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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이 쓴 로판 소설에 빙의되어버렸다-113화 (113/150)
  • 113화.

    모르는 체해야 할 일들이 많아서인지, 정말 몰라서인지 타린은 어쩔 줄 몰라 했다.

    소르니는 타린을 훑어보며 낱낱이 평가했다. 버릇이었다. 곱상하게 생긴 외모와 소심한 듯 보이는 성격. 백작가의 가주가 될 사람으로서 부족해 보이는 면.

    소르니가 입가를 가린 채 허, 하고 비웃었다. 타린의 고개가 수그러들었다. 모르는 체였어도 말은 해두어야겠다 싶어, 소르니는 허리를 바르게 폈다.

    “샤를로트 백작 부인이 벨리타에게 빌붙어 줄타기했죠. 폐하와 2황자를 두고 몇 번이나 저울질을 하고 안부를 묻는 체, 폐하와 긴밀한 사이인 벨리타를 몇 번이고 떠봤잖아요?”

    로엘린이 바삐 움직이는 기색이 있기는 했지만, 자세히 알지는 못했다. 타린은 이 자리가 무척이나 부끄러워졌다. 아무것도 몰랐다는 게 몹시 수치스럽다. 어머니가 한 일들을 아들이 몰라 비웃음을 당하고 책망받았다.

    타린이 아는 로엘린은 그런 사람이 아니었으나, 타린은 자신의 어머니를 잘 알지 못했다.

    창피해서 어디로든 달아나고 싶었다. 타린이 아랫입술을 꽉 물어 감정을 억눌렀다. 비꼬는 말들이 타린을 찌르고 헤집는다.

    “몰랐다면 부끄러워하세요. 벨리타에게 도는 소문을 다 알고 있으면서도 돕지 않고 이용이나 했던 백작 부인도, 무지한 당신도요.”

    차갑게 일갈한다. 소르니는 테이블을 짚고 일어섰다. 타린은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상체를 웅크린 타린을 내려다본 소르니가 소리 내어 헛웃음을 지었다.

    “벨리타의 친구? 하, 웃기지도 않아. 정작 필요할 땐 얼굴도 내비치지 않았으면서.”

    소르니가 등을 돌려 정원을 가로질렀다. 타린은 축축해지는 눈가를 손바닥으로 지그시 누르며 울음을 참았다. 억울해서도 아니고 화가 나서도 아니다. 너무 부끄러웠다. 무지한 스스로가 수치스럽고, 친구라고 생각한 벨리타를 이용한 꼴이었던 자신이 한심했다. 벨리타에게 사과하여 바로 잡아야겠다.

    타린이 주먹을 꾹 쥐었다. 우선 울음을 좀 참고 나서.

    *

    “아, 릴페트 자작이 제국 동쪽에 있는 마정석 동굴을 독점했다고요?”

    “네, 얼마나 기세등등해졌는지~”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떠들어댔다. 뒤에서 대기하고 있는 엘라가 벨리타의 귓가에 고개를 들이밀어 서류가 많이 밀렸다고 속삭였다.

    벨리타는 가능한 한 더 많은 대화를 나누고 싶었으나 시간 여건이 되지 않아 자리에서 일어났다. 로엘린이 괜찮다며 돌아보는 벨리타를 만류했다.

    벨리타는 서류를 처리하러 떠났고, 로엘린은 하녀의 안내를 받아 손님방으로 이동했다.

    로엘린이 데려온 하녀들이 재깍 일 처리를 빠르게 끝내 놓은 덕에 짐 정리는 완벽했고, 테이블 위에 로엘린이 읽다 만 책도 올려놓았다. 의자에 앉은 타린은 하녀가 준비해 뒀을 리가 없지만.

    아들을 너무도 사랑하는 로엘린은 심각한 표정으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타린을 반겼다. 타린이 이야기를 나누자며 채근했다.

    “무슨 일이기에 그리 심각한 얼굴이니?”

    “어머니께 여쭐 게 있습니다.”

    “얼마든지.”

    마주 앉은 로엘린이 고상하게 양손을 모았다. 타린은 몇 번이고 눈치를 보며 머뭇거리다 겨우 서두를 꺼냈다.

    “어머니, 벨리타를 이용하셨나요?”

    “무슨 소리니?”

    감도 잡히지 않는다는 태도였다. 타린은 입술을 잘근 씹어대다 고개를 숙였다.

    소르니에게 듣고 나니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어머니가 먼 거리의 사람처럼 느껴졌다. 그런데도 타린은 로엘린을 무척 사랑하고 있기에―.

    “폐하와 2황자님을 두고 저울질하며 벨리타를 이용했다고 들었어요. 사실인가요?”

    굳게 닫힌 입매와 진중한 빛을 띤 낯. 로엘린은 부쩍 자신의 아들이 자랐음을 느꼈다.

    그와 별개로 로엘린은 타린의 질문이 우스웠다. 곱게 키워 세상 물정도 모르는 타린. 사랑스러운 타린. 로엘린이 우아한 손짓으로 테이블을 짚었다.

    “이용이라니. 단어가 거슬리는구나.”

    “말 돌리지 마시고요.”

    테이블을 손가락 끝으로 쓸어내린 로엘린이 온화하게 입술로 호선을 그렸다.

    “벨리타도 나에게서 정보를 얻고, 활용하는데? 우리는 그런 관계란다.”

    “친구잖아요. 친구를 이용한다고요?”

    “서로 돕고 돕는 게 친구 아니겠니. 타린, 아가야. 어디서 무얼 듣고 와서 이러는지 모르겠지만, 한쪽의 의견만 듣고 몰아세우는 건 옳지 않아.”

    로엘린의 말이 틀린 건 아니다. 서로 정보를 주고받으며 이득을 챙기고 적당히 살가운 관계도 친구라고 일컫는다.

    타린에게 있어서 로엘린은 하늘이었고 선생이었으며 사랑하는 어머니였다. 그래서 더욱 하늘의 이면을 본 것 같은 기묘함이 들었다. 언제나 올바르고 애정이 넘치는 사람인 줄 알았지만, 사람은 단면만 존재하지 않았다.

    누군가에겐 천사가, 누군가에겐 개자식이 되는 게 사람이다. 타린은 자신의 어머니가 소르니에게 개자식과 다름없는 존재로 낙인찍혔음을 깨달았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로엘린은 친구에게 도움을 받아 가문을 부지했고, 소르니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로엘린의 행동은 약아빠진 얌체 같은 짓거리였을 뿐이다.

    세상을 긍정적으로만 보던 타린은 스스로가 미련하다고 느꼈다.

    “그래도 어머니. 도움을 준 벨리타에게 고맙다는 말 정도는 해 주세요.”

    “어머? 난 충분히 보답했단다.”

    양손을 모은 로엘린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타린은 깨달아야 했다. 벨리타와 로엘린의 관계는 그 둘만의 규칙이 있고, 명확한 선이 있다는 것을. 타린이 간섭할 필요도, 말을 얹을 필요도 없다. 벨리타와 로엘린은 나름의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더 할 말이 없어진 타린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테이블에 놓인 책을 든 로엘린이 페이지를 펼쳤다.

    “아들. 난 백작은 원치 않는단다.”

    “예?”

    백작 부인이 백작이 싫다니. 설명이 빠진 말을 이해하려던 타린은 이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어, 어떻게 아셨어요?”

    “내 아들인데 모르겠니.”

    다 알았구나. 어디서부터 티가 난 걸까. 타린이 머리를 쥐어뜯었다. 로엘린이 조용히 웃음소리를 흘렸다.

    대강 쥐어뜯은 머리를 정돈하며 타린은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벨리타는 좋다고 하셨잖아요. 체르핀 공녀, 아니 백작님은 싫으세요?”

    페이지를 넘기던 로엘린이 그대로 책을 뒤집어 테이블에 놓았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타린을 보았다.

    “얼굴에 어둠이 많아. 너무 고생하면서 자랐잖니.”

    “그게 왜요?”

    떡 줄 소르니는 생각도 않는데 김칫국부터 원샷한 타린이 로엘린의 반대에 반박했다.

    이야기가 길어지리라 짐작한 로엘린은 타린을 향해 몸을 틀었다. 차분한 낯의 나긋나긋한 말투였다.

    “예민하고 거칠어. 황태자비가 될 사람이었고 그만큼 사납지. 체르핀 공작가와 척을 지고 있는데 무슨 피해를 받을 줄 알고. 황태자비가 되지 못했다면 그만한 이유가 있을 거란다. 무엇보다.”

    테이블에 팔을 얹은 로엘린이 걱정 어린 눈으로 타린을 보았다.

    “넌 감당할 수 없어. 체르핀 백작을 평생 책임질 수 있겠니?”

    타린은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타린은 소르니를 안다. 단편적인 면이지만 그마저도 소르니였다.

    매섭고 예리하며 독을 품은 사람. 평생을 함께하고 싶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저 더 알아가고 싶고 웃는 얼굴을 더 보고 싶고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은 욕심이었다.

    타린이 문손잡이를 쥐었다. 땀이 배어 나왔다.

    “그렇게까지 생각해 본 적은 없어요. 백작님의 의견도 모르는데……. 우선 알아가고 싶어요.”

    “연애까지는 뭐라고 하지 않으마. 엄마는 결혼은 반대야.”

    거기까지 생각 안 했다니까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반박한 타린은 문을 열었다. 발을 내딛기 전, 로엘린이 마지막으로 조언을 얹었다.

    “워낙 날카로운 사람이라, 네가 연애까지 해낼 수 있을지 모르겠구나. 아들 힘내고?”

    “아이, 정말…….”

    수줍어하며 얼굴을 새빨갛게 불태운 타린이 황급히 방을 벗어났다.

    로엘린은 하녀를 불러 소르니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게 했고, 타린은 빠르게 걸어 벨리타를 찾았다.

    벨리타가 틀어박혀 있는 집무실 문을 두드린 타린이 조심스럽게 얼굴을 내밀었다. 팔과 손에 잉크를 묻혀가며 미친 듯이 일하고 있는 벨리타가 포션을 들이켜며 타린을 반겼다.

    “어어, 어서 와.”

    “너 지금 죽기 직전인데? 괜찮은 거야?”

    “사람은 쉽게 안 죽어. 왜 왔어?”

    소주 원샷하듯 포션을 비운 벨리타가 호탕하게 병을 내려놓았다. 벨리타가 이런 사람이었던가, 타린이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

    벨리타의 앞까지 다가온 타린이 양손을 조신하게 모으고 어물거렸다.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바쁘게 서류를 넘기며 펜을 움직이던 벨리타가 입만 열어 독촉했다.

    “나 바빠. 빨리 얘기하자.”

    “아, 어, 으응. 그……. 고맙다고 이야기하려고.”

    “뭘?”

    종이가 빠르게 넘어간다. 문서를 확인하고, 그와 비슷한 문서가 있는지 확인하며 눈이 바쁘게 움직였다.

    타린은 일에 미쳐 있는 벨리타를 더 방해할 수 없다는 생각에 주저 없이 감사 인사를 전했다.

    “네가 어머니께 도움을 줘서 가문이 피해를 받지 않을 수 있었어. 고마워.”

    “내가 한 게 아니지. 네 어머니가 잘 해낸 거야.”

    “응?”

    여전히 서류에 시선을 두고 있는 벨리타가 입만 달싹거렸다.

    “주어진 정보로 효율을 내는 건 그 사람의 능력이니까. 로엘린은 능력이 좋은 사람이야.”

    “어, 으응. 고, 마워.”

    “아, 맞다.”

    벨리타가 종이에서 펜을 떼고 타린을 올려다보았다. 타린이 고개를 기울이며 의문을 표했다.

    “너 그, 아랫도리 잘 작동하지?”

    “……어?”

    “영 신경 쓰이네. 멀쩡하면 너 소르니랑 데이트 좀 해 봐라.”

    뭘 들은 건지 의심까지 들었다. 아랫도리? 작동?

    타린은 무심코 자신의 하체로 시선을 돌렸다가 화들짝 놀라 벨리타를 보았다. 무심하게 젖은 손수건으로 팔과 손을 닦던 벨리타가 말갛게 미소 지었다.

    아랫도리의 작동 여부와 더불어 소르니와의 데이트라는 폭탄 발언을 한 벨리타는 마른 수건으로 팔과 손에 물기를 닦았다.

    타린은 그만 기절하고 싶어졌다. 벨리타가 이런 사람이 아니었던 것 같은데. 타린은 세상이 참 복잡하고 여러 면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배우고 말았다.

    “대답이 늦다. 할 거야, 말 거야?”

    다시 펜을 잡은 벨리타가 눈을 가늘게 떴다. 타린이 소스라치게 놀라 고개를 격하게 끄덕거렸다.

    “할게. 작동은 안 해 봐서 잘 모르겠는데, 데이트할래.”

    “오냐. 소르니한테 얘기해 보고 약속 잡아 줄게.”

    “고, 고마워…….”

    “할 말 끝났으면 나가 봐.”

    얘기를 마친 벨리타가 손을 휘휘 저으며 펜을 움직였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지? 타린은 혼이 쏙 빠진 채로 터덜터덜 집무실을 벗어났다. 다리가 풀리는 기분이 들었다.

    *

    공식 업무도 끝났다. 일은 해도 해도 끝이 나지 않고 처리할수록 서류는 쌓여 간다. 끝냈다고 생각하여 책상을 보면 어느새 서류는 쌓여 있다.

    잭슨은 미간을 짚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피곤하고 지쳤다. 벨리타와 거래도 해야 하는데.

    “벨리타가 부족하다…….”

    낮게 중얼거린 잭슨이 다음 문서를 앞으로 옮겼다. 조슈아의 상단 처리를 위한 서류였다. 왜 이 서류가 잭슨의 앞까지 와야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상속할 사람도 없으니 당연히 제국의 것이 된다. 잭슨이 확인할 필요도 없는 서류였다.

    노타가 슬쩍 얹어놓은 서류였지만 잭슨이 알 리 없었다. 대충 도장을 찍고 넘기려다 멈칫했다.

    주인 없는 상단.

    무르펜에서 제일 규모가 큰 상단.

    “벨리타 주자.”

    잭슨이 펜을 들어 서류에 글을 적었다. 와중에도 효자 노릇을 톡톡히 하는 잭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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