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화.
머리채를 어떻게 잡아야 틀어 올린 저 머리 모양대로 고스란히 잡을 수 있을까, 계산하며 마리제를 빤히 쳐다봤다.
벨리타의 시선을 느꼈는지, 마리제는 수줍게 얼굴을 붉혔다. 자고로 싸움은 선빵 필승이다. 벨리타가 손목을 돌리며 먼저 손을 뻗을 준비를 했다.
그 순간, 마리제가 자신의 치맛자락을 쥐고 더듬거리며 말을 이었다.
“유명하신 만큼 비밀스러우셔서 꼭 한번 만나 보고 싶었어요. 친해지고 싶기도 했고요.”
사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벨리타의 뒤를 따라붙는 추잡한 소문들이 많았다. 잠정적으로 벨리타는 사교계에서 매장이 될 절차를 밟고 있었는데, 소르니가 해결해 준 덕에 명예를 회복했다. 벨리타는 모른다. 소르니가 얼마나 벨리타를 위해 노력해 주었는지.
어린 영애들이 꿈꾸는 황족과의 화려한 황궁 로맨스, 적이었던 높은 작위의 귀족과 둘도 없는 단짝 친구가 되고 사랑해 주던 남자의 상단마저 물려받은 여자.
어릴 적부터 아팠던 몸에, 사랑하는 황제가 부모를 감금한 데다 온갖 부정적인 소문에 시달렸지만 꿋꿋하게 이겨내고 나아가는 멋진 영애.
영애들이 동경하는 벨리타 릴레이나 파텔.
벨리타의 평판을 이야기해 주던 마리제가 황홀하다는 반응을 하며 발을 동동 굴렀다.
자리를 채워 준 다른 아이들도 마리제를 따라 만나서 영광이라며 벨리타에게 말을 얹었다.
벨리타는 어안이 벙벙했다. 모두 다 사실이기는 한데 이렇게까지 칭송받을 이유가 없었다.
당황한 벨리타가 소르니에게로 시선을 돌리니, 자신도 잘 모르겠다는 듯 어깨를 들썩거렸다.
확실히 소르니가 떠든 이야기가 아니었다. 소르니가 한 일은 흑마법사로 몰리는 벨리타를 구해낸 것뿐. 부정적으로 몰렸던 소문이, 벨리타의 평판이 좋아지자 긍정적인 효과를 낸 거였다.
마리제가 아직도 당혹감에 멍한 벨리타의 손을 조심스럽게 잡으며 말했다. 무척 들떠 보였다.
“저 파텔 상단도, 소이트 상단도 자주 애용할게요. 그리고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하나 여쭙고 싶은 게 있는데…….”
멍청하게 고개만 끄덕거리는 벨리타를 사랑스럽다는 듯이 바라보며 소르니가 차를 홀짝거렸다. 하지만 이어지는 마리제의 질문에 소르니가 마시던 차를 뿜었다.
“황제 폐하와 혼인은 언제쯤 하시나요?”
“뿌웁!”
재빠르게 고개를 돌려서 다행이었다. 꽃이 만개한 정원 한복판에서 사람에게 차를 뱉었다간 티파티가 엉망이 되는 게 당연한 결말이었을 테니까.
꽃에 물을 준 소르니가 초췌한 낯으로 손수건을 꺼내 입가를 닦았다. 옆에 앉아 있던 아이들이 깜짝 놀라 괜찮냐고 물었지만 소르니는 대꾸할 정신이 남아 있지 않았다.
누구랑, 뭘 해?
벨리타도 소르니와 같은 반응이었다. 아들과 결혼은 언제 하느냐는 질문과 다를 바 없었기 때문에, 벨리타는 아연실색한 태도로 답을 뱉지 못했다.
어이가 없어 턱만 덜그럭, 떨어대는 벨리타의 손을 고쳐 잡은 마리제가 다시 한번 눈을 빛내며 질문했다.
“폐하와 각별한 사이시잖아요. 두 분이 혼인하신다고 소문이 자자하던걸요? 언제쯤인가요? 아직 날을 잡지 못하신 건가요?”
무례한 질문인 걸 마리제도 알았고, 같이 자리를 빛낸 영애들도 알았으며, 지나가는 하녀도 알았다.
파혼하긴 했지만 약혼자였던 소르니가 벨리타의 옆에 앉아 있었고, 결혼은 언제 하냐고 독촉하는 듯한 발언은 명백한 오지랖이다.
다만 모두가 마리제를 탓하지 않고 침묵하고 있는 이유는 정말 궁금해서였다.
솔직히 궁금하잖아.
성격 더럽고 난폭한 폭군이 굳세고 사랑스러운 여인을 만나 평화로워지는 이야기는 모두가 아는 소설 속 진부한 사랑 이야기다.
그 이야기가 현실에서, 주변에서 실시간으로 펼쳐지고 있는데 궁금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
저 북부의 동굴에 잠들어 있는 드래곤도 궁금해할걸.
벨리타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을 훑어본 소르니가 단출한 자수가 박힌 손수건을 내려놓고 입을 열었다. 말을 하려는 순간, 벨리타의 대답이 먼저 튀어나왔다.
“제가 왜 폐하랑 결혼해요?”
정말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의 벨리타 때문에 분위기가 순식간에 싸늘해졌다.
마리제는 벨리타의 손을 잡은 채 딱딱하게 굳었고, 다른 영애들은 헛기침하거나 고개를 돌리는 둥 멋쩍은 반응을 했다.
한 문장으로 잭슨과의 염문설을 박살 낸 벨리타는 슬쩍 마리제의 손을 떼어냈다. 마리제가 비어 버린 손으로 테이블을 짚으며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아닌……가요?”
“아닌데요. 가족…… 같은 사이인데, 웬 결혼. 소름 돋네요.”
벨리타가 팔뚝을 문지르며 진저리쳤다.
이 반응을 잭슨이 봐야 했는데. 잠자코 듣고 있던 소르니가 터지려는 웃음을 겨우 참았다.
적당히 돌려서 대답하는 화법이 난무한 티파티에서 직설적인 벨리타의 답은 그만큼 진심이 두드러졌다.
훈훈했던 분위기가 참혹할 정도로 가라앉자, 소르니의 맞은편에 앉은 영애가 어떻게든 분위기를 환기하려 말문을 텄다.
“다들 그 소문 들으셨나요? 수도에 있는 미혼의 영애들이 사라진다는 소문이요.”
무슨 도시 괴담도 아니고. 벨리타가 눈을 가늘게 뜨고 마들렌을 하나 더 집었다. 베어 물 때마다 퍼지는 오렌지 향이 자꾸 손이 가게 한다. 한입에 모조리 밀어 넣자, 소르니가 대놓고 귀여워하며 차를 권했다.
그러건 말건 괴담 같은 이야기를 입에 올린 영애, 버르틴이 귀신 이야기를 하듯 몸을 움츠리고 눈을 가늘게 떴다. 다른 영애들은 이미 버르틴의 말에 집중하고 있었다.
“일주일 전부터 이틀에 한 명씩 사라진대요. 작위와 나이에 무관하게 혼자만 있으면 눈 깜짝할 새에 없어진다고 했어요. 가장 최근에 실종된 영애가 히렐바트가의 공녀님이라고 하더라고요.”
흡입력 있는 말재간이다. 어느새 벨리타도 버르틴의 말을 귀 기울여 듣고 있었다.
소르니는 무감한 태도로 벨리타의 입에 마카롱을 넣어 줬다. 아기 새처럼 받아먹는 벨리타에 신이 나 다쿠아즈도 넣어 준다.
어지간히 먹이라며 벨리타가 소르니의 손등을 쳐내는 동시에 마리제가 맞장구를 쳤다.
“드비에 공녀님이요? 분명 며칠 후에 결혼하신다고…….”
결혼을 앞둔 새색시가 실종됐다는 소리인가?
벨리타가 다시 꾸역꾸역 밀어 넣어지는 다쿠아즈를 받아먹었다. 아까까지 떠들던 춤 이야기보다 훨씬 흥미로웠다.
자신의 말에 집중한 영애들을 죽 훑어본 버르틴이 슬픈 체 눈썹을 내리며 대꾸했다.
“네. 맞아요. 실종되신 날에 드레스를 맞추러 가는 길이었다고 하더라고요. 남편분에게 드릴 꽃을 사러 마차에서 내렸는데 호위가 한눈판 사이에 사라졌다고…….”
곳곳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드비에 공녀의 결혼은 정략결혼이었지만 서로에게 마음이 있는 사이였다. 결혼 후 연애를 할 것이다, 좋은 부부가 될 것이다, 평가가 자자했는데 돌연 공녀가 사라져 버렸다.
당연히 남편 측의 가문도 난리가 났고 히렐바트 공작도 뒷목을 잡고 쓰러졌다.
차까지 먹이려는 소르니를 쳐낸 벨리타가 버르틴에게 질문했다.
“그럼 공작님은 어떻게 하신대요?”
아주 좋은 질문이라는 듯, 버르틴이 바로 답했다.
“기사단까지 이용해서 공녀님을 찾고 있다고 해요. 폐하께도 도움을 요청할 계획이라고 하더라고요.”
“아이고. 실종된 영애들은 아직도 못 찾았고요?”
“그렇죠. 그러니까 다들 조심하세요. 길거리에서 사라진다고 하니까 절대 혼자 계시지 마시고요.”
버르틴의 당부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벨리타도 덩달아 고개를 끄덕거렸지만, 겁을 먹게 될 정도로 와닿는 사건이 아니었다. 자신은 피해를 보지 않을 거라는 근거 없는 자신감 덕이다.
버르틴은 드비에 공녀 외에도 실종된 다른 영애들의 이야기도 떠들었다.
벨리타는 가만히 버르틴의 조잘거림을 들으며 자신의 소문도 이런 식으로 퍼져 나갔겠구나, 짐작했다. 다시 상기해도 조금 얼떨떨하다. 소문을 떠드는 것을 좋아했지, 주인공이 될 생각은 못 했으니까. 아예 생각하지 않았던 건 아니지만 이곳에 온 뒤로는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진짜 자신도 아닌데 소문이 어떻게 되든 관심 없었고 그보다 중요한 게 많았으니까.
언제든 소문의 방향은 자신을 향할 수 있고, 떠드는 사람의 입맛에 맞추어 변화할 수 있다. 음침하고 역겨운 영애에서, 당차고 멋진 영애로 탈바꿈하는 것처럼.
당연한 일이다. 소문을 좋아하면 언제든 소문의 주인공이 된다. 누군가의 이목을 받으면 입에 오르내린다. 알고 있는 사실인데도 당사자가 되니 기분이 묘했다. 긍정적인 평판이었음에도 낱낱이 까발려지는 기분은 썩 유쾌하지 않았다.
화려하게 살 그릇이 되지 못하는 거겠지. 벨리타는 소르니의 입에 큼지막한 슈를 처넣으며 버르틴의 말에 호응했다.
*
무거운 발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웅장할 정도로 퍼지는 소리가 굳게 닫힌 문틈으로 새어 들어왔다. 저녁까지 관료들과 즉위식에 대해 의견을 주고받느라 피곤한 잭슨이 신경질적으로 귓바퀴를 문질렀다.
쿵. 무게감 있는 물체가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참다못한 잭슨이 고개를 들어 문 너머를 노려보자마자 문이 열렸다. 노타였다.
일이 많아 신경이 날카로워진 잭슨이 고개를 까딱거렸다. 바닥에 놓인 상자를 질질 끌고 들어오며 노타가 멋쩍게 웃었다. 상자 안에 가득 채워진 건, 탄원서였다.
“오늘도인가.”
“네에……. 점점 많아지네요.”
즉위식이 미뤄진 이유이자, 잭슨의 신경을 갉아먹는 것.
잭슨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손가락을 무신경하게 까딱거렸다. 노타가 잭슨의 앞에 상자를 가져왔다. 카펫이 끌려 긁힌 자국이 남았다.
상자에 가득 꽂힌 두루마리를 꺼내려 상체를 숙이자 잭슨이 만류했다. 읽지 않아도 내용을 다 알고 있기 때문이다. 며칠 전부터 쌓이기 시작한 탄원서는 점점 수가 많아졌다.
귀족 영애들의 실종사건.
황제의 도리로 당연히 실종사건을 해결하라는 구구절절한 협박들이다.
잭슨이라고 손을 쓰지 않은 건 아니었다. 셋이 사라졌을 적부터 수도 경비를 강화했고 수색도 했다. 다섯이 넘어가면서 전담팀도 만들었다. 마법까지 동원하여 범인과 실종된 여인들도 찾으려고 힘을 썼지만, 수확은 없었다.
지금은 어느새 열다섯 명.
이틀에 한 명씩 사라지다가 어느 기점부터 하루에 두 명, 하루에 세 명씩 사라지곤 했다. 곱게 타이르며 협박하던 탄원서들은 실종 인구가 열 명이 넘어가면서부터 황제의 자질을 운운하기 시작했다.
평민이 사라졌다고 하면 눈 깜짝 안 할 귀족들이 자기 일이 되자 초조해지고 다급해져서 황제에게 매달리는 것이다.
역겹거나 우습지 않다. 잭슨에게 감흥을 주지 못했기에 어떠한 감정도 들지 않았다. 귀족이 하루아침에 모두가 사라진다고 해도 잭슨은 늘어날 일에 짜증만 날 뿐, 안타까움도 느끼지 않을 것이다.
벨리타만 탈이 없다면 다 괜찮다.
며칠 전, 황궁에 찾아온 벨리타가 장례식을 위해 영지에 다녀온다는 소식은 무척 달가웠다. 실종 사건은 수도에서만 일어났고, 수도에서 벗어나면 비교적 안전했으니까.
평소였다면 가지 말라고 붙잡았을 잭슨도 화색하며 오래 머물러도 좋다고 대꾸했다.
잠시 떠나는 벨리타를 위해 만병통치약으로 불리는 만다고까지 선물했다. 사실 선물로 받은 만다고였지만 잭슨에게 알 바가 아니었다. 기뻐하는 벨리타의 얼굴을 봤으니 더할 나위 없이 만족스러웠다.
벨리타와 함께하기 위해 황제가 되었는데 시간을 보내기도 요원하니, 의미가 없다. 잭슨이 짜증이 가득한 손길로 상자를 치우라고 명령했다.
상자를 힘겹게 들어 올린 노타가 나가지 않고 잭슨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왜?”
여전히 싹수없고 냉랭한 황제를 바라보던 노타가 상자를 고쳐 들었다. 한참을 우물쭈물하던 노타가 조심스럽게 제안했다.
“좀 쉬시는 게 어떻습니까? 술이라도 드시겠어요, 같이?”
“뭐?”
어이가 없다 못해 당황스럽기까지 한 잭슨의 낯을 본 노타가 마음을 굳혔다.
“너무 피곤해 보이시니, 술이라도 한잔하시죠. 술동무 해드리겠습니다.”
한 번도 사적으로 시간을 보내자 제안한 적 없는 노타였기에 잭슨은 무척이나 당혹스러웠다.
일그러진 표정의 잭슨이 쌓인 서류들을 바라봤다. 지치긴 했지. 벨리타도 당분간 볼 수 없으니 답답하기도 하고. 잭슨이 펜을 놓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긍정적인 답변이 돌아오자, 노타가 환하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