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자신은 벨리타가 아니라는 폭탄 발언 이후 제대로 만나지 못했다. 심지어 황궁에 오래 머물지도 않았다. 한 달 넘게 만나지 못하고 겨우 한 번 만났는데, 그마저도 욕을 얻어먹어야 했었다.
잭슨은 벨리타를 파악하기 어려웠다. 벨리타에게 예쁨받고 싶고 사랑받고 싶은 마음에 일을 저지르면 항상 혼이 났다. 잭슨이 쌓인 문서들을 처리하며 입술을 내밀었다.
친구 하면 자주 만나 준다더니 다 거짓부렁이다. 그래도 괜찮다. 벨리타는 가족에 묶여 제안을 거절하지 못할 테니까.
데이비드는 가주 일을 하며 벨리타를 신경 쓰지 못할 테고, 백작이 된 소르니도 바쁘게 움직이느라 벨리타를 챙겨주지 못할 거다. 방해되는 거라면 오웬뿐이다. 그 능글맞은 변태 자식. 오웬을 치워내고 싶지만, 벨리타의 건강 회복을 위해서 필요하긴 하니.
문서에 도장 찍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잭슨은 가늠해 보았다. 벨리타를 어디까지 몰아넣어야 자신에게 와 줄는지. 부모를 가두고, 꽤 아끼던 조슈아도 죽였음에도 벨리타는 잭슨을 혐오하지 않았다. 선을 넘는 발언을 해도 역겨워하지 않았다.
벨리타의 허용 범위는 어디인가. 어느 정도로 선을 넘으면 진심으로 미워하나.
벨리타가 그어 놓은 선을 넘지 않는 범위에서 벨리타를 몰아넣어 가져야 한다. 잭슨에게는 어려운 일이었고 해내고 싶은 일이었다.
매달려도 와 주지 않고 사랑한다 속삭여도 동해 주지 않으니. 착하게 굴면 잠깐 돌아봐 주고 타인에게로 떠난다. 갖은 수단을 써 보아도 좋아해 주지 않으면 잭슨의 방법대로 하는 길밖에 없다.
우선은 조슈아의 상단을 양도하는 일로 만나자고 해야겠다. 황제가 만들어 자금줄로 사용하던 상단. 잭슨이라고 못할 것 없다. 거래를 거절하더라도 자금을 핑계로 벨리타와 만나는 일을 늘리고 바쁘게 만들어 타인과 만날 시간을 줄이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듯했다.
오웬과 벨리타가 각별한 사이로 발전한 모양이지만, 벨리타가 건강을 회복하면 없어질 사람이다.
차근차근, 계획대로. 틀어지지 않게 여유를 가져서.
잭슨이 편지지를 들어 빠르게 펜을 휘갈겼다. 벨리타를 만날 생각에 들떴다.
*
밤을 새워 일을 처리하려고 하는 벨리타를 엘라가 억지로 일으켰다. 고향에 갔다가 돌아오니 벨리타가 회복되어서 정말 기뻤는데 사랑하는 망할 아가씨는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몸을 망쳤다.
작년에는 자살 시도를 하지 않나, 황태자와 만나서 다치지 않나 독을 먹질 않나, 비교적 최근에는 밥도 안 먹고 걷지도 않아서 피골이 상접했었다.
이제는 과로다. 엘라는 벨리타가 무서울 정도로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자가 치유가 있다고 하지만 과로로 누적되어 망가지는 몸은 회복이 되기나 할지. 여전히 멋있고 혼나고 싶은 아가씨지만 돌연 죽어 버릴까 봐 너무 무섭다.
엘라는 이것까지만 하면 된다는 벨리타를 만류하며 침실까지 끌고 왔다. 벨리타는 짐짝처럼 질질 끌려갔다.
침실에 벨리타를 던져 넣은 엘라가 목욕 시중도 들어 주어야 쉬겠느냐고 소매를 걷어붙이자 벨리타가 파드득 놀라며 엘라를 쫓아냈다.
벨리타는 엘라가 근래 들어 굉장히 달라졌다고 느꼈다. 벨리타의 탓이었으나 벨리타는 엘라가 성장기라 그런가 보다, 하고 지레짐작했다.
벨리타는 몸이 찌뿌둥해 기지개를 켰다. 전에는 몸을 많이 움직였던 것 같은데 최근 들어서 그리 움직인 적이 없다.
우울하니 몸이 움직일 기력이나 날까. 벨리타는 다시 운동을 시작해야겠다고 간단히 마음먹고 빠르게 씻고 나왔다. 축축한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문지르며 벨리타가 침대에 앉았다.
로엘린과 타린이 머무르는 와중에 소르니는 떼를 쓰며 며칠 자고 가겠다고 했다.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오웬의 입양 결정과 타린과 소르니의 데이트도 단번에 끝내야겠다.
우선 오웬과 이야기를 나누어야 할 텐데. 벨리타가 침대에서 일어났다. 어차피 같은 지붕 아래에 있는데 만나지 못할 게 뭔가.
벨리타가 머리에 수건을 얹고 침실에서 벗어나 오웬의 침실로 향했다. 아래층에 있는 오웬의 방으로 가는 길은 꽤 어둑하고 고요했다. 풀벌레 소리가 울고 풍성한 나뭇잎들이 나부끼는 소음이 났다.
잡음 속에서 수많은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내 상념으로 뛰어들어 가라앉는다. 바란 적 없는 삶이지만 잘 살아가고 있는 걸까. 몸 주인을 위해 쓰던 일기는 이제 쓸 필요가 없을까. 장례도 치러 주지 못하고, 아무도 모르게 홀로 죽어서 안타깝다.
조슈아는 장례 치러 줄 사람도 없을 텐데 잘 되었을까. 데이비드는 아직 학기가 끝나지 않았는데 가주 일과 잘 병행하고 있으려나.
내 딸은. 내 가족들은. 나의 장례를 잘 치러 주었을까.
보험은 잘 받았을까. 통장의 비밀번호는 찾았을까. 혼자 상주를 서면 많이 힘들 텐데 아이를 지우지 말 걸 그랬다. 우리 딸 이제 혼자여서 어떡하지. 아직 한참 어린데 무서운 세상에 홀로 남겨두어서 어쩌면 좋지.
딸이 이 세상에 개입할 수 있었다는 건, 벨리타가 소설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걸 보고 있다는 의미였다. 죽게 되는 순간 모든 정보를 떠올렸다.
보험과 통장, 집문서. 그 외의 모든 정보를. 홀연히 홀로 남게 될 딸이 걱정되어 도움이 될 것들을 모조리 긁어모았다. 무능한 엄마가 해 줄 수 있는 건 이따위 것들뿐이었다.
벨리타는 빛을 밝히는 마법을 전개했다. 복도에 서 있는 벨리타의 주위가 순식간에 환해졌다.
주위의 사람들이 행복해졌으면 좋겠다. 벨리타는 빛이 따라오는 걸 느끼며 무심코 생각했다.
삶을 찾은 소르니가 고생 없이 행복하면 좋겠다. 데이비드도 바라던 가주의 자리를 쟁취하고 좋은 사람을 만나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다. 라빌과 테일러가 풀려나서 단란하게 살았으면 좋겠다. 조슈아가 짧은 삶 동안 조금이라도 행복했길 바란다. 잭슨은.
순간 벨리타의 걸음이 멈추었다. 모두가 벨리타에게 아픈 손가락이었으나 잭슨은 묘하게 더 아프고 시선이 가는 손가락이다.
소설대로라면 벨리타를 만나 불행했던 잭슨이 행복해져야 했다. 불행 범벅인 남자 주인공이 여자 주인공을 만나면 성장하고 행복해지는 게 당연한 이치니까. 잭슨의 행복해질 기회를 벨리타가 앗아간 것과 다름없다.
아들을 떠올리게 하는 남자 주인공. 행복해질 기회를 빼앗긴 아들과 닮은 남자 주인공.
벨리타는 헛발질을 하며 발을 굴렀다. 다른 아이들은 적어도 자신의 행복을 찾아가는데 잭슨은 그러지 못하고 있다. 잭슨이 행복해지면 좋겠다. 잭슨에게 오롯이 애정을 쏟아부어 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나거나 자신의 행복을 찾길 바랐다.
벨리타에게 얽매이지 않을 수 있게. 집착은 사랑이 아니다. 자신이 좋자고 강요하는 감정이 사랑일 수 없다. 잭슨이 사랑을 배우길 원하고 사랑을 할 수 있게 자라길 바란다. 스스로를 애정하길 소망한다. 스스로를 사랑하고 아끼는 법을 배우고 성장하면 좋겠다.
벨리타가 마법으로 빛나는 불을 껐다. 어두워진 복도를 가로질러 나아간다.
도착한 벨리타가 오웬의 침실 문을 두드렸다. 방문 너머로 황급히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얼마 가지 못해 문이 열리자 셔츠를 급하게 꿰입은 오웬이 헝클어진 머리로 멋쩍게 미소 지었다.
“올 줄 몰랐어. 불렀으면 내가 갔을 텐데.”
“나도 발 있어, 인마. 할 말 있어서 왔는데, 자고 있었어?”
새침하게 대꾸한 벨리타가 오웬을 지나쳐 방 안으로 들어섰다. 수도 저택에 올 때 짐이 없다고 느끼긴 했지만 정말 없었다. 방 내부는 내어 줬던 그대로였고 추가된 가구도, 짐도 없었다.
벨리타가 주위를 둘러봤다. 침대 옆 좁은 탁자에 놓인 안경은 벨리타가 연말 선물로 건넨 것이다. 쓰고 있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는데, 보관만 하는 모양이었다.
벨리타의 시선을 느낀 오웬이 벨리타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안경 되게 잘 쓰고 있어. 정말이야.”
안경은 아티팩트였다. 눈의 피로를 덜어 주는, 보잘것없어 보이지만 굉장한 기능을 갖추고 있는 선물이다. 그런데도 쓰고 있는 모습을 보여 주지 않아 내심 섭섭한 건 사실이다.
벨리타가 퉁명스럽게 어련히 잘 쓰겠냐며 오웬을 밀어냈다. 오웬이 더욱 달라붙어 등에 가슴을 기댔다.
벨리타는 순간 엎어치기를 할까 고민했지만, 목적이 따로 있었기에 참아야 했다.
“됐고, 할 말이 있어서.”
“응. 얘기해.”
등 뒤에 오웬을 매단 채 뒤뚱뒤뚱 걸어 침대에 앉았다. 자연스럽게 오웬의 위에 앉게 된 벨리타가 축축한 머리를 매만졌다.
오웬이 뒤로 물러나 벨리타를 침대에 잘 앉혀놓고 젖어 있는 긴 머리에 얹어진 수건을 들었다.
“소르니가 대답을 듣고 싶어 하잖아. 생각해 봤어?”
“생각은 해 봤지.”
“어쩌고 싶어?”
수건이 머리카락을 감싸 목 위부터 천천히 누르며 내려온다. 벨리타는 얌전히 머리를 맡겼다. 간질거리는 가슴께에 괜히 발을 구르고 싶어진다.
“잘 모르겠네. 결혼해서 널 고생시키고 싶지는 않은데.”
“양아들 됐다고 소르니가 널 괴롭힐 애는 아니잖아. 나중을 생각해서도 귀족으로 사는 게 도움 되지 않아?”
역시 가족과의 관계가 끊어질까 봐 괴로운 거려나.
벨리타가 고개를 뒤로 꺾어 거꾸로 오웬을 바라봤다. 벨리타의 머리카락을 문지르던 오웬이 마주치는 시선을 느끼고 웃는다. 그리고 고개를 숙여 벨리타의 이마에 입을 맞춘다. 가슴께가 일렁거린다. 손끝이 괜히 간지러웠다.
“그것도 그렇지. 그런데 난 잘 모르겠어. 평민인 난 자유롭고 신경 쓸 체면도 없어서 좋단 말이야.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살면 되고.”
벨리타도 이곳에 오고 몇 달간 미친 사람 취급받으며 적응하느라 고생했다. 남들의 시선을 신경 쓰고 말도 안 되는 예절을 지켜가며 사는 건 고단하고 피곤하다. 오웬이 말하는 바가 무엇인지 체감했다.
오웬이 수건을 머리에 덮어 손가락 끝으로 지그시 문지르고 지압한다. 어으, 좋다. 벨리타가 앓는 소리를 냈다.
“게다가 네가 정말 나랑 결혼해 줄지 확실하게 정해진 것도 아니잖아.”
“만난 지 얼마나 됐다고 결혼이야.”
“네가 사는 세상이 어떤지 몰라도 이곳은 만나지도 않은 사이여도 결혼을 해.”
벨리타도 안다. 벨리타의 어머니 세대가 그랬다.
벨리타가 눈을 감았다. 오웬의 손길이 세세하게 느껴졌다. 조심스럽고 애정이 가득 담긴 부드러운 손길.
벨리타 또한 오웬이 좋다. 결혼해도 마음고생은 시키지 않을 것 같았다. 오웬은 좋은 남자다.
그럼에도 성급히 결혼하겠노라 대답을 하지 못하는 건 이른 나이에 섣불리 결정한 결혼은 피눈물을 쏟게 했고, 젊은 날의 청춘을 제대로 즐겨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가족을 건사하느라 일만 했던 벨리타. 현실에서의 벨리타는 어른이었다. 어디든지 갈 수 있지만 어디든 갈 수 없이 묶인 처지. 할 수 있는 건 많지만 제약된 신세.
모든 걸 잃고 새로 시작하게 된 시점에서 다시 붙들리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는다.
사랑은 하고 싶지만 구속되고 싶지 않고, 청춘을 즐기고 싶지만 낭비하고 싶지 않다. 벨리타는 나름 세월을 살아왔지만, 자신의 세상은 무척 좁았다는 걸 알았다. 아는 만큼 보이는 세상은 배울수록 점점 넓어진다. 배우는 게 즐겁다. 오십 후반이 되어서야 깨달았다.
대답이 없는 벨리타에게 채근할 마음이 없는 오웬은 말없이 머리를 말렸다. 마법으로 말릴 수 있지만 직접 말려 주고 싶었다. 이유는 모르겠다. 그저 그러고 싶었다.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
오웬에게 들었던 말을 되돌려준 벨리타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