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딸이 쓴 로판 소설에 빙의되어버렸다-111화 (111/150)

111화.

잡담을 마친 소르니는 디저트와 차를 다 비워내고 종종 놀러 가겠다며 홀연히 떠났다.

벨리타와 오웬은 덩그러니 룸에 앉아 남은 디저트와 차를 내려다보았다. 입맛이 뚝 떨어졌다.

첫 데이트도 완전히 망했고, 오웬은 졸지에 가족을 버릴 망나니로 예정되어 버렸다. 벨리타가 케이크를 포크로 성의 없이 찌르다가 고개를 들었다.

“어쩌고 싶어?”

“글쎄. 물론 좋은 제안이기는 한데, 난 가족에 그리 절대적인 애정이 있는 편도 아니라서.”

벨리타는 오웬의 성정을 다시금 상기했다. 철저한 개인주의 성향에 이성주의자. 오웬이 내킨다면 정말 가족의 연을 끊고 소르니의 양아들로 입적될 수도 있었다. 충분히 미련을 두지 않고 떠날 사람이다.

벨리타가 진이 빠진 몸을 소파에 뉘었다.

“그럼 뭐가 문제인데?”

“공녀의 양아들이 되는 게 싫은 거지. 내 기분 문제라.”

잘 이해가 가지 않아 벨리타가 고개를 기울였다. 오웬이 인상을 찌푸린다.

“귀엽게 굴어도 말 안 해 줄 거야.”

“내가 언제.”

그냥 고개만 기울인 것뿐인데 억울해진 벨리타가 미간을 찌푸렸다. 오웬이 고개를 돌리며 눈을 질끈 감았다.

“그렇게 귀엽게 굴어도 말 안 한다니까.”

“아니, 이 미친놈이.”

벨리타가 오만상을 찌푸리자 오웬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그렇게 귀엽게 물어보면 내가 어떻게 거절해. 말해 줄게.”

“이거 또라이 아냐?”

테이블에 양손을 올린 오웬이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고개를 숙였다. 벨리타가 상체를 기울였다.

“공식적인 자리로 가면 내가 공녀를 어머니라고 불러야 하잖아……. 절대로 싫어.”

“푸학!”

겨우 그런 이유로 고민하고 있었다니. 가족과 멀어지게 되는 건 뒷전이었나 보다.

벨리타가 어이없는 대답에 속절없이 웃음을 터트렸다. 오웬이 입술을 내밀며 투덜거린다.

“내가 어딜 가던 공녀의 아들이라고 불릴 거 아냐. 백작 영식이라는 소리도 듣기 싫다고.”

“가족은?”

“그걸 왜 걱정해? 남의 아들 된다고 해서 내가 우리 부모님 아들이 아닌 건 아니잖아.”

당연하다는 듯 대꾸하는 오웬의 말에 벨리타는 할 말을 잃었다. 남의 자식이 된다고 혈연은 끊어지지 않는다.

벨리타는 그간 고민했던 상념을 완전히 떨쳐낼 수 있었다. 맞다. 벨리타가 잭슨과 소르니를 자식처럼 여긴다고 해도, 벨리타의 딸과 아들은 여전히 벨리타의 자식이고 잭슨과 소르니는 남의 자식이다. 당연한 사실이었다.

그 당연한 사실을 품에 끌어안고 끙끙 앓았던 벨리타가 바보였다. 벨리타의 자식은 여전히 벨리타의 안에 살아 있고, 평생 벨리타의 자식일 거다. 그냥 새 아이들이 생기는 것뿐. 슬픔에 취해 간단한 사실을 잊었다.

벨리타는 완전히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 털어낼 수 있었다. 명쾌한 해답에 기쁜 벨리타가 몸을 벌떡 일으켜 오웬에게 다가갔다. 오웬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벨리타를 바라봤다.

덥석 오웬을 끌어안는다. 안는 것으로 모자라 오웬의 얼굴 곳곳에 입술 도장을 찍어댔다. 오웬은 너무 기쁜 나머지 얼굴을 내어주고 어정쩡하게 벨리타의 허리에 손을 둘렀다.

“갑자기 뭐야? 뭐가 그렇게 좋은데?”

“넌 천재야!”

“맞아, 난 천재야.”

타박이 돌아와야 하는데 돌아오지 않는다. 오웬이 벨리타를 바라봤다.

“고민이 해결됐어. 잭슨과 소르니가 내 자식 자리를 빼앗을까 봐 겁먹었는데, 그냥 새 자식 생긴 셈치면 되는걸.”

“뭐?”

명랑한 벨리타의 말을 들은 오웬이 얼굴을 굳혔다. 이건 아니지, 반박하며 벨리타의 허리를 끌어당겨 허벅지 위에 앉혔다.

“난 황제를 자식으로 두고 싶지 않아. 양어머니가 될지 모르는 공녀를 자식으로 두면 족보가 너무 꼬이잖아?”

“미친놈 아니야, 이거.”

당연하게 결혼할 거라 생각하고 있는 오웬이 어이가 없다.

벨리타가 오웬의 볼을 손바닥을 밀어내자 오웬이 벨리타의 손목을 잡아 저지했다. 진지하고 심각한 낯으로 오웬이 뇌까렸다.

“그럼 나랑 결혼 안 할 거야?”

“그건 모르지.”

오웬은 진심으로 상처받았다. 첫 데이트인데! 첫 데이트에!

슬픔에 시무룩해진 오웬을 달래던 벨리타가 오웬의 양 볼을 감싸 고개를 들게 했다. 오웬이 우는 체하며 손길을 피하려고 들었다.

우악스럽게 오웬의 볼을 붙든 벨리타가 오웬의 입술에 입술을 문지른다. 오웬은 여전히 우는 시늉을 하며 벨리타의 뒷목을 쥐어 고개를 꺾었다. 능구렁이같이 상황을 이용해먹는 오웬의 입술이 벨리타의 입술을 거듭 맞춰댔다.

달래주려 한 입맞춤이었는데. 오웬이 벨리타의 목덜미를 손가락으로 간지럽히며 머리카락을 헤집었다. 벨리타가 오싹한 기분이 들어 무릎을 세워 앉고 오웬을 찍어 누르듯 입을 맞췄다.

천천히 오웬이 고개를 들이밀며 어깨를 붙잡자, 벨리타가 몸을 빙글 돌려 오웬의 옆에 앉았다. 열에 들뜬 오웬의 낯이 벨리타를 집요히 쏘아본다.

“너 진짜 얄밉고, 사랑해.”

“응, 나도 너 사랑해.”

숨을 몰아쉬는 오웬이 손등으로 입술을 문질렀다. 놀리려고 벨리타의 입맞춤을 이용했지만, 갖고 놀아진 건 오웬이었다.

오웬은 적절하게 치고 빠진 벨리타가 얄미웠으나 사랑스러웠다. 태연하게 사랑한다고 대꾸하는 모습마저 사랑스럽다. 이거 진짜 중증 아니야?

오웬이 한숨을 내쉬며 벨리타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슬슬 돌아갈까.”

“역시 데이트의 끝은 밤까지 같이 있는 거지.”

“벨리타, 너 진짜 너무 최고다.”

오웬이 벨리타를 이끌고 빠르게 계산을 마친 후, 순간이동으로 저택으로 돌아갔다.

*

첫 데이트 이후 일주일이 지났다. 잭슨은 벨리타의 면회 신청을 반려했다. 매일 면회 신청을 하고 있는 처지가 되었지만 어쩌겠는가. 잭슨이 황제인데.

그동안 벨리타는 꽤 능률 좋게 상단의 일을 처리했다. 배우는 족족 활용할 줄 알고, 그에 더해 쌓인 경험을 응용하니 조금 위태로웠던 상단은 제자리를 찾아갔다. 집무실에서 벗어나는 일이 없었다.

오웬은 벨리타가 생기를 되찾아가는 모습이 참으로 뿌듯하고 보기 좋았지만, 꽤 섭섭했다.

엘라도 돌아왔고 수도 저택의 일원이 다시 제대로 갖춰졌음에도 벨리타는 일에 몰두했다. 재미있어하니 만류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돌아온 엘라는 벨리타의 회복을 무척이나 기뻐했다. 벨리타를 못 본 기간 동안 걱정을 많이 했었는데 다행이라며 눈물까지 닦았다.

해가 쨍쨍한 한낮, 오웬은 벨리타의 집무실에서 뒹굴었다. 할 일이 없었다.

벨리타가 여느 때와 다름없이 도착한 로엘린의 편지에 답장을 쓰다 의아함을 느꼈다. 며칠 전 편지에 놀러 온다는 이야기를 나눴는데 그날이 오늘이었던 거다. 일에 몰두해 있어 시간의 흐름을 눈치채지 못했다.

벨리타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대기하고 있는 엘라를 불렀다. 엘라가 아직 디저트가 완성되지 않았다며 안절부절못했다.

“샤를로트 백작 부인이 와! 오늘! 준비해!”

“갑자기요? 오늘요?”

뒹굴뒹굴하던 오웬도 벌떡 일어났다. 허름한 셔츠가 엉망으로 구겨져 있었다. 벨리타는 오웬에게 삿대질하며 당장 옷을 갈아입을 것을 명령했고, 오웬은 부리나케 뛰어나갔다.

엘라도 소식을 전하러 빠른 백스텝을 밟았다.

명령을 끝낸 벨리타가 의자에 앉아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까지 일을 처리해야 하는데, 손님을 맞이하며 할 수 있을까.

안 되면 되게 한다. 벨리타는 느슨한 소매를 걷어붙이고 펜을 쥐었다. 로엘린이 오기 전에 모든 일을 끝내겠노라 다짐하며 펜을 휘갈겼다.

완벽하게 실패했다. 벨리타는 잉크가 덕지덕지 묻은 손으로 로엘린과 타린을 반겨야 했다. 가끔 편지로 근황을 전해 들은 로엘린은 벨리타가 바쁜 처지에 있음을 이해했다.

한가득 짐을 싸 들고 온 로엘린이 벨리타를 끌어안았다. 화려한 향수가 풍겨 왔다. 벨리타도 로엘린을 안으며 서로의 안부를 다시금 확인했다.

“잘 지냈어요? 벨리타, 얼굴이 홀쭉해졌어요.”

“일이 좀 많았는데, 이젠 좀 괜찮아요. 오는 길 많이 힘드셨죠.”

“봄이라서 꽃도 예쁘게 피웠기에 눈 호강하면서 왔는걸요.”

살갑고 달가운 대화를 묵묵히 듣고 있던 오웬과 타린은 서로 눈이 마주치자 멋쩍게 인사를 나눴다. 남에게 관심 없는 오웬과 소극적이고 소심한 타린은 인사 외의 이야기를 이어 나가지 못했다.

벨리타가 손님을 응접실로 안내하며 엘라가 대령한 물수건으로 손을 닦았다. 로엘린이 벨리타의 옆에 붙어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눴다.

“걱정 많이 했어요. 소문도 그렇고 며칠간 행방불명이었잖아요.”

“소문 더럽게 빠르네요.”

“소문은 내 전문인걸요.”

응접실 소파에 도란도란 앉은 넷은 이야기보따리를 풀었다. 잭슨이 파혼을 했다, 황후는 누굴 들일까, 에르테 세력들이 모조리 죽어 나갔다, 에르테는 도망가서 어디 갔는지 모르겠다, 등등 온갖 소문을 소란스럽게 나누었다.

가만히 대화를 듣던 타린이 조심스럽게 이야기에 끼어들었다.

“벨리타, 조심해. 폐하께서 널 아낀다는 소문이 자자하니까 에르테 전하가 나설지도 몰라.”

“걱정도 팔자야. 날 뭐하러? 할 짓이 그렇게 없대?”

새침한 벨리타의 대꾸에 타린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오웬은 타린에게 약간의 흥미가 생겼다. 얌전한 백작 영식으로 보았는데 생각보다 정세를 예상하는 능력이 좋은 듯했다.

오웬이 타린에게 말을 걸려던 순간, 엘라가 다급하게 응접실의 문을 열었다. 엘라의 뒤를 따라 폭풍처럼 나타난 소르니가 말갛게 웃었다.

“벨리타! 생각은 좀 해 봤니?”

삽시간에 조용해졌다. 로엘린과 타린은 벌떡 일어나 어쩔 줄 모르며 인사했고, 소르니는 당연하게 받아넘겼다. 당당하게 벨리타의 옆을 차지하고 앉은 소르니가 팔짱을 낀다.

“넌 웬일이야?”

“대답 들을 게 있잖니. 기다리다 못해서 들으러 왔단다.”

아직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물론 벨리타의 의견은 딱히 중요하지 않다. 오웬의 의사가 중요했다. 오웬이 거부하면 벨리타도 따라 평민이 되고, 오웬이 수락하면 백작가의 일원이 된다.

벨리타가 오웬에게 시선을 돌렸다. 오웬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어깨를 들썩거렸다. 오웬도 아직 결정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조금 더 시간을 달라고 입을 열려던 벨리타는 소심하게 꿈지럭거리는 물체를 보았다.

타린이었다. 얼굴이 붉어져 소르니를 보고 손과 다리를 꿈지럭거린다. 벨리타가 소르니와 타린을 번갈아 보다가 작게 탄식을 뱉어냈다. 이놈 봐라. 전에는 내가 좋다고 귀엽게 수작 걸더니. 그새 다른 여자에게 반하고 말이야.

물론 벨리타가 상관할 바 아니었다. 벨리타에게는 오웬이 있었고, 타린은 친구 사이에 불과했으니까.

타린과의 기억을 들추어보던 벨리타는 눈을 가늘게 뜨고 입꼬리를 올렸다. 사랑받고 자란 타린. 사소한 행동에 배려가 묻어나고 곱게 자랐다. 행복한 가정에서 올곧게 성장한 남자아이. 성정이 바르고 애정이 가득하다.

소르니는 어떠한가. 애정을 갈구하고 사랑받기를 원한다. 벨리타가 줄 수 없는 사랑을 만끽할 수준으로 받을 수 있다.

확실히 단정 지을 수는 없다. 소르니의 결핍이 타린을 잡아먹을지, 타린의 애정이 소르니를 채워 줄지 미지수였다. 부정적인 감정과 결핍은 자칫하면 주변까지 함께 끌어내리고 마니까.

벨리타는 타린의 그릇을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소르니의 불행을 행복으로 채워 줄 듬직한 사람인지, 휘말려 나가떨어질지.

남의 연애에 간섭하는 성격이 아니었으나, 타린은 소르니의 짝으로 꽤 잘 맞을 것 같았다. 외모로 보나 성격으로 보나 잘 어울리는 한 쌍의 원앙 아닌가.

벨리타는 넘치는 오지랖을 인정하기로 했다. 둘을 이어 주고 싶다. 연애 정도는 시켜 봐도 좋지 않을까. 결혼이야 둘이 잘 맞으면 하는 거고.

생각을 마친 벨리타가 소르니의 팔을 잡아당겼다. 소르니가 벨리타의 어깨에 고개를 기댔다. 물끄러미 바라보는 타린에게 벨리타가 미소 지었다.

“우리 백작님 너무 예쁘죠?”

타린과 오웬, 로엘린과 소르니는 입이 쩍 벌어져야만 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