지도 못하게, 채워진다.

시야가 흐려졌다가 이내 선명해졌다. 잭슨은 고개를 들어 집무실을 보았다. 볕이 들어 화사하고 약간의 종이 냄새가 났으며 금으로 치장된 장식들이 화려했다. 이런 곳이었던가. 종일 틀어박혀 있던 곳이 이렇게나 깔끔하고 화려했던가.

벽지의 색, 카펫의 색과 책장의 색, 갖가지 색들이 넘쳐서 눈이 시리다.

벨리타는 팔을 넓게 뻗어 잭슨을 안았다. 잭슨이 상체를 웅크리고 눈물을 삼켰다. 넓은 등이 아이의 것처럼 작기만 해서, 벨리타는 품을 수 있었다.

“같이 성장하자. 자라고 또 자라서, 나중에는 네 안을 얼마나 가득 채웠는지 자랑해 줘. 넌 착한 아이니까, 네가 사랑하게 될 것들도 분명 아름다울 거야.”

“다 못 채우게 되면, 실망할 텐가?”

축축하게 젖은 목소리가 낮았다. 불행을 배운 아이는 걱정을 깨우친다. 벨리타는 잭슨에게 기대하는 법을 가르쳐 주고 싶어서. 등을 토닥이며 잭슨의 어깨에 뺨을 기댔다.

“아니, 같이 채우면 되지. 네가 품을 수 있는 게 많다는 뜻이니까. 평생을 채울 수 없어도 좋아. 다양한 걸 배우고 알아가면서, 실패도 해 보자. 넘어지고 망쳐도 괜찮아. 일어서는 법을 배우면 돼. 옆에서 도와줄게. 친구 좋다는 건 이럴 때 쓰는 거잖아.”

친구. 잭슨은 단어를 입에서 곱씹었다. 어색했지만 썩 입에 붙어서, 잭슨은 한참이나 입안에서 맴도는 단어를 굴려 보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