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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이 쓴 로판 소설에 빙의되어버렸다-124화 (124/150)
  • 124화.

    질투는 아닐 거다. 오웬이 질투하는 꼴은 본 적이 없으니까. 하녀장에게 할 이유도 없다. 오웬이 사람 많은 현관에서 이러는 까닭은 그저 삐진 자신을 달래주다 일하러 가 버릴 벨리타가 야속해서겠지. 아마 벨리타가 오웬을 두고 일하려 가도 그러려니 할 거다.

    오웬의 속을 짐작한 벨리타가 눈을 가늘게 떴다. 오웬의 볼을 덥석 쥐었다. 한 손으로 휘어잡은 볼이 눌려 우스꽝스럽게 입술이 튀어나왔다.

    서로의 얼굴을 잡은 우스운 상황에, 하녀장은 자리를 떠나 주어야 하나 고민했다.

    “놔라.”

    “네가 놔.”

    “네가 먼저 잡았잖아. 놔, 인마.”

    져주는 건 언제나 오웬의 몫이었으나 이번만큼은 아니다.

    애인 사이가 되자마자 미친 꼴을 봐야 했고, 일하느라 뒷전으로 밀려났으며, 분위기 타서 뽀뽀 좀 했다고 얻어맞은 뒤 버려졌다.

    솔직히 이번 정도는 화내도 되지 않아?! 나도 사람인데, 서운하다고!

    벨리타의 턱을 감싸던 손이 볼을 꾹 눌렀다. 벨리타의 입도 오리처럼 튀어나왔다. 지켜보는 하녀들은 억지로 웃음을 참느라 어깨가 들썩거렸다. 지금의 행동만 보아서는 둘의 사이가 연인이라는 사실을 아무도 알아주지 않을 거다.

    옥신각신, 둘의 말다툼이 길어진다. 유치하게 먼저 놔라, 동시에 놓자, 하나 둘 셋 하면 놓자, 로 이어졌다. 하녀들은 이제 대놓고 입을 틀어막은 채 웃었다.

    하녀장이 헛기침을 하자 벨리타와 오웬이 하녀장을 보았다.

    “보는 눈이 많습니다. 오웬 님과 하실 이야기가 있다면 저는 나중에 찾아뵙겠습니다.”

    점잖은 말투와 목소리에 전투 의지를 잃은 벨리타와 오웬이 동시에 서로의 볼을 놓았다. 사람이 많은 것도 잊었다.

    멋쩍게 뒷목을 긁적거린 벨리타가 하녀장에게 다가가다가 덜컥. 옷깃을 붙잡는 오웬 덕에 더 걷지 못하고 돌아봤다. 오웬이 무척이나 서운해하며 벨리타를 노려본다. 달래주기는 해야 하지만, 일이 우선이다. 벨리타가 오웬의 손을 조심스럽게 밀어냈다.

    “밤에 보자. 네 방에서 기다려. 내가 확실히 달래줄게.”

    확실히 달래준다는 의미를 완벽하게 알아들었다. 기대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다. 다만 오웬은 벨리타가 자신을 두고 일을 택하리라는 걸 짐작하고 있었다. 애초부터 그런 사람이다. 예전이었다면 더 장난치지 못해 아쉬울 뿐이었겠지만 지금은 이상하게 서운하다.

    오웬은 벨리타의 옷을 잡던 손으로 허공을 두어 번 쥐었다 놓았다. 가지 말라고 잡아도 자신에게 집중하지 못할 걸 알아서. 오웬이 비 맞은 강아지처럼 고개를 끄덕거렸다.

    착하다. 벨리타가 오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오래간만에 예쁜 옷 입고 머리도 곱게 넘겼는데 제대로 된 데이트도 해 주지 못해서 미안했다. 나중에 실컷 놀아 줘야지.

    헤집은 머리를 정돈해 주고 벨리타가 등을 돌렸다. 고개를 숙이고 얌전히 머리를 내어주던 오웬의 귀는 붉게 물들어 있었다. 반칙이다. 벨리타, 진짜 반칙이다. 당연히 보내줄 수밖에 없잖아.

    오웬의 속을 모르는 벨리타가 하녀장의 앞에 섰다. 하녀장이 곁눈질로 오웬을 확인했다. 저 상태면 벨리타를 데려가도 괜찮을 듯했다.

    “집무실로 가죠.”

    집무실 방향을 손가락으로 가리킨 벨리타가 앞장섰다.

    *

    마차에 작은 짐들이 실렸다. 이른 아침부터 사람들은 바쁘게 움직였다. 집사장은 마차에 실린 짐들을 확인하다 주인을 발견하고 고개를 숙였다. 집사장을 따라 모든 사람이 고개를 숙였다.

    멀끔한 정장을 차려입은 데이비드가 서류를 넘기며 저택에서 걸어 나오고 있었다. 발걸음에 피곤이 묻어 있고, 한숨에 고단함이 어려 있다.

    마차 앞에 다다를 때까지 묵묵히 서류를 확인하던 데이비드가 휴대용 펜을 휘갈겨 서명한 후, 집사장에게 건넸다. 집사장이 공손하게 서류를 받아 들었다.

    “아카데미에 들렀다가 바로 돌아오실 겁니까?”

    “아마. 조기졸업 확인받고 돌아올 거야.”

    데이비드가 고개를 까딱거렸다. 덜컹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저 멀리서 마차가 달려온다. 또 무슨 일인지. 방문 일정은 며칠 동안 없을 텐데.

    집사장도 다가오는 마차를 발견했는지 확인하고 가시겠느냐며 물었다. 데이비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잠도 줄이고 일을 처리하느라 머리가 지끈거렸다. 가는 길에 잠이라도 푹 자야겠다.

    마차를 기다리는 동안 데이비드가 미간을 짚고 집사장에게 말을 걸었다.

    “상단의 상황은 어때? 누님께서 잘하고 계셔?”

    “네. 아직은 큰 차이가 나지 않지만 점차 수익이 늘어날 전망으로 보입니다.”

    “그렇구나.”

    꽤 걱정을 많이 했는데. 경영 교육을 받지 못한 벨리타였으니 염려가 되기는 했다. 그래도 잘 지내는 모양인가 보다. 기분이 오묘하다.

    데이비드는 억지로 괜찮아지려고 노력했으나 괜찮지 못했다. 교육을 받아왔지만, 갑자기 시작하게 된 일은 버거웠고, 아버지의 부재가 벅찼다.

    홀연히 수도로 떠난 벨리타가 잘 지내는 듯 보이니 얄밉기도 하고 다행이기도 하다. 수도에서 벨리타와 함께 보냈던 시간이 좋았던 때였구나. 데이비드가 허벅지를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보러 가도 될까. 수도에는 아카데미가 있고 벨리타가 있다. 아카데미에 가는 길에 한 번쯤 들러도. 얼굴만 보고 가도 좋지 않을까.

    침잠하는 데이비드의 안색을 눈여겨보던 집사장이 희끗희끗한 머리를 넘겼다.

    “황제 폐하께서 소이트 상단을 넘겨주셨다는 소식도 있습니다.”

    “뭐?”

    마른세수하던 데이비드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데이비드는 잭슨이 미쳤나 싶었다. 파텔 상단도 큰 규모인데, 수도를 삼킨 소이트 상단마저 같은 가문의 사람에게 준다고? 경제를 흔들 권력을 벨리타에게 모두 몰아준다?

    이건 황제가 미친 선택을 한 것이다. 상단을 받았다면 귀족들이 데이비드에게 편지를 보내주었을 텐데, 데이비드는 처음 듣는 소식이었다.

    혼비백산한 데이비드를 가만히 바라보던 집사장이 조용히 헛기침하며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이어지는 집사장의 말은 데이비드의 혼을 쏙 빼놓았다.

    “전서구로 오늘 아침 받아본 소식에 의하면, 아가씨께서 음식점도 열 계획이라고 하십니다.”

    “누님이?”

    일에 미친 건가? 그동안 여기저기 쏘다니고 미친놈들만 줄줄이 소시지로 엮어오더니.

    데이비드가 혀를 차며 이마를 짚었다. 마차가 가까워진다. 데이비드는 벨리타를 만나 보아야 하나, 고민했다.

    “소이트 상단은 파텔 소유가 아닌 아가씨 개인의 소유라고 전해 받았습니다.”

    황제가 미쳤나? 데이비드가 애써 황족모독죄로 잡혀갈 만한 생각을 속으로 삼켰다.

    파텔 상단은 가문의 소유지만, 벨리타가 운영권을 쥔 이상 소이트 상단에 이점이 되도록 계약을 바꾸고 운영에 손을 댈지도 모른다.

    벨리타를 신뢰하지만, 사람의 위치가 사람을 바꾼다. 가주가 되기 위해 기를 쓰고 버티던 데이비드가 가주가 되자마자 모두 내려놓고 떠나고 싶은 것처럼.

    벨리타라고 욕심이 없진 않을 거다. 온전한 소유의 상단이 제국 최고가 되길 누가 바라지 않을까.

    데이비드가 초조하게 허벅지를 주먹으로 툭, 툭, 내리쳤다. 마차가 철문 앞에 섰다. 파텔 문양이 박힌 마차에서 시종이 뛰어내렸다. 한바탕 바닥을 구른 시종이 데이비드의 앞에 무릎 꿇고 앉았다. 누가 보면 프러포즈라도 하는 모양새다.

    자세에 당황할 여유도 없이 시종이 편지를 꺼내 데이비에게 바쳤다. 허술한 포장을 보니 벨리타가 보냈으리라.

    데이비드가 마른침을 삼키고 편지를 받았다. 어떤 내용이 적혀 있을지. 모두가 데이비드를 바라봤다.

    시선을 느낀 집사장이 가는 길에 확인하는 게 어떠하냐 권유했다. 편지에 정신이 팔린 데이비드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끄덕거렸다.

    편지를 챙긴 데이비드가 마차에 올라탔다. 기다렸다는 듯 마차가 출발했다. 매끄럽게 길을 내달리는 마차 안에서 데이비드는 피곤한 눈가를 문질렀다.

    편지를 볼 용기가 나지 않는다. 벨리타에게 다시는 보지 말자고 했으면서 의지하게 해달라고 매달리던 게 최근이다. 벨리타의 상태가 호전되면 다시 만나자고 했지만, 이 짧은 사이에 나아질 리가 없다.

    가주의 자리를 빼앗으려고 하나? 아니, 벨리타라면 가족의 연을 끊자고 했을 수도 있다. 가주가 되면 벨리타를 쫓아낼 생각을 하기는 했지만, 지금은 아니다. 원치 않는다. 데이비드가 마음을 터놓고 대할 수 있는 사람은 벨리타뿐이다.

    눈을 질끈 감고 편지 봉투를 뜯었다.

    바스락거리는 종이의 소리가 사형선고처럼 들린다. 하지만 편지지도 아닌 흔한 종이에 대충 적어 놓은 걸 보니 괜히 안심됐다. 티격태격 싸웠던 시절의 벨리타와 같아 보여서.

    긴장을 누그러트린 데이비드가 글을 읽었다.

    [나 벨리타.

    라빌이랑 테일러는 안전해.

    사형시키지는 않겠대. 대신 몇십 년은 유폐될 거라더라.

    살아 있는 게 어디야, 그치?

    잭슨이 면회 허락해 줬으니까 찾아와. 같이 보러 가자.

    기다릴게.

    너 아카데미 가고 있기는 해?

    아무리 바빠도 졸업은 해라.

    나 잭슨한테 상단 받음. 부럽지.]

    힘이 빠진다. 걱정이 무색하게 벨리타는 평온했다. 언제 언성을 높였느냐는 듯,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속내를 모르겠다. 전에는 다 알 것 같았는데.

    두서없는 말들과 격식 없는 편한 말투가 여전히 벨리타지만.

    일이 잘 풀려서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다.

    무거운 숨을 길게 뱉은 데이비드가 편지를 접어 안주머니에 넣었다. 일정을 수정해야겠다.

    *

    닷새 동안 누구를 만날 시간도 없이 일에 치였다. 재정 상태를 확인할 사람보다 모든 일을 능동적으로 처리해 줄 사람이 필요해 비서를 고용했고, 소이트 상단의 고용인들도 돌아왔다.

    모든 일이 순조롭게 풀리고 있지만, 음식점에 투입할 요리사 한 명이 부족했다. 그래서 고민하지 않고, 말로만 설명한 한식의 조리법을 완벽히 해내던 주방장을 집무실로 불렀다.

    요리가 개떡 같아서 불렀을까 봐 식은땀을 줄줄 흘리는 주방장을 훑어보던 벨리타가 평온하게 거래를 제시했다.

    “곧 내가 음식점을 열어요. 여기 말고 거기서 일하시죠.”

    명령과 다름없는 말투였지만 피곤함에 절은 벨리타에게는 최대한의 상냥함이었다. 주방장은 결국 쫓겨난다는 생각에 눈물을 글썽거렸다. 벨리타가 다 식은 차를 단번에 목구멍에 꽂아 넣고 턱을 괴었다.

    “돈 더 줄게. 당신 말고 해 줄 사람이 없어서 그래요.”

    “저 안 잘려요?”

    “내가 왜 잘라요?”

    서로 멀뚱멀뚱하게 눈만 끔뻑거렸다. 벨리타가 한숨을 내쉬며 미간을 짚었다. 잠이 부족하다. 비서가 도와주고 있지만 일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벨리타가 할 일이 더 많았다. 나중에는 사람 더 고용해서 다 떠넘겨야지.

    벨리타가 지친 기색이 역력한 태도로 말을 이었다.

    “총주방장이에요, 당신이. 할 거예요, 말 거예요?”

    “할게요.”

    “옳지.”

    주방장은 신나서 머리를 몇 번이나 숙이곤 떠났다. 건물은 성공적으로 매입했고, 인테리어 디자인을 확인 뒤 공사에 착수하면 된다. 일정이 빠듯하다. 엘라도 바쁜 벨리타를 따라다니며 시중을 드느라 병든 닭처럼 골골댔다.

    벨리타가 손바닥으로 얼굴을 마구 문질렀다. 그 순간, 디저트를 받아오려 떠난 엘라가 빈손으로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뭐야. 왜 빈손이야.”

    “아가씨!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에요! 도련님! 도련님! 돌아옴!”

    “뭐시라?”

    펄쩍펄쩍 뛰어 들어온 엘라가 벨리타의 팔을 잡고 의자에서 끌어냈다. 엉겁결에 일어난 벨리타도 엘라를 따라 펄쩍펄쩍 뛰어 계단을 내려갔다.

    쿠당탕, 뛰지 말라고 타박할 사람은 저택에 없었기 때문에 세 칸씩 계단을 내려온 벨리타가 순식간에 문 앞에 섰다. 마차를 뒤로하고 주머니를 뒤적거리던 데이비드가 벨리타를 발견했다.

    웃어야 할지 기뻐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얼굴의 데이비드가 어색하게 굳어 입만 달싹거렸다.

    “……누님.”

    벨리타도 답장 없이 늦은 저녁에 들이닥친 데이비드에게 화를 내야 할지, 반갑다고 인사해 줘야 할지 결정하지 못하고 어색하게 입을 벌려 웃었다.

    분위기를 환기시켜 줄 오웬이 시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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