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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이 쓴 로판 소설에 빙의되어버렸다-125화 (125/150)

125화.

다만 현재의 오웬은 벨리타가 달달 볶아 새로운 주술서 개발에 착수해서 연구실에 틀어박혀 있었다. 오웬이 있어도 분위기가 달라질 거라는 기대는 되지 않는다.

의지하고 싶어서 오웬을 찾는 것일 뿐. 편지를 적을 때는 이렇게까지 신경 쓰이고 어색하지 않았는데.

벨리타가 데이비드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들어와. 편지가 없어서 그냥 무시한 줄 알았는데.”

“바빠서 답장은 못 썼습니다. 어차피 아카데미의 일로 수도에 오기는 해야 했어서…… 오는 김에 들렀습니다.”

어어. 그랬구나. 다가온 데이비드의 얼굴을 바로 보지 못하고 말을 얼버무리며 고개를 돌렸다. 데이비드가 표정을 굳혔다가 쓰게 웃는다.

열린 문으로 벨리타가 어물쩍 걸어 들어갔다. 데이비드도 뒷목을 긁적거리며 따라 들어간다. 엘라가 벨리타의 뒤를 졸졸 따라가며 응접실로 차와 디저트를 가져다주겠다고 했다.

집무실로 가져다 달라고 부탁한 벨리타가 눈만 굴려 데이비드를 흘겨봤다. 평소에 어떤 대화를 했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이렇게까지 어색한 사이는 아니었는데.

계단의 핸드레일을 붙잡은 벨리타가 데이비드를 돌아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데이비드도 따라 딱딱하게 웃는다.

“내가 일이 많아서, 집무실에서 이야기하자. 괜찮지?”

“괜찮습니다. 그…… 저도 같이 일하면 되니까요.”

“어, 그렇, 구나. 너도 바쁘고, 나도 바쁘고. 하하.”

오웬 어디 있어~! 하다못해 소르니나 잭슨이 있었으면 정신이라도 없었을 텐데.

벨리타가 핸드레일을 주먹으로 내리쳤다가 생각을 고쳤다. 꼭 친해질 필요는 없다. 이미 글러 먹은 관계인데 뭐. 어차피 데이비드도 떠날 거고, 면회 다녀오고 나면 볼일 없을 거다. 아마 그럴 거다.

벨리타가 심호흡을 하곤 계단을 올라갔다.

집무실로 이동한 둘은 서류를 꺼냈다. 벨리타는 자신의 의자에, 데이비드는 접객용 소파에 앉았다. 예전이었으면 벨리타도 데이비드의 앞에 마주 앉았겠지만, 마음의 거리만큼 둘의 거리도 멀어졌다.

벨리타는 서류를 뒤적거려 소르니가 일전에 보내준 장의사에 관한 편지를 꺼냈다. 돈만 주면 알아서 준비해 준다는 장의사.

필요하다면 시체까지 준비해 준다고 했다. 그럴 필요까지는 전혀 없었지만. 벨리타가 큼, 헛기침했다. 데이비드가 벨리타를 보았다.

“너…… 조슈아 장례식에 올래?”

깜짝 놀란 데이비드는 자리에서 일어나야 했다. 유려한 구두가 바닥을 딛는다. 짧은 구두 굽 소리가 이어지고 벨리타의 위에 그림자가 졌다.

책상 앞으로 다가온 데이비드에게 벨리타가 편지를 내밀었다. 그는 소르니의 편지를 빼앗아 읽었다.

축약하자면 이 장의사가 절차와 준비 모두 알아서 해 주니 돈만 주면 된다는 소리다. 데이비드가 편지지에서 벨리타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체르핀 공녀, 아니 백작이 도와준 겁니까?”

“그래, 이 사람 일 잘한대. 조슈아를 아는 사람만 모아서 조촐하게 하려고 했는데, 아는 사람끼리라고 해 봤자 너랑 나, 소르니 정도뿐인데 집에서 준비하면 시간도 많이 들고 신경 쓸 일도 많으니까 아예 맡겨 버리는 것도 좋을 것 같아서.”

“그건 그렇습니다만.”

떨떠름한 데이비드의 반응을 눈여겨보던 벨리타가 턱을 괴었다.

“왜? 가기 싫어?”

“예?”

편지를 가만히 바라보던 데이비드가 움찔, 몸을 떨었다. 그렇게 물고 뜯지 못해 안달 내던 사이였지만, 막상 죽어서 장례식을 치른다고 하니 기분이 오묘하다. 멍하고 얼떨떨했다.

섣불리 입을 열지 못하는 데이비드를 가만 바라보던 벨리타가 혀를 찼다.

“그래도 걔, 가족도 없어서 우리 아니면 장례 치러 줄 사람도 없어.”

맞는 말이라서 데이비드는 입을 열지 못했다. 조슈아보다 더 심각한 상황에 처한 귀족들도 많았지만, 미운 정이 든 탓일까 속이 쓰렸다.

데이비드는 아카데미에서 있었던 일을 회상했다. 오랜만에 찾아간 아카데미에서 많은 학생이 사망 처리가 되어 있었다. 가까스로 목숨을 부지한 학생들도 가문을 위해 자퇴하거나 꾸역꾸역 출석 일수를 채우러 등교했다.

그에 비하면 데이비드는 참 형편이 좋은 편이었다. 성적과 출석이 좋아 조기 졸업이 가능했으니까. 데이비드는 선생과 상담할 때에 느꼈던 미묘한 불쾌함을 떠올렸다.

황제가 된 잭슨의 애정을 받는 벨리타 덕분에 가문이 무너지지 않았다는 뉘앙스의 말을 하던 선생. 데이비드도 죽었어야 마땅했는데 죽지 않아 참 다행이라는 말.

진심으로 안도해서 하는 말이었겠지만 데이비드는 꽤 불쾌했다. 심기가 꼬여 있어서 기분이 나빴는지도 모른다.

미간을 찌푸린 데이비드가 책상을 손으로 짚었다.

“언제 한답니까?”

“잘 모르겠어. 이제부터 준비하려고.”

데이비드는 입을 다물었다. 진짜 싫었던 사람인데. 그래도 벨리타에게 맹목적이었던 사람이었으니, 자신도 조슈아를 신뢰하기는 했었다.

데이비드가 책상을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일정한 소음이 울렸다.

“정성이라도 보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남에게 다 떠맡긴 장례식이 정성이 있을 리가 없다. 거창할 필요 없이 준비하는 정성이라도 보이면 좋지 않을까 싶었다.

데이비드의 말에 벨리타가 옅게 웃었다. 하, 올라간 입매가 얼마 가지 않고 가라앉는다. 벨리타가 턱을 괸 채 데이비드에게 일갈했다.

“죽어 봐서 아는데, 죽으면 끝이야. 애초에 장례식은 산 사람들이 멋대로 죽은 사람 위한다고 하는 체면치레잖아. 과정이 중요한 게 아니야. 돈도 성의고, 마음을 다해 울고 좋은 곳에 가길 빌어주면 되는 거라고.”

벨리타의 말에도 데이비드는 의견을 굽히지 않았다. 아니, 둘이 서로 싫어하던 사이 아니었냐고. 갑자기 왜 챙겨 주는 건데.

턱을 괸 손에 얼굴을 묻은 벨리타가 숨을 내쉬었다. 동의하지 못하는 태도인 데이비드를 어떻게 설득시켜야 할지. 얼굴을 파묻은 채 손바닥에 막혀 웅얼거린다.

“정성을 다한다고 해 봤자, 네가 직접 땅을 팔 거야 뭘 할 거야. 다 아랫사람들 시킬 거잖아. 그게 장의사에게 맡기는 거와 다를 게 뭔데? 적어도 장의사는 능숙하기라도 하지. 난 이미 가족의 장례식을 여러 번 치렀어. 내 말 들어.”

벨리타가 살던 세상의 일은 처음 듣는다. 데이비드는 반박할 말을 고르다가 이내 입을 다물어버렸다. 이미 여럿 겪어 보았던 상실감과 무거운 슬픔이 얼굴에 묻어나서 따질 생각도 들지 않는다. 얼마나 슬퍼하고, 얼마나 그리워하며, 얼마나 좋은 곳에 가길 빌어주는지가 중요하다.

데이비드가 못내 고개를 끄덕거렸다. 데이비드의 승낙을 확인한 벨리타가 등받이에 등을 기댔다.

“그럼 의뢰는 내가 넣을 테니까, 날짜 잡히면 얘기해 줄게.”

데이비드는 벨리타에게 괜찮으냐는 질문을 하지 못했다. 조슈아와 꽤 가까운 사이었으니까. 애초에 벨리타를 누님이라고 불러도 되는지도 모르겠다.

데이비드가 편지를 곱게 접어 벨리타에게 돌려줬다. 이내 적막이 찾아왔다. 서로 쳐다만 보며 입을 열지 않았다. 안부 인사를 묻기에는 관계가 너무 멀리 와 버렸나. 아니다. 회복할 수 있다.

데이비드가 굳은 얼굴로 근황을 캐물었다.

“최근 바쁘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하녀장이 저택으로 근황을 적어서 전서구를 보내주더군요. 로틀 남작의 상단을 받았다죠. 가게도 새로 연다고 하시고.”

“……어어.”

다 알고 있구나. 벨리타가 괜히 크게 숨을 내쉬었다. 예전이었다면 왜 자신만 빼놓고 일을 벌이냐고 찡얼댔을 텐데. 이렇게나 거리가 멀어졌던가.

벨리타가 이마에 손을 얹고 의자에 늘어졌다. 속이 답답하다.

“너는 어때? 저택은 여전한가?”

“꽤 삭막합니다. 애완견이라도 들여야 하나, 싶을 정도로.”

“개는 털 날려……. 내일 점심 먹고 면회나 가자.”

근데 내가 가도 되려나. 어차피 가짜인데. 벨리타가 작게 중얼거렸다.

데이비드가 책상을 내리쳤다. 쿵, 소리와 함께 쌓인 서류들이 흔들렸다. 큰 소리에 놀란 벨리타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데이비드를 올려다봤다.

데이비드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선 씨근덕거리고 있었다.

왜 화내? 어이가 없는 벨리타가 질문을 삼켰다.

“당연히 오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 가족이잖습니까!”

“…….”

“부모님은 아무것도 모르시는데……!”

아무것도 모르고 오매불망 딸을 기다리고 있겠지. 진짜 딸은 죽었다는 것도 모르고.

말할 생각은 없다. 일기장을 본 데이비드의 반응을 보고 마음을 굳혔다. 적어도 테일러와 라빌에게 알리지 않기로. 벨리타의 마지막 호의이자 양심으로, 아무것도 모르는 채 살게 두기로 했다. 기생충처럼 몸을 빼앗은 벨리타가 해 줄 수 있는 건 그뿐이다.

대답 없는 벨리타의 반응에 가슴께를 쿵쿵 두드린 데이비드가 소리쳤다. 괜한 벨리타에 대한 죄책감 때문에 격한 반응이 나오는 것 같았다.

“그럼 죽을 때까지 만나지 않을 생각이십니까? 가짜라고 해도, 가족입니다. 그래도 정은 들었을 거 아닙니까.”

벨리타는 무심코 부모님의 부고를 전해 들은 순간을 떠올렸다. 세상이 무너지고 눈물밖에 나오지 않았던 그때. 벨리타는 지독하게 후회했었다.

더 자주 만나러 갈걸. 전화라도 자주 할걸. 하다못해 사랑한다는 말이라도 더 많이 할걸.

오열 속에 후회가 섞이고 끝도 없이 쏟아졌었다.

이번에도 그런 후회를 하게 될까. 벨리타는 더는 후회하고 싶지 않았다. 이미 너무도 많은 후회를 겪었다.

마지못해 벨리타가 고개를 끄덕거리자 데이비드의 상체가 무너졌다. 책상에 엎어진 데이비드에게 타박해야 할지 걱정을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는 사이, 데이비드가 작게 중얼거렸다. 고요한 집무실 안은 작은 말소리마저 크게 울렸다.

“평생 그곳에 갇혀 계시게 되면……. 저는 이제 어떻게 버팁니까.”

아직 열여덟의 아이는 부모의 부재에 의연하지 못했다. 떨어져 있는 동안 저택에서 데이비드가 어떻게 버텨왔는지는 모르지만, 라빌과 테일러가 안전하리라는 희망이 마지막 버팀목이었던 건 알 것 같았다.

벨리타가 저도 모르게 뻗었던 손을 거두었다. 데이비드가 처박았던 고개를 든다. 눈물이 그렁그렁해져서 애써 울음을 참고 있었다.

“저는 누님이 필요합니다. 가짜여도 좋아요. 어차피 제가 아는 누님은 당신입니다.”

말하면서도 북받쳐 오르는 감정을 어찌할 수 없어 결국 울음이 터졌다. 말할수록 서러워진다.

데이비드는 양손에 얼굴을 파묻고 오열했다. 책상에 기댄 채 무너진 꼴이 하찮았지만 벨리타는 오열하고 있는 가짜 남동생이 안쓰러웠다.

거두었던 손을 다시 내밀어 데이비드의 머리에 얹었다. 노란색이 감도는 주황빛 머리가 손가락에 얽혔다.

“행복해지려는 순간마다 왜 이렇게 괴로운 일이 일어나는지 모르겠습니다. 다 제 탓인 겁니까. 제가 감히 욕심을 부려서 다 망치는 겁니까.”

“……왜 그런 생각을 해.”

“다 사라집니다. 손에 쥐었다고 생각하면 얼마 안 가 다 사라지고 맙니다. 가지면 안 될 걸 감히 탐낸 죄라는 듯이. 다…….”

데이비드가 가장 바랐던 것은 가족이다. 누나와의 관계 개선, 부모님의 인정과 애정이었다.

데이비드는 실제로 이루었다. 소원을 이루고 원하는 삶을 살게 되었다. 잭슨에 의해 부모가 갇히고 누나가 다른 사람이었다는 비극적인 결말이 이어졌지만.

데이비드는 어렸고 심약하다. 어른스러운 척하지만 본질은 아이였다. 벅찬 고난을 감당하기에는 어린 나이.

벨리타는 자신의 상태를 돌아봤다. 위태로운 아이를 감당할 상황이 되는지. 말없이 데이비드의 머리카락만 무성의하게 쓰다듬자 결국 데이비드가 애처롭게 고개를 들었다.

“그게 왜 네 탓이야. 굳이 말하면 내 탓인 거지.”

“예?”

“네가 바란 건 당연한 거였어. 당연히 누려야 할 것. 그게 왜 죄야?”

고저 없는 벨리타의 덤덤한 목소리가 되레 눈물샘을 자극했다. 데이비드가 아이처럼 소리 내어 울었다. 당연한 것도 눈치를 봐가며 원해야 했던 데이비드는 죄책감을 덜어낼 수 있었다.

데이비드가 머리를 쓰다듬는 벨리타의 손을 쥐었다. 데이비드가 헐떡이며 초조하게 지껄였다.

“누님도……. 누님의 탓이 아닙니다. 진심입니다. 아니, 누님의 탓이어도 괜찮습니다.”

데이비드가 겨우 꺼내놓은 진심은 벨리타에게 닿지 못했다. 어찌 되었든 벨리타의 탓이 맞으니까. 벨리타가 이곳에 와서 모든 걸 망쳤으니까.

데이비드의 어설픈 위로는 벨리타에게 흔히 뱉어지는 가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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