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화.
주머니와 옷 사이에 낀 보석을 털어내며 오웬과 엘라가 일어섰다. 케린의 메모장을 뜯어 펜을 휘갈긴 벨리타가 엘라에게 메모를 건넸다. 주춤거리면서 다가온 엘라가 종이를 받아 들었다.
[실력이 출중한 요리사 다섯 넘게 구해올 것.
직업 정신 투철한 웨이터, 웨이트리스 열 넘게 구해오고 가게를 전담할 담당자 둘 구해.]
열여섯의 엘라는 쉽게 이해하지 못했다. 주인을 보필할 줄만 알지 누군가를 고용하는 일은 해 본 적 없었던 탓이다.
종이를 반듯이 접은 엘라가 안주머니에 메모를 넣었다. 벨리타에게 도움이 되고 싶은데 잘할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질 않는다.
발끝을 바닥에 툭, 툭, 두드린 엘라가 다시 케린의 메모장을 뜯은 벨리타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가씨, 저……. 제가 잘할 수 있을까요?”
순식간에 종이 두 장을 강탈당한 케린이 눈치를 살폈다. 벨리타는 태연하게 시선을 종이에 두고 글을 적으며 대답했다.
“집으로 돌아가서 하녀장에게 보여 줘. 저녁에 나랑 의논하자고 전해 주고.”
혹시나 했지만 역시 엘라는 할 일이 없었다. 벨리타에게 도움이 되고 싶었는데.
엘라가 손가락을 꼼지락대다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직 자신이 부족하니 중대한 일을 맡기기 염려되는 거겠지.
빠르게 글을 적은 벨리타가 오웬에게 종이를 내밀며 심드렁하게 말했다.
“나중에 살려달라고 빌 만큼 일 시킬 테니까 빨리 가서 전해 줘.”
때가 아니라는 말이다. 엘라가 할 일은 많다는 뜻도 된다. 엘라는 환하게 핀 미소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집에서 뵙겠다는 인사와 함께 엘라가 사무실을 떠났다.
걸음을 재촉하면서도 엘라가 기뻐 보였기에 벨리타는 크게 숨을 내쉬며 평온하게 웃었다. 귀여운 엘라 같으니라고.
메모를 받아 든 오웬이 글을 읽다 놀란 체를 했다. 케린은 자신이 이곳에 남아 있을 이유가 있나, 잠시 고민했다.
벨리타가 남긴 글은 짧았다. 음식점을 열 테니 따라다니면서 적절한 구매를 하도록 도와달라는 문장. 벨리타가 자신을 의지하고 있다는 사실이 무척 기뻤지만 오웬의 전문 분야는 아니었다. 적합한 인물은 조슈아다. 이미 죽었지만. 근래 들어 빈자리가 크게 느껴진다. 오웬과 가까운 사이가 아니었음에도 와닿는 부재가 떨떠름하다.
벨리타의 눈높이까지 상체를 숙인 오웬이 작게 속삭였다.
“사람을 고용하는 게 어때? 재정 관리를 맡아 줄 고용인으로.”
맞는 말이다. 맡긴 일을 척척 해내는 오웬에게 너무 의지하고 있었다. 벨리타는 멋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언제부터 오웬을 이렇게나 맹신하고 있었을까.
케린이 큼, 헛기침했다. 벨리타가 화들짝 놀라 케린을 돌아봤다. 가게를 열 생각에 신이 나서 잊어버렸다. 벨리타는 나중에 마저 이야기하자며 오웬의 어깨를 토닥거렸다.
하고 있던 이야기가 뭐였더라. 벨리타가 기억을 되짚는 사이, 어느새 오웬이 벨리타의 뒤에 서서 나름대로 의젓하게 호위 노릇을 했다. 나누던 대화를 떠올린 벨리타가 탄성을 뱉었다.
“상단 재정 상태와 계약서들, 주 수입원들도 알려 주세요.”
유능한 상사면 상사가 고블린이든 용이든 상관없는 케린은 상단의 재정이 얼마나 넉넉한지 설명했고, 수북이 쌓인 계약서들을 하나하나 내려놓으며 곧 종료될 계약과 반드시 갱신해야 하는 계약들도 짚어 주었다.
벨리타는 꼼꼼히 확인하면서도 궁금한 점들을 되묻고 완벽히 숙지해 갔다. 심심해진 오웬이 주위를 둘러봤다.
케린이 갑자기 칼을 들고 설쳐도 순식간에 제압할 수 있고, 암살자들이 들이닥쳐 몰살하려고 들어도 멱을 딸 수 있는 오웬이 긴 다리를 휘적거리며 주위를 둘러봤다. 책도 무수히 많고 장식장도 화려하다.
보석과 훈장, 장식품을 훑어보던 오웬이 눈을 가늘게 떴다. 웬 신발이지? 공들여 만들어진 것 같긴 하지만 장식장에 넣을 만큼의 수준 높은 구두는 아니다. 작은 쪽지가 얹어져 있었지만 읽을 마음은 들지 않았다.
조슈아의 취향에 대해 의문을 가지게 된 오웬은 책상에 엉덩이를 걸쳐 앉았다. 접객용 테이블을 향해 눈을 돌린 오웬이 콧노래를 흥얼댔다.
조슈아와 주술서를 계약했다는 사실을 이야기해 줘야 할 텐데. 벨리타와 케린은 깊이 있는 이야기를 나누고 있으니 오웬이 끼어들 틈도 없다.
벨리타가 상단을 소유하게 될 줄 알았으면 계약을 느슨하게 해도 좋았을 것이다. 하다못해 주술서를 더 개발해 두었거나.
오웬은 나날이 쌓이는 돈으로 만족하기도 했고, 벨리타를 그의 세상으로 돌려보내 주기 위해 바빴던 탓에 주술서를 개발하지 못했다. 벨리타가 없었다면 벨리타를 위해 개발한 폭발 마법은 주술서로 만들어졌을 거다. 돈벌이가 꽤 잘되었을 텐데.
슬슬 다른 상단에서도 오웬의 주술서를 모방하기 시작했으니 새로 개발을 하긴 해야 할 터다. 시간이 날지 모르겠지만.
오웬의 콧노래를 들은 벨리타가 시끄럽다며 타박했다. 오웬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웃어넘겼다.
케린은 꽤 유능한 벨리타를 보고 기뻐하며 열심히 설명을 늘어놓았다. 지루하다. 오웬은 조슈아의 의자에 앉아 하품했다. 저녁이 되기 전엔 끝나려나.
기대가 무색하게 저녁이 되고 난 후에도 대화가 이어졌다. 오웬은 슬슬 벨리타를 데리고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일이 즐거운 건 알지만 무리하면 과유불급이다.
오웬이 술식을 적던 종이를 말아 주머니에 쑤셔 넣고 벨리타에게 다가갔다. 신이 난 벨리타의 어깨를 두드리자 화들짝 놀라며 오웬을 올려다봤다. 토끼 눈처럼 동그랗게 뜬 채 입을 꾹 다문다. 막무가내로 입 맞추고 싶은 충동이 들었지만 이겨낸 오웬이 살갑게 웃었다.
“슬슬 돌아가야 해요, 아가씨.”
“징그럽게 무슨…….”
존댓말과 존칭에 소름이 돋은 벨리타가 인상을 찌푸리며 일어났다. 케린도 따라 일어선다.
벨리타가 피곤해진 눈가를 주무르며 오웬에게 서류들을 챙기라고 지시했다. 당연한 듯 명령하고 오만하게 구는 벨리타의 태도에 오웬은 살짝 두근거렸다. 엘라가 왜 벨리타에게 변태처럼 구는지 이해가 갈 것 같기도 했다. 완전 멋있어. 조곤조곤 논리적으로 혼나고 싶어.
나눈 대화를 옮겨 적은 메모장을 챙긴 케린이 상체를 숙여 인사했다. 양손 가득 서류를 든 오웬이 벨리타의 옆에 붙어 섰다.
케린의 인사를 정중하게 받은 벨리타가 오웬의 어깨에 고개를 기댔다. 케린이 사무실에서 나가자마자 벨리타가 오웬의 등짝을 거칠게 내리쳤다. 벨리타에게 맞은 건 오랜만이어서, 오웬은 자신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왜 때려?!”
가득 서류를 안고 있는 탓에 맞은 부근을 문지를 수도 없다. 등짝이 얼얼해서 눈물이 찔끔 난다. 뒤로 물러난 오웬이 몸을 꼬았다.
벨리타는 꽈배기처럼 몸을 꼬는 오웬을 선뜩하게 노려본다. 그러고는 건달처럼 침 뱉는 시늉을 했다.
“너 조슈아랑 계약했더라? 돈 엄청 벌고 있더라? 어?”
“그게 뭐, 어쨌는데.”
난폭한 벨리타도 당황스럽지만 맞은 등짝이 더 아프다. 오웬이 벽에 등을 문지르며 반박했다.
벨리타가 드레스 치맛자락을 한 손으로 그러모아 움켜쥐곤 짝다리를 짚었다. 건들거리는 꼴이 영락없는 양아치였다.
“내가 너 먹여 살리려고 고생하고 있었는데. 말도 안 하고 부양받을 생각하니까 좋더냐?”
“안 물어봤잖아.”
“콱, 그냥. 어디서 말대답이야. 맞을라고.”
오웬은 억울해졌다. 귀족 못지않은 재력이 있기는 하지만 벨리타가 가진 만큼은 되지 못한다. 그나저나 먹여 살려?
오웬이 눈을 접으며 미소 지었다. 그새 능청스러운 태도로 돌변한다. 벽에 등을 문지르니 아픔도 미미해졌고 무엇보다 먹여 살리려고 했다는 말이 놀리기 딱 좋았다.
오웬이 성큼성큼 벨리타에게 다가갔다. 상체를 숙이고 코앞까지 얼굴을 들이민다. 벨리타가 고개를 뒤로 내뺐다.
“먹여 살려 준다고~? 언제부터 준비했는데? 우리 오늘부터 연애하기로 한 거잖아. 응? 전부터 나랑 연애할 준비를 하고 있었던 거야?”
“미쳤냐?”
질색한 벨리타가 오웬의 얼굴을 밀어냈다. 볼이 눌리고 얼굴이 뭉개져도 오웬은 굴하지 않았다. 놀리는 게 제일 재밌다.
더욱 얼굴을 들이밀며 몸을 붙인 오웬이 능글거리는 미소를 지었다. 말끝을 늘려주는 것도 잊지 않는다.
“애인을 먹여 살릴 필요가 있나? 응~? 결혼하는 사이에나 생각할 문제 아닌가? 첩도 아니고 누가 애인을 먹여 살려~?”
정곡을 찔렀다. 벨리타의 얼굴이 점점 붉어졌다. 이게 다 오웬이 첫 데이트 때 결혼 이야기를 꺼내서 그렇다. 자신도 모르게 오웬과 결혼할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거다.
부끄러워진 벨리타가 씨근덕거리며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와 동시에 콱, 오웬의 정강이가 신코에 부딪혔다. 긴 다리를 걷어차인 오웬이 악, 소리를 내며 몸을 웅크렸다.
기회를 놓치지 않는 벨리타가 주먹을 쥐고 오웬의 등과 어깨를 두들겨 팼다. 장난 가득한 솜방망이 주먹이다. 걷어차인 정강이는 진심이어서 눈물 나게 아팠다.
오웬이 앓는 소리를 내며 완전히 몸을 웅크려 바닥에 서류를 내려놓았다. 벨리타의 주먹질은 멈추지 않았다. 팡, 팡. 얻어맞는 소리가 가볍고 경박했다. 가만히 맞고만 있던 오웬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벨리타의 손목을 붙잡는다. 힘을 주지 않아 언제든 손목을 뺄 수 있었지만 벨리타는 그대로 움직임을 멈추고 오웬을 올려다봤다.
오웬도 벨리타의 손목을 쥐고 얼굴을 가까이했다. 한참을 서로를 바라봤다. 숨이 닿을 거리에서 바라만 보던 둘의 적막을 깬 것은 오웬의 입맞춤이다. 쪽, 입술끼리 맞닿았다가 떨어진다.
예상하지 못한 입맞춤이다. 야살스럽게 눈을 접어 웃는 오웬의 얼굴도 치명타였다. 벨리타는 거세게 뛰는 심장에게 가만히 있으라며 채찍질하고 싶어졌다.
벨리타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오웬은 곧장 눈썹을 늘어트리고 우는 시늉을 했다.
“나 다리 부러진 것 같아, 자기야…….”
분위기 좋았는데. 결혼하자고 하면 받아줄 생각이 있었던 벨리타가 잡힌 손목을 빼내고 짜증을 담아 오웬의 머리를 힘주어 눌렀다. 오웬이 고꾸라진다.
바닥에 주저앉은 오웬을 씨근덕거리며 바라보다 혀를 찼다. 장난치다가 나라 말아먹어도 좋다고 웃을 놈.
벨리타가 거칠게 발을 구르며 문으로 걸어갔다. 오웬이 벨리타를 다급하게 불렀지만 벨리타는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쾅! 문이 닫힌다.
오웬은 사무실 바닥에 처량하게 주저앉은 채 굳게 닫힌 문을 바라봤다. 가끔 이유 모를 행동하는 벨리타를 어찌 대해야 할지 모르겠다. 오웬이 정강이를 문지르며 우는 소리를 냈다.
*
집까지 마차로 돌아온 벨리타는 오웬을 버려두고 왔다는 사실을 뒤늦게야 깨달았다.
마차를 탄 직후에는 부끄러움과 민망함에 욕하느라 오웬을 잊었고, 중반부터는 상단의 일과 음식점의 일로 고뇌하느라 오웬을 잊었다.
저택의 문 앞에서 원망스러운 눈으로 벨리타를 노려보는 오웬을 보고서야 버려두고 왔음을 눈치챘다.
당황한 벨리타가 오웬을 달래주려고 했지만 그는 새침하게 고개를 틀며 서류는 집무실에 놓았으니 잊지 말고 확인이나 하세요, 라고 삐졌음을 어필했다.
벨리타가 오웬의 재킷을 잡고 어색하게 웃었다. 오웬은 꿋꿋하게 고개를 든 채 투덜거렸다.
“어떻게 애인을 잊을 수가 있어~ 그것도 만난 지 하루도 안 된 애인을. 무거운 서류 들고 혼자 돌아오는 길이 얼마나 서럽던지! 장난 좀 쳤다고 어떻게 뒤도 안 돌아보고 가 버릴 수가 있어?”
“너 순간이동으로 왔잖아.”
“허! 참! 나! 이렇게 뻔뻔한 사람을 봤나! 세브릭 양, 당신은 어떻게 생각해요? 하루도 안 된 애인을 버려두고 가 버리는 게 말이나 된다고 생각하세요?”
예? 지나가던 하녀 세브릭이 얼떨결에 대답했다. 벨리타는 환장할 노릇이었다. 쓰레기랑 사귄다고 동네방네 소문을 내라, 아주.
벨리타가 오웬의 멱살을 잡으려던 순간, 하녀장이 다가왔다.
“아가씨.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잊고 있었다. 오늘 왜 이리 잊는 게 많지. 벨리타가 오웬과 하녀장을 번갈아 바라봤다. 하녀장을 향해 입을 달싹이려는 순간, 오웬의 손이 벨리타의 턱을 부드럽게 움켜쥐고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자신의 쪽으로 돌렸다. 오웬이 퉁명스럽게 입술을 비죽거렸다.
“어딜 봐.”
지금 하녀장에게 질투하나? 벨리타가 헛웃음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