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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이 쓴 로판 소설에 빙의되어버렸다-120화 (120/150)
  • 120화.

    소르니는 차가운 얼음물이 담긴 잔을 눈가에 얹었다. 엘라는 삐쳐서 돌아오지 않았고 해는 어느새 저물었다.

    서류를 끄적거리던 벨리타가 장례식을 치러야겠다고 얘기했다. 소르니는 냉큼 돕겠다고 나섰다. 최근 들어서 장례는 암암리에 이루어졌지만, 성대하게 해내지는 못했다. 근래에 진행된 장례식의 주인공들은 대부분 사형을 당한 자들이었으니까.

    벨리타는 아는 사람끼리 모여 진행하고자 했다.

    불행하게도 이곳의 장례식은 잘 모른다. 벨리타는 장례식을 준비하는 김에 데이비드에게 연락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의지하려는 데이비드가 부담스러워서 거리를 둔 지 얼마나 되었다고.

    그래도 벨리타의 상태는 꽤 많이 나아졌다. 이곳에서의 삶을 인정하고 관계를 받아들이기로 하니 마음이 조금은 가볍다.

    라빌과 테일러의 안전도 확보했고, 면회도 허락받았으니 데이비드에게 전해 줘야 한다. 편지를 받으면 얼마나 기뻐할까. 데이비드의 불행도 조금은 덜어 줄 수 있지 않을까 싶어졌다.

    벨리타가 편지지 대신 빈 종이를 테이블에 올려놓고 경쾌하게 펜을 휘갈겼다. 부은 눈을 대충 가라앉힌 소르니가 자신이 도움을 줄 장의사를 찾아보겠다고 했다.

    “조슈아랑 사이도 안 좋았으면서.”

    퉁명스럽게 대꾸하던 벨리타가 말끝을 흐렸다. 거침없이 편지를 써 내려가던 손이 일순간 멈칫했다.

    “그래도 고마워. 도와주면 큰 도움이 될 것 같아.”

    했던 말을 정정했다. ‘아’ 다르고 ‘어’ 다르다고, 좋게 말하면 좋은 반응이 돌아온다.

    벨리타의 살가운 대답에 소르니는 곧장 달갑게 미소 지었다. 벨리타에게 큰 도움이 된다니, 이리 기쁠 수 없을 터였다. 소르니는 벨리타의 팔짱을 껴 찰싹 들러붙는다.

    “폐하는 바빠서 못 오실 거야. 아직 2황자도 잡지 못했는데 황궁을 비워 두면 안 되잖니.”

    “걔는 왜 와? 조슈아가 무덤에서 일어나겠다. 시체도 없는데.”

    소르니의 입술이 말없이 달싹거렸다. 조슈아의 죽음을 버겁게 받아들이던 모습을 기억하고 있어서. 상단을 받지 못하겠다며 소리치던 벨리타가 아직도 선연하다. 가끔 벨리타의 신랄한 비꼬는 말투에 놀랄 때가 있다.

    그래도 좋아. 소르니의 얼굴이 가녀린 어깨에 파묻혔다. 벨리타가 귀찮다는 기색을 드러내며 어깨를 들썩거렸다. 기대고 있던 머리가 박자감 있게 튀어 오른다.

    까르륵 웃으며 벨리타에게서 떨어진 소르니가 헝클어진 머리를 손가락으로 빗었다. 벨리타의 손이 불쑥 튀어나와 소르니의 머리카락을 정돈했다. 하얗고 얇은 손가락이 붉은 머리카락을 세심하게 쓸어 올린다.

    코까지 순식간에 끼쳐오는 잉크의 떫은 냄새. 소르니의 시선이 손목에서 가녀린 팔을 훑고 얼굴에 도달했다.

    “다 컸네, 다 컸어. 시집가도 되겠네.”

    기뻐하면서도 아쉬움이 묻어난다. 정말 다 큰 딸을 보는 말투여서, 소르니는 만약 엄마가 있다면 이런 느낌이었을까 상상해 봤다. 벨리타는 타린과 결혼하길 바라나. 벨리타가 바라는 남자라면 괜찮은 사람일지도 모른다. 실제로도 그리 나쁘지 않았고.

    툭. 볼을 두드리는 손등을 느낀 소르니가 어깨를 떨었다. 나른하게 미소를 짓고 있는 벨리타가 소르니의 등을 가볍게 밀어냈다.

    “가서 자. 나머지는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

    얼떨결에 자리에서 일어난 소르니가 테이블을 짚고 섰다. 벨리타는 늦은 시각까지 곁을 지켜 주는 소르니가 기특하다는 얼굴을 하고 다시 펜을 들었다.

    “저……. 부탁할 게 있는데.”

    “예쁜 짓을 하긴 했지만, 너무 비싼 건 못 사 줘.”

    아니다, 사 줄 수 있으려나? 혼잣말을 중얼거린 벨리타가 고개를 틀어 소르니를 올려다봤다. 소르니는 손가락 끝으로 테이블을 지그시 누르며 긁었다.

    “폐하가 너한테 무슨 짓을 했어?”

    “어? 별건 아니고 부모님 안전은 보장해 주겠다는 약속을 받은 거야.”

    그랬구나. 그래서 그렇게 들떠했구나. 다행이다. 크게 숨을 마신 소르니가 테이블을 긁었다. 소리는 나지 않았다.

    “그 대가로 뭘 줬는데? 폐하가 그냥 해 줬을 리 없잖니.”

    “……어…….”

    숲과 푸른 하늘이 담긴 눈이 정처 없이 허공을 배회한다. 소르니가 들으면 소름 끼쳐 할지도 모르는데. 입이 다물어졌다가 벌어진다. 괜찮겠지. 애초에 잭슨이 잘못한 일인데 알 게 뭐람.

    “아들처럼 대해달라고 하더라고. 그래서 그렇게 해 준다고 했어.”

    “뭐?”

    물론 정말 아들처럼 대해 줄 생각은 없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예상했던 반응이다. 소르니가 넌더리를 치며 테이블을 약하게 쿵쿵, 내리쳤다. 잭슨이 한 번쯤은 꼭 망했으면 좋겠는데, 운도 좋은지 매번 비켜 간다. 얄미워서 죽을 것 같다.

    펜을 이리저리 흔들던 벨리타가 헛웃음을 지었다.

    “넌 잭슨 걔를 왜 그렇게 싫어해? 둘이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

    일이라면 많았다. 약혼을 위해 처음 만났던 날, 위아래로 훑어보며 판단하던 시선부터 몇 년 전에는 약혼자에게 말도 없이 전쟁터로 떠나 버리질 않나, 이겨서 돌아왔으면 연락이라도 해 줘야지 일언반구도 없었다.

    그런 태도 탓에 공작가에서 얼마나 무시를 받았는지. 자기만 잘났고 남은 신경도 쓰지 않는 잭슨이 싫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소르니가 잭슨의 험담을 줄줄 읊었다. 처음에는 그랬구나~ 듣던 벨리타도 어느새 주먹을 불끈 쥐며 욕설을 난무했다. 뭐 그런 쓰레기가 다 있냐고.

    그런데 그 쓰레기가 아들이 되었다. 뭐 이런 전개가 다 있나. B급 소설이어도 이렇게까지 막장은 아닐 거다.

    목에 핏대를 세워가며 열변을 토하던 소르니는 주먹을 쥔 손을 애써 펴 보았다. 핏대가 선 손이 테이블을 짓누른다. 너무 욕만 했나. 그래도 화가 나는 걸 어떡해.

    남을 이렇게까지 노골적으로 헐뜯어 본 것은 처음이라, 소르니가 어색하게 웃으며 벨리타를 안았다.

    “잘 자. 너무 늦게까지 일하지 말고.”

    “그래, 소르니야. 빨리 가서 자.”

    뺨에 입술을 문댔다. 벨리타가 징그럽다며 소르니를 밀어냈지만 힘은 미약했다.

    힘껏 끌어안던 소르니가 벨리타를 놓고 물러섰다. 여러 감정이 담긴 눈이 벨리타를 훑는다. 이렇게 행복해도 될까.

    소르니가 집무실에서 벗어났다. 찾아온 행복이 벅차서 현실감이 들지 않았다.

    *

    오래 머물고 싶었지만 벨리타가 바쁜 일정으로 힘겨워하니 로엘린과 타린은 눈치껏 떠나 주었다.

    점심 식사를 마친 후, 로엘린과 타린은 준비된 마차 앞에 섰다. 벨리타와 소르니가 배웅을 나갔다.

    타린과 소르니는 수줍어하며 실없는 대화를 나눴는데, 로엘린과 살가운 작별 인사를 나누던 벨리타가 이목을 집중시키려는 듯 큰 목소리를 냈다.

    “아, 맞다! 그래서 둘이 데이트 언제 해?”

    노골적으로 둘을 이어 주려는 벨리타의 말에 로엘린이 옅게 눈썹을 까딱거렸다. 타린과 소르니의 얼굴이 붉어진다.

    “벨리타, 그건 우리가 알아서 할게.”

    “마, 맞아. 우리가…….”

    팔꿈치로 벨리타의 팔을 찌르며 소르니가 대답했다. 우리, 라는 말에 더욱 얼굴이 붉어진 타린도 거들었다.

    벨리타는 능글맞게 눈을 가늘게 떴다. 장난기가 다분했다.

    “그래~ 너희 둘이. 알아서. 응?”

    악! 부끄러움을 못 이긴 소르니가 괴성을 지르며 벨리타의 팔을 붙잡고 흔들었다. 벨리타의 몸이 흔들린다. 타린은 이미 벌겋게 익어서 구운 토마토가 되어 있었다.

    난장판이 된 상황을 가만히 지켜보던 로엘린이 크게 헛기침을 했다. 날뛰던 소르니가 눈치를 살피며 얌전해졌다. 조용해진 주위를 훑어본 로엘린이 온화하게 미소 지었다.

    “저희는 이만 가 볼게요. 좋은 시간이었어요.”

    “저도 즐거웠어요. 조심히 가요, 로엘린.”

    아쉬움이 가득한 타린을 질질 끌고 마차에 탄다. 로엘린이 창문 너머로 손을 흔들었다. 소르니와 벨리타도 따라 손을 흔든다.

    기껏 놀러 와 주었는데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내주지 못했다. 다음에는 온종일 수다를 떨어야지.

    벨리타가 손을 내리고 멀어지는 마차를 바라보았다. 날씨가 좋고 바람도 산뜻하다. 벨리타가 따사로운 햇볕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당장에 닥친 일들이 산처럼 쌓였는데. 파텔 상단은 겨우 원상복구 시켰고 거래처도 여럿 바꾸었다. 소이트 상단의 상태도 확인해야 하고, 장례식 준비도 해야 한다. 이미 일은 벅차도록 많다. 그래도 날씨가 좋아서, 오늘은 조금 쉬고 싶은 생각이 든다.

    깍지를 껴오는 손이 느껴졌다. 벨리타가 눈을 떴다. 조심스럽게 손을 잡은 소르니가 헤실거리며 몸을 붙여 왔다. 가식으로라도 챙겨 주려고 했는데, 이제는 진심으로 아껴 주고 싶어졌다. 벨리타가 해사하게 웃었다.

    “날씨도 좋은데 산책이나 할까, 소르니야?”

    “좋아. 디저트도 정원에서 먹는 건 어때?”

    “와~ 나도 산책 좋아하는데.”

    응?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멀끔하게 차려입은 오웬이 문 앞에 서서 손을 들고 있었다. 저건 무슨 자세야.

    벨리타가 소르니의 손을 잡은 채 성큼성큼 걸어왔다. 환하게 웃으며 오웬이 팔을 벌렸다. 박치기하듯 몸을 들이대자 오웬이 가볍게 받아 안는다.

    소르니가 손을 놓아주니, 벨리타는 냉큼 오웬을 가득 끌어안았다. 오웬이 벨리타의 볼에 바로 뽀뽀 세례를 퍼부었다.

    “며칠 있겠다더니, 벌써 왔어?”

    “여자 친구나 보라면서 쫓겨났어.”

    서운한 척 말하지만 오웬은 싱글벙글한 얼굴이다. 벨리타는 이야기가 잘 끝났겠거니, 짐작했다.

    오웬이 짐을 내려놓고 벨리타의 허리를 안아 번쩍 들었다. 치마가 너풀거리고 말끔하게 빗은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벨리타가 말갛게 웃었다.

    “나 없는 동안 좋았어? 얼굴이 폈는데.”

    “들켰네.”

    “와, 나 진짜 상처.”

    “받든가.”

    말장난을 주고받으며 벨리타의 볼에 입술을 비비적대던 오웬이 물러서 있는 소르니를 발견하고 장난스럽게 미소 지었다. 소르니가 움찔, 몸을 떨었다.

    “어머니도 안녕하셨어요?”

    정말 적응 안 될 것 같다. 소르니가 팔뚝에 오소소 돋은 닭살을 문지르며 뒷걸음질 쳤다. 그러다가 오웬의 말을 이해한 소르니의 얼굴이 활짝 폈다. 역겨운 건 둘째 치고, 어머니라고 부른다는 건…….

    이제 작작 하고 내려달라며 오웬의 머리를 주먹으로 약하게 내리치던 벨리타도 행동을 멈추고 오웬을 내려다봤다. 소르니가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양손으로 입을 가렸다.

    “입양되기로 한 거니?”

    “부모님이 그러라네요. 네가 언제 귀족이 돼 보겠냐면서.”

    오웬은 부모님께 이야기를 드리던 순간을 떠올렸다.

    나름 당혹스러워하며 거절하는 부모님을 상상했지만 결과는 달랐다. 감성적이고 정이 많은 오웬의 어머니마저 떨떠름한 얼굴로 ‘귀족 시켜 준다고 하면 그냥 해. 네가 무슨 재주로 귀족이 되겠니.’라고 했다.

    오웬과 똑 닮은 아버지는 말할 필요도 없다. 냉담한 반응에 오웬은 사실 조금 상처를 받았다.

    심지어 여자 친구도 갓 성인이 된 열아홉 살 후작 영애라고 하니 어머니가 오웬의 등짝을 후려쳤다. 양아치에 도둑놈이라면서. 양심이 있으면 빨리 가서 입양시켜 달라고 발등이라도 핥아야 하지 않겠냐고 했다.

    믿었던 어머니에게 발등 찍힌 오웬은 눈물을 머금고 돌아온 것이다.

    비참하니까 자세히는 얘기하지 말아야지. 오웬은 속으로 굳게 다짐했다.

    소르니는 무척이나 기뻐했다. 오웬이 벨리타와 결혼을 하게 되면 그토록 바라던 가족이 될 수 있다. 잭슨이 무자비하게 귀족들의 목을 썰어 준 덕에 지금 오웬을 호적에 올려도 구설에 잠시 올랐다가 조용히 넘어갈 거다. 귀족들도 정신이 없으니까.

    벨리타를 지켜 줄 수 있다. 가족이 된다. 소르니의 하얀 얼굴에 붉은 혈색이 돌았다.

    소르니가 뒤에 서 있는 하녀에게 자신도 돌아갈 테니 준비하라고 소리쳤다. 하녀가 재빠르게 저택 안으로 들어간다.

    “오웬 메이지.”

    “응, 왜요?”

    소르니가 벨리타의 뒤에 섰다. 오웬은 벨리타를 끌어안은 채 고개만 숙여 소르니를 내려다봤다.

    “넌 이제 내 아들이란다. 네 성은 체르핀이 되고, 내가 결혼을 해서 가문을 떠나면 가주는 네가 될 거야.”

    자세히 듣지 못한 말이다. 당황스러운 속내를 숨긴 오웬이 눈을 가늘게 떴다.

    “왜 이제야 말하는 거죠? 거래할 때에는 이런 내용 없었잖아요.”

    “네가 싫어할 게 뻔하니까.”

    허, 참……. 오웬이 헛웃음을 뱉었다. 말은 그렇게 했어도 결혼 안 하는 줄 알았더니.

    오웬이 품에 갇힌 벨리타를 보았다. 여기서 오웬이 거절해도 없는 일이 될 수 있다. 그대로 낮은 신분으로 평생을 살다가 죽어도 된다. 높은 신분이 주는 족쇄는 오웬의 발목을 붙잡는 불필요한 것들이다. 하지만 벨리타에게는. 귀족 생활이 익숙해진 벨리타에게 낮은 신분의 삶은 버겁지 않을까.

    무엇을 선택해야 함께 행복해질 수 있을까.

    언제나 자신을 위한 선택만 해 왔던 오웬에게 함께 행복해질 선택은 어려웠다. 자신도 만족해야 하면서 벨리타도 만족할 길.

    오웬이 벨리타의 어깨를 힘주어 감쌌다. 벨리타의 얼굴이 오웬의 어깨에 파묻힌다. 숨이 막혀서 벨리타는 오웬을 밀어냈다.

    “내가 전에도 말했지. 네가 원하는 대로 하라고.”

    코가 눌려 벌겋게 물든 벨리타가 고개를 치켜들고 오웬을 쏘아봤다. 굳건한 표정. 전적으로 신뢰하고 있다는 얼굴이었다. 오웬의 선택을 믿고 지지하겠다고. 벨리타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오웬은 긴장이 풀어져 말갛게 웃음을 터트렸다.

    오웬이 바라는 건, 원하는 건.

    “벨리타.”

    벨리타의 붉은 코를 손끝으로 문지르며 오웬이 마음을 굳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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