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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이 쓴 로판 소설에 빙의되어버렸다-117화 (117/150)
  • 117화.

    부단히도 노력했다. 벨리타가 소르니를 돌아봐 줄 때까지. 영애에게 치명적인 소문도 직접 나서 상쇄시켜 주고, 유일하게 연말 선물도 준비해 주었으며, 벨리타가 사랑하는 사람과 편한 삶을 누리게 하려고 입양까지 제의했다. 그 외에 잡다한 노력도 많았다.

    소르니는 벨리타를 위해 노력했다. 이제야 보상을 받게 되었는데, 잭슨은 무엇을 했나. 되레 피해만 끼치지 않았던가.

    그런데도 벨리타는 잭슨을 봐줬다. 소르니가 애처롭게 바라던 것을 잭슨은 쉽게 망쳤다. 그랬으면서 뭐? 봐주지 않는다고? 인간이라는 족속이 가진 것으로는 만족하지 못해 욕심을 낸다고 하지만.

    소르니는 기가 찼다. 제 발로 걷어찼으면서 투정이라니. 웃기지도 않다.

    마음 같아서는 잭슨에게 주먹질이라도 한번 해 보고 싶었다. 너무 얄밉고 얄궂어서. 질투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잭슨이 미웠다.

    소르니가 벨리타를 데리고 나가려 손을 뻗는 순간, 거친 파열음과 함께 잭슨의 뺨이 반대로 돌아갔다. 벨리타가 반대쪽 뺨도 내리친 것이다.

    소르니가 멍하니 벨리타를 바라봤다. 벨리타는 씨근덕대며 주먹을 쥐었다.

    “내가 언제 널 안 봐줬는데. 네가 되지도 않는 짓을 해도 내가 얼마나 많이 봐줬는지 알아?”

    “……그런 말이 아니잖나.”

    “내가 호구로 보여? 기회를 걷어찬 건 너야. 저번에도 그랬고 이번에도 그렇지. 그리고 다시 기회는 없어. 끝이야.”

    속이 시원하다. 소르니가 자신도 모르게 가슴을 쓸어내렸다. 잭슨은 꽤 절박하게 매달렸다. 벨리타를 놓아주지 않고 몇 번이고 사과했다.

    벨리타는 이 상황에서 확실한 답을 내렸다. 정말 제 아들이었다면 이리 매몰차게 거부하지 못했을 거라는 것. 단호하게 관계를 끊고자 하는 태도가 잭슨을 벨리타의 아들로 보지 않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잭슨이 무모하게 굴었을까. 아들로 보고 있지만 정작 필요할 때에는 내칠 걸 알아서. 아이들은 눈치가 빠르고 예민하다. 어른의 행동을 읽을 줄 안다. 버려질까 무서웠던 걸까.

    벨리타는 눈을 가늘게 떴다. 아무래도 상관없다. 벨리타는 잭슨에게 지쳤다. 애원하며 잘못을 비는 잭슨을 바라보면서도 조슈아의 시신이 없으니 유품이라도 관에 넣어 장례를 치러 줘야겠다, 따위의 생각만 들었다.

    책임감이고 나발이고. 아들로 보건 말건. 잭슨은 이미 선을 여럿 넘었다. 더는 됐다. 봐주고 싶은 생각도 없다.

    벨리타가 잭슨의 팔을 온 힘을 다해 내리쳤다. 살벌한 소리가 났다.

    잭슨이 헛숨을 들이켜며 남은 한 손으로 어떻게든 벨리타를 붙잡으려 발버둥 쳤다.

    발버둥 쳐 봤자다. 벨리타는 잭슨의 턱을 손바닥으로 밀어내며 품에서 벗어났다.

    드레스가 구겨져 볼품없어졌다. 소르니가 빠르게 벨리타의 옆에 서서 치마를 털어 주름을 폈다. 일어나서 벨리타를 붙잡으려는 잭슨을 차갑게 시린 눈으로 바라봤다. 아무 말 하지 않아도 느껴졌다.

    딱 여기까지다.

    선을 넘으면 으레 주어졌던 자비는 없다. 나중을 기약할 수도 없다. 완전히 끝.

    잭슨은 하얗게 질린 낯으로 다시 자리에 앉았다. 벨리타가 서류를 챙겼다. 잭슨의 손이 덜덜 떨렸다. 어떻게든 해야 한다. 어떻게든 벨리타의 마음을 돌려야 했다.

    “벨리타.”

    거들떠보지도 않고 등을 돌린다. 잭슨은 눈물이 앞을 가려 뿌옇게 흐려진 벨리타를 눈에 담았다.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해야 날 다시 봐줄까.

    벨리타의 인내심을 몇 번이고 자극한 건 다름없는 사실이다. 내심 애정을 확인받고 싶었던 거다. 내쳐지지 않음에 애정을 확인했다. 부정할 수 없다.

    잭슨은 벨리타가 자신을 내칠 줄 몰랐다.

    간을 보듯 마지노선을 확인하고 그 이상을 넘지 않으려고 했다. 그 안에서 무슨 짓을 해도 벨리타는 눈감아줄 테니까.

    벨리타의 말이 맞다. 잭슨은 주어진 기회를 몇 번이고 걷어찼고 대가를 받아야 한다.

    “어, 어……. 폐, 하?”

    소르니가 경악하며 내뱉은 당혹스러운 목소리에 뒤를 돌아봤다. 잭슨이 무릎을 꿇었다. 벨리타는 이미 여러 번 봐서 감흥이 없었다.

    무감한 벨리타와 다르게 소르니는 혼절할 뻔했다. 제국의 태양이 무릎을 꿇다니! 다른 사람이 없어서 다행이지 있었더라면 큰일이다. 그렇지만 차마 일어나라는 말은 못 하겠다. 너무 우스워서.

    “뭐해? 일어나.”

    덤덤하게 말을 건넨다. 잭슨은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귀엽게도 엉망으로 울고 있었다.

    잭슨이 여전히 무릎을 꿇은 채 벨리타를 올려다보자, 벨리타는 다시 문을 향해 발을 내디뎠다.

    “싫으면 그대로 있든가.”

    온종일 무릎을 꿇고 있어도 신경 쓰지 않을 태도였다. 잭슨은 안달이 났다. 벨리타의 몸이 문 앞까지 다다르자 잭슨이 황급하게 무릎을 세워 기어 왔다.

    소르니가 벽에 몸을 기댔다. 제국의 황제가 무릎을 꿇고 기어 오는 꼴을 보니 참혹하고 우스웠다.

    벨리타가 문손잡이에 손을 얹었다.

    “내가 잘못했어. 착하게 굴게. 정말이야. 벨리타, 엄마. 제발요.”

    엄마라는 소리에 움찔, 손이 움츠러들었다. 반사적이었다. 벨리타의 반응을 확인한 잭슨이 바로 뒤까지 기어와 치맛자락을 잡고 매달렸다. 벨리타는 돌아보지 않았다.

    “다시는 안 그럴게요. 한 번만 봐주세요. 엄마.”

    자존심 따윈 중요하지 않았다. 벨리타의 아픈 상처를 건드리는 행위라도 상관없다. 이 상황만 모면할 수 있으면 됐다.

    잭슨은 치맛자락에 얼굴을 파묻고 늘어졌다. 벨리타가 소르니에게 나가 있으라며 손짓했다. 더 구경하고 싶었지만 소르니는 낄 곳 안 낄 곳을 분간할 줄 알았기에, 선뜻 문을 조금만 열고 몸만 빠져나갔다.

    다시 문이 닫히고 둘만 남았다.

    벨리타는 유독 물렁물렁해지는 다짐이 짜증 났다. 엄마라는 단어에 약해지는 마음이 화가 났다. 용서해 주고 싶지 않았지만. 용서하지 않았지만.

    “확인받고 싶어서 그랬어요. 날 얼마나 좋아해 주는지 알고 싶었어요. 엄마는 표현해 주지 않으니까, 날 얼마나 아껴 주는지 몰라서……. 시험했어요. 미안해요. 정말이에요.”

    무너진다. 딸이 하는 말 같아서. 죽은 아들이 귓속에 속삭이는 것 같아서.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 못 해 주고 떠난 자격지심이 크기를 불린다.

    벨리타가 파리하게 질린 채 눈만 굴려 잭슨을 내려다봤다. 처참하게 밑바닥까지 끌어내린다. 애써 외면하고 회피하고 있는 와중에도 발목을 붙들고 처박는다. 가슴이 내려앉았다. 죄책감이 기어코 고개를 들이밀었다.

    “시험…… 했다고…….”

    속은 들끓듯 화가 나는데도 잔잔하게 울렁거렸다. 터지기 직전의 화산처럼. 멍하니 잭슨만 보았다.

    잭슨이 눈물에 젖은 치맛자락을 움켜쥐고 불쌍하게 바라본다. 손은 차가운데 심장은 빠르게 뛰었다. 구역질이 나올 것 같았다. 내가 왜 이러지. 의구심이 들었다가 엉성하게 헤집어진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잭슨이 양손으로 벨리타의 손을 감싸 쥐고 처연하게 고개를 들었다.

    “착한 아들이 될게요. 약속해요, 엄마.”

    심장은 나가떨어져 바닥을 나뒹굴고 머리는 하얗게 표백된다. 벨리타는 잡힌 손을 뿌리치고 입을 틀어막았다. 헛구역질이 나온다. 우욱. 괴리감이다. 어떻게든 아들로 인정해 주고 싶은 마음과 아들은 이미 죽어서 없다는 사실의 충돌.

    벨리타가 벽을 짚었다. 비틀거리며 얼마 가지 못해 주저앉고 만다. 잭슨이 벨리타의 어깨를 조심스럽게 쥐었다.

    “착한 아들이 되면 예뻐해 주실 거죠? 사고도 안 치고 일도 열심히 할게요. 엄마 속상하게 하지 않을 거예요.”

    뱀처럼.

    “엄마. 날 사랑해 줘요. 아들이잖아요.”

    홀려서.

    “엄마는 아들을 사랑하잖아요. 그렇죠? 아들 여기 있어요.”

    와작. 희미하게 과일이 베어 먹히는 소리가 났다. 환청이려나. 무언가가 박살 나는 소리 같기도 했다.

    벨리타가 숙였던 고개를 들고 잭슨을 바라봤다. 무해하고 불쌍한 얼굴. 애정을 받고 싶어 안달이 난 얼굴.

    “……그래.”

    벨리타의 입술이 달싹거렸다. 넌 이런 와중에도 내 불행을 이용하는구나. 벨리타의 약한 부분을 집요하게 비틀어 비집고 들어오고야 만다.

    벨리타의 손이 잭슨의 부은 뺨을 매만졌다. 잭슨이 사랑스럽게 눈을 감고 벨리타의 손길을 만끽했다.

    “하지만 넌 내 아들이 아니야.”

    “…….”

    잭슨의 얼굴이 굳었다. 벨리타는 일그러진 표정으로 매만지던 잭슨의 뺨을 움켜쥐었다.

    “내가 옆에 있기를 바라면. 라빌과 테일러는 죽이지 마.”

    어차피 죽일 생각도 없었다. 하지도 않을 일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하는 것만으로도 벨리타가 머물러 준다면 이득이다. 원래는 결혼 약속을 받아낼 심산이었지만 어쩌겠는가. 일이 자꾸 틀어지는걸.

    잭슨은 거듭 고개를 끄덕거리며 팔을 뻗었다.

    “그냥 유폐만 시켜 둘 테니, 날 아들처럼 대해 줘. 이번에야말로, 정말 잘할 거다.”

    포기하지 않을 거다. 잠시 물러날 뿐. 표정이 풀어지는 벨리타를 확인한 잭슨이 말갛게 웃으며 끌어안았다.

    잭슨은 만족했다. 벨리타가 이성적으로 사랑해 주지 않아도 괜찮다. 정말 상관없다. 곁에만 있어 주면 족하니까. 그러면 되니까.

    어깨에 얼굴을 묻고 비비적댔다. 타박하지 않고 얌전히 안겨 주는 벨리타도 좋다.

    *

    잭슨이 허튼짓을 했을 줄 알고 집무실 앞에서 전전긍긍했지만, 예상과 달리 벨리타는 태연하게 복도로 나왔다. 걱정이 무색했다. 혼이 조금 빠진 듯했지만 평소와 다름없었다.

    복도를 지나쳐 마차를 타려는 순간, 벨리타가 소르니의 팔을 잡아당겨 안았다.

    “우리 옷 보러 갈까?”

    물론 소르니의 입장에서는 쌍수 들고 환영이었다. 그런데도 선뜻 그러자 대답하지 못한 건 벨리타가 과하게 즐거워하고 있었던 탓이다.

    소르니는 기묘한 분위기를 알아차렸다. 곧장 결론이 났다. 잭슨 이 망할 쓰레기 새끼가 헛짓을 했다.

    실제로 잭슨이 헛짓을 하기는 했지만 벨리타가 상황을 잘 이용해 라빌과 테일러의 목숨을 부지시켰고, 면회 허락도 받았다는 사실을 모르는 소르니가 다급히 팔을 빼내고 벨리타를 마차에 태웠다.

    아쉬워하는 벨리타를 뒤로하고 마부에게 벨리타를 데려다준 후, 다시 자신을 데리러 오라며 명령했다.

    마차가 떠나는 것까지 확인한 소르니가 잔뜩 일그러진 낯으로 몸을 돌렸다. 왔던 길을 되돌아가는 건 어렵지 않다. 하녀와 호위를 달고 집무실까지 다다른 소르니가 홀로 안에 들어섰다.

    잭슨은 어느새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서류를 처리하고 있었다. 태평해서 욕지기가 솟구쳐 올라왔다. 시선도 주지 않은 채 종이나 넘기는 잭슨에게 다가섰다.

    “폐하. 벨리타에게 무슨 짓을 한 거죠?”

    “무례하군.”

    여전히 종이를 넘긴다. 소르니는 절박함까지 느꼈다. 벨리타가 정말 이상한데, 말로 설명할 수도 없다.

    소르니가 할 말을 고르던 순간 잭슨이 아, 하고 탄성을 뱉어냈다.

    “마침 잘 왔다. 부탁할 게 있어.”

    “이 상황에 부탁이 나오나요?”

    “체르핀 백작. 옛 생각을 해서 무례를 눈감아 주고 있지만, 더는 허락하지 않겠다.”

    미친놈인 걸 알고 있었지만. 소르니가 헛웃음을 뱉었다. 이래서 잭슨이 싫었는데.

    소르니가 탐탁지 않게 무어냐고 질문했다. 잭슨이 펜을 휘갈기며 대수롭지 않게 대꾸한다.

    “내 즉위식 준비를 도와라.”

    “뭐라고요?”

    갑작스럽게 황제가 된 탓에 즉위식도 제대로 치르지 못했다. 보통은 황제와 황후가 자기 아들을 위해 공들여 준비해 가며 즉위식을 진행하는데 제 손으로 이미 베어 넘긴 탓이다.

    이런 경우는 대신들이 준비하거나 부인이 나서는 게 옳았지만, 황궁에 근무하는 귀족들도 죽이고 파혼까지 한 탓에 준비를 도와줄 사람이 없었다.

    벨리타가 해 준다면 정말 좋은 일이겠지만 여의치 않으니, 약혼자였던 소르니가 제격이었다.

    설명하지 않아도 알아서 알아들은 소르니가 코웃음을 쳤다. 잭슨이 눈을 가늘게 접으며 사납게 노려본다.

    “제가요?”

    “공작과 척을 졌다는 건 모두가 알지. 네가 곤란한 상황인 것도 안다. 그래서 내가 처리했어.”

    소르니가 인상을 찌푸렸다.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잭슨은 덤덤하게 펜을 내려놓고 차를 한 모금 넘겼다.

    “공작을 죽여 주겠다는 뜻이다. 내가 널 도왔으니 너도 날 도와. 즉위식 준비는 어렵지 않지 않나.”

    “어떻게.”

    귀걸이를 매만졌다. 초조하고 당혹스럽다. 잭슨은 며칠 전 일을 입에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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