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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이 쓴 로판 소설에 빙의되어버렸다-108화 (108/150)

108화.

경험이라고 하기에 우습지만 벨리타는 꽤 오랜 기간 장사를 해 왔고, 나름의 장사 철칙도 있었다. 지식이 없을 뿐 능력은 좋았다는 거다. 노하우도 있고 본질을 꿰뚫어 보는 눈도 있었다.

오웬은 하나를 알려 주면 열을 아는 벨리타에게 신이 나서 알고 있는 온갖 경영 지식을 모조리 가르쳤다. 벨리타는 스펀지처럼 지식을 흡수했다.

가르치기 위해 사용한 종이가 쌓여 반 뼘이 넘어갈 무렵, 둘은 정신이 들었다. 벌써 늦은 밤이었다. 저녁까지 거르고 신나 버렸다.

오웬이 헛웃음을 뱉으며 종이들을 정리했다. 벨리타가 오웬의 손목을 붙잡는다.

“버리지 마. 나 또 볼 거야.”

“그래?”

마법 가르칠 때는 이렇게까지 열성적이지 않았으면서. 오웬은 살짝 서운했다.

벨리타가 책상 서랍을 열어 종이를 정리해서 넣었다.

“그러고 보니 넌 이걸 어떻게 다 알아?”

“아, 그거.”

조슈아와 계약할 때 뒤통수 맞지 않으려고 공부한 지식이다. 공부하다가 신나서 필요 없는 경영까지 손을 댄 거라고 차마 이야기할 수 없었다.

조슈아가 죽고 죄책감을 느끼고 있는 벨리타인데 이름을 들먹여 다시 떠오르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오웬은 지식에 대한 욕구가 하늘을 찌르다 못해 우주를 뚫고 나가는 편이었고, 그것은 마법사의 사소한 특징 중 하나였다.

그 덕에 벨리타의 머리에 온갖 경영 지식을 쑤셔 넣어 줄 수 있었다. 오웬이 멋쩍게 웃으며 대충 얼버무렸다.

“그냥 어쩌다 보니. 내가 지식 쌓는 걸 많이 좋아하잖아.”

그렇구나. 벨리타가 의심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했다. 흥미로운 일에 관해서는 미친 사람처럼 몰두하는 오웬이었으니 그러려니 했다. 벨리타를 돌려보내기 위해 잠도 자지 않고 끼니도 걸러 가며 포션만 들이켜던 오웬 아니던가.

벨리타는 의자에 등을 기대고 늘어졌다. 아침부터 머리를 쓸 일이 많아 속이 메슥거렸다.

“선생을 구해야 하나 싶었는데 한시름 덜었네. 고맙다.”

“나처럼 능력 좋은 호위가 또 어디 있어. 그렇지, 제자님?”

“웃기셔. 선생이었다가 호위였다가 난리 났네.”

머리를 쓰고 나니 배가 고프다. 고3이었던 딸이 왜 자꾸 야식을 찾아댔는지 이해할 것 같았다. 벨리타가 씁쓸하게 웃었다.

오웬이 벨리타의 양어깨를 잡아 일으켰다. 그리고 장난스럽게 웃는다.

“나 그거 먹고 싶어.”

“뭐?”

“수제비. 네가 해 줬던 거.”

그걸 언제 해 줬더라. 아, 바닷가에서 지낼 때 한 번 해 주었다. 벨리타가 흠, 눈을 가늘게 뜨고 오웬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나 머리 너무 써서 피곤한데.”

“그래? 머리 아픈 건 아니지?”

기댄 머리를 오웬이 조심스럽게 감싸 들었다. 벨리타의 고개가 뒤로 젖혀졌다.

시선이 마주치자 벨리타가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 오웬은 눈썹을 구기며 입을 꾹 다물었다.

아-. 낮게 탄성을 토해낸 오웬이 곧장 벨리타의 입에 입술을 문지른다.

벨리타가 소리 없이 웃고는 오웬의 허리춤을 붙잡았다. 쪽, 입술이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예쁜 짓 하면 넘어가 줄 거라고 생각해?”

“나 예쁜 짓 안 해도 예쁜데.”

그건 맞지. 뻔뻔한 오웬의 대답에 납득한 벨리타가 오웬의 등을 가볍게 토닥거렸다.

“수제비 해 줄게. 재료가 있으려나.”

그때에는 바닷가여서 육수 낼 재료를 구하기 쉬웠다. 수제비 생각을 하니 정말 먹고 싶어졌다.

벨리타는 주방에 있을 재료들을 떠올리며 오웬의 손을 맞잡고 주방으로 단란하게 걸어갔다.

도착한 건 좋았는데, 주방 하녀가 벨리타를 막고 고개를 도리질 쳤다. 늦은 밤이었음에도 하녀는 주방을 정리하고 있었고 벨리타의 방문에 화들짝 놀라 식칼을 떨어트렸다. 다친 사람도 없고 그저 바닥에 떨어지기만 했으니 다행이었다.

벨리타를 본 하녀가 문을 온몸으로 틀어막고는 열심히 벨리타의 침입을 막았다.

“아니, 왜 안 되냐고!”

“아가씨, 요새 안 좋으시잖아요!”

벨리타의 상태가 좋지 못했던 최근이었기에 하녀는 필사적으로 반항했다. 몸도 안 좋기까지 한 벨리타가 주방에서 다치면 큰일이었다.

도통 대화가 통하지 않아 씨근덕거리는 둘을 가로막은 오웬이 살갑게 웃었다.

“그럼 만들어 주실래요? 아가씨와 내가 아직 식사하지 못했거든요.”

“그건 당연히 해드리죠!”

“내가 한다니까? 이제 넌 들어가서 쉬어.”

온종일 떠들어 목이 갈라진 오웬이 벨리타를 말렸다. 착하다, 참아 주자, 봐주자, 몇 번이고 다독여서야 벨리타는 길게 숨을 뱉으며 진정했다. 오웬의 말을 듣고 수제비 먹고 싶어졌는데.

벨리타가 후, 가슴께를 손바닥으로 쓸어내리자, 오웬이 하녀에게 맛있게 부탁한다는 말을 남기고 벨리타를 어화둥둥하며 식당으로 이끌었다.

불도 들어오지 않은 식당에 도착하자마자 오웬이 손가락을 휘둘러 식당을 밝혔다.

“그거 알려 줘. 배울래.”

“지금 해 볼래?”

한번 배우는 재미를 깨닫고 나니 흥미가 생기는 건 죄다 배우고 싶어진 벨리타가 오웬을 채근했다.

오웬은 마법에 관심이 식지 않은 벨리타를 무척 기뻐하고 자랑스러워하며 의자에 앉혔다. 그리고 식탁보에 손가락으로 술식을 그으며 설명한다. 다만 오웬의 설명이 개떡 같았다. 어째 쟤는 마법만 가르치면 짜증이 날까.

벨리타가 언제나 그랬듯 정과 사랑으로 참아 주며 술식을 시도했다. 성공이다. 이미 밝은 식당이 더욱더 환하게 빛났다.

눈이 멀 것 같은 환한 빛 탓에 벨리타는 황급히 술식을 머릿속에서 지웠다. 오웬이 싱글벙글 웃으며 양손으로 턱을 괴고 벨리타를 바라보았다.

“우리 자기 너무 잘하네. 진짜 바다 가르는 거 아니야?”

“자꾸 헛소리할래?”

식당의 문이 열렸다. 하녀가 간단한 빵과 샐러드, 구운 고기와 수프를 올렸다. 이윽고 눈치 좋게 사라진다. 벨리타가 포크를 들었다. 얌전히 벨리타의 먹는 모습을 바라보던 오웬이 가볍게 말을 던진다.

“조금만 더 하면 서클 쌓을 수도 있겠는걸.”

“너는 무슨 그런 말을 그렇게 가볍게 하냐.”

들었던 포크를 식탁에 떨어트린 벨리타가 인상을 찌푸렸다. 벨리타가 오웬을 찾았던 이유. 툭하면 기절하고 힘의 충돌 탓에 아파했던 것과는 작별이다. 도움만 받고 해 준 게 없다.

벨리타는 포크를 대충 털어내고 샐러드를 입에 욱여넣었다. 선물이라도 해야겠다, 생각하던 찰나 벨리타와 오웬은 단둘이 제대로 데이트해 본 적도 없다는 걸 깨달았다.

단둘이 놀러 가 본 적이 없다. 시장 구경도 데이트라면 데이트겠지만, 풋풋하게 손 마주 잡고 무르펜을 돌아다니지도 못했다.

벨리타가 입안에 가득 들었던 샐러드를 씹어 삼키고 고기를 썰며 말했다.

“내일 데이트 가자.”

쨍그랑, 나이프가 바닥에 곤두박질쳤다.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오웬이 양손을 덜덜 떨었다.

“너, 너는 무슨 그런 말을 그렇게 가볍게 해?”

귀엽다. 벨리타는 짧은 감상을 남기고 능청스럽게 웃었다. 오웬이 양손으로 입을 틀어막으며 소리 없는 아우성을 내질렀다.

은근한 미소를 짓고 고깃덩이를 자른 벨리타가 접시를 들어 오웬의 앞에 내려놓았다. 고기가 잘리지 않은 오웬의 접시를 가져온 벨리타는 다시 고기를 잘랐다. 태연하게 고기에 시선을 둔 채 질문한다.

“그래서, 싫어?”

“……아뇨. 너무 좋아요.”

“옳지.”

바닥에 나뒹구는 칼을 주운 오웬이 다 잘라놓은 고기를 입에 욱여넣었다. 붉어진 얼굴이 식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

아침부터 점심까지 일만 했다. 몸을 쓰는 일만 했던 벨리타는 앉아서 하는 일을 하려니 영 익숙하지 않았다.

펜을 휘갈기며 계약 파기 안 할 거니 엿 먹으라는 말을 귀족 언어로 장황하게 돌려 적은 벨리타가 열린 문 사이에 서서 기다리고 있는 오웬을 발견했다. 대충 입고 다니던 오웬이 깔끔한 정장을 입은 채 벨리타를 기다렸다.

셔츠도 제대로 잠그지 않고 다니던 오웬이었는데 제대로 차려입은 모습을 보니 여간 멀끔한 게 아니었다. 조슈아의 파티에서 만났던 오웬이 떠오른다. 그때도 기가 막히게 잘생겼었지.

벨리타가 오웬을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성큼성큼 드레스 자락을 휘날리며 오웬에게 다가가 덥석 끌어안는다.

“뉘 집 자식인지 잘생겼네~”

“우리 엄마 아들이거든.”

장난스럽게 오웬의 볼과 턱에 입을 맞추던 벨리타가 얼굴이 붉어진 오웬의 손을 잡았다.

나름 벨리타도 신경 쓴다고 곱게 차려입었는데 오웬에게 견줄 바가 되지 못했다. 얼굴이 잘난 탓이다.

벨리타가 오웬을 이끌며 집무실을 벗어났다. 계단을 내려오고 마차를 준비시켰다. 오웬은 내내 안절부절못하며 벨리타의 손을 고쳐 쥐었다.

“왜 그래? 싫어?”

“아니……. 좀……. 긴장돼서.”

무슨 소리인가 눈을 굴리던 벨리타가 방긋 웃는다.

“첫 데이트라서 긴장했어?”

“……응.”

수줍어하면서도 할 말은 다 하고, 손잡을 건 다 잡는다. 벨리타가 장난스럽게 오웬의 반쯤 넘긴 머리를 정돈했다.

“긴장하지 마. 원래 처음이 어려운 거지.”

고개를 끄덕거린 오웬이 식지 않는 얼굴을 손으로 가렸다. 마차가 준비되었다는 하녀의 말을 듣고 벨리타가 오웬을 잡아끌었다.

벨리타는 오웬이라는 호위가 있으니, 하녀도 호위도 됐다며 거절한 후 화려한 마차를 타고 무르펜으로 달렸다.

분명 즐거웠다. 점심도 여유 있고 단란하게 잘 먹었고, 팔짱을 낀 채 시내도 돌아다녔다.

잡화점에서 이상하게 생긴 브로치를 보고 한참을 웃기도 하고, 예쁘장한 목걸이를 껴 보기도 했다. 완벽한 데이트였다.

바짝 긴장하던 오웬도 얼마 가지 않아 장난도 치며 즐거워했다. 그랬는데.

“벨리타.”

다리가 아파 디저트 가게로 들어섰더니 소르니가 있었다. 웬일로 홀로 차를 마시며 앉아 있던 소르니가 벨리타를 발견하자마자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가게 안의 모든 사람이 소르니와 벨리타를 힐끔댔다. 언젠가 봐야겠다고 생각은 했지만 이렇게 만나고 싶지 않았다. 아직 마음의 준비도 하지 못했다.

벨리타가 오웬의 팔을 잡아 끌어당기며 가게를 벗어나려고 하자 소르니가 높은 굽을 신은 채 뛰어왔다.

소르니가 벨리타의 팔을 힘주어 잡는다. 벨리타는 소르니를 돌아보았다. 울음을 참으려 얼굴이 일그러진 소르니가 벨리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사람들이 수군대기 시작했다.

“우선 나갈까? 아니면 프라이빗 룸으로 갈까?”

“부탁할게, 안내 좀 받아 줘.”

벨리타의 대답에 오웬이 종업원을 불렀다. 종업원이 소르니의 테이블을 정리하고 먹다 만 음식들을 트레이에 올려 프라이빗 룸으로 안내했다. 룸이 따로 있어서 다행이었다.

한사코 떨어지지 않으려 벨리타의 팔을 붙들고 졸졸 따라온 소르니가 소파로 구성된 룸에 들어서자마자 벨리타를 끌어당겨 옆에 앉혔다. 데이트하러 온 오웬은 졸지에 옆자리를 빼앗겼다.

주문을 기다리는 종업원에게 오웬이 대충 급하게 주문한 뒤 종업원을 내보냈다. 문이 닫힌다. 오웬은 한숨을 뱉으며 소파 등받이에 등을 기댔다.

가녀린 팔을 놓칠세라 소르니가 바짝 붙어 앉아 있었다. 팔이 빠지는 감각이 들어 벨리타가 소르니를 밀어냈다. 소르니가 고개를 푹 숙이고 빠르게 저었다. 소르니를 밀어내던 손이 붉은 머리 위에 얹어졌다.

“나 팔 떨어져. 그만해. 어디 안 가.”

귀찮음이 역력한 말투를 들은 소르니가 촉촉해진 눈으로 벨리타를 보았다. 왈칵 눈물이 터진다. 벨리타는 익숙하게 곧장 아이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

“왜 울어, 왜. 뭐가 그렇게 서러워.”

“……네가, 나 무시하고 가려고 했잖아-. 나는 반가운데, 네가…….”

오웬은 자신의 존재를 잊지 말아 달라고 말하고 싶었으나, 없는 듯 얌전히 소르니의 비스킷만 훔쳐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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