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화.
“그건 나중에 생각해 본다고…….”
오웬이 눈을 가늘게 뜨고 벨리타를 흘겨보았다. 벨리타도 오웬을 따라 눈을 가늘게 뜨고 장난 가득한 낯으로 쳐다본다.
널찍한 등이 굽어진다. 벨리타는 오웬의 뺨에 몇 번이고 입을 맞췄다.
오웬이 고개를 꺾어 벨리타의 입에 입술을 문질렀다. 이불 속에 숨은 여린 몸을 힘주어 안았다. 서로의 이마가 맞닿았다. 벨리타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부모님이랑 상의해 봐.”
“글쎄……. 알아서 하라고 하실 텐데.”
턱을 들자 코가 닿는다. 얼굴이 조금 더 가까워졌다. 오웬은 말끝을 흐리며 벨리타의 눈을 빤히 바라봤다. 벨리타도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그래도. 이야기드리는 게 좋아.”
단호한 회유였다. 오웬은 눈을 가늘게 접어 웃었다. 오웬은 벨리타의 말을 거절할 방법을 모른다.
오웬이 눈을 감고 턱을 더 들었다. 입술이 닿았다. 옅게 겹쳐진 입술이 달싹거리며 간질인다. 벨리타가 입술에 힘을 주었다.
“며칠 떠나 있어야 할 텐데. 혼자 괜찮겠어?”
“로엘린도 있고, 소르니도 있잖아.”
눈을 감은 벨리타가 오웬을 따라 입술을 달싹거렸다. 스치는 입술이 간지러워서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정 걱정되면 빨리 끝내고 오면 되지.”
“같이 가면 좋을 텐데.”
말캉한 입술을 꾹 누르자, 두꺼운 덩어리가 과육처럼 터져 나올 것 같았다. 오웬이 히죽거리며 벨리타의 볼과 입술, 이마 곳곳에 입술을 문질렀다.
벨리타가 푸하, 숨을 참았다가 크게 들이마시며 웃음을 터트렸다. 고개를 흔들며 입맞춤을 거부해도 오웬은 꿋꿋하게 입술을 들이밀었다.
결국 벨리타가 오웬의 입술에 손을 얹는다.
“상견례는 나중에.”
장난스러우면서도 선을 긋는 말이 새어 나왔다. 오웬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정말 나중에 상견례를 하면 될 테니까. 벨리타가 결혼을 결심하게 할 자신이 있었다.
오웬이 끌어안고 있던 손을 하나 들어 벨리타의 턱을 감쌌다. 느릿하게 입술이 닿았다.
*
날이 밝자마자 오웬은 벨리타를 깨우고 입을 맞춘 후, 대충 짐을 챙기고 떠났다. 벨리타는 로엘린과 소르니, 타린을 데리고 정원에서 산책도 한번 해 주고 밥도 잘 챙겨 먹었다.
쌓인 일 처리를 위해 집무실로 들어서자마자 황궁에서 편지가 왔다. 벨리타는 잭슨의 멱살을 쥐어 흔들어대고 싶었지만 만나야 할 수 있기에 옷을 챙겨 입었다.
옷을 갈아입고 나오자 소르니가 복도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벽에 기대어 살갑게 웃으며 손을 흔든다.
“같이 가자.”
“어디인 줄 알고?”
“보나 마나 폐하가 불렀겠지. 황실 마차 온 걸 봤거든.”
눈치 빠르긴. 소르니는 잭슨이 허튼짓을 하는지 감시하기 위해 벨리타를 따라가기로 했다. 벨리타가 어련히 잭슨의 헛짓에 당하지 않겠지만 혹시 모르니까.
타린이 안절부절못하며 쫓아다니는 것이 거슬리기도 했다.
대답하지 않은 벨리타가 계단을 내려가자 당연하게 소르니가 뒤를 따랐다. 벨리타도 딱히 거절할 마음은 없었다.
오웬이 없으니 이동 수단은 마차뿐이다. 벨리타가 눈에 띄게 질색했지만 소르니는 어쩔 수 없다며 등을 토닥였다. 호위와 엘라가 따라붙었다.
화려한 마차가 유려하게 바퀴를 굴리며 이동했다. 벨리타는 당연하게 멀미했다.
얼마 가지 않아 황궁이었다. 문지기들은 마차와 그 안에 있는 벨리타를 보고 곧장 문을 열어 줬다. 파텔 가문의 문양이 장식된 마차인 덕이었다.
몇 초 동안은 의아해했지만 소르니는 깨달았다. 벨리타가 언제든 황궁을 쏘다닐 수 있는 권한을 얻게 되었다는 것을. 분명 잭슨이 지시한 사항이리라.
저렇게 방심하다가 칼 맞으면 정말 볼만할 텐데. 소르니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넓은 황궁에 도착하고 많은 귀족과 눈인사를 하며 집무실로 이동했다. 벨리타는 무척 귀찮았다.
집무실에 잭슨이 거만하게 앉아 있었다. 벨리타가 저러다 허리 부러지겠다며 혀를 차자 잭슨이 바로 자세를 바르게 했다. 잭슨이 환하게 웃으며 팔을 벌렸다.
“뭐 어쩌라고.”
호위와 하녀들을 문밖에 대기시킨 벨리타가 소르니의 팔짱을 끼고 잭슨의 앞에 섰다.
벨리타의 앙칼진 대꾸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잭슨은 팔을 더 넓게 벌린다. 한숨을 내쉰 벨리타가 팔짱을 풀자마자 냉큼 팔을 낚아채 무릎에 앉혔다.
잭슨의 표정이 맑다. 소르니는 그만 헛구역질을 하고 싶어졌다.
“엄마, 오셨어요?”
“미친 새끼신지?”
잭슨이 해맑게 웃으며 벨리타에게 환영 인사를 건넸다. 벨리타의 얼굴이 썩어 들어가며 자신도 모르게 쌍욕을 토해냈다.
잭슨은 괘념치 않았다. 벨리타의 쇄골에 얼굴을 박고 비비적거리기나 했다.
“선물이 있지. 네가 파텔 상단을 운영하고 있다고 들었다.”
“소식 더럽게 빠르네. 선물이 뭔데? 부모님 풀어주는 거?”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 존재감이 사라진 소르니는 얌전히 소파에 앉아 잭슨의 꼴값을 지켜봤다.
잭슨이 팔만 뻗어 테이블에 올려두었던 서류를 챙겨 내밀었다. 벨리타가 종이 몇 장을 손에 쥐었다. 읽으려고 하니 잭슨의 머리가 거슬려서 읽을 수가 없다.
벨리타가 팔꿈치로 잭슨의 머리를 밀어내며 글을 읽었다. 소이트 상단. 조슈아의 노력으로 일궈온 상단.
그 상단이 벨리타의 소유로 들어왔다는 문서였다. 벨리타는 믿을 수 없어 글을 다시 읽었다. 똑같은 문장이다.
허. 어이가 없다. 무어라 설명하기 어려운 불쾌함. 기시감이 들었다. 잭슨이 피가 말라붙은 조슈아의 유품을 건네주었을 때와 같은 감정.
벨리타가 고개를 들어 잭슨을 봤다. 잭슨은 칭찬을 바라는 듯 벌써 미소 짓고 있었다.
“나는 이거 못 받아.”
단호한 거절을 들은 잭슨이 얼굴을 굳혔다. 벨리타는 손을 뻗어 테이블에 문서를 내려놨다.
“왜지? 네 상단보다 규모가 큰 곳이다. 주인도 없으니 먹어도 탈이 나지 않을 거다.”
“이걸 내가 왜 받아? 내가 어떻게 받아?”
혈연도 아니고 각별한 사이도 아니다. 고작해야 친구 정도겠지. 벨리타는 조슈아의 것을 받을 자격도 없었고, 받고 싶지도 않았다. 속이 울렁거린다.
벨리타는 조슈아의 장례식도 가 주지 못했다. 그런 벨리타가 조슈아의 전부가 녹아 있는 상단을 받게 된다니. 고개를 도리질 치며 완고하게 거절했다. 잭슨이 이유를 물었다.
“내가 조슈아에게 받을 수 있는 건, 크라바트 장식뿐이야. 난 그 애 장례식도 못 가 줬다고.”
“장례식?”
잭슨과 소르니가 동시에 말했다. 벨리타는 둘을 번갈아 바라봤다. 잭슨이 설명해 주기 전, 소르니가 선수 쳐 입을 열었다.
잭슨이 째려보든 말든 소르니는 관심 없었다. 잭슨이 입을 열면 벨리타의 속이 터지니, 소르니가 설명해 주는 게 나았다.
“장례식은 없었어.”
“뭐?”
청천벽력이었다. 장례식이 없었다고? 장례를 치러 줄 가족이 없는 조슈아이기는 해도 소속된 고용인들이 해 주지 않나?
벨리타가 잭슨을 돌아봤다. 당장 어찌 된 일인지 설명해 달라는 낯이었다. 벨리타의 시선이 좋은 잭슨은 그것을 한껏 만끽하다 드디어 입을 열었다.
“반역 무리는 장례를 치르지 않아. 이미 시체 더미는 불에 태웠다.”
반역이 아니다. 잭슨은 황제가 아니었고, 황위를 계승하기 위한 싸움을 벌였을 뿐이다. 살아남은 승자의 입맛대로 처우가 정해지는 패자의 처지인 걸 알지만. 알아도.
벨리타가 하얗게 질려 손을 덜덜 떨었다. 만약 라빌과 테일러도 그렇게 되면 어떡하지? 아니, 잭슨이 죽일 리 없다. 죽이지 않을 거다. 벨리타와 멀어지고 싶지 않으니까.
쉽게 죽는다는 건 알고 있었다. 이런 소설이나 만화 같은 장르는 조연들의 목숨이 쉽게 달아난다는 걸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래도 페이지를 넘기며 보는 것과 함께 지냈던 사람이 죽어 버리는 건 다르다. 완전하게 다르다. 죽은 후에 장례조차 해내어 줄 수 없다는 사실까지.
벨리타가 가느다란 숨을 내쉬었다. 진짜 엿 같았다.
묘비를 세워도 육신은 없고, 빈 관으로 허상의 장례를 치러 주는 게 고작이라니. 그게 최선이라니.
죄책감이 짓누른다. 화가 나고 무력하며 서글펐다.
벨리타가 퍼뜩 고개를 들었다. 잭슨과 눈이 마주쳤다. 벨리타는 분노를 주체할 수 없었다.
“넌 왜 그래, 대체? 날 왜 힘들게 하지 못해서 안달이야?”
잭슨의 보라색 눈이 선연하게 빛났다. 벨리타가 거듭 마른세수를 했다. 버석하게 말라 나올 눈물도 없었다.
“뭐가 문젠데, 넌? 내 친구 시체를 불태워 버려서 장례도 못 치러 주게 했다는 걸 그렇게 쉽게 말할 수 있어? 대체 어떻게? 그래 놓고 상단을 받으라고? 미쳤어, 너?”
깔끔하게 정돈된 옷깃을 잡았다. 멱살을 잡고자 왔었는데 정말 잡게 될 줄은 몰랐다. 벨리타가 분노를 삼키며 눈을 치켜떴다.
“그럼 너 말고 누가 받지? 로틀 남작에게는 너뿐이었다.”
사실이다. 제대로 된 혈연이 없는 조슈아에게는 벨리타만이 유일했다. 잭슨과 소르니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벨리타는 전신을 짓누르는 무게감이 버거워졌다. 납득이 된다. 남의 손에 들어가거나 상단이 망하는 것보다 벨리타의 소유가 되는 걸 조슈아도 기뻐할 거다. 그런데 그게 씨이발 뭐.
벨리타가 잭슨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벨리타. 황후가 되면 상단은 운영할 수 없지만 걱정 마라. 대리인을 세워 주지. 이미 상단은 네 명의다.”
“너 이 씨이발, 언제까지 그딴 소리 할래.”
소르니가 헛숨을 삼켰다. 원망과 미움, 분노가 잭슨을 향했다.
차이는 현장을 실시간으로 볼 수 있다니. 소르니는 팝콘 대신 비스킷을 씹었다.
“내가 너 헛짓거리 봐주는 것도 한두 번이야. 잘하겠다고? 배워 가겠다고? 말만 해 봤자 뭐가 달라져. 너는 여전히 날 괴롭히고 화나게 하는데.”
무게감과 분노, 무력감이 오는 원인을 잭슨에게서 찾았다. 애먼 곳에 화풀이다. 벨리타는 알고 있음에도 견디기 벅차서 잭슨에게 화살을 돌렸다.
잭슨의 낯이 서서히 굳어갔다. 잭슨은 언제나 그랬듯 벨리타의 선을 가늠했다. 이만큼 넘어와도 넘어가 주나. 그럼 이 정도는? 더 해도 되나? 벨리타는 매번 잭슨의 무례와 폭력성을 눈감아줬다.
이번에도 그럴 수 있었다. 다만 잭슨이 간과한 건 이미 금이 가 있는 둑에 계속해서 돌팔매질했다는 점. 서서히 쪼개지는 둑에 마지막 한 방을 내리쳤다는 점이다.
잭슨이 얌전히 있었다면 기회는 더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미 엎질러진 물은 주워 담을 수 없다.
잭슨의 멱살을 끌어 코앞까지 당긴 벨리타가 짓씹듯 이를 악물고 뇌까렸다.
“내 아들은 이딴 짓 안 해. 난 내 새끼 이따위로 키운 적 없고, 거둘 생각 없어.”
진작 해냈어야 했을지도 모른다. 벨리타가 정에 연연하여 잭슨에게 여지를 주지 않았다면 더 나은 결과가 있었을 수도 있었다.
잭슨이 파리하게 질렸다. 무릎에서 일어나려는 벨리타를 움켜잡아 품에 가뒀다. 버둥대는 몸을 단단히 붙든다.
지켜보던 소르니가 몸을 일으키며 나서려고 입을 열었다. 순간 매서운 파열음이 울렸다.
잭슨의 고개가 돌아갔다. 붉게 부어오른 볼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소르니가 입을 벌렸다. 삐걱거리며 잭슨의 얼굴이 돌아온다. 놀란 얼굴이었다.
얼얼한 손을 움켜쥔 벨리타가 사정없이 미간을 찌푸린다.
“전부터 하지 말라고 몇 번 얘기했어. 내 말이 말 같지 않아? 우스워?”
격양된 목소리였지만 말투는 매정했다. 잭슨이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벨리타가 몸을 빼내려 움찔거릴수록 늪처럼 집요하게 잡고 늘어진다.
“기회는 몇 번이나 줬어. 말을 해도 듣지 않는 건 짐승이지, 사람이야? 꼭 내가 손 들게 해야 해? 너 그렇게 머리 나빠? 난 너랑 결혼 생각 죽어도 없어. 내가 널 봐주고 있던 건 아들과 닮아서지 너와 결혼하고 싶어서가 아니야.”
“벨리타, 내가 잘못했어.”
“뭘 잘못했는지나 알아? 그냥 상황을 모면하려고 둘러대는 거잖아, 너.”
물방울이 떨어진다. 볼을 적시고 흘러내린다. 벨리타는 잭슨의 눈물도 이젠 지긋지긋하다고 느꼈다.
“……그럼 내가 어찌해야 되나. 어떻게 해도 너는 날 봐 주지 않는데.”
소르니는 잭슨의 말이 기만으로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