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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이 쓴 로판 소설에 빙의되어버렸다-122화 (122/150)
  • 122화.

    산뜻하다 못해 상쾌해 보이는 벨리타에게 묻고 싶은 말이 많다. 잭슨과 소르니에게 자식인 체하지 말라고 언성을 높였던 벨리타 아니던가. 물론 소르니와 관계가 좋아지기는 했지만.

    오웬은 벨리타가 저주나 마법에 걸렸는지 의심해야 했다. 의심은 병이라지만 많을수록 좋다는 게 오웬의 철칙이었기에.

    대놓고 묻지 못하고 맞닿은 신체 틈으로 마력을 흘렸다. 타인의 마력이 닿은 흔적이나 더 나아가 저주의 잔해까지 볼 수 있을 터였다.

    오웬은 가만히, 눈을 감고 흔적을 더듬어 갔다. 전신을 훑고 뒤엎어도 찾을 수 없었다. 오웬이 눈을 떴다. 벨리타의 낯이 일그러져 있었다.

    “뭐해?”

    벨리타가 침입한 마력을 인지하고 얼굴을 굳혔다. 순한 인상의 벨리타가 인상을 쓰면 더 귀엽지만, 살벌한 시선은 조금 무섭다. 오웬이 황급히 변명했다.

    “마력이 많이 늘었네. 조금만 더 쌓으면 서클을 만들 수 있을지도 몰라.”

    “갑자기?”

    “신경 쓰여서 그랬지. 네가 오죽 쓰러졌으면 걱정했겠어?”

    긴장한 것치곤 잘 나불댔다. 오웬은 자신에게 칭찬 도장을 찍어 주고 싶어졌다.

    의심하던 벨리타도 과거를 회상하고 이해했다. 벨리타가 생각해도 벨리타는 너무 자주 쓰러졌었다. 오웬이 걱정할 만하다. 갑자기 이러는 이유는 모르겠지만.

    여전히 장미를 꽂고 있는 오웬을 보았다. 사랑스러워서 카메라가 있다면 찍고 싶을 정도다.

    휴대전화, 아니, 최소한 디지털카메라라도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벨리타가 검지와 엄지를 세워 액자를 만들어 팔을 뻗었다. 프레임 안에 오웬이 딱 예쁘게 들어왔다. 사진이 없으니 이 순간을 남길 수단이 없어 아쉽다.

    영문 모를 행동하는 벨리타를 의아하게 바라보며 오웬이 앵글 속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이건 뭐야? 주술인가?”

    “사진 찍는 중이야.”

    “사진?”

    카메라가 없는 이곳에는 오로지 그림뿐이다. 정체 모를 명칭에 흥미를 느낀 오웬이 눈을 빛냈다.

    “내가 남기고 싶은 순간을 순식간에 남길 수 있는 거. 그림보다 정확하고 빠르지. 내 세상에 있던 거야.”

    “갖고 싶어. 있었으면 널 엄청나게 남겼을 텐데.”

    같은 생각을 하는구나. 벨리타가 조용히 웃었다. 앨범까지 만들었던 소중한 아이들이 있었는데. 오웬이 벨리타의 손목을 잡아 내렸다.

    “벨리타, 너의 아들과 딸도 사진으로 남겼겠네?”

    “당연하지. 앨범도 몇 권이나 있었는데.”

    꽤 밝은 목소리여서, 오웬은 안심했다. 두고 온 아이 생각에 괴로워하던 벨리타가 이제는 추억과 그리움으로 그들을 떠올렸다. 그래도 빠른 변화여서, 오웬은 자신이 잠시 떠난 사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캐물어 보고 싶어졌다. 오웬이 벨리타의 양손을 쥐고 마주 보고 섰다.

    “그래서 무슨 일이 있었는데? 후작님과 후작 부인의 안전도 확보했다고? 대체 언제?”

    정말 이야기하자면 길었다. 벨리타는 오웬에게 하나하나 모두 이야기해 줬다. 잠자코 듣던 오웬이 잭슨의 이야기가 끝나자마자 인상을 찌푸리며 짜증을 냈다.

    “아니, 애기 엄마. 그래도 아들이 잘못했으면 혼내야지. 당신은 너무 물러서 탈이야.”

    “얼씨구. 이보세요, 애기 아빠. 애가 잘못했다고 엉엉 울고 매달리는데 어떻게 그래? 너무 매몰차면 애 배려.”

    흐음, 낮게 침음을 흘리며 눈을 가늘게 뜬 오웬이 벨리타를 흘겨봤다. 벨리타도 오웬과 똑같이 가늘게 눈을 뜨고 오웬을 흘겨봤다. 그리고 곧장 먼저랄 것도 없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도 후작님과 후작 부인이 안전해져서 다행이네. 유폐라고 해도 지하 감옥과 다르게 황궁의 첨탑은 감옥치고는 살 만하니까.”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갔다 왔어?”

    “아버지에게 들었네요. 누굴 범죄자로 몰아.”

    편견이 이렇게 없어도 되는 거냐며 오웬이 헛웃음을 지었다. 최소 백작 가문 이상만 들어갈 수 있는 황궁의 첨탑인데, 평민인 자신이 어떻게 다녀오겠냐고. 물론 범죄를 저지르지도 않았다.

    오웬이 장난스럽게 맞잡은 손을 허공에 흔들었다.

    “그래도 난 네가 언제 황제를 따끔하게 혼내줬으면 좋겠어.”

    “엄청 혼냈다니까. 네가 봤으면 그만하라고 말렸을걸?”

    “체르핀 백작이랑은 언제 그렇게 가까워졌고?”

    잘만 대답하던 벨리타가 입을 다물었다. 약하게 불어오는 바람이 따뜻하다. 벨리타는 잠시 말을 고르다가 오웬의 손을 깍지 껴 잡았다.

    “그냥…… 불쌍하니까 잘해 줘야지 하다가 언제부터인지 진심이 되더라고.”

    “황제도 그렇고, 백작도 보기 힘들어했잖아. 이젠 괜찮은 거야?”

    오웬이 마른침을 삼켰다. 괜찮아졌으면 해서 묻는 말이기도 했다. 벨리타는 말없이 오웬을 바라보다가 미소를 지었다. 말갛고 청량했다.

    “인정하기로 했어. 너랑 했던 얘기가 계속 생각나더라고.”

    잔잔하게 불던 바람이 돌연 거칠어졌다. 툭, 장미가 떨어져 바닥을 구른다. 꽃잎도 떨어져 앙상해진 장미를 주운 벨리타가 다가섰다. 말쑥하게 넘긴 머리가 바람 탓에 엉망으로 헤집어진 오웬이 차오르는 감정을 애써 억누른다.

    “내 세상에 있었던 것도 나고, 지금 여기에 있는 것도 나라는 거. 이젠 내 삶이라는 걸 인정하고 나니까, 조금은 나아졌어.”

    오웬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벨리타가 힘겨워했던 모습들이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다.

    하얀 햇볕을 받으며 은은하게 웃는 벨리타가 자신의 귀 뒤에 꽂혀 있던 장미를 빼냈다. 행동하는 순간순간이 잘 그려진 유화를 보는 듯했다.

    지금이라면, 이런 질문을 해도 좋을 것 같아서. 오웬이 흐트러진 머리를 쓸어 넘기며 물었다.

    “벨리타. 지금 행복해?”

    두 장미를 대충 화단에 던진 벨리타가 오웬을 따라 흘러내린 자신의 머리를 넘기며 웃었다.

    “지금은 아니지만, 행복해질 수 있을 것 같아.”

    정말 행복해질 준비가 된 사람처럼 보였다. 그래서 오웬은.

    “그렇구나. 잘됐다.”

    성큼, 벨리타의 앞으로 다가간 오웬이 어깨를 끌어안고 얼굴을 묻었다. 코끝에 감도는 벨리타의 향은 달고 떫었으며 희미하게 종이 냄새와 잉크 냄새가 났다.

    정말 잘됐다. 오웬의 작은 목소리를 들은 벨리타가 오웬을 마주 끌어안았다.

    얼굴을 스치는 벨리타의 곱슬머리가 간지러웠다. 간지러워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한참을 부둥켜안고 있던 오웬이 벨리타의 뺨에 자신의 볼을 문질렀다.

    “상단 일은 어떻게 된 거야?”

    “주인이 없어진 지 좀 됐으니까 상태 알아보려고 하는 중이야. 오늘 상단 찾아가서 둘러보려고 했는데 같이 갈래?”

    “……응. 그럴래.”

    현실감이 들지 않아서, 오웬은 벨리타의 뺨을 한 입 베어 물었다가 욕을 얻어먹었다.

    *

    전날 벨리타가 지시한 대로 소이트 상단의 부상단주를 찾아냈다. 상단이 황실의 소유로 넘어간 탓에 새 직장을 찾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고 했다.

    부상단주를 납치하다시피 끌고 와 조슈아의 상단에 밀어 넣은 벨리타가 오웬과 엘라를 대동하고 문을 막아섰다.

    부상단주 케린은 벨리타가 상단주가 되었음을 믿지 못했다. 황제의 옥새가 찍힌 서류를 보고서야 인정한 케린은 덥수룩하게 자란 짙은 녹색 머리를 헤집었다.

    상단 내부는 먼지가 쌓이기 시작했고 물건도 그대로 놓여 정리가 필요해 보였다. 벨리타는 케린을 앞장세워 상단 곳곳을 둘러봤다. 화려하고 심플한 내부. 리모델링은 필요 없었다.

    사무실까지 확인한 벨리타가 사무실 소파에 몸을 뉘었다. 소파가 푹신하니 돈 좀 들였다 싶다. 케린은 새로운 고용주를 두고 어찌할 바 몰라 했다. 벨리타가 손가락을 까딱거린다.

    “최근 서류들 가져와요. 거래 내용과 고용인들 목록도. 재고 목록도 가져오시고요.”

    슬그머니 소파에 앉으려던 케린이 벌떡 일어나 조슈아의 책상을 뒤졌다. 날짜별로 정리된 문서들이 우르르 발견됐다. 잭슨이 손을 대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한 무더기로 쌓인 서류들을 들추어 보던 벨리타가 불필요한 서류를 빼냈다. 뒤에서 지켜보던 오웬은 꽤 능숙해진 일 처리에 감탄했고 엘라는 싱숭생숭한 마음을 누르며 멋진 벨리타를 찬양했다.

    고용인 목록부터 훑어본 벨리타가 케린에게 이들의 부재를 물었다. 현재 상단이 망한 줄 알고 떠난 이들이 꽤 상당하다고 했다. 벨리타가 대수롭지 않게 목록을 넘기며 말했다.

    “다시 고용해요. 새 주인 왔으니까 다시 일하라고.”

    새로운 인물을 고용할 필요는 없다. 조슈아가 길들여 놓은 고용인들은 벨리타가 헤매어도 알아서 업무를 해낼 테니까. 생각보다 조슈아는 일 처리를 잘해 놨다. 생각보다 훨씬 잘했다.

    목록을 확인한 벨리타가 서류를 내려놓았다. 케린은 푸른 눈을 빛내며 벨리타의 말을 받아 적었다.

    받아 적을 필요가 있나 싶지만. 벨리타가 재고 목록을 확인하며 입을 열었다. 어느새 오웬과 엘라는 구석에서 보석을 만지작거리며 놀고 있었다.

    “고용인을 더 뽑아야겠네요. 홍보팀과 영업팀으로요. 홍보는 다섯, 영업은 일곱 정도. 외국어에 능통한 사람이면 좋겠고 계약할 때 통역이 가능할 정도면 되겠어요. 성별, 나이에 상관없이 모집하세요. 다시 운영한다고 홍보할 겸 공개적으로 모집하시고 지원 서류부터 받으세요. 서류 통과하면 면접 보는 거로 하죠. 면접 심사는 내가 봅니다.”

    받아 적길 잘했다. 케린은 빠르게 읊는 벨리타의 말을 옮겨 적으며 생각했다.

    작은 음식점을 운영하다가 회사 사장이 되었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묘한 벨리타가 재고 목록을 넘기며 펜을 들었다. 재고가 얼마 남지 않은 것들, 많이 남은 것들을 표시하기 시작했다.

    “재고가 많이 남은 건 다시 들여오지 않도록 하죠. 조슈아가 욕심이 많았나 본데, 너무 많은 물건은…….”

    쉼 없이 떠들던 벨리타가 입을 다물었다. 판매하는 물건이 많을수록 중구난방해져서 구멍가게 꼴이 나기에 십상이다.

    그 순간 벨리타는 현실의 삶에서 편리하게 누렸던 배송 시스템을 떠올렸다. 온라인 주문. 배송. 이곳에서 과연 가능할까? 마법으로 가능하지 않을까? 마법을 사용하기에는 품삯이 너무 들지 않나.

    있으면 정말 돈을 쓸어 담을 텐데. 벨리타가 신경질적으로 뒷목을 긁적였다. 우선 두고 방법을 찾아보자.

    벨리타가 주로 판매하는 목록들을 확인한 뒤, 팔리지 않는 음식 재료를 보았다. 이미 견고히 자리 잡은 파텔 상단에서 음식 재료를 판매하고 있어 밀릴 수밖에. 스스로가 자신의 적인 꼴이다.

    벨리타가 헛웃음을 지었다가 긁적이던 뒷목을 움켜쥐었다.

    이곳에서 잘 먹지 않는 음식 재료들. 벨리타에게 너무도 익숙하고 친숙한 재료들.

    “음식점을 열어야겠다.”

    “네?”

    벨리타가 홀린 듯 중얼거렸다. 적고 있던 케린이 고개를 들었지만 벨리타는 무시하고 생각에 빠졌다.

    사람을 고용할 돈은 충분하다. 데이비드와 처음으로 무르펜을 돌아다니며 봐두었던 건물도 있다. 팔리지 않는 음식 재료로 음식점을 연다면. 입맛 까다로운 데이비드도 잘 먹었던 벨리타의 음식을. 귀족들에게 바가지를 씌워서 비싸게 팔아치우면…….

    돈에 관련하니 두뇌가 빠르게 회전했다. 귀족에게 잘 팔리면, 퀄리티와 가격을 낮추어 평민들에게도 팔 수 있을 거다.

    이 일은 케린에게 맡길 수 없다. 벨리타가 주먹을 움켜쥐었다. 벨리타가 직접 찾아 고용하는 내 사람. 내가 처음부터 쌓아가는 가게. 망해도 괜찮다. 돈은 많고 시간도 많으니까.

    벨리타가 가장 잘할 수 있는 것은 한식이었다. 몇십 년을 칼만 쥐어오던 벨리타다. 다시 음식점을 열 생각에 가슴 언저리가 뜨거워진다. 벅차오르는 것도 같다.

    구석에서 보석을 쌓아 뒹구는 오웬과 엘라에게 고개를 돌린 벨리타가 소리쳤다.

    “너희가 해야 할 일이 있어!”

    해야 할 일이……. 벨리타의 말을 옮겨 적던 케린이 ‘예?’하고 고개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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