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화.
따뜻한 바람이 일렁거렸다. 소르니의 붉은빛이 도는 머리카락도 흩날린다. 갈색의 눈이 타린을 담았다. 날카로운 눈매, 하얀 피부, 여린 뼈대. 소르니를 이루는 아름다운 조각들이 조화롭게 어우러졌다.
타린은 이미 차일 준비를 했다. 소르니의 곁에 있기에는 타린은 부족하고 어리숙했다. 자신도 잘 알고 있었다. 소르니가 씹던 사과를 삼키고 입을 열었다.
“사랑은 쉽게 변해요. 사람은 간사하고 마음을 가볍게 바꾸죠. 난 변하지 않는 감정을 원해요.”
소르니는 자신의 결핍을 알았다. 벨리타의 곁에 머무를수록 사무치게 와닿았으니까. 벨리타를 좋아했다가 소르니로 쉽게 마음을 바꾼 타린을 믿을 수 없었다. 당연했다.
타린은 소르니의 말뜻을 곧장 알아챘다. 부끄러워서 견딜 수 없다. 그럼에도 타린은 물러서지 않았다.
“쉽게 바뀌니 제가 백작님을 좋아하게 된 거죠. 감정은 부정적으로만 바뀌지 않아요. 앞으로 백작님께 가질 제 마음도 그렇고요. 그리 무거운 마음은 아니지만, 결코 가볍지 않아요. 백작님을 알아갈수록 더 좋아지는 이 감정이 쉽게 부정적으로 바뀌리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에 대해 모르시잖아요?”
공작에게 허구한 날 얻어맞아 뼈가 뒤틀리고 상처투성이였던 소르니를 모른다. 열등감에 절어 행복한 가정에서 자란 영애들에게 시비를 걸고 모욕을 주었던 소르니를 모른다. 벨리타에게 작은 위로 하나 받고 매달리는 비참하고 초라한 소르니를 모른다.
소르니는 스스로가 얼마나 초라하고 보잘것없는지 안다. 타린도 안다면 떠날 것이다.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해 줄 사람은 없으니까.
“네, 모르죠. 저는 백작님에 대해서 한 치도 모릅니다.”
그거 봐. 아무것도 모르면서 쉽게 좋아한다고 하다니. 행복하고 곱게 자란 사람은 이래서 싫다. 세상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만 보니까. 머릿속이 꽃밭이라 모두가 행복한 줄 아니까.
소르니는 대화를 끝내기로 마음먹었다. 함께 있을수록 스스로가 얼마나 하찮은지 깨닫게 된다. 공작가를 떠난 뒤 비참한 감정을 느끼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알고 싶어요. 백작님이 무슨 음식을 좋아하는지, 취미는 무엇인지, 꽃은 무얼 좋아하는지. 어떤 생각을 하고 계시는지 하나씩 알아가고 싶어요. 곁에서요.”
“그걸 왜 알고 싶어 해요?”
누구도 물어본 적 없다. 소르니가 무슨 음식을 선호하고 불호하는지, 취미를 무얼 가졌는지, 산책할 때 어떤 꽃을 유심히 들여다보는지 궁금해하고 눈여겨보는 사람은 없었다.
뱃속이 간질거린다. 사과를 잘못 먹었을까. 아니면 처음 받아 보는 온전한 애정에 탈이 난 걸까. 소르니가 배를 움켜쥐었다.
“좋아하니까요. 좋아하는 사람을 알아가는 건 즐겁잖아요. 백작님이 좋아하는 것들, 싫어하는 것들, 오페라를 보고 난 후의 감상 같은 것들을 공유하고 싶어요.”
“……이상해요, 그거.”
정말 이상하다. 공유해서 무얼 하려고. 사소한 정보들을 알아서 사용할 곳도 없을 텐데. 소르니가 표정을 찡그렸다.
타린이 소스라치게 놀라서 음침하다고 느꼈다면 정말 죄송하다고 사과했다. 아니다. 음침한 게 아니라.
“백작님과 함께 추억을 나눈다면, 그것만으로도 아주 기쁘고 행복할 거니까요.”
그래, 이런 게. 이상하다. 정말 이상해서 울음이 터질 것 같다.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진다는 기분을 소르니 따위에게 느끼다니. 타린은 정말, 정말로 이상한 사람이다.
“처음부터 진지하게 만나자고 말할 생각 없어요. 백작님도 바쁘시니 우선 천천히, 가볍게 서로를 알아가는 건 어떠세요? 부담 드리고 싶지 않아요.”
다정해서 짜증이 난다. 너무 좋은 사람이라서. 상냥하고 배려심이 넘쳐서 얄미웠다.
소르니는 실감했다. 사랑받는 기분은 이런 거구나. 이렇게나 따뜻하고 화사해서 결국은 녹아 버리는구나.
소르니가 손바닥에 얼굴을 파묻었다. 타린이 안주머니에서 자신의 손수건을 꺼내 건넸다.
“천천히 대답해 주셔도 좋아요. 기다릴게요.”
“……난 첫 번째가 좋아요.”
“이미 첫 번째이신걸요.”
소르니가 손수건을 받아 들었다. 주인을 닮아 자수마저 섬세하고 자그맣다. 백작 부인이 놓았을 손수건이겠지만. 이미 첫 번째라는 그 말이 어찌나 벅차오르던지. 소르니는 그만 눈물을 쏟아냈다.
타린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르니 앞에 무릎 꿇고 최선을 다해 소르니를 위로했다. 애정을 받는다는 건, 마침내 찾아낸 오아시스였다.
*
집무실에서 들어앉은 벨리타는 조슈아의 상단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고민했다. 처분하자니 미안하고, 갖기에도 미안했다. 돌아온 직후부터 쭉 고민에 빠져 있었다. 혼자서 중얼거리는 소리를 다 들은 엘라는 슬그머니 벨리타의 뒤에 다가와 속삭였다.
“그냥 가지세요. 고민할 필요 있어요? 남작님도 기뻐하실 거라고요.”
“그럼 파텔 상단과 합치게 되잖아. 소이트 상단은 그냥 두고 싶은데.”
“두 개 운영하시면 되죠. 어차피 파텔 상단은 파텔 후작 가문의 소유니까, 소이트 상단은 아가씨가 가지시는 거로.”
천잰데? 벨리타가 여태까지의 고민이 허망해진 얼굴로 엘라를 돌아봤다. 열여섯 먹더니 애가 똑 부러지게 자랐다. 가르친 것도 없는데. 애초부터 잘난 아이였는지.
벨리타가 엘라의 머리를 투박하게 쓰다듬었다. 엘라가 허물어진 바보 같은 미소로 히죽거렸다. 어차피 결혼하게 되면 파텔 상단은 두고 가야 한다. 만약 오웬과 정말 결혼하면 돈 나올 구석이 없으니 조슈아의 상단을 가져가면 될 터였다.
황제의 자금줄이라는 사실이 마음에 걸리지만, 가짜 아들 돕는 셈치고 운영하면 될 거다. 서로에게 나쁜 것도 아니지 않나.
벨리타는 조슈아의 상단에 방문하여 내정을 확인하기로 했다. 오웬과 함께 가면 좋았겠지만 멀리 떠났으니 혼자서도 괜찮을 성싶었다.
벨리타가 상단에 고용된 사람 중 직위가 가장 높은 자에게 연락하라고 지시했다.
대기하고 있던 하녀가 뒷걸음질 치며 물러났다. 그러고 보니 하녀들이 곧잘 엘라의 백스텝을 따라 하고 있었다.
“엘라야.”
“네, 아가씨?”
“너 저거 유행시켰어?”
“어떻게 아셨어요? 저 인기 되게 많아요. 제가 다 유행시켰죠!”
그래, 그렇구나. 벨리타가 떨떠름하게 엘라의 머리를 거칠게 쓰다듬었다. 무성의해서 더 좋았다. 엘라는 고양이처럼 그르릉거리며 벨리타의 손길에 머리를 맡겼다.
엘라의 땋은 머리가 엉망이 될 무렵, 소르니가 집무실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눈이 퉁퉁 부은 채였다. 벨리타는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났다.
“아가, 무슨 일이야!”
아가? 소르니와 엘라가 동시에 벨리타를 바라봤다.
벨리타는 단번에 뛰쳐나와 소르니의 얼굴을 움켜쥐고 이리저리 살펴봤다. 소르니는 얼떨떨하게 벨리타의 손길에 얼굴이 휘둘렸다.
“누가 때린 건 아니지? 어떤 새끼가 우리 애를 울려.”
“어, 별건 아닌데.”
“애 얼굴이 불어 터진 찐빵이 됐는데 뭐가 별 게 아니야?!”
불어 터진 찐빵은 또 뭔데. 소르니가 한 걸음 물러나 얼굴을 떼어냈다. 손등으로 눈가를 가린다.
소르니는 벨리타가 아가라고 불러주는 게 좋아서, 엘라가 있음에도 정정은 하지 않았다. 소르니가 부은 눈을 접어 미소 지었다.
“정말 별거 아니야. 벨리타, 일이 많은 것 같던데 좀 도와줄까?”
“아이고, 됐네요. 넌 네 일 있잖아. 나 혼자서도 잘하고 있어. 남작의 상단은 그냥 내가 가지려고.”
“두 상단을 운영해야 할 텐데 괜찮겠어?”
“하이고, 걱정도 팔자셔. 내가 뭐 못하는 거 봤어? 오웬도 도와주니까 괜찮아.”
소르니가 고개를 치켜들고 낮게 침음을 흘렸다. 이쯤 물어볼까. 잭슨과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리도 들떴는지.
벨리타가 손을 뻗어 소르니의 눈가를 엄지로 문질렀다. 애정이 가득 묻어나는 손길이었다. 투박하면서도 부드러운, 다정한 온기.
조금 더 즐기고 싶은 마음에 소르니가 얼굴을 내밀며 웃었다.
“나 눈 너무 부어서 어떡하지? 나 못생겼어?”
“눈만 가라앉히면 예뻐.”
“나 샤를로트 백작 영식이랑 데이트하기로 했어.”
“뭐? 아이고, 잘됐다. 경사네 경사. 드디어 남자 친구 생기는 거야?”
엘라는 질투가 났다. 아가라니. 가끔 실수로 불러주는 것 빼고 자신도 자주 듣지 못했다. 매일 붙어 다니는 자신보다 소르니에게 먼저 아가라는 애칭을 붙여 주다니. 서운하고 섭섭하다.
벨리타에게 아가라고 들은 날, 일기장에도 적어 놨던 엘라였다. 소르니에게만 하지 말고 자신에게도 해 줬으면 하는데, 지금 끼어들면 욕만 먹겠지.
울먹이면서 주춤주춤, 뒤로 물러난 엘라가 상단의 소식이 들어왔는지 확인해 보고 오겠다며 뛰쳐나갔다. 으레 그랬던 뒤로 물러나는 행동은 없었다.
벨리타는 다녀오라며 대강 손짓하고 소르니의 눈가를 문질렀다.
“나 눈 따가워…….”
“울었으니까 그렇지. 내일이면 로엘린이랑 타린 돌아간다던데, 데이트는 언제 하게?”
“천천히 해도 좋다고 했어. 만나 주는 거로 감지덕지하겠다던데?”
바람결에 흐트러진 머리를 쓸어 귀 뒤로 넘겨 주었다. 소르니가 얌전히 미소 지었다.
“당연하지. 귀한 아가 만나는데 감사하다고 엎드려 절해야지, 그럼.”
“나 귀해?”
팔을 벌려 벨리타에게 안겨 온다. 벨리타는 냉큼 소르니를 끌어안았다. 소르니의 말랑한 뺨이 어깨에 기대어 눌렸다. 벨리타가 소르니의 야윈 등을 토닥거렸다.
“누구인데 그럼 안 귀해? 마른 것 좀 봐. 밥 잘 먹고 있는 거 맞아?”
“……벨리타.”
“왜.”
“……벨리타.”
“왜 자꾸 불러싸. 나 여기 있다, 왜.”
벨리타. 입속에 단어를 굴렸다. 달고 썼다. 너무 달고 동시에 너무나도 씁쓸해서 소르니는 눈을 질끈 감고 입안을 배회하는 문장을 쏟아냈다.
“……내가 정말 사랑하는 거 알지?”
아껴 달랬다고 정말 아껴 주는 당신이 계속 곁에 있기를 바라는 간사한 내가 미안해. 변한 네 태도를 의심하면서도 만끽하고 싶어서. 약삭빨라서 미안해. 지금 이 상황이, 눈물 좀 흘렸다고 걱정해 주는 벨리타가 너무 좋아서. 소르니가 울음 대신 문장을 뱉었다.
벨리타가 소르니의 등을 힘주어 끌어안았다. 마른 등을 쓰다듬고 이내 토닥거린다. 인자하고 평온한 낯으로 벨리타가 작게 속삭였다. 귓가가 간질거렸다.
“소르니야, 너는 이미 정말 좋은 애야. 혼자서도 잘 크고, 얼마나 대견한데.”
데일 정도로 따뜻한 다정함은 소르니가 가장 바라왔던 순간이다.
소르니는 잭슨과 약혼이 성사되었을 때, 공작가의 사람들의 반응을 떠올렸다. 으레 그래야만 했던 것처럼, 못했다면 가만두지 않았을 거라는 어조의 태도들.
미래의 황후가 된 소르니에게 여전히 매몰차고 차가웠던 시선들과 업신여기던 대우를 기억한다. 모두가 당연히 그러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벨리타가 알려 줬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사랑을 찾아가는 일이 얼마나 벅차고 기쁜 일인 건지 가르쳐 준다. 도전을 응원해 주고 자신이 얼마나 소중한지, 행복해질 자격이 있는지 상기시켜 준다.
좋은 사람이다. 그토록 해 왔던 노력들이 보상을 받는 기분이 들었다. 자신이 행복해지는 만큼, 소르니는 벨리타가 자신처럼 행복해지길 바랐다.
“고마워. 고마워, 벨리타.”
소르니는 벨리타를 힘껏 안았다. 단 향과 잉크와 종이의 냄새, 품에 가득 담기는 야윈 체구의 온기. 흘러내려 간질이는 결 좋은 머리카락.
소르니는 이 순간을 영원히 기억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