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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이 쓴 로판 소설에 빙의되어버렸다-129화 (129/150)

129화.

따지고 본다면 노타는 성공한 인생이다. 줄타기를 잘해서 황제의 최측근이 되었고 단둘이 술도 마실 수 있게 되었으니까.

비록 멀리 가지 못하고 집무실에서 술잔을 기울이게 되었지만, 노타는 이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붉은 와인과 구운 연어 샐러드를 접대용 테이블에 올려놓고 술잔을 주거니 받거니 했다.

피도 눈물도 없어서 술조차 취하지 않을 것 같던 잭슨은 생각보다 술이 약했다. 와인 석 잔. 고작 석 잔에 잭슨의 얼굴이 벌겋게 달았다.

잭슨이 소파에 늘어져서 조용히 눈을 굴렸다. 혹시 몰라서 물을 준비해 두었는데, 옳은 선택이었다.

노타가 와인 잔을 치우고 물 컵을 잭슨의 앞에 놓아주었다. 잭슨이 눈을 가늘게 접으며 순한 미소를 지었다.

“폐하, 어디 가서 술 드시지 마세요.”

“왜?”

“주량이 약한 것도 약점이 될 수 있으니까요.”

사납고 매서운 얼굴이 한껏 풀어지자 무척 만만한 얼굴이 됐다. 벨리타의 앞에서만 저런 표정을 짓는 줄 알았는데.

노타는 잭슨의 새로운 면을 알게 되어 조금 기분이 좋아졌다.

목이 타는 듯한 갈증을 느낀 잭슨이 단번에 컵을 비웠다. 물기가 맺힌 컵이 테이블을 적신다.

잭슨은 가만히 컵을 바라보다가 노타에게 질문했다.

“넌 왜 나를 따르지?”

“네? 갑작스러운 질문이시네요.”

노타가 잭슨을 따른 지는 꽤 오래되었다. 잭슨의 나이가 열다섯이었을 때 모시기 시작했으니 벌써 6년째다. 잭슨이 소르니와 약혼하기도 전에 그와 함께했다. 노타는 잭슨을 모시게 된 계기를 상기했다.

열다섯의 잭슨만큼이나 노타도 어렸다. 열일곱의 나이에 잭슨의 뒤치다꺼리를 도맡게 되었으니까.

가주가 될 수 없고, 돈을 벌기에도 재능이 없던 노타는 자신의 처지를 이해하고 황궁에 들어왔다. 5황자의 밑으로 배정받아 재미없고 무난한 삶이 되리라 짐작했던 노타였다. 한겨울의 황궁 복도에서 잭슨을 보기 전까지는.

검은 머리카락과 보라색의 눈. 수려한 외모에 신체마저 월등했음에도 그를 따르는 여인이 없었고, 담당 시종과 하녀들마저 거리를 벌려 잭슨의 뒤를 쫓았다.

복도가 넓어서였는지, 겨울이라서 그랬는지. 잭슨은 외로워 보였다. 외딴 섬처럼 덩그러니 홀로 남겨져 있었다.

그가 걸음을 멈추면 더 가까이 다가가기도 싫다는 듯 하녀들과 시종들이 자리에 섰고, 우연히 지나가던 귀족과 눈이 마주치면 귀족은 넌더리를 치며 고개를 돌렸다.

노타는 짧은 일생 어느 곳에서도 혼자였던 적이 없었기에, 잭슨이 누구보다 안쓰러웠다.

따돌림당하는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지도, 슬퍼하지도 않았지만 그래서 더욱 안타까웠다. 따돌림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기색이어서 그랬는지도 몰랐다.

5황자의 시종이었던 노타가 잭슨을 모시겠노라 시종장에게 부탁한 건, 황궁 사람 중 최초였다. 황궁의 사람들 그 누구도 잭슨을 모시려고 하지 않았으니까. 그 사실을 알았을 때 노타는 조금 서글퍼졌다.

기억을 되짚은 노타가 와인 잔을 손에 쥐고 수줍게 미소 지었다.

“친해지고 싶었거든요.”

계절이 지나고 황태자가 되어도 여전히 무엇도 속에 들이지 않았던 잭슨에게 다양한 세상을 보여 주고 싶었다.

여름에는 축축한 비 냄새가 땅속에서부터 풍겨 오고, 겨울이 되면 차가운 바깥바람이 코를 얼리는 것도. 주위에 가까운 사람이 많으면 얼마나 하루하루가 즐거운지도. 봄에는 봄만의 놀이가, 겨울에는 겨울만의 놀이가 있다는 것도 알려 주고 싶었다.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 감상을 떠드는 게 얼마나 즐거운 일인지도 느끼게 해 주고 싶었다.

“나와 친해지고 싶었다고? 어째서지? 내가 황제가 될 사람이라서?”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얼굴을 구긴 잭슨이 거만하게 턱을 괴었다. 노타가 고개를 저었다.

잭슨과 시간을 보낸 지 6년 만에 사적인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에 큰 기쁨을 느끼며, 노타가 대답했다.

“친구가 되고 싶었으니까요. 폐하, 조건을 따져 가며 친구를 하는 예도 있지만. 대부분은 큰 이유 없이 친구가 돼요.”

잭슨이 턱을 괸 손으로 입을 가렸다. 웃고 있는지 기분 나빠하고 있는지 짐작할 수는 없지만, 분명한 건 잭슨이 노타의 말에 귀를 기울여 주고 있다는 것이다.

노타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대화가 잘 통해서, 좋아하는 음식이 같아서, 하다못해 자주 마주쳐서 친구가 되기도 해요. 운이 좋으면 정말 반쪽 같은 친구를 만나기도 하죠.”

긴밀한 관계를 맺어 본 적 없는 잭슨으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는 말이었다. 벨리타와 지금 같은 사이가 되기까지도 순탄하지 않았으니까.

물을 마시고 정신이 또렷해진 잭슨이 다섯 살 아이처럼 질문했다.

“그렇다면 왜 난 여태껏 만나지 못한 거지? 그리 쉽게 친구를 만들 수 있는 거라면, 나의 문제가 아닌가.”

노타는 제법 답하기 어려운 질문에 입을 다물었다. 생각을 정리할 필요가 있다. 노타에게 잭슨은 동생과도 같은 존재가 되었기에, 그를 상처 줄 만한 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노타가 와인을 한 모금 머금었다가 삼켰다.

“폐하는 주위를 둘러볼 여력이 되지 않으셨잖아요.”

입가를 가렸던 손이 내려간다. 잭슨은 조금 멍한 표정으로 손을 내리고 노타를 바라보았다.

“워낙 다망하셨으니까. 친구가 필요한지 돌아볼 시간이 되지 못했잖아요. 저도 곁에 있어서 아는걸요. 이 자리에 오기까지 힘든 시간을 보내셨고요. 폐하, 사람은 많고 다양해요. 폐하가 연어를 좋아하듯, 누군가는 연어를 싫어할 수도 있어요.”

집중된 시선에 노타는 긴장한 기색을 숨기며 목소리를 다듬었다.

“아직 폐하가 돌아봐 주지 않았을 뿐, 폐하를 알아보고 좋아할 사람은 분명 있어요. 폐하는 좋은 사람이잖아요. 인간성이 부족하기는 하지만, 벨리타 영애에게 선물 받은 꽃을 아직도 소중히 간직하고 계시고 딸을 잃은 가신들을 위해 일을 도맡아 처리하시고요.”

잭슨이 넋을 놓은 낯으로 가만히 노타를 쳐다봤다.

오늘만큼 잭슨의 시선을 고스란히 받아 본 적이 없었던 터라, 노타는 멋쩍게 와인 잔을 흔들었다.

시선이 떨어지지 않는다. 잭슨은 한참이나 노타를 눈에 담았다. 눈길이 부담스러워진 노타가 연어가 남았으니 더 먹으라며 그릇을 밀어 줬다.

그제야 잭슨이 입을 열었다. 멍청하고 얼빠진 낯이었다.

“너구나.”

“네?”

“날 알아보고 좋아하는 사람이.”

그 생각을 하느라 여태 아무 말도 없이 쳐다만 본 건가? 노타가 작게 소리 내 웃음을 터트렸다.

잭슨이 테이블을 짚어 상체를 세우며 대답을 종용했다. 고개를 숙인 노타가 어깨를 떨어가며 웃음을 참았다. 후, 숨을 몰아쉰 뒤, 웃음 탓에 벌어지는 입을 가리며 노타가 대답했다.

“네. 방금 설명해드렸잖아요. 그리고 폐하, 저뿐만이 아닐 거예요. 시간이 지나면 폐하를 아끼는 사람이 더 많아질 거고, 곁에 머무를 거예요. 저처럼요.”

잭슨이 전보다 붉어진 얼굴을 손으로 가렸다. 어쩔 줄 모르는 반응이다. 칭찬을 들어 본 경험이 거의 전혀 없어서, 어떤 반응을 해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고맙다고 해야 할지, 헛소리 말라며 타박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잭슨은 벨리타에게서 느꼈던 감정을 다시금 경험했다. 가슴 안쪽이 일렁거리고 뱃속이 따뜻하다. 목구멍이 울컥, 뜨거운 용암이라도 치솟는 감각이다. 코끝이 시리고 손에 힘이 들어가서, 잭슨은 그저 가만히 숨을 죽였다.

노타가 여분의 포크로 먹기 좋게 연어들만 찾아 한곳에 모았다.

“폐하는 사랑받을 수밖에 없는 사람이에요. 아직 기회가 오지 않았을 뿐이죠. 어, 어? 폐하, 울어요?”

“……누가, 운다고…….”

투둑, 바짓단을 적시는 물기에 노타가 화들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 다급히 재킷 안주머니를 뒤져 손수건을 꺼내서 잭슨의 옆에 앉는다.

잭슨은 양손에 얼굴을 파묻고 고개를 숙였다. 노타가 말갛게 웃으며 잭슨의 손가락 사이에 손수건을 끼워 넣었다. 잭슨의 손이 단번에 손수건을 펼쳐 얼굴을 덮었다.

“몰랐는데 폐하 완전 울보네요~”

“……시끄러워.”

웅크린 잭슨의 위에 노타의 팔이 얹어졌다. 노타가 잭슨의 어깨를 감싸 안고 부드럽게 다독였다.

“술 더 드실 수 있겠어요?”

“……아니.”

“연어라도 마저 드세요. 좋아하시잖아요.”

“………응.”

“손수건은 세탁해서 돌려주세요. 아무리 폐하라도 눈물 콧물 묻은 건 좀.”

“……닥쳐.”

“네.”

등과 어깨를 다독이던 노타가 별안간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잭슨은 신경질을 내며 노타에게서 등을 돌렸다.

열린 창문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에 쌓인 서류들이 나뭇잎처럼 흔들린다. 봄이 지나고 여름이 다가오고 있었다.

*

점심 식사를 마치자마자 데이비드는 벌써 정원에 나가 있었다. 들떠 있다. 부모를 만날 생각에 들떠 있었다.

벨리타는 데이비드가 정원을 빙글빙글 도는 걸 보며 마치 주인을 기다리는 강아지 같다는 감상이 들었다.

돈이 가득 든 주머니 두 개를 챙겨 작은 가방 안에 욱여넣었다. 소문을 들어 보니 황궁의 첨탑은 생각보다 부패가 심해서 돈을 쥐여 주면 죄인에게 꽤 좋은 대우를 해 준다고 했다. 돈이야 이제 넘치다 못해 썩어나는 벨리타였으니 금화 몇 푼쯤이야 타격도 없다.

라빌과 테일러에게 전해 두면 알아서 요긴하게 사용하겠거니, 싶어 두둑하게 챙겼다. 아마 수도의 건물은 살 수 있을 양이다.

언제 나오느냐며 독촉하는 데이비드에게 이제 나간다고 소리친 벨리타가 계단을 내려갔다. 오웬이 계단 밑에서 단정하게 차려입은 채로 손을 뻗고 있었다.

“에스코트야?”

“그럼.”

신경 써서 단장한 듯 멀끔하게 넘긴 머리와 정장이 우아했다. 짙은 보라색 머리에 푸른 정장이 두드러지게 어울렸고, 코르사주 대신 벨리타가 선물한 안경이 꽂혀 있어서 수수하면서 화려했다.

과한 미남이다. 차려입지 않았을 때는 흐트러진 매력이 있더니 잘 차려입을 때는 멋들어졌다.

이런 미남에게 에스코트를 받자 기분이 날아갈 듯 들떠서. 벨리타가 주저 없이 오웬의 손을 잡고 하나 남은 계단을 내려왔다.

“진짜 꼴 보기 싫으니까 그만 좀 하고 오십시오.”

답답해서 끌고 가려고 저택 안으로 들어온 데이비드가 오만상을 찌푸렸다.

숨만 쉬면 시비다. 벨리타가 맞받아칠 말을 고르는 틈에 오웬이 벨리타의 입술을 손바닥으로 틀어막고 방긋 웃었다.

“응, 처남. 지금 가.”

계속 듣다 보니 적응되는 처남 소리가 더 짜증 난다. 데이비드는 신경질적으로 등을 돌리고 쿵쿵 발을 굴렀다.

그런 데이비드의 모습을 보며 조용히 웃은 오웬이 벨리타에게 작게 속삭였다.

“반응 진짜 재미있지 않아?”

무슨 의미인지는 알겠는데, 가만 보면 오웬도 참 성격 이상하다. 벨리타가 눈을 가늘게 뜨고 서늘한 표정을 지으며 오웬의 손을 잡아끌었다. 오웬이 결국 참지 못하고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마차에 타고 황궁에 도착했다. 황궁은 무척이나 넓은 곳이어서, 구석에 있는 첨탑까지 걸어가려면 시간이 오래 걸렸기에 첨탑 바로 앞에 마차를 댔다.

벨리타는 부쩍 더워지는 날씨를 느끼며 오웬의 에스코트를 받고 마차에서 내렸다.

화려한 드레스 대신 허리만 천으로 조인 느슨한 드레스가 다리에 엉켰다. 팔찌를 만지작거린 벨리타가 오웬의 옆에 섰고, 데이비드가 긴장한 기색으로 벨리타의 뒤를 따라 마차에서 내렸다.

처음 보는 관리가 마중을 나와 일행을 반겼다.

마음에 썩 들지는 않던 노타였지만 막상 얼굴을 못 보니 섭섭해서, 벨리타는 괜히 첨탑을 둘러보았다.

높고 견고한 탑이다. 창문도 아주 작게 트여 몸을 비집어 넣을 수도 없었고, 미묘하게 마력도 느껴졌다. 기사들이 지키고 있음에도 불상사를 대비하여 마법을 둘러놓은 모양이었다.

관리는 파텔 문양이 박힌 마차를 알아보고 친절하게 첨탑 안으로 안내했다.

감옥은 5층부터 있으며, 라빌과 테일러가 있는 곳은 8층이라고 했다.

언제 올라가냐. 벨리타가 한숨을 내쉬니 오웬이 벨리타의 팔을 잡아 부축했다.

고맙기는 한데. 8층 걷는다고 부축받을 정도로 체력이 나쁘지…….

나쁘다. 매우 나빴다.

8층까지 헐떡거리며 올라온 벨리타가 오웬과 데이비드의 부축을 받으며 관리가 대령한 의자에 주저앉았다. 폐가 터질 것 같고 허벅지와 종아리가 찢어질 것 같다.

벨리타가 욕설을 뱉으며 숨을 몰아쉬자, 바로 앞에 있는 철창 안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벨리타?”

라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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