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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이 쓴 로판 소설에 빙의되어버렸다-121화 (121/150)

121화.

“입양하세요.”

오웬이 바라고 원하는 건 벨리타였고, 벨리타가 행복해질 결정을 하면 된다. 오웬은 더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대답을 들은 소르니가 잔뜩 신이 나서 당장 준비하겠다며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나자 벨리타가 오웬의 허리춤의 옷깃을 잡아끌었다.

“우리 산책할까?”

“좋지.”

현실로 돌아가지 못해 우울함에 빠져 빛도 보지 않던 벨리타였고, 상단의 일로 바쁘다며 집무실에만 틀어박혀 있던 벨리타였다. 선뜻 먼저 산책하자는 말이 오웬에게는 이다지도 달가울 수 없었다. 몇 년을 힘들어하리라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벨리타의 회복이 빨라 다행이었다.

하녀들을 물리고 오웬이 벨리타의 손을 잡아 깍지를 꼈다. 오웬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작은 손이 단단하게 손을 맞잡았다.

오웬과 벨리타가 정원으로 발길을 돌렸다. 따사롭고 산뜻한 봄의 정원은 푸르고 화려하다. 혹독한 겨울을 이겨낸 꽃과 풀, 나무들이 자신을 드러낸다.

벨리타는 조슈아와 겨울 산에서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온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드디어 조슈아에게도 봄이 찾아왔는데, 얼마 가지 못해 혹한기가 닥쳤다.

혹한기가 아니라 영원한 봄이었을지도 모른다. 벨리타는 조슈아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되, 삶을 동정하지 않기로 했다. 조슈아는 열심히 살았고, 많은 성취를 이뤘다.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는 아이였지만, 이내 봄꽃처럼 쉽게 저버리고 말았다.

벨리타는 손목을 두른 팔찌를 내려다봤다. 벨리타의 현실의 삶 속에서 소중한 이들을 떠나보낸 경험으로 배운 건 그래도 의연해진다는 점이다.

시간이 지나면 감정은 흐려지고 추억도 바래진다. 벨리타도 시간이 흐르는 게 느껴질 때마다 힘겨웠던 순간이 있었다. 아들을……. 일찍 여읜 부모님을…….

생각에 잠겨 있던 벨리타가 고개를 쳐들었다. 푸른 하늘과 하얀 해가 눈에 들어온다. 새로운 삶. 불행이라 여겼던 다른 인생.

오웬이 맞잡은 손을 흔들었다. 어느새 걸음은 멈추어져 있었다.

“벨리타, 왜 그래?”

“어…….”

벨리타가 고개를 숙여 발아래에 짓밟힌 잔디를 바라봤다. 개미가 기어간다. 발끝을 돌려 개미의 길을 터 줬다.

“요새 일한다고 너무 무리했나 보네. 괜찮아?”

다정한 목소리. 걱정이 가득한 말투. 벨리타가 볼을 감싼 오웬의 손길을 따라 얼굴을 들었다.

벨리타가 고개를 도리질 치며 웃었다. 오웬이 벨리타의 볼을 잡고 상체를 숙였다. 입술이 닿았다. 닿은 입술이 조심스럽게 문질러지고 떨어진다. 맞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나 조슈아의 상단을 받았어.”

“조슈아? 아…… 로틀 남작. 갑자기 왜?”

“아들이 줬어. 내가 받는 게 조슈아도 행복할 거라면서.”

짧은 대화 속에서 오웬은 기이한 점을 발견했다. 로틀 남작이라고 부르던 벨리타가 무슨 바람이 들어 그의 이름을 불러주는 건지, 아들은 또 누구인지.

오웬의 눈썹이 순간 꿈틀거렸다. 아들. 아들이라고 하면.

“황제?”

엄마, 결혼해요. 라는 충격적인 발언은 아직도 오웬의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 그 덕에 짐작할 수 있었다. 반신반의하며 던진 오웬의 질문에 벨리타는 냉큼 긍정했다.

오웬은 정신이 아득해졌다. 떠난 지 얼마나 되었다고 그새 무슨 일이 벌어진 거냐고.

오웬은 벨리타와 대화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알아야 대처가 가능하니까.

오웬이 입을 열려는 순간, 벨리타가 몸을 틀었다. 활짝 꽃잎을 틔우기 시작한 장미 앞으로 다가간다. 붉은색투성이의 장미 사이에 파묻힌 벨리타가 오웬을 향해 방긋 웃었다.

“꽃 엄청 피었어. 너무 예쁘지 않아?”

“응. 예쁘다.”

꽃도, 벨리타도. 무척 예뻐서 오웬은 수줍게 미소 지었다. 산들바람이 둘을 훑고 스쳤다. 환한 햇볕을 받은 벨리타의 하얀 얼굴이 투명하게 빛났다.

톡, 곱게 핀 장미 한 송이를 꺾은 벨리타가 잎으로 줄기를 감싸고 오웬의 머리에 꽂았다. 훌쩍 다가온 벨리타에게서 단 향기가 아른거렸다. 얇은 손목. 드러난 하얀 팔이 오웬의 주위에 머물렀다.

오웬은 반사적으로 벨리타의 손목을 쥐었다. 손아귀에 한참이나 남는 손목을 끌어 내려 볼에 댔다. 벨리타가 오웬의 볼을 쥐었다.

“나 예뻐?”

눈을 가늘게 접어 웃은 오웬이 얼굴을 들이밀었다. 단정하게 넘긴 머리에 꽂힌 장미가 머리 색과 어우러졌다. 말끔한 정장 너머로 두드러지는 탄탄한 몸과 손목을 잡은 유려한 큰 손. 야살스럽게 지어지는 미소가 벨리타의 얼굴을 붉게 했다.

솔직히 반칙 아닌가. 폐인처럼 대충 입고 다니던 오웬이 예쁘게 차려입고 자신이 예쁘냐고 묻는데.

벨리타는 입을 앙다물고 눈썹을 찌푸렸다. 부끄러운 것 같기도 하고, 설레어서 그런 것 같기도 하다. 말이 나오지 않는다. 얼굴에 열이 올랐다.

오웬이 장난스럽게 작은 웃음소리를 내며 눈을 감고 얼굴을 더 가까이 내밀었다.

“너무 예뻐서 할 말을 잃었어?”

정답이다. 눈을 감을 새 없이 얼굴이 가까워져서, 오웬의 입맞춤을 곧이곧대로 눈에 담았다. 입을 맞출 때는 얕게 눈썹을 찡그리는구나. 티 나지 않을 정도로. 속눈썹이 생각보다 길다.

벨리타가 오웬의 뺨을 손가락 끝으로 훑었다. 톡, 소리와 함께 입술이 떨어진다. 머리카락을 귀 뒤로 쓸어 넘기는 손길이 느껴졌다. 벨리타가 멀거니 올려다보자, 오웬이 난처한 듯 눈썹을 찡그린다.

“나도 할 말 없어지네. 너무 예뻐서.”

귀에 느껴지는 무게감에 벨리타가 손을 올렸다. 오웬이 짓궂게 웃으며 벨리타의 양손을 잡아 아래로 내렸다.

“뭔데? 뭐 했어?”

“네가 한 거.”

오웬이 모르게 한 짓들이 꽤 있던 터라 벨리타가 입을 다물고 할 말을 골랐다. 그나마 생각나는 건.

“잘 때 엉덩이 두들긴 거?”

“뭐?”

자는 오웬의 엉덩이를 드럼 치듯 두들긴 기억이 나서. 오웬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이내 눈을 가늘게 접고 멀어졌던 얼굴을 들이민다. 취조하는 뉘앙스였다.

벨리타가 고개를 돌리며 오웬을 흘겨봤다. 어이가 없어진 오웬이 헛웃음을 삼키며 물었다.

“너 잘 때 내 엉덩이 두들겼어?”

“아니, 탐스럽잖아.”

“내 엉덩이가? 희롱을 밥 먹듯이 하네, 내 애인은.”

억울한 태도로 오웬의 시선을 피하던 벨리타가 멈칫했다. 애인.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기는 했지만, 애인의 관계는 아니었다. 오웬도 애인 관계가 아님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그런 단어를 언급하는 건, 관계가 진전되길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벨리타가 오웬을 따라 눈을 가늘게 접고 장난스럽게 입꼬리를 올렸다.

“귀에 무슨 짓 했는지 알려 주면 안 할게.”

“에이, 난 희롱당하는 거 좋은데?”

“정말? 내 애인은 엉큼하네.”

뭐? 멍청해진 오웬의 낯을 본 벨리타가 웃음을 터트렸다. 당황으로 굳어진 오웬에게 얼굴을 들이댄 벨리타가 능글거리며 잡은 양손을 깍지 꼈다. 오웬의 얼굴이 불처럼 타오른다.

“응? 무슨 짓 했어, 자기야.”

“너, 너……. 진짜…….”

순식간에 언어 능력을 상실한 오웬이 횡설수설하며 입을 달싹거렸다. 벨리타가 뒤꿈치를 들어 벌어진 오웬의 아랫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 떨어졌다.

다리가 풀린 오웬은 속절없이 주저앉았다. 양손이 벨리타에게 묶여 하찮은 자세였다. 바닥으로 고개를 숙인 오웬이 작게 중얼거린다.

“진짜 앙큼하고 귀여워. 짜증 나.”

“그래서 싫어?”

“아니. 나 하늘 날 수 있을 것 같아.”

못 날아가게 네가 꽉 잡아줘. 꽤 낭만적으로 들리는 말을 지껄이며 오웬이 깍지 낀 손에 힘을 주었다. 벨리타의 웃음이 크게 터졌다. 벨리타도 오웬의 앞에 쭈그리고 앉았다. 치마가 잔디에 널브러진다.

“나랑 연애하자. 나 돈도 많고 시간도 많아. 마법도 할 줄 안다?”

잡은 손을 좌우로 느리게 흔들며 벨리타가 태연하게 조잘거렸다. 오웬이 퍼뜩 고개를 든다. 시선이 맞닿는다. 둘의 얼굴은 머리에 꽂은 장미 못지않게 붉었다.

붉지만 태평하고 느긋한 낯으로 고개를 기울인 벨리타가 채근했다.

“대답은?”

오웬의 턱이 가늘게 떨린다. 이내 고개를 주억거리며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너, 무 좋아…….”

“옳지.”

벨리타가 잡은 손을 놓고 바닥을 짚었다. 무릎을 세우고 오웬의 앞으로 팔을 뻗어 다가왔다.

불쑥 다가온 벨리타를 마주 볼 수 없어 오웬이 고개를 돌리며 입술을 물었다. 바닥을 짚던 손이 오웬의 턱을 잡고 돌린다. 오웬은 울 것 같은 얼굴로 허공을 응시했다.

“나 봐야지.”

“못 보겠어. 심장 터질 것 같아.”

“내 남자 친구 심장 터지면 뽀뽀 못 하는데 어쩌지?”

그제야 오웬이 벨리타를 보았다. 어쩔 줄 모르는 오웬이 썩 귀여워서. 벨리타는 더 기다리지 못하고 오웬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오웬의 손이 잔디를 움켜쥐었다가 놓고 자신의 허벅지를 긁었다.

벨리타는 그사이 귀에 얹어진 물체를 만져 보았다. 장미구나. 실실 웃음이 샌다. 오웬의 숨결 사이에서 옅게 앓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쪽, 쪽. 몰아치는 입맞춤에 오웬의 상체가 점점 뒤로 기울어졌다. 오웬이 잔디에 등을 대고 누워서야 벨리타가 떨어졌다. 입가를 손등으로 닦고는 말갛게 웃었다.

타오를 듯 뜨거운 얼굴을 양손으로 가린 오웬이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불만을 제기했다.

“너 너무 능숙해…….”

“좋아하잖아.”

“맞아. 너무 좋아.”

오웬을 양팔로 가둔 벨리타가 짓궂은 미소를 지었다. 장미를 꽂고 부끄러워하는 오웬이 무척 사랑스러워 보였다.

볼에 쪽, 입술을 문댄 벨리타가 몸을 일으켰다. 주황색의 긴 머리카락 사이에서 존재감을 드러낸 장미보다 달아오른 벨리타의 얼굴이 더 붉고 예뻐서. 여유롭게 자신을 내려다보는 벨리타가 너무도 아름다워서 오웬은 또 한 번 사랑에 빠졌다.

마저 산책하자며 뻗어진 벨리타의 손을 잡고 일어섰다. 지금 상태로 보아선 산책이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마는. 오래간만에 여유롭게 만끽하는 산책이 달가워 보여서 오웬은 둘만의 시간을 즐기기로 했다.

정원의 반을 느긋하게 걸은 시점에서 오웬의 가슴은 터질 것처럼 뛰었다. 이것도 데이트인가? 데이트지? 우리 사귀는 사이니까. 사귀는 사이! 연인! 벨리타가 먼저 고백한!

자신은 이렇게나 심장이 터질 것 같은데 벨리타는 평온해 보인다. 고백할 때에도 그랬다. 능숙하고 자연스럽다. 연상이라서 그런가?

오웬이 마른세수를 했다. 분위기에 휩쓸려 묻지 못한 질문도 함께 떠올랐다. 정신이 없어서 잊어버릴 뻔했다. 이게 다 벨리타 탓이다. 누가 그렇게 예쁘고 귀엽고 멋지고 사랑스러우라고 했나.

오웬이 돌연 걸음을 멈추었다. 오웬의 팔짱을 끼고 있던 벨리타가 반동으로 몸을 틀었다. 아직 꽃을 꽂고 있는 오웬이 진지하게 서두를 꺼냈다.

“로틀 남작의 상단을 받았다며. 왜 황제가 아들이 됐어? 체르핀 백작과 언제 그렇게 가까워졌는데?”

짐짓 굳은 얼굴에 아직 붉은 기가 남아 있었다. 벨리타는 멀거니 오웬의 낯을 바라보다가 별 해괴한 말을 다 듣는다는 듯 짓궂게 표정을 일그러트렸다.

“얘기하자면 길어. 그리고 라빌과 테일러의 안전도 확보했다고. 나 잘했지?”

무수히 떠오르는 질문이 머릿속을 배회한다. 오웬은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서, 입을 다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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