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화.
우는 소르니를 달래주고 나니 오웬이 떠올랐다. 팔에 달라붙어 끈덕지게 늘어지는 소르니를 떼어놓고 문을 열었더니 오웬이 벽에 기대어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잘 차려입은 정장은 이미 구겨져 있었다.
벨리타를 돌아본 오웬이 울상을 지으며 손을 뻗어왔다.
“다 끝났어? 나 다리에 쥐 난 것 같아.”
“야옹 해, 야옹.”
“벨리타, 너 진짜 어이없고 열 받는데 귀엽다.”
뻗은 손을 잡고 일어난 오웬이 후들거리는 다리를 두드리며 룸 안으로 들어왔다. 이미 차게 식어 버린 차를 마법으로 데운 오웬은 소르니를 흐릿하게 째려봤다.
시선을 느낀 소르니가 붉게 충혈된 눈으로 뻔뻔하게 뭐? 라고 대꾸했다. 벨리타가 오웬의 앞으로 케이크를 밀어 주었다.
“우리 오늘 첫 데이트였거든. 오웬한테 너무 뭐라고 하지 마.”
“뭐?!”
테이블을 쾅, 내리치고 몸을 일으킨 소르니가 충격에 빠진 얼굴을 했다. 오웬과 벨리타를 빠르게 번갈아 본 소르니가 흐물거리며 다시 소파에 몸을 뉘었다.
오웬이 소르니를 열심히 째려보며 케이크를 잘라 입에 욱여넣었다.
“그래, 짐작은 하고 있었단다. 둘의 기류가 미묘했거든.”
“티 났어?”
“말이라고 하니.”
재빠르게 일갈한 소르니가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이 먹다 남은 디저트로 손을 뻗었다가 양이 줄어들었음을 확인하자 눈이 사납게 찢어진다.
오웬이 같이 뻔뻔하게 뭐, 라고 대꾸했다. 평민 주제에 무례하기 그지없는 태도에 화가 난 소르니가 오웬의 머리채를 잡으려 손을 뻗었다.
벨리타가 빠르게 소르니의 손등을 찰싹, 내리쳤다.
쟤가 내 디저트를 빼앗아 먹었다며 고자질을 하고, 오웬이 새침하게 케이크를 잘라 먹는 꼴을 번갈아 확인하던 벨리타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손을 뻗어 케이크를 포크로 찍어놓은 오웬의 손을 쥐고 입에 넣었다. 먹으려던 케이크를 순식간에 강탈당한 오웬은 분노 대신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소르니가 진저리치며 얼굴을 구겼다. 케이크를 우물거리고 삼킨 벨리타가 눈썹을 휘었다.
“아무튼, 첫 데이트인데 방해받아서 서러워하는 중이니까 이해해 줘.”
“그래, 이해는 할게. 어쩐지 옷차림에 신경을 썼더라. ……그런데 그렇게 되면, 폐하는…….”
심각하게 손으로 입가를 가리던 소르니가 중얼거렸다. 잭슨이 벨리타를 연모하고 있다는 사실은 오웬도 알고, 소르니도 알며, 벨리타도 알았다. 지나가는 황궁의 개구리도 알 것이다.
소르니와 오웬은 잭슨이 황제가 된 후 어떤 술수를 쓸지도 다 파악하고 있던 차였다.
심각해지는 분위기 속 소르니가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더니 돌연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아하학! 꼴좋다!”
평소같이 입을 가리지도 않고 테이블에 머리를 기대어 주먹으로 쾅쾅 내리친다. 테이블이 들썩거렸다.
“결혼하겠다 뭐다 난리란 난리는 다 쳤으면서, 시작도 못 해 보고 차이게 생겼네!”
신나게도 웃는다. 벨리타는 떨떠름해진 태도로 소르니를 내려다봤다. 오웬은 무슨 심정인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리며 마저 케이크를 입에 넣었다.
그를 본 벨리타가 오웬을 향해 입을 벌린다. 의미를 파악한 오웬이 움찔거리며 케이크를 먹기 좋게 잘라 벨리타의 입안에 넣어 줬다. 소르니가 뒤집어지게 웃었다.
“황제까지 됐는데 설레발이었잖아! 아하학! 표정 보고 싶다! 얼마나 한심할까!”
“그건 나도 보고 싶은걸.”
벨리타의 입가를 닦아 주던 오웬이 거들었다. 벨리타는 오웬을 가자미눈으로 째려봤다. 오웬이 어깨를 으쓱였다.
“오웬, 너 생각해 보니까 잭슨 너무 놀려먹던데.”
“아, 티 났어?”
“안 나겠냐.”
소르니도 종종 보았던 오웬의 장난질이었기에 너무 크게 웃어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내고 오웬의 말에 집중했다. 솔직히 궁금하지 않은가. 평민이 황태자를 놀려먹는 이유가.
이목이 쏠리자 오웬은 가볍게 고개를 도리질 치며 대답했다.
“재밌잖아, 반응이.”
깔끔하고 완벽한 대답이었다. 평민이 황태자를 놀려먹은 이유가 그저, 단지 반응이 재미있어서라니.
벨리타는 어이가 없어 눈을 가늘게 떴고, 소르니는 다시 테이블을 쾅쾅 내리치며 박장대소했다.
벨리타는 소르니가 잭슨에게 쌓인 악감정이 많았다고 추측해 보았다. 물론 소르니는 잭슨에게 악감정이 많았다. 재수 없어 하기도 했다.
“장난치면 어쩔 줄 몰라서 질색하는데, 당연히 재미있지 않아?”
“아하학! 재미있대, 아학!”
너무 좋아하는 거 아닌가. 벨리타는 배가 아프다며 헐떡거리는 소르니를 내려다봤다.
벨리타가 퉁명스럽게 소르니의 등을 토닥거리자 소르니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겨우 진정했다. 소르니가 찢어질 것 같은 배를 문지르며 오웬에게 말했다.
“너 굉장히 재미있구나. 그간 몰라봐서 안타깝네.”
“백작 각하께서 알아주시니 기쁘네요.”
하하 호호, 단란하게 이야기를 주고받는 둘을 바라보던 벨리타가 찻물을 들이켜며 말했다.
“놀고 자빠졌네. 지랄을 해라, 아주.”
“우리 아가씨께서 말버릇이 조화롭지 못하니 이해해 주세요, 백작 각하.”
“오냐, 이해해야지. 우리 벨리타인데.”
어느새 죽이 척척 맞는 소르니와 오웬이 벨리타를 놀려먹기 시작했다. 우리 벨리타, 사랑스러운 벨리타, 사랑하는 벨리타.
끝도 보이지 않는 달달한 호칭에 벨리타는 결국 손을 뻗어 오웬과 소르니의 등짝과 어깨를 내리쳤다.
“이것들이, 미쳐가지고, 어딜 어른을 놀려먹어.”
맞는데도 좋다고 까르륵댄다. 벨리타는 질색을 하며 소파에 몸을 기댔다. 벨리타 탓에 마음고생을 했던 둘인지라 이 기회에 잔뜩 놀리며 앙심을 푸는 듯했다.
소르니가 벨리타의 팔을 붙들고 안겨 온다.
“저리 가. 안 가? 더 맞을래?”
“아이, 벨리타. 내가 사랑하는 거 알잖아.”
“지랄로 앞구르기 하는 소리 하고 자빠졌네.”
걸걸한 욕설에도 소르니는 기뻐했다. 벨리타가 귀찮다는 태도로 소르니를 바라보다 문득 궁금한 점이 떠올라 달라붙어 있는 소르니를 우악스럽게 밀어냈다. 소르니가 벽까지 내몰려 구겨졌다.
“너 공녀 아니었어? 갑자기 웬 백작?”
“이제야 궁금해하는 거니? 서운하다, 정말.”
“맞고 말할래, 그냥 말할래.”
“그냥 말할게.”
장난스럽게 아양을 떨던 소르니가 아직도 얼얼한 등짝을 상기하고 급격히 침착해졌다.
차분하게 구석까지 내몰려 앉은 소르니가 차를 한 모금 마시고 이야기를 꺼냈다. 귀족들 사정에 관심 없는 오웬만이 케이크를 먹다가 소르니의 디저트로 손을 뻗었고, 소르니가 앙칼지게 오웬의 손을 쳐냈다.
“사실은 말이지. 폐하가 황위를 쟁취하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단다.”
“나 손 아픈데.”
“약혼한 공녀로서 당연히 도울 일이었지. 공작님을 설득해서 기사단을 내주었어.”
“나 손 아프다니까?”
오웬의 아련한 외침을 무시한 소르니가 마저 차를 마시고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소르니에게 시선을 둔 벨리타가 손만 대충 뻗어 오웬의 손을 잡아주었다. 오웬의 투정이 쏙 들어갔다.
“폐하에게도 거래를 요청했단다. 내가 황제가 될 수 있게 도울 테니 약혼을 파하자고.”
“갑자기?”
얌전해진 오웬의 손등을 문질러 주던 벨리타가 질문을 꺼냈다. 황후가 되기 위해 벨리타에게 독까지 먹였던 소르니가 아니던가. 갑자기 태도가 바뀐 소르니가 이해되지 않았다.
“갑자기가 아니야. 벨리타, 네가 날 그렇게 만들었잖니.”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었다. 벨리타가 멍청한 표정으로 소르니를 바라보자, 소르니는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벨리타에게 슬쩍 엉덩이를 들이밀었다. 거리가 가까워졌다.
“내 인생을 살도록. 네가 말해 주었잖아. 오이를 얼굴에 얹은 날 이후에 곰곰이 생각해 봤어. 내가 바라는 내 삶은 무엇일지.”
그때라면 벨리타가 딸이 너무 보고 싶어 오지랖을 부렸던 날이었다. 소르니를 딸로 보았던 날.
벨리타가 멋쩍게 오웬의 손을 주물럭거렸다. 오웬의 손가락이 은근하게 벨리타의 손바닥과 손등을 간지럽혔다.
은은하게 빛이 나는 미소를 지은 소르니가 주황빛의 귀걸이를 만지작거렸다.
“난 황후를 바라지 않아. 내가 바라는 건 온전한 내 것. 내가 일굴 수 있는 것들. 황후로서도 많은 걸 해낼 수 있겠지만, 공작가를 뒤에 둔 이상 내가 바라는 대로 흘러가지 않을 걸 알아.”
얇고 마른 손가락을 간지럽히며 손장난을 하던 오웬이 소르니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래서 공작가를 몰살하지 않고 백작 작위를 받은 걸까.
오웬이 은근슬쩍 고개를 숙여 벨리타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벨리타가 장난스럽게 오웬의 입안으로 손가락을 쑤셔 넣었다. 컥, 오웬이 낮게 기침했다.
소르니는 둘의 애정행각을 무시하고 제 할 말만 늘어놓았다.
“그래서 폐하에게 거래했지. 도와줄 테니 그리 바라던 파혼을 하고 작위를 달라고. 멸문한 가문들이 많아서 작위는 쉽게 받아낼 수 있었단다.”
멸문한 가문이 많다는 의미를 알았다. 테일러와 라빌이 그렇게 된 이유가 있었기에. 벨리타는 오웬의 볼을 잡아 늘이던 손을 내려놓고 소르니에게 집중했다.
소르니가 눈을 접어 웃었다. 창문 너머로 저물기 시작하는 노을에 비친 소르니가 타오르는 듯 보였다.
“세습 작위이니 난 내 가문을 이어 나가야 해. 다만, 난 계집이라 가문을 이을 수 없어.”
여자는 남자의 성을 따르고, 남자의 가문에 종속된다. 벨리타는 그러려니 했다. 벨리타의 세대에서는 여인의 존재란 출가외인이었으니까. 소르니가 조용히 찻잔을 손가락으로 두드리다가 말을 이었다.
“난 내 가문을 키우고 싶고 유지하고 싶어. 그러니 오웬을 내 양자로 들이고 싶단다.”
“네?”
뭔 헛소리야. 벨리타와 오웬이 소르니를 바라보았다. 만화였다면 분명 허접한 효과음과 함께 두 사람의 눈이 튀어나왔을 것이다.
소르니가 덤덤히 찻잔을 두드리다가 한 모금 들이켰다. 대답이 늦는 소르니가 답답해 멱살을 잡을까 고민하던 벨리타는 무력을 접어두고 말로 채근했다. 소르니가 대꾸한다.
“오웬 메이지는 평민이지. 벨리타와 혼인한다면 벨리타도 평민의 삶을 살아야 해. 난 결코 그 꼴을 못 봐.”
“아니, 내 부모님 버젓이 살아 있는데요?”
난처한 오웬의 말을 무시한 소르니가 찻잔을 내려놓았다. 이곳에서 소르니만 평온했다.
“메이지를 내 양자로 들이면 벨리타 넌 백작가의 일원이 되는 거고, 후작가와는 사돈으로 돈독해질 수 있어. 폐하도 섣불리 개입하지 못할 거란다.”
“나는 내 부모님이랑 사이도 좋은데요? 갑자기 부모를 바꾸라고?”
“너 부모랑 사이좋았냐?”
가족과 불화가 있으리라 생각하고 의심도 하지 않은 벨리타가 오웬을 돌아봤다. 오웬이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 새끼가 날 속였어, 벨리타가 우악스럽게 손을 뻗었으나 오웬이 소파에 달라붙어 손길을 피했다.
소르니의 제안은 모두에게 좋은 조건임이 틀림없다. 소르니에게도 좋고, 벨리타와 오웬에게도 좋은 조건이다. 소르니가 귀걸이를 만지작거리며 평온하게 말했다.
“어차피 네 아비가 가진 건 일대 작위이고, 혈연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잖니. 나쁜 조건은 아니니까 잘 생각해 보렴. 결단이 서면 네 아비에게 내가 설명해 줄게. 그나저나 후계 교육을 받아 본 적이 없어 걱정이네. 좋은 선생 있니?”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그러네.”
벨리타가 빠르게 모른다고 대답하니, 소르니도 납득하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오웬과 벨리타는 몰아친 새로운 걱정에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