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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이 쓴 로판 소설에 빙의되어버렸다-118화 (118/150)

118화.

며칠 전, 잭슨은 공작의 둘째 아들인 테르시안과 몰래 만났다.

야심한 밤. 비어 있는 조슈아의 상단에서 잭슨은 촛불에 불을 붙였다. 로브 후드를 뒤집어쓴 잭슨의 안광만 서늘하게 빛났다.

먼지가 앉기 시작한 소파에 몸을 뉜 테르시안은 일방적으로 약혼을 파기한 잭슨에게 반감을 품고 있었는데, 그에게 잭슨이 제시한 조건은 파격적이었다.

“공작과 소공작을 죽여.”

“예?”

여전히 촛불에 얼굴을 가까이한 잭슨이 눈만 굴려 테르시안을 보았다. 테르시안의 붉은 머리가 희미한 빛에 파묻혔다.

날카로운 눈매를 가늘게 접은 테르시안은 잭슨의 말이 명령인지 계약인지 짐작했다. 물어보기 이전, 다행히도 잭슨이 먼저 그에 대한 보상을 입에 담았다.

“황가의 일원이 되지 못해 아쉽기도 하겠지.”

“그렇, 습니다만……. 폐하가 하시는 일에 어찌 의문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머리와 같은 색의 짙은 검은 로브가 움직임에 따라 흔들렸다. 잭슨이 가벼운 걸음으로 테르시안의 앞에 다가섰다.

테르시안은 제국의 태양을 앞에 두고 마주 볼 자신이 없어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잭슨의 발이 마룻바닥을 툭, 툭, 건드린다.

“의문을 가져서는 안 되지만, 욕심은 낼 수 있지 않나.”

주어가 없으니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테르시안은 비상한 머리를 빠르게 굴렸다. 잭슨의 비웃음이 담긴 목소리가 작은 방을 울렸다.

“체르핀 백작이 황후가 되면 넌 고작 황후의 오라비겠지만.”

잭슨의 테이블에 걸터앉았다. 다리를 꼰다. 잭슨이 들고 있는 촛대의 불이 일렁거렸다.

“네가 공작이 된다면, 넌 황후의 아버지가 되는 거다.”

그 말을 단번에 이해한 테르시안이 고개를 들었다. 갓 태어난 자신의 딸과 훗날 태어나게 될 잭슨의 아들이 혼인을 한다면, 자신의 딸은 황후가 된다. 이보다 매력적인 제안은 없다.

내려다보는 잭슨의 보라색 눈이 일말의 감정도 담지 않은 채 그늘졌다. 빛이 바랜 보석과 같아서 테르시안은 미묘하게 불쾌해졌다. 그러나 거절할 방법도, 필요도 없었다.

오라비보다 아버지의 자리에서 휘두를 수 있는 권력의 힘은 대단했다. 괜히 체르핀 공작이 기를 쓰고 잭슨의 옆에 소르니를 붙여 놓았겠는가.

테르시안의 짙은 갈색 눈이 탐욕에 번들거렸다. 이럴 때 보면 피는 못 속이는군. 잭슨이 간단한 감상을 머릿속에 늘어놨다.

“하겠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황후의 아버지가 될 수 있다면 뭔들 하지 못할까. 테르시안이 경청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잭슨이 상체를 숙여 테르시안과 눈높이를 맞췄다. 잭슨의 얼굴 한쪽에만 빛이 들어 반쪽짜리 가면을 쓴 괴물 같아 보였다. 마치 악마와 거래를 하는 것처럼.

“체르핀 백작이 뭘 하든 간섭하지 마라.”

의문을 품을 필요는 없다. 잭슨이 소르니에게 옛정이라도 남아 챙겨 주는 건지, 가뜩이나 어지러운 정세에서 긁어 부스럼 만들지 말라는 건지. 미래의 황후 아버지가 될 테르시안은 그저 기계처럼 고개만 끄덕거릴 뿐이다.

“최대한 빠른 시일 안에 죽여. 해낸다면 넌 내 사람이다.”

황제의 사람. 황후의 아버지. 매혹적이고 누구나 바라 마지않는 권력의 끝이다. 테르시안이 거듭 알겠다며 감사를 전했다.

훅, 잭슨의 숨이 유일한 촛불을 껐다. 암흑 속이다. 잭슨이 발소리를 죽이고 문을 열어 벗어났다.

이야기를 들은 소르니가 귀걸이를 힘주어 눌렀다. 잭슨의 의중을 파악하기 어렵다. 어떠한 정도 없는 관계였다.

잭슨에게 벗어날 수 있었던 건 벨리타를 인질로 삼은 덕이었고, 파문당해 쫓겨날 뻔한 소르니에게 작위를 내려준 이유도 사교계에 어울리지 못하는 벨리타를 위함이었다. 소르니가 제시한 제안이긴 했어도 잭슨이 원했기에 이루어질 수 있었다.

왜 공작을 죽이려 들었는지는 짐작이 간다. 약혼으로 맺어진 권력의 끈을 실컷 이용하고 일방적으로 끊어 버렸으니까. 뒤통수를 맞은 공작이 언제 잭슨을 배신할지 모르는 일이다. 불안의 싹은 미리 잘라내야 옳다.

그토록 혐오하던 공작의 죽음이라니. 소르니는 목덜미까지 훑고 올라오는 오싹함에 입술을 깨물었다. 죽어가는 얼굴에 침이라도 뱉어 주고 싶은데 그럴 수는 없겠고.

소르니가 절로 올라가는 입꼬리를 애써 갈무리하며 입을 열었다.

“즉위식은 돕겠어요. 하지만 아직 제 질문에 대한 답은 듣지 못했네요.”

평소라면 귀족 언어로 돌리고 돌려 비유적인 표현으로 채근했겠지만, 마음이 급했다. 잭슨이 서늘하게 가라앉아 소르니를 올려다봤다.

“눈감아주는 건 끝이라고 얘기했다만.”

잭슨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살벌한 태도에 겁을 먹은 소르니가 마른침을 삼켰다.

“벨리타가 이상해요.”

현재의 소르니는 벨리타에게 필요한 사람이다. 잭슨은 섣부르게 소르니를 죽이려 들지 않을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예전의 소르니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미친 짓이었지만. 감히 황제에게 따지고 드는 짓거리를 하지 않았을 테지만.

“귀찮다고 저택으로 돌아갔어야 할 벨리타가 함께 옷 구경을 하자고 했어요. 신나서요.”

태연했던 낯에 금이 간다. 잭슨이 주름이 잡힐 만큼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잭슨에게 곤란한 일이었다. 라빌과 테일러의 안위를 약속하는 것만으로도 그리 기뻐하다니. 그럴 줄 알았으면 결혼하자고 한 번 더 물어볼 걸 그랬다. 정말 벨리타가 떠날까 봐 너무 성급했다. 일이 자꾸 틀어지는 것에 짜증이 났다.

잭슨이 신경질적으로 펜을 내려놓았다. 소르니가 움찔, 몸을 떨었다.

“벨리타에게 물어봐.”

더 캐묻는다면 해를 끼치겠다는 태도였다. 소르니는 더 묻지 못했다. 목숨이 소중했으니까. 다른 해결 방안이 있을 터였다.

소르니가 예를 갖춰 인사하고 돌아섰다. 문손잡이를 잡기 직전, 소르니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는 벨리타가 그대로였으면 좋겠어요. 제가 사랑한 벨리타 그대로요.”

손잡이를 잡았다. 잭슨의 대답은 없었다.

“폐하께서도 후회하지 않길 바라요.”

주제넘은 말이었다. 달칵, 문이 열렸다. 소르니는 곁눈질로 잭슨을 몰래 훔쳐봤다. 평온하고 덤덤한 낯짝. 잭슨이 더는 벨리타에게 악영향을 끼치지 않길 바라지만. 그래, 괴물이 어찌 알겠냐. 목을 꺾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소르니가 집무실을 벗어났다. 잭슨은 소르니가 나가는 모습을 확실히 확인하고 나서야 미간을 짚었다.

*

마차를 타고 벨리타의 저택으로 돌아온 소르니는 내내 심란했다.

잭슨이 벨리타에게 무슨 짓을 하기는 했는데, 정확한 경위를 모르니 답답하기만 했다. 나가라고 해도 같이 있을걸. 지켜 주러 같이 갔는데 결국 해낸 것은 없다. 무력한 스스로가 경멸스러웠다.

정원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있는 소르니가 마른세수를 했다.

손가락 틈새로 벨리타가 손수 깎아 준 사과를 흘겨봤다. 직접 정원까지 나와 테이블에 올려다 주고 갔다.

무척이나 기쁘고 행복하지만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보기 겁난다. 인정하기 비참해도 벨리타는 소르니에게 이렇게까지 다정하지 않으니까. 심경의 변화가 크게 일어났나.

소르니가 한숨을 뱉었다. 복잡한 와중에도 거슬린다. 먼발치에서 알짱대는 타린이.

“자주 뵙네요, 샤를로트 경.”

기사 서임은 받았으니 경이라고 불러도 무관하다. 저렇게까지 유약한 사람이 기사라는 게 우습지만.

소르니가 왜 자꾸 얼쩡거리냐는 뜻을 담아 말을 건넸다. 타린이 붉어진 뺨을 손등으로 문지른 뒤, 주춤거리며 다가온다.

“아, 네, 네에. 장미를 보고 있었어요. 무척 아름다워서…….”

장미는 소르니를 의미했다. 대놓고 보고 있다고 하기 민망하니 비유를 들었을 테지. 소르니가 귀찮은 기색을 담아 미소 지었다.

“가시가 있으니 가까이하지는 않는 게 좋겠네요.”

더는 다가오지 말라는 뜻. 타린은 자리에 멈추어 서서 손을 꼼지락거렸다. 곁을 내주지 않는다.

타린은 소심하고 겁이 많아 명백히 그어놓은 선을 넘기 어려웠다. 그럼에도 용기를 내고자 했다. 모두가 소르니에게 향기 없는 꽃이라며 손가락질해도 상관없다. 소르니는 꽃 따위가 아닌 명백히 살아 숨 쉬는 사람이니까.

타린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꺾지 않을 테니 괜찮지 않을까요? 그 사과, 벨리타가 백작님 드린다고 손수 깎아 주셨어요.”

꺾지 않는다니. 소르니가 얼굴을 가렸던 손을 조금 내려 눈만 드러냈다. 타린은 소르니의 행동이 사랑스러워서 저도 모르게 말갛게 웃었다.

소르니는 타린이 이상했다. 공녀에서 백작으로 추락했음에도 예의를 갖춰 주고 더 다정하게 대해 준다. 지치지도 않고 날마다 알짱거린다.

소르니로서는 결코 이해할 수 없는 타린의 행동이었다. 소르니가 포크를 들어 사과를 찍었다.

“드세요. 하나 정도는.”

사과를 찍은 포크를 내밀었다. 타린의 낯이 순식간에 붉어졌다. 우물쭈물, 어쩔 줄 몰라 하며 포크를 쥐었다. 손이 닿는다. 타린은 손에 화상이라도 입는 감각이 들었다. 사과를 권하는 것으로 앉아도 된다는 신호와 더불어 곁을 내어 줬다.

타린은 할 수만 있다면 하늘을 날았을 거다. 아작, 사과가 반 토막이 난다. 소르니가 무감한 낯으로 타린을 바라봤다.

“제가 왜 좋으세요? 샤를로트 경.”

“푸흑!”

씹고 있던 사과가 잔디로 뿜어졌다. 빠르게 고개를 틀어 소르니의 얼굴에 뱉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었다. 사레가 들린 건 다행히 아니지만.

콜록거리며 핏대가 선 목을 손바닥으로 문지른 타린이 숨을 삼켰다. 티를 안 내려고 노력했는데 왜 다들 아는 거지?! 타린은 그만 울고 싶어졌다.

“대답하기 어려우신가요?”

“아, 어, 아니, 콜록! 아닙니다!”

잔기침이 가라앉지 않는다. 타린은 양손으로 입을 가리곤 기침을 정리했다. 소르니가 손수건을 내밀었다. 하얀 레이스에 화려한 자수가 박힌 손수건. 아마 소르니가 직접 자수를 놓았을 테다. 타린은 손수건에 얼굴을 박고 죽고 싶어졌다. 너무 좋아서.

감사 인사와 함께 타린이 조심스럽게 손수건을 받았다. 차마 쓰지는 못했다.

“사교 활동하실 때부터 봐 왔어요. 그때까지만 해도 무서운 분이신 줄 알았습니다.”

“난 무서운 사람 맞아요.”

턱을 괴고 남은 포크로 사과를 찍었다. 소르니가 덤덤하게 사과를 베어 물었다. 타린은 손수건을 양손에 꼭 쥐고 어수룩하게 입을 달싹거렸다.

“네, 압니다. 무서울 정도로 아름답고 무서울 정도로 능력이 좋으시죠. 제가 백작님을 좋아하게 된 건, 그런 이유가 아닙니다. 아, 물론, 그런 면도 좋아하고 있습니다!”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는 왜 이렇게 바보가 되는가. 타린이 혀를 깔짝대며 깨물었다가 짐짓 굳은 얼굴로 소르니를 보았다.

소르니는 꽤 흥미 있는 낯이었다. 말 잘하자. 망치면 안 된다. 타린이 초조하게 다리를 떨었다.

“웃는 모습이, 무척 사랑스러우셨어요. 백작님은 냉혈한이라는 편견을 깨주었습니다. 백작님으로 인해 제가 세상을 보는 시각이 달라졌어요. 당신을 보면 제가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기분이 들어요. 아, 물론 백작님께서는 완벽하시죠…….”

“고작 그런 이유로요?”

“네?”

떠는 것치고는 잘 말했다고 생각했는데 소르니의 반응은 떨떠름했다. 납득할 수 없다는 듯, 더 대단한 이유가 있으리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타린은 붉게 달아오른 귀를 손바닥으로 누르며 어색하게 웃었다. 웃는 얼굴이 바보 같아 보이지 않아야 할 텐데.

“좋아하는 감정 하나로 사람을 발전시키는 건 대단하다고 생각해요. 감정이 싹트는 계기가 거창할 필요도 없고요. 계기가 어떻든 저는 점점 백작님의 다른 면도 좋아지고 있어요. 그거면, 된 거 아닐까요?”

대답이 없다. 타린은 곁눈질로 소르니를 훔쳐봤다. 멍한 얼굴. 너무 멍청한 대답이라 대답도 나오지 않는 걸까.

타린은 지레 겁을 먹고 되는 대로 지껄였다. 이런 식으로 고백하고 싶지 않았는데. 왜 세상은 마음대로 흘러가지 않는 걸까. 방으로 돌아가서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울어야겠다.

“웃는 모습에 반했어요. 반하고 나니 백작님의 다양한 모습들이 눈에 들어오더군요. 아끼는 것에 애정을 가진 모습도, 입을 가리는 습관도, 혼자 계실 때에 손가락을 두드리는 버릇도 좋아요. 홀로 백작 가문을 이끌어가는 모습도 정말 멋져요. 갈수록 더 좋아지고 있습니다.”

타린이 고개를 들고 소르니를 곧게 바라봤다. 얼굴이 터질 것 같다.

“좋아합니다. 소르니 롤레인 체르핀 백작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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