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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이 쓴 로판 소설에 빙의되어버렸다-130화 (130/150)

130화.

목소리에 놀란 셋은 황급히 철창 너머를 바라봤다. 소박하긴 했지만 여느 평민보다 나은 복장에 철창 내부에도 식탁, 화장실, 침대 등 있을 것은 다 있었다. 심지어 철창에 커튼도 있다. 사생활을 존중하기 위함인 듯 보였다.

귀족들을 위한 감옥이라고 들었지만 이 정도로 호화로울 줄은 몰랐다.

감옥인데 열악해야 하는 거 아니야? 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지만, 그 덕에 라빌과 테일러가 고생하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하니 다행이었다. 라빌과 테일러가 석방되면 잭슨에게 환경을 열악하게 조성해 달라고 건의해야겠다.

벨리타가 터질 것 같은 다리를 주물렀다.

그 순간, 철창이 덜그럭거렸다.

라빌이 철창을 붙잡고 손을 뻗고 있었다. 반사적으로 라빌의 손을 맞잡으려고 일어난 벨리타가 다리의 통증을 이기지 못하고 앞으로 고꾸라졌다. 오웬이 벨리타의 허리를 붙잡아 지탱한다.

“……조심 좀 해. 코 깨지겠어.”

장모님 앞이라고 나름 얌전한 말투를 사용한 오웬이 벨리타를 다시 의자에 앉혔다. 곧장 의자째로 들어 라빌의 앞에 놓아준다.

순식간에 가까워진 거리에 당황한 벨리타가 의자에 바짝 붙어 앉았다. 벨리타의 다리 위에 라빌의 손이 얹어졌다.

“벨리타. 넌 괜찮니? 어디 다친 데는 없니? 데이비드, 너도 이리 오렴. 얼굴이 많이 상했구나…….”

얼굴을 보자마자 한다는 말이 걱정이다. 신세 한탄도 아니고, 잭슨의 욕도 아닌 자식 걱정.

벨리타의 속이 시큰거렸다. 무슨 마음인지 알아서, 얼마나 가슴을 졸이며 자식을 생각했을지 알 것 같아서 목 안쪽이 따끔거렸다.

“이제 와서 죄송해요…….”

벨리타가 라빌의 손을 겹쳐 잡았다. 진짜 어머니가 아니었음에도 본래 벨리타의 기억 탓인지, 정이 들어서인지. 눈가가 뜨겁다.

“괜찮아, 괜찮아. 벨리타. 네가 안전하면 됐단다. 데이비드, 아가. 왜 그리 울고 그러니.”

라빌의 손을 붙잡고 흐느껴 울던 데이비드가 고개를 도리질 쳤다. 라빌이 두 아이의 손을 잡고 무뚝뚝한 표정으로 애정을 표현했다.

“걱정을 많이 했단다. 무사해서 다행이야. 정말…….”

울컥, 라빌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얼마나 걱정했는지 모른다. 수도로 떠난 두 아이의 행방을 모르는 채로 갇혀서 오매불망 기다리고 있는 처지가 얼마나 한탄스러웠던지. 황제가 혹시라도 두 아이를 해쳤을까 봐 두려워하며 매일 밤을 뜬눈으로 지새워야 했던 순간이 얼마나 참혹했던가.

부쩍 마른 라빌이 울음을 참았다. 라빌의 심정을 헤아린 벨리타도 눈가에 물기가 어렸다.

벨리타는 라빌을 이해했지만, 완벽히 안심시킬 말을 할 줄 모르는 바보였기에, 떨리는 목소리를 억누르고 조곤조곤 이야기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폐하와도 잘 이야기해서 평생이 아니라 이십 년만 유폐하겠다는 약속도 받았는걸요. 저는 파텔 상단을 운영하게 됐어요. 로틀 남작의 상단도 받았고요. 곧 음식점도 열어요. 어머니가 나오시면, 음식점에 반드시 초대할게요. 데이비드는…….”

근황을 이야기하라고 고개를 돌렸더니 데이비드는 우느라 말할 여력이 되지 않아 보였다. 하긴, 마음고생이 오죽 심했던가.

벨리타는 데이비드의 근황도 이야기해 주었다. 아카데미는 조기 졸업했고 가주의 일을 하고 있다. 워낙 바쁜 형국이니 파티는 열지 못하겠지만, 테일러의 허락을 받으면 곧장 가주를 시킬 거라고 했다.

라빌은 벨리타가 뱉는 단어 하나하나가 소중하다는 듯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경청했다.

오랜만에 만나는 가족인데, 꼴이 우습기도 하지. 벨리타가 라빌의 마른 뺨을 손바닥으로 감쌌다.

“어머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폐하와 좀 친한 사이잖아요. 언제든 면회 올 수 있어요. 자주 찾아뵐게요. 약속해요.”

벨리타 자신의 진짜 어머니는 바쁘고 멀다고 자주 만나지 못했지만, 이번만큼은. 후회하지 않을 거다.

울음을 애써 삼키던 라빌이 결국 참지 못하고 오열했다. 벨리타가 창살 너머로 손을 뻗어 라빌의 어깨를 감쌌다.

뒤에서 잠자코 지켜보던 오웬이 관리에게 작게 속삭이며 금화 세 개를 건넸다. 그것을 냉큼 받아 든 관리가 라빌의 철창을 열어 주고 멀리 있는 테일러의 철창도 열어 모셔왔다.

비척거리며 복도를 걸어오던 테일러의 걸음이 점점 빨라진다. 바쁘게 뛰어온 테일러가 라빌을 안고 있는 벨리타를 끌어안았다. 데이비드도 엉엉 울며 셋을 얼싸안는다.

크흠, 헛기침한 오웬이 주목을 바란다는 듯 손을 들었다. 넷의 시선이 오웬에게 쏠렸다.

단정히 넘긴 머리를 긁적이던 오웬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자리를 옮길까요? 이 층에 응접실이 있다는데. 뇌물 값이래요.”

나란히 훌쩍거리던 넷은 오웬의 말에 홀린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여섯 층이나 내려가는 동안 참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대부분이 데이비드가 떠들고, 라빌과 테일러가 들어 준 거지만 아무렴 어떤가. 데이비드는 라빌과 테일러가 생채기 없이 조금 마르기만 했음에 무척이나 기뻐했다.

물론 다리가 다 풀린 벨리타는 오웬이 안고 내려갔다. 벨리타와 오웬은 셋의 대화에 간섭하지 않고 조용히 계단을 내려왔다.

2층에 도착하니 관리가 응접실의 문을 열어 줬다. 응접실이라곤 해도 저택에 비하면 열악해서, 싸구려 소파와 대량으로 갖춰진 물이 전부였다. 그럼에도 괜찮았다. 감옥 복도에서 울고불고 떠드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으니까.

응접실에 들어오자 관리가 한 시간 후에는 나와 주어야 한다는 으름장을 놓고 문을 닫았다. 자연스럽게 벨리타와 오웬이 함께 앉고 라빌과 데이비드, 테일러가 나란히 앉는다.

훌쩍, 잠시간 동안 눈물을 삼키는 소리만 들렸다. 벨리타는 낮게 헛기침을 하고 애써 미소 지었다.

“폐하께서 언제든지 와도 좋다고 하셨어요. 저는 수도에 사니까, 자주 찾아올게요. 데이비드는 영지에 있을 거라 거리가 멀지만, 오웬이 순간이동을 할 줄 아니까 괜찮아요. 정 적적하시면 책이라도 한 권씩 넣어드릴게요. 읽고 싶으신 거 있으세요?”

침울한 분위기를 환기하기 위한 벨리타의 노력이었다. 이상한 소설은 안 된다는 말을 하려던 순간, 라빌이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벨리타, 괜찮다. 괜찮아. 억지로 그러지 않아도 된단다.”

꽤 자연스럽게 말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던가?

벨리타는 헛숨을 삼키고 입을 다물었다. 오웬이 슬쩍 손을 잡아주었다. 이런 눈치 빠른 앙큼한 녀석 같으니라고.

오웬의 손을 맞잡은 벨리타가 자꾸만 코 안쪽이 시큰해지는 감각을 참으며 숨을 죽였다.

라빌과 테일러가 가운데에 앉은 데이비드의 손을 하나씩 잡았다. 아들의 손등을 느릿하게 토닥여 주던 라빌이 말을 이었다.

“난 무엇보다 네가 걱정되는구나. 폐하와 사적으로 긴밀한 사람은 너뿐인데. 해코지당하지는 않았니? 다친 곳은 없고? 누가 괴롭히지는 않지?”

딸을 위한 걱정이다. 벨리타를 위함이 아니었음에도, 벨리타는 자신에게 묻는 말인 것 같아서 코끝이 미어졌다. 벨리타가 고개를 푹 숙이고 끄덕거렸다.

얼굴을 보이지 않는 딸이 걱정된 라빌이 엉덩이를 들고 벨리타에게 손을 뻗었다.

“딸아, 벨리타. 무슨 일이 있거든 꼭 이야기해 주렴. 나는 언제나 너와 데이비드가 걱정이란다. 어디 다치기라도 하면 정말 가슴이 아파.”

이러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자신의 본체에 비하면 한참이나 어린 라빌인 걸 알지만 정말 엄마 같아서 어쩔 줄 모르겠다. 달면서도 쓴 걱정과 애정을 삼키면 탈이 날지도 모른다는 걸 알면서도.

라빌의 손이 주황색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가 떨어졌다. 벨리타의 어깨가 잘게 떨렸다. 오웬이 맞잡은 손에 힘을 주고 풀었다. 그의 손가락이 벨리타의 손등을 천천히 토닥거린다.

흐트러지는 숨을 겨우 내쉰 벨리타가 고개를 들었다. 눈가가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죄송해요, 죄송해요……. 저 때문에…….”

테일러가 왜 그런 생각을 하느냐며 짐짓 굳은 표정을 했다. 표정은 다양하지만, 말투는 딱딱한 테일러. 말로 표현할 줄 모르는 테일러가 우는 딸을 위해 머릿속에서 고르고 골라 그에게 있어 가장 다정한 말을 뱉었다.

“벨리타. 네 탓이 아니다. 내가 결정한 일이야. 그러니 부담 갖지 마라. 네가 잘못한 건 없어. 자책하지도 말고.”

짤막한 문장들이었지만 테일러의 진심이 묻어났다. 얼마나 꾹꾹 눌러 담은 진심일지 짐작이 가서, 벨리타는 그만 눈물을 터트렸다.

죄책감이 있었다. 벨리타가 섣부르게 행동하지만 않았어도 갇히게 될 일이 없었을 테니까. 데이비드가 혼자 남겨지는 걸 두려워하며 떨지 않아도 되었으니까. 다 자신의 탓이라고 생각했다.

한데 아니라고, 벨리타의 탓이 아니라고 해 줬다. 당사자가 직접.

용서받는 기분이 들었다. 벨리타는 몇 번이나 고개를 주억거렸다. 데이비드도 누님의 탓이 아니라며 거들었다.

왜 진작 몰랐을까. 이미 가족이었다는 것을.

오웬과 맞잡은 손에 힘을 주며 벨리타가 하소연을 토했다.

“잭슨과 얽혀서, 제가 제멋대로 굴어서 이렇게 됐다고 생각했어요……. 피해만 끼치고 다니는 게 아닌가……. 결국 나도 덜 자란 어른이 아닌가 싶어서…….”

어른이란 무엇일까.

도망치지 않고 책임을 질 줄 아는 사람? 닳고 닳아서 마모된 사람? 다른 이들의 불행도 떠안아 줄 수 있는 사람이 어른인가?

그렇다면 벨리타는 나이만 헛먹은 아이일지도 모른다. 오십이 넘어도 새로운 도전이 무섭고 책임지기 버거운 일이 많았으며, 타인의 불행이 힘겨워 밀어내기도 했다. 닳고 닳아서 충분히 너덜거린다고 생각했는데, 상실에 쉽게 무너졌다.

묵묵히 벨리타의 말을 듣고 있던 테일러가 단호하고 차분한 어조로 대답했다.

“너도 아직 어리다. 나도 아직 어리고. 아마 여든이 되어서도 어리겠지.”

고요한 응접실 내에 테일러의 목소리만 퍼진다. 벨리타는 고개를 들지 못하고 훌쩍거렸다.

“사람은 죽는 순간까지 성장한다. 매일 새로운 지식을 깨닫고 나아간단다. 나도 아직 한참이나 부족해. 순간마다 배우고 내 세계를 넓히고 있다. 나도 아직 덜 자랐다. 벨리타, 너도 아직 자라는 중인 거야. 완벽한 어른은 세상에 없어.”

가만히 듣고 있는 벨리타가 얼굴을 들었다. 눈썹이 벌겋게 물들어서 콧물을 찔끔 흘리고 있었다. 썩 귀여운 딸의 눈물에, 테일러는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어쩌면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성장하려는 사람이 진정한 어른일지도 모르지. 벨리타, 완벽할 필요 없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하고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해. 더 좋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한다면, 그 자체로도 충분한 어른이다.”

아버지로서 아팠던 어린 벨리타에게 사랑을 표현해 주지 못했던 것을 후회하고, 이제라도 노력하는 것처럼 성장한다.

벨리타는 소리 내 울었다. 오웬의 품에 얼굴을 묻고 서럽게도.

테일러의 말이 맞다. 벨리타는 아직도 성장하고 있고 죽을 때까지 자라날 거다. 자신만 타인을 보듬고 품어 줘야 하는 게 아니다. 서로 기대며 살아가는 게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었으면서.

불행하게 자란 아이들이 불쌍하고 안타까워서 키우고 있다고 생각했다. 자신만이 베풀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었다. 서로에게서 결핍을 채우고 함께 행복해지고 있다는 것도 몰랐다.

잭슨이 벨리타에게서 사람답게 사는 법을 배웠듯, 벨라타도 잭슨과 소르니, 오웬, 조슈아 모두에게서 사랑을 받고 더 나은 사람이 되는 법을 배우고 있었다.

바보 같은 벨리타. 이제야 주위를 둘러볼 시야가 생긴다.

빠듯하게 들어차 있는 가슴 언저리에 여유가 생기고, 그 안에 행복을 넣을 자리를 마련했다.

더 넓은 세상을 마주하고 도전할 수 있는 용기가 났다.

벨리타가 마주 앉은 가족들을 바라봤다. 눈물에 젖어 시야가 흐렸지만 뚜렷하게 보였다. 벨리타를 향하는 애정 어린 눈과 온화한 표정이. 사랑이 보였다.

“꼭, 출소하시면……. 같이 벽난로에 도란도란 앉아서 얘기도 하고, 여름에는 바닷가도 가고, 같이 햇볕 쨍쨍할 때 산책도 해요. 꼭이요. 꼭…….”

몸 주인을 위해 했던 말이었지만, 지금은 자신을 위한 말이었다.

행복해지기 위해서, 행복해지고 싶어서 입에 올린 소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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