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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이 쓴 로판 소설에 빙의되어버렸다-109화 (109/150)
  • 109화.

    디저트를 훔쳐 먹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소르니는 서운한 마음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전에도 내가 얼마나 상처받았는지 알아? 그래도 우리 친구 아니었냐고-.”

    한창 힘들 때, 소르니가 찾아와 매달리던 날이 기억났다. 벨리타가 조용히 침잠하며 소르니를 내려다봤다.

    잠자코 지켜보던 오웬의 눈이 가늘어졌다. 벨리타의 가라앉은 낯이 소르니를 훑는다. 진절머리 난다는 듯, 묘한 짜증이 어려 있었다.

    “소르니야. 내가 널 데려온 건 시선을 신경 써서야.”

    쏟아지던 소르니의 한탄이 멎었다. 붉은빛이 감도는 입술이 여러 번 달싹거리다 애처롭게 호선을 그렸다. 소르니가 벨리타의 손을 움켜쥐었다.

    “너무 반가워서 급한 마음에 그랬어. 화났니?”

    “화나고 자시고 할 게 뭐가 있어. 다 울었으면 가.”

    어째 첫 데이트부터 잘 풀린다 싶었다. 오웬이 눈을 굴려 작게 트인 창문 너머를 보았다. 투명인간 취급을 받고 있기는 하지만 불편한 분위기의 이곳에서 벗어나고 싶어졌다. 데이트하다가 무슨 날벼락이냐고.

    오웬이 비스킷 하나를 더 집어 먹자 굳게 닫혀 있던 문이 열렸다. 종업원이 등장하니 삽시간에 조용해졌다.

    종업원은 애매한 분위기를 애써 무시하며 주문한 차와 바움쿠헨을 테이블에 올렸다. 오웬은 나갈 때 자신도 데리고 나가 달라고 부탁하고 싶었으나 참았다.

    종업원이 나가고 문이 다시 단단히 닫히자 벨리타는 바움쿠헨 한 조각을 자신의 앞으로 가져왔다. 이윽고 조용히 포크를 든다.

    한참 입을 다물고 벨리타를 안달 내며 바라보던 소르니가 찻물을 들이켠 후, 작게 소리쳤다.

    “왜 나한테만 그렇게 쌀쌀맞아?”

    케이크를 포크로 자르던 벨리타가 고개를 돌렸다.

    “뭐?”

    “그렇잖니. 로틀 남작도, 하다못해 폐하한테도 그렇게 살갑게 굴고 챙겨줬는데. 왜 나한테만 매정하게 굴어? 내가 싫어?”

    벨리타가 포크를 내려놓고 미간을 짚었다. 오웬이 빠르게 잘 우려진 차를 벨리타의 잔에 따라 주었다.

    벨리타가 찻잔을 들고 오웬을 바라봤다. 오웬은 군말 없이 마법을 사용해 차를 식혀 줬다. 식은 차를 확인한 벨리타가 단번에 마시고 내려놓았다.

    “애처럼 굴지 마.”

    “……애처럼? 그럼 폐하는? 폐하는 아들로 봐놓고서 왜 나한테는 그래? 로틀 남작이 죽었다니까 울어도 줬다며? 왜 난? 너한테 난 뭐니? 너 딸 있다며. 날 딸로 봐줄 수는 없는 거야?”

    감정이 격해져 말실수했다. 소르니는 제 잘못을 알았지만 주워 담을 수 없었다. 말실수지만 진심이었으니까.

    소르니는 억울했고 서운했다. 그토록 다정하게 속삭여서 홀려놓고는 언제나 뒷전이었다. 소르니보다 잭슨, 소르니보다 오웬. 하다못해 따라다니는 하녀 따위가 소르니보다 우선이었다.

    첫 번째가 되고 싶었다. 자신을 사랑하고 싶어도 사랑할 줄 몰라서 한 번이라도 받아 보고 싶었다.

    소르니의 말에 벨리타가 테이블을 주먹을 내리쳤다. 쾅, 식기들이 덜그럭거렸다. 오웬은 소파와 한 몸이 되어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도록 조절했다.

    주먹을 덜덜 떨던 벨리타가 살벌하게 고개를 들었다. 소르니가 헛숨을 삼킨다.

    “너 뭐라고 했어?”

    “…….”

    “너를 왜 내 딸로 봐. 왜. 내 딸은 버젓이 잘 살아 있는데, 왜! 네가 뭔데, 감히!”

    딸은 벨리타의 세상이었고 전부였다. 역린 같은 존재다. 소르니를 꽤 좋아하기는 하지만 세상과 견줄 수는 없다. 소르니는 남이었고 딸은 혈육이다.

    온갖 고생을 해가며 애지중지 키운 딸. 전부를 내줘도 아깝지 않은 자식. 벨리타는 그 자식과 단절됐다. 잃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런 벨리타에게 딸과 같은 취급을 해 달라고 해 보았자 화만 돋울 뿐이다.

    그 사실을 소르니는 몰랐고 가족에 대한 애정이 없어 쉽게 뱉을 수 있었다. 만약 소르니가 가족에게서 충분한 사랑을 받아 보았다면 쉽게 뱉지 못했을 말이다.

    그래서 소르니는 서러워졌다. 그리 막무가내로 굴고 힘들게 했던 잭슨은 죽은 아들로 보았으면서 왜 자신에게는 그러지 못하는지. 왜 자신은 벨리타에게 소중한 존재가 되지 못하는지 화가 났다.

    벨리타는 쉽게 곁을 내주고 정을 준다. 조슈아에게 그러했고 잭슨에게, 데이비드, 오웬에게마저 그러했다. 하다못해 평민인 디저트 가게 사장까지 아꼈다.

    벨리타는 물심양면으로 곁을 배회하던 소르니에게는 왜 그리 매정한가. 벨리타는 답할 수 있다. 정말 딸과 겹쳐 보았기 때문이다. 자식을 잃은 슬픔에 미쳐 곁에 있는 어린 여자아이를 딸이라고 부르고 싶었던 까닭이다.

    딸이 만들어 딸의 성격, 버릇이 은근하게 녹아 있는 캐릭터. 종종 입을 가리는 버릇이라든가 스킨십을 해 올 때 팔짱을 껴오는 점이라든가, 화가 나고 서러우면 눈물부터 나는 부분들이. 딸과 닮아서 벨리타는 소르니에게 살갑게 굴 수 없었다. 벨리타에게 있는 자식은 가슴에 묻은 아들과 버젓이 멀쩡하게 살아 있는 딸이다.

    소르니를 딸처럼 여기게 된다면 현실에서 살아가고 있을 자식을 가슴에 묻게 될까 봐 무서웠다. 벨리타는 현실에 일궈놓은 모든 걸 잃었고, 그것을 인정하는 데에 오랜 시간이 걸렸다. 아직 완전히 수긍하지도 못했다. 딸까지 가슴에 묻고 싶지 않았다. 자식을 잃은 걸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나약한 벨리타는 자기만족을 위해 소르니를 딸과 빗대어 본 적이 있고, 그대로 딸의 위치를 빼앗길까 봐 두려워한 적이 있다.

    잭슨에게 느꼈던 감정과 마찬가지다. 그래서 벨리타는 소르니에게까지 그러고 싶지 않았다. 꽤 복잡한 심경이다. 짧게 정리하자면, 벨리타는 소르니를 딸로 빗대어 본 적이 있고 앞으로도 그러고 싶지만, 딸을 잃은 걸 인정하고 싶지 않아 현실 부정 중이었다.

    소르니는 불처럼 화를 내는 벨리타에게 겁을 먹었다. 소르니는 이대로 벨리타가 자신을 떠날까 봐 두려워졌다. 첩의 자식으로 태어나 황태자와의 혼인을 위해 애물단지처럼 자란 소르니가 벨리타에게 매달리는 건 불가항력이다. 소르니에게는 벨리타뿐이다.

    소르니가 황급히 손을 모아 문지른다. 자존심이고 뭐고 거들떠볼 필요도 없다.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다시는 안 그럴게. 나 미워하지 마, 응? 잘못했어.”

    손바닥이 발바닥이 되도록 문지르며 운다. 어린아이가 부모에게 혼이 나듯, 유일한 세상에 버림받을까 봐 두려워하며 매달린다.

    보기 힘든 행동이었다. 다 큰 어른이 아이처럼 빌고 용서해달라고 애원하는 걸 덤덤히 보기 어려웠다. 속이 시큰거린다. 불쌍하고 안타까워 죽겠는데 선뜻 딸처럼 대해 주겠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벨리타……. 내가, 정말 미안해. 잘못했어. 다시는 절대 이런 일 없을 거야.”

    “…….”

    착잡함에 벨리타가 미간을 짚었다. 어디서부터 잘못됐을까. 소르니는 분명 어엿하니 알아서 잘살 거라고 생각했는데. 모두가 결핍을 가지고 있었고 벨리타도 다르지 않다. 결핍끼리 모여 봤자 더 큰 결핍만 생길 뿐이다.

    고개를 든 벨리타가 오웬에게 나가 있으라며 손짓했다. 오웬은 기다렸다는 듯 룸에서 벗어났다.

    저 새끼 기다리고 있었네. 벨리타가 짧게 혀를 차자 소르니의 안색이 파리하게 질려 부산스럽게 움직였다.

    “너 뭐해?”

    어이가 없다. 벨리타가 혀를 차는 걸 보고 소르니는 자신에게 하는 짓이라고 오인해 무릎까지 꿇었다. 소파 위에 가지런히 무릎을 꿇고 앉아 있다.

    벨리타는 속이 들끓는 기분이 들었다. 분노라고 하면 분노라고 할 수 있었다. 벨리타가 빠르게 소르니의 팔을 낚아채 옅게 흔들었다.

    “여기가 어디라고 무릎을 꿇어, 미친 계집애야!”

    “내가 어떻게 하면 되는데! 난 너밖에 없단 말이야, 너뿐이라고! 너까지 없으면 나는 어떡해!”

    “내가 뭐라고 그렇게까지 해!”

    “나한테 그런 말 해 준 건 너밖에 없으니까!”

    소르니의 외침을 끝으로 벨리타는 입을 다물었다.

    무릎을 꿇고 눈물만 서럽게 흘리던 소르니가 슬그머니 팔을 빼내 벨리타의 손을 맞잡아 깍지를 꼈다. 소르니가 씨근덕거리며 말을 이었다.

    “……스스로를 사랑하라는 걸 대체 어떻게 하는지 모르겠어. 난 언제나 누군가에게 첫 번째였던 적도 없고, 마음을 주고받는 법도 몰라. 사교계는 나한테 싸움판에 짓밟지 않으면 짓밟히는 곳이야. 내가 어디에서 날 아껴 줄 방법을 찾아?”

    말을 쏟아낼수록 북받쳐 오르는 설움에 소르니가 훌쩍거리기 시작했다. 깍지 낀 벨리타의 손을 소중하게 감싸 쥔다.

    “내가 누군가를 아끼고, 아낌을 받는다면 그게 너였으면 좋겠어. 네가 뭐라고 그렇게까지 하냐고? 넌…… 너를 몰라. 너와 있으면 얼마나 속이 꽉 찬 느낌을 받게 되는지, 네 자체가 얼마나 큰 위로가 될 수 있는지, 네 반말도 얼마나 따뜻한지…….”

    벨리타는 할 말을 찾지 못했다. 언제나 의젓하게 굴어서 이겨내고 있는 줄 알았다. 소르니가 자란 환경이 지독하게 이기적이었던 걸 알고 있으면서도.

    소르니는 벨리타에게 좋은 모습만 보여 주려고 했다는 걸 알아주지 못했다. 결핍이 큰 아이일수록 퇴화하거나 과하게 의젓하게 군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데도 눈치채 주지 못했다.

    벨리타가 책임질 필요 없다. 누구든 해 줄 수 있는 말에, 누구든 해 줄 수 있는 배려였다. 홀려 매달리는 사람의 탓이지 호의를 건네준 사람의 책임은 아니다.

    그런데도 벨리타는 부채감을 느꼈다. 조슈아에게도 호의를 주었다가 후에는 무심했다. 그 결과가 어땠지? 소르니에게 관심을 주지 못하면 소르니도…….

    더 이상의 죄책감은 싫었다. 주위 사람들이 죽어 나가는 꼴을 보고 싶지 않았다. 무심했기에 망쳤다면 신경 써 주면 되는 일 아닌가.

    이따금 소르니를 딸에 빗대어 보게 되더라도 소르니는 기뻐할 거다. 자기 위안으로 챙겨 주는 체를 해도 행복해하겠지. 옳지 않다는 걸 안다. 하지만 가식으로나마 사람이 행복해진다면 누가 옳지 않다고 손가락질할 수 있는가?

    생각을 정리한 벨리타가 소르니의 손을 덮어 쥐었다. 소르니가 두려움과 공포, 기쁨과 희망으로 어지럽게 점철된 채 눈을 빛냈다. 벨리타가 제법 사근사근, 부드럽게 말했다.

    “난 널 내 딸로 못 봐. 그래도 좋아?”

    “그래도 좋아. 널 귀찮게 하지 않을게. 오지 말라고 하면 부를 때만 갈게. 날 좋아해 줘…….”

    소르니는 끝까지 벨리타의 눈치만 본다. 벨리타는 속이 시큰거렸다.

    “널 첫 번째로 두지는 못해. 그래도 널 좋아할 수 있어. 그래도 언젠가는 널 가장 우선시하는 사람을 만날 거야. 그럼 그 사람을 네 첫 번째로 두면 돼.”

    “그럴게. 네가 그러라고 하면 그럴게.”

    “내가 시켜서 하는 게 아니라, 네가 하고 싶을 때 그렇게 하는 거야.”

    세상만사 다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벨리타가 한숨을 내쉬며 소르니의 손등을 토닥거렸다.

    소르니가 쭈뼛거리며 눈치를 살피다가 슬쩍 손을 놓고 팔을 벌렸다. 거절당하는 걸 미리 짐작하고 상처받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벨리타의 눈에는 그런 소르니가 다 보여서. 불가피하게 벨리타는 팔을 뻗어 소르니를 끌어안았다.

    “아가.”

    “응, 벨리타.”

    무신경하게 가벼이 뱉어내는 다정한 말이 좋아서 소르니는 벨리타를 힘주어 끌어안았다.

    “네가 행복해졌으면 좋겠어. 진심이야.”

    “네가 바란다면 꼭 그럴게.”

    “기대지 말라는 말은 안 해. 사람이 다 의지하면서 사는 거지. 그래도 누군가가 떠났을 때 무너지지 않도록 잘 자랐으면 좋겠어.”

    “응. 약속할게.”

    “착하다.”

    소르니가 해사하게 웃으며 벨리타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오웬이 끝났나 싶어 문을 조금 열었다가 곧장 소리 없이 조심스럽게 닫았다. 오웬의 첫 데이트는 완벽하게 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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