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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이 쓴 로판 소설에 빙의되어버렸다-115화 (115/150)
  • 115화.

    “난 언제나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살았는데.”

    “이번에도 그러면 되지.”

    젖은 머리카락이 손가락에 엉킨다. 벨리타는 꽤 노곤노곤한 태도로 머리를 맡겼다. 오웬의 손가락이 곱슬곱슬한 머리카락을 빗었다.

    “더 좋은 여자를 만나더라도 귀족 신분인 게 좋잖아. 살아 보니까 돈 많고 집안 좋고 배운 게 많으면 나쁠 건 없더라고.”

    태평한 벨리타의 말에 오웬의 손이 움직임을 멈추었다. 오웬은 순간 자신이 잘못 들은 줄 알았다. 당연하게 다른 여자를 만나리라 이야기하는 벨리타가 경악스러웠다.

    머리를 빗던 손을 떼어 벨리타의 어깨를 잡았다. 마른 어깨가 손아귀에 잡혀 돌아갔다. 벨리타의 상체를 돌린 오웬이 무릎을 세워 벨리타를 내려다본다. 에메랄드를 담은 눈이 덤덤하게 감았다가 뜨였다.

    “무슨 말이야. 내가 다른 여자를 만날 거라 말하는 거야, 지금?”

    “만날 수도 있다고 생각해.”

    오웬은 울컥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삼켰다. 분노인가? 서운함일지도 모르겠다. 감정은 서툴러서 정확한 명명을 찾기도 어려웠다.

    “첫사랑이 왜 안 이루어진다고 하는지 알아?”

    이를 악문 오웬의 뺨을 손가락 끝으로 쓸어내린 벨리타가 무덤덤한 낯으로 지껄였다.

    “서툴러서 그래. 감정도, 대하는 법도. 어설프게 망치고 그러지 말자 배운 뒤에 더 좋은 사람을 만나가는 거지.”

    “무슨 의미야? 그럼 내가 널 거쳤다가 더 좋은 사람을 만날 거라는 소리야?”

    “그래도 괜찮다는 말이야.”

    꽉 다문 잇새로 손가락이 침입했다. 이 상할라, 작게 중얼거리며 오웬의 입을 벌렸다.

    오웬이 입속에 침입한 손가락을 약하게 물었다. 차라리 씹어 삼켜 버리고 싶어졌다.

    “내가 신기하고 특이해서 마음이 가는 걸지도 모르잖아. 나 같은 아줌마를 좋아하는 것보다 네 또래에 풋풋한 애와 연애하는 게 당연하니까. 그냥, 가끔 그런 생각이 들어.”

    오웬은 듣고 싶지 않아졌다. 벨리타는 이따금 잔인하다. 잔혹하고 가슴에 비수를 놓는다. 너무도 현실적이고 자기 혐오적인 말속에서 벨리타는 스스로를 갉아먹곤 했다. 상대에게 상처를 주고 자신도 헤집어진다.

    오웬은 이 대화가 과연 어떤 이득이 있는지 묻고 싶어졌다. 불필요한 감정 소모, 서로에게 해만 되는 대화다. 입속의 혀처럼 구는 손가락을 뱉어냈다.

    벨리타는 꿋꿋하게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넌 젊고, 난 속이 늙었잖아. 나 때문에 네가 네 나이대에 즐겨야 할 일들을 즐기지 못할까 봐 걱정돼. 문득 내가 네 발목을 잡고 있는 게 아닐까, 하고…….”

    “이 대화 못 들은 거로 할게.”

    말을 끊은 오웬이 벨리타의 머리 위에 수건을 얹었다. 벨리타의 시야가 가려졌다. 오웬이 무슨 표정을 하고 있을지, 슬퍼하고 있는지 화를 내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벨리타가 수건을 들치었다. 오웬이 벨리타의 등을 떠밀었다.

    “입양 문제는 더 생각해 볼 테니까, 가서 자.”

    “넌 아깝지 않아?”

    벨리타가 침대에서 일어나 오웬을 바라봤다. 시야에 담기는 무뚝뚝한 벨리타의 낯을 보니 오웬은 그만 울고 싶어졌다. 자신 말고 다른 여자를 만나 보라는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은 와중에도 사랑스럽고 예뻐서. 짜증이 났다.

    오웬이 양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벨리타는 종종 오웬도 알지 못하는 감정들을 꺼내어 들추어 본다.

    깊은 곳에 파묻혀 인지도 못 했던 서럽고 슬픈 감정도 기어코 거들떠보게 하고 분노도 고집스럽게 찾아내 건들고 만다. 벨리타와 있으면 감정이라는 늪에 빠지게 되곤 했다. 생소한 감각들이 발목을 붙들고 천천히 잠식시킨다.

    슬픔, 분노, 애정, 기쁨, 이성적 판단 아래 제어되던 감정들이 오웬을 침식한다. 들이켜는 숨에 가득 파고들어 폐를 가득 채운다.

    감정에 휘둘리는 엿 같은 감각을 벨리타는 느끼게 하고야 마는 것이다.

    오웬이 주먹을 꽉 쥐었다. 목 안쪽이 뜨겁게 타오른다. 코안이 시큰거리고 눈가가 따끔거렸다.

    “내가 널 좋아하는 건, 내가 결정한 일이야. 네가 걱정할 것도 고민할 필요도 없는 문제란 말이야.”

    “넌 나 같은 아줌마가 대체 왜 좋은데?”

    목구멍이 불구덩이를 삼킨 듯 뜨겁고 아렸다. 오웬이 마른침을 삼켰다. 저릿하다.

    “넌 가끔 날 굉장히 힘들게 해.”

    “내가?”

    벨리타가 헛웃음을 지으며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한 번은 겪고 지나가야 할 문제였다. 완전한 타인과 가까워지는 과정은 결코 순탄할 수 없다. 완벽하게 타인이기에 이해할 수 없는 사안으로 다투고 해소를 해야 한다. 참기만 하는 관계는 좋게 흘러갈 수 없기에.

    “그러는 너야말로. 넌 왜 말을 안 해? 잭슨이 황위를 쟁탈하려는 걸 나에게 말해 줬으면 조슈아도, 테일러와 라빌을 지킬 수도 있었어. 잭슨한테 가서 빌든, 대피시키든 내가 뭐라도 했을 거 아니야! 네가 짠 판에 내가 놀아나는 꼴이 좋아? 게다가 난 네 성이 뭔지, 가족과 어떤 관계인지도 며칠 전에 처음 알았어. 우리 관계에 이게 말이 돼? 내가 못 미더워?”

    “물어보지도 않았잖아! 나에 대해 궁금해하기나 했어? 네 세상으로 돌아가겠다고 선을 그어놓고 언제든 떠날 것처럼 굴었으면서. 네 이름을 알려 주지도 않고, 내 앞에서 몸을 해치기나 하고! 우리 관계? 대체 뭔데? 날 좋아한다고 해놓고는 기다리라지 않나, 몸 주인을 찾아달라지 않나. 이번엔 뭐? 늙은 자기보다 또래에 맞는 여자랑 만나라고? 나한테 할 소리야?”

    상황이 처참했던지라 참고 넘겼던 문제였다. 감정 소모를 피하고 싶어서, 싸우고 싶지 않아서 상한 감정을 묻어두고 외면했다. 묻어두어 봤자 쌓인 것은 넘치기 마련인데. 서로가 격해진 감정을 인지하지 못하고 언성을 높였다.

    오웬이 침대에서 일어나 벨리타의 앞에 섰다. 벨리타는 무의식적으로 뒷걸음질을 치며 떨리는 숨을 참았다.

    “넌 날 가끔 무력하게 만들어. 같이 행복해지자고? 내가 어떻게 행복해져? 내 자식새끼 혼자 남겨놓고 나만 어떻게 행복해지냐고! 네가 짠 판에 아무것도 모르고 휘둘리면서 행복해지겠어?”

    “널 위해서였어! 넌 힘들어하고 아무것도 하기 싫어하는데, 잭슨이 사람을 죽인다고 말해 봤자 네가 움직였겠어? 자기혐오도 그 정도면 됐어. 네 탓이 아니라고 내가 얼마나 더 이야기해 줘야 해? 이제 이곳이 네 세상이야. 네가 살 곳이라고. 언제까지 회피할 건데? 다 가짜 같아 보여? 네가 만든 관계들은 보이지도 않아?”

    서로를 할퀸다. 벨리타가 거리를 벌려 멀어졌다. 오웬이 일그러진 낯으로 벨리타에게 다가갔다.

    뒷걸음친다. 뒤로 물러나고 물러나서 달아날 곳 없는 벽까지 닿았다. 벨리타가 헛숨을 삼켰다.

    “네가 만든 관계야. 네가 네 의지로 직접 맺은 사람들이야. 체르핀 백작도, 황제도, 로틀 남작도. 그리고 나도. 심지어 찾아온 샤를로트 백작 부인과 영식까지. 전부 네 사람이라고. 언제까지 네가 살던 세상을 그리워만 하고 있을 건데?”

    오웬이 벨리타의 앞에 섰다. 치마 너머 허벅지에 붙은 주먹이 가늘게 떨렸다. 벨리타의 시야가 갈피를 못 잡고 흔들린다.

    씨근덕거리며 벨리타에게 손을 뻗은 오웬이 주춤했다. 벨리타는 두려워했다. 대체 무엇을? 어깨를 쥐려고 든 손에 움츠러들고 가까워진 거리를 견딜 수 없어 하며 달아난다.

    오웬은 순간적으로 벨리타의 전 남편을 떠올렸다.

    아차, 싶었다. 오웬은 너무 격양되어 있음을 깨달았다. 평소였다면 절대 하지 않았을 말과 행동이다. 범람하는 감정에 휩쓸려 벨리타를 몰아넣고 말았다.

    반사적으로 오웬이 뒤로 물러났다. 벽에 등을 바짝 기대고 있던 벨리타가 스르르 주저앉았다. 숨과 몸이 떨렸다.

    짧게 들은 전남편의 이야기를 간과했다. 벨리타가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을 줄은 몰랐다.

    오웬이 안절부절못하며 벨리타에게 손도 대지 못하고 발을 동동 굴리다 서둘러 침대에서 이불을 끌어왔다. 푹신하고 부드러운 이불이 벨리타를 덮는다. 마법으로 방 안을 환하게 밝히고 베개와 쿠션을 벨리타에게 안겨 줬다.

    벨리타는 혼이 빠진 낯으로 손을 덜덜 떨며 베개를 끌어안았다.

    오웬은 벨리타의 앞에 주저앉아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벨리타가 소스라치게 움찔거렸다. 천천히, 언제든 내칠 수 있을 속도로 벨리타의 손을 잡았다.

    벨리타가 손을 내려다보다 고개를 들었다. 공포가 남아 있었다.

    “……내가 미처 몰랐어. 미안해. 다시는 이런 일 없을 거야. 혼자 있고 싶어? 차 내올까?”

    “……아, 아니. 됐어.”

    벨리타 자신도 놀란 듯 공포감이 가신 자리에는 당혹스러움이 남았다. 언제부터 이런 트라우마를 갖고 있었지? 그리 담아두고 있지 않은 줄 알았는데.

    벨리타가 베개를 품에 가득 끌어안았다. 헛웃음과 함께 눈물이 쏟아졌다.

    오웬은 다급히 손수건으로 벨리타의 눈물을 닦았다. 안아 주지도, 다독여 주지도 못하고 어쩔 줄 몰라 했다.

    “……나 되게 무서워했었구나.”

    벨리타가 조용히 중얼거리자 오웬의 눈물도 터져 나왔다. 오웬이 맞잡은 벨리타의 손등에 이마를 댔다.

    “미안해. 정말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응. 나도 미안. 갑자기 이래서 놀랐겠네.”

    “내가 놀란 게 문제가 아니잖아.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오웬이 말끝을 흐렸다. 트라우마로 남을 정도로 아픈 기억을 굳이 들추고 싶지 않았다.

    오웬이 벨리타의 손을 빠듯하게 감싸 쥐었다. 그리고 벨리타의 손등에 이마를 문질렀다. 가늘고 보드라운 머리카락이 손목을 간지럽혔다.

    벨리타의 손이 오므라들었다. 오웬이 벨리타의 손등에 기대어 훌쩍거렸다. 물기 젖은 목소리가 꼴사나웠다.

    “……내가 한 말. 진심이 아니라고는 못 하겠지만 그래도 화낼 정도는 아니야. 섭섭하기는 하지만 넌 아직 힘든 시기니까.”

    서로가 격해져서 긁어댔지만 벨리타도 언젠가는 나눠야 할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차분하게 서운했던 점들을 이야기하고 사과하며 나아가면 좋겠다고.

    벨리타가 맞잡은 손을 빼내어 오웬의 뺨을 감쌌다. 오웬이 고개를 든다. 눈물에 젖은 얼굴이 꽤. 벨리타가 침을 삼켰다. 아무리 그래도 좀. 눈가를 문질러 닦으며 벨리타가 대꾸했다.

    “나도 그래. 목소리 높일 필요가 없었는데.”

    “그 말 진심이야? 내가 다른 사람 만나면 좋겠다는 거.”

    젖은 노란 눈이 보석처럼 반짝거렸다. 흐트러진 머리와 풀어 헤쳐진 셔츠. 밝은 방에서 더욱 잘 보이는 오웬의 우는 얼굴.

    오웬은 울면 코가 붉어지는 편이었구나. 벨리타가 무심코 베개를 움켜쥐었다.

    “아니. 그냥 자격지심이야.”

    “왜?”

    벨리타의 손바닥에 뺨을 비빈다. 말캉하고 매끈한 감촉이 손에 감겼다. 벨리타가 다른 손으로 오웬의 팔을 잡아끌었다. 잠자코 이끌려 거리가 가까워졌다. 쪽. 고개를 내밀어 오웬의 입에 입을 맞췄다.

    “난 네 어머니보다 나이가 많을걸. 난 배운 것도 없고, 가진 것도 없는데 네가 아깝잖아.”

    “왜 그런 생각을 해.”

    무릎을 세워 기어 온 오웬이 조심스럽게 벨리타를 안았다. 따뜻한 품. 좋은 향. 벨리타가 훌쩍거렸다. 나란히 울고 있는 꼴이 우습기까지 하다.

    오웬을 끌어당겨 벽에 기대어 앉히고 벌어진 다리 사이에 앉았다. 쏙 알맞게 들어가는 자리가 기분 좋았다. 의자와 침대를 놔두고 바닥에 앉아 함께 이불을 덮었다. 벨리타가 베개와 쿠션을 한 아름 끌어안는다.

    “벨리타. 넌 좋은 사람이야. 웃는 얼굴도 좋고, 남을 챙기는 배려와 다정함이 좋아. 네 구수한 욕도 좋고, 이리저리 튀는 매력도 있어. 까칠한 면도, 매정한 모습도 설레.”

    칭찬을 들으니 간질거렸다. 울음 탓에 갈라지고 가라앉은 목소리 덕인지, 애정이 느껴지는 말투 덕인지 모르겠다.

    벨리타가 오웬의 가슴에 기댔다. 오웬이 벨리타를 품에 안았다.

    “앞으로 많이 말할게. 벨리타, 너도 많이 말해 줘. 난 언제나 네가 궁금해.”

    응. 그럴게. 낯간지러워 웅얼거리는 목소리에 오웬이 낮게 웃었다. 고개를 숙여 벨리타의 볼에 마구 입을 맞췄다.

    벨리타가 파드득, 몸을 움츠리며 웃다가 오웬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래서 입양은 어쩌겠다고?”

    문제가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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