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물론 벨리타는 소르니의 얼굴을 꽤 좋아했다. 까칠하게 생겼지만, 이목구비 곱고 예쁘게 생겼으니까. 벨리타의 둥글둥글하고 순한 얼굴과는 다른 미인상이었다.
소르니 스스로도 자신이 예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남들 앞에서 자랑당하는 경험은 처음이었다.
소르니의 얼굴이 머리카락 색처럼 붉게 물들었다. 모두가 당혹스러움에 아무 말도 하지 못해도 벨리타는 아랑곳하지 않고 소르니의 칭찬을 늘어놓았다.
“얼굴에 잡티 하나도 없고 하얀 데다 머리카락 색도 좀 봐요, 너무 예쁘지 않아요? 생긴 것도 누굴 닮아서 이렇게 이쁘게 생겨먹었는지-. 애가 참 야무지고 자기 사람을 얼마나 잘 챙기는데요. 게다가 황태자비가 될 뻔한 사람이면 애가 얼마나 잘났는지 말해 뭐해요. 입만 아프지.”
소르니는 수치심까지 느꼈다. 벨리타가 소르니의 팔을 당겨 사람들에게 내밀자 파드득, 벨리타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오려 발버둥 쳤다.
자랑 좀 하려는데 가만히 있지 못하니 벨리타가 어깨와 날개 뼈를 찰싹, 찰싹 때려가며 소르니를 제압했다.
소르니가 제발 좀 하지 말라며 양손으로 얼굴을 가린다. 벨리타가 억지로 팔을 치워냈다.
붉은 얼굴이 바닥을 향했다. 벨리타가 소르니의 팔뚝을 툭툭 치며 가증스럽게 웃었다.
“아주 일등 신붓감이죠. 그렇지 않아, 타린?”
“예? 어? 응? 어, 으응…….”
갑작스러운 질문에 놀란 타린이 붉게 물든 뺨을 손등으로 문지르며 황급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빨갛다 못해 홍당무가 된 소르니가 벨리타를 밀어냈다.
로엘린이 입가를 손으로 가리며 어색하게 웃는다.
오웬이 눈을 가늘게 뜨고 벨리타의 헛짓거리를 눈에 담았다. 꼭 놀려 줄 테다.
“벨리타의 말대로 무척 아름다우십니다. 공녀, 아니, 백작님…….”
“어? 어, 고마워요…….”
용기를 가득 담아 말을 건넨 타린이 고개를 처박았다. 벨리타를 뜯어말리던 소르니도 어색하게 웃으며 칭찬을 받아들였다. 분위기가 어색하다 못해 싸늘해졌다.
벨리타는 물론 만족했다. 소르니의 칭찬도 해내었고, 타린이 소르니에게 말도 붙였다. 로엘린과 이야기해 보고 제대로 약속을 잡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로엘린이 짧게 헛기침을 하곤 벨리타를 향해 미소 지었다.
“벨리타도 일등 신붓감 아니겠어요? 내가 점찍어 놓은 며느리인걸요.”
아직도 마음을 못 버렸다니. 벨리타가 반박할 말을 입에 담으려는 순간, 집요한 시선을 느끼고 돌아보았다. 오웬이 살기등등한 눈으로 벨리타를 노려보고 있었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반드시 해명하라는 시선이었다.
해명이고 자시고 벨리타는 로엘린이 멋대로 점지해 놓은 며느리 후보였고, 벨리타 본인은 이미 거절한 상태였다.
오웬의 끈질긴 시선을 무시하고 소르니를 당겨 로엘린에게 들이댔다. 소르니가 어색하게 웃는다.
“며느릿감으로는 백작님이 으뜸이죠. 내가 아들만 있었으면 결혼시켰을 텐데!”
“벨리타, 벨리타? 제발 그만…….”
소르니가 벨리타의 옆구리를 쿡쿡 찌르며 사정했다. 평소와 같았으면 까칠하게 그만하라고 윽박질렀을 텐데 말이 많은 로엘린 앞이라 섣부르게 행동하지 않았다.
물론 벨리타는 굴하지 않았다. 벨리타가 소르니와 로엘린을 악수시키려는 찰나 타린이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일어났다. 그리고 벨리타의 손을 겹쳐 쥐고 조심스럽게 밀어낸다.
소르니가 겨우 제자리에 앉았다. 무릎을 굽혀 벨리타와 시선을 맞춘 타린이 조곤조곤 타이르듯 속삭인다.
“백작님께서도 곤혹스러워하시니 이만하는 게 좋겠어. 좋은 친구를 두어서 부러워.”
친구 좋다고 자랑하려는 마음은 알겠지만, 소르니가 환장할 정도로 수치스러워하니 그만두라는 소리였다.
벨리타는 옅게 굳은살이 박인 타린의 손을 떼어내며 해사하게 웃었다. 타린도 마주 웃는다.
로엘린이 타린에게 가서 앉으라는 제스처를 취했고, 타린이 곱게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어색하다. 벨리타의 행동으로 인해 미치게 어색하다.
벨리타도 자신이 너무 오지랖을 부렸다는 걸 깨달았지만 후회는 없었다. 소르니는 벨리타를 말려 준 타린에게 미약한 호감을 느끼게 되었고, 타린은 금세 사랑에 빠진 사람에게 도움을 줄 수 있었다. 벨리타는 그것만으로도 족했다.
큼, 오웬이 낮게 헛기침을 하며 벨리타에게 눈치를 줬다. 벨리타가 뭐, 어쩌라고, 입을 벙끗거렸다.
소르니가 열이 올라 더워진 탓에 손부채질을 하다가 벨리타의 손목을 확인했다.
“이거 귀걸이 맞지? 매번 하고 다녔는데 몰라봤네.”
조슈아가 준 팔찌를 언제나 끼고 있었지만 소르니는 이제야 알아봤다. 단순한 귀걸이가 이렇게까지 변할 줄 몰랐다.
소르니가 벨리타의 팔을 들고 팔찌를 이리저리 훑어봤다. 벨리타는 썩 씁쓸한 낯을 했다. 호기심이 생긴 로엘린이 고개를 내밀며 소르니를 보았다.
“귀걸이라뇨?”
“벨리타 영애와 장신구를 맞추었답니다. 영애께서 귀걸이를 사용하지 않아 다른 장신구로 변형했는데 무척 예쁘게 되었네요.”
“어머, 어머. 너무 예쁘네요. 둘이 장신구도 맞추다니 너무 귀여워요.”
순식간에 화기애애해졌다. 오웬은 더 이상 이 자리에 앉아 있을 필요를 느끼지 못해 먼저 일어섰다.
타린이 오웬을 힐끗 보았다가 단란하게 떠드는 여인들을 보았다. 타린도 슬그머니 일어난다.
남자들이 일어나는 걸 눈치챈 벨리타가 앉으라는 손짓을 했다.
“맞아, 로엘린. 타린의 후계 교육은 어떻게 시키나요? 백작님도 가주가 되었는데 영 어렵다고 하더라고요. 아는 선생이 있다면 소개 좀 해 주시겠어요?”
“어머……. 감히 제가 말씀드려도 괜찮을까요? 여럿 알고 있기는 한데.”
소르니가 벨리타의 팔을 잡아 뜯으며 입을 막으려 했지만 막을 수 없었다. 창피함을 견딜 수 없던 소르니가 결국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미안하지만 현기증이 나서 자리를 뜨겠다는 말과 함께 응접실을 벗어났다.
벨리타가 타린에게 가 보라며 눈짓한다. 타린이 어물거리며 어쩔 줄 몰라 하자, 오웬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샤를로트 백작 영식. 여인들끼리 할 이야기가 있는 듯하니 함께 일어나시겠어요?”
눈치를 보느라 일어나지 못한 타린에게 오웬이 말을 건넸다. 그리고 예의를 차릴 줄 알면서 여태 차리지 않았던 오웬이 타린을 데리고 나갔다.
벨리타와 로엘린은 다시 잡담을 시작하며 어디 가정교사가 좋다느니, 경제 선생은 잘 구할 수 없다느니 떠들었다.
어물쩍 따라 나온 타린이 오웬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자 오웬이 대충 괜찮다며 인사하고 정원을 향해 손가락질했다.
“정원으로 나가시면 백작님이 계실 겁니다. 이야기 나누세요.”
“예?! 아, 네?!”
소르니를 찾고 있는 걸 어떻게 알았는지. 타린이 새빨갛게 익은 얼굴로 당황했다. 오웬이 나른하게 웃으며 고개를 짧게 숙이고 계단을 올라 사라졌다.
여유로운 오웬의 모습이 꽤 멋지다고 생각한 타린이 서둘러 정원으로 향했다. 문을 열고 정원으로 나서자 작은 테이블 의자에 소르니가 앉아 있었다. 녹음으로 푸른 정원 속에서 붉은 소르니만이 뚜렷했다.
그녀는 붉게 달아오른 얼굴을 손으로 가리고 상체를 웅크리고 있었다. 흘러내린 붉은빛이 맴도는 갈색의 머리카락이 흘러내려 창피한 얼굴을 가려 주었다.
타린은 먼발치에서 멀거니 소르니를 바라보았다. 타린은 스스로가 바보 같음을 알았다. 벨리타에게 첫눈에 반했던 것도 모자라, 벨리타의 친구인 소르니에게 호감을 느꼈다.
타린은 벨리타에게 마음을 접은 지 꽤 되었다. 황태자와 혼인한다는 이야기로 떠들썩해지면서부터였다.
황태자와 타린은 외모로도, 능력으로도, 신분으로도 견줄 수 없었고 벨리타가 다른 사람을 좋아한다는 생각에 알아서 마음을 추슬렀다. 자신이 그 사람을 좋아한다고 해서 그 사람이 자신을 좋아해 줄 의무가 없다는 걸 안다.
친구로도 만족하는 타린이었고, 벨리타는 무척 좋은 사람이니 좋은 사람을 만나는 게 옳다고 생각했으니까. 벨리타는 타린에게 좋은 친구다. 편지로 주고받는 안부 인사도 충분했고, 관계에 대한 욕심도 나지 않았다.
타린은 벨리타를 딱 미지근한 정도의 감정. 그 온도로 좋아했다. 쉽게 식을 수 있을 정도로만.
열아홉이 된 아이의 사랑은 뜨겁지만 쉽게 식기 마련이다. 곧잘 타오르기도 한다. 타린은 나이대에 맞는 감정을 느낄 줄 알았고 배울 줄 알았다.
타린은 천천히 걸음을 디뎠다. 잔디가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소르니에게 다가가는 짧은 시간 동안 머리를 다듬고, 크라바트를 다시 정돈했으며, 재킷 밑단을 당겨 구김도 없앴다.
“백작님.”
간지럽고 부드러운 음색을 들은 소르니가 붉어진 얼굴을 한 채 고개를 돌렸다. 마주치는 시선이 데일 듯 뜨거워서, 타린은 불그스름한 뺨을 숨기지 못하고 미소 지었다.
“앞에 앉아도 될까요?”
소심한 타린. 용기도 없고 바보 같은 타린. 숱하게 들은 놀림을 뒤로한 채 타린은 용기를 냈다.
소르니가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거리자 타린이 조심스럽게 소르니의 앞에 앉았다. 여름은 아직인데, 더웠다.
“벨리타가 한 말들은 잊어주세요.”
“아, 네! 물론이죠. 벨리타가 정말 좋은 친구를 사귀어서 기뻤나 봐요. 그렇게 들뜬 건 처음 봤어요.”
“……그래 보여요?”
“그럼요. 벨리타가 백작님을 참 아끼나 봐요.”
억세지 않고 조곤조곤한 말투였다. 소르니는 벨리타가 자신을 아낀다는 말에 기뻐 배시시 미소 지었다.
타린은 소르니의 미소가 참 예쁘다고 생각했다. 사교계에서 마주쳤을 때는 날이 서 있고 매서운 느낌이 들었었다. 장미처럼 가시를 두르고, 섣불리 다가오면 찔러 버리겠다며 자기 보호를 하는 듯. 그래서 벨리타와 함께 있을 때는 신기했다.
말갛게 웃고 부끄러워하기도 하며 사교계에서 쉽게 보여 주지 않았던 모습을 보였다. 그 모습이 너무도 예쁘고 사랑스러워서. 타린이 살갑게 웃으며 자세를 바르게 했다.
“가정교사를 구한다고 하시던데. 제가 몇 분 소개해 드려도 괜찮을까요?”
부끄러움에 열이 올랐던 얼굴도 차츰 식어갔다. 하얀 안색으로 돌아온 소르니가 손으로 입가를 가렸다.
“글쎄요. 영식에게 도움을 받을 필요는 없을 것 같네요.”
선을 긋고 벽을 쌓는다. 소르니가 눈을 접어 웃어가며 거절했다. 공녀였던 소르니가 가문에서 쫓겨나 백작이 되었다는 건 이미 소문이 파다했다. 신분도, 명성도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백작이 낮은 신분은 아니지만, 소르니는 공작가의 공녀였다. 소르니는 자존감이 낮지만, 자존심은 강했다. 동정으로 적선 받은 도움은 사절이다. 벨리타는 예외지만.
확고한 거절의 의사를 들은 타린이 멋쩍게 미소 지었다. 소르니가 손가락으로 입가를 가리며 다른 손으로 테이블을 두드렸다.
“그 전에. 벨리타 덕에 목숨을 구했으면, 감사 인사라도 전해야 하지 않나요? 샤를로트 백작 영식.”
“네?”
언제 수줍어하고 부끄러워했냐는 듯, 소르니는 매섭게 비수를 꽂았다. 타인들이 인지하고 있는 소르니처럼 선뜩하게 날카로운 눈을 치켜떴다.
타린은 소르니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타린이 순진한 낯으로 무슨 말이냐 되묻자 소르니가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비웃음이었다.
“내가 공녀였던 때에는 모든 곳이 내 귀였고, 눈이었어요. 모르는 체 말아요.”
곱게 자란 타린은 모르는 이야기였다. 테이블에 턱을 괴고 입가를 가린 소르니가 타린을 훑어보았다. 타린은 달아나고 싶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