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화.
경계 짙은 시선이다. 아무리 사랑하는 사이라고 해도 전날 그렇게 상처를 줘 놓고 대뜸 사람을 죽였다고 시인하면 모두 오웬과 같은 반응일 거다. 그럼에도 서운하고 서러워진다.
벨리타가 오웬의 옷깃을 잡고 끌어당겼다. 오웬이 힘을 주어 상체를 뒤로 물렸다. 힘들어할 때마다 입을 맞춰 주고 볼을 기대어 주었으면서 왜.
“……너 누구야?”
뭣. 벨리타는 당혹스러움과 설움이 한데 뒤섞여 눈물을 펑펑 쏟아냈다. 무슨 질문이 그따위인가.
벨리타가 오웬의 멱살을 틀어쥐어 흔들었다. 이 새끼, 무슨 새끼, 욕설이 난무하자 오웬은 그제야 경계를 지웠다.
“아, 몸 주인인 줄 알았네.”
“왜 못 알아보는데, 왜…….”
짜증 가득히 오웬의 뺨을 손가락 끝으로 긁고 가슴팍을 주먹으로 두드렸다.
오웬이 자신이 다 미안하다며 벨리타를 한 품에 끌어안았다. 벨리타의 거친 호흡이 흐릿하게나마 안정되어 갔다.
“몸 주인 찾고 싶다고 해 놓고 다음 날 토하고 울면서 자기가 죽였다고 하면 오해할 만하지 않아? 욕하는 거 보고 알아봤네. 우리 자기, 욕 하나는 독보적이야.”
“내가 죽였다니까? 몸 주인을?”
벨리타가 벨리타임을 알게 되자 오웬은 느슨하게 풀어진 낯으로 냉큼 볼을 기대어 온다. 벨리타의 볼이 눌려 찌부러졌다.
몸 주인을 죽이고 빼앗았다는데 태평하고 여유로운 태도라니. 벨리타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벨리타가 오웬의 볼을 밀어냈다.
“나야 좋지 뭘. 난 네가 좋은 건데, 네가 없으면 무슨 소용이야?”
그야 맞는 말이긴 하다. 겉모습은 같을지언정 속은 다른 사람이니까. 오웬이 사랑한 사람은 가짜 벨리타였다. 그러니 가짜 벨리타가 진짜 벨리타를 죽이고 몸을 빼앗았다고 하더라도 상관이 없었다.
벨리타는 이상한 관념이 미묘하게 거슬렸지만 다른 이들보다 훨씬 이성적이고 상식적인 오웬이 하는 말이라 그냥 넘어갔다.
오웬마저 없으면 벨리타는 속절없이 무너질 테니까. 벨리타는 토사물이 묻은 입을 대충 닦아내며 말했다.
“넌 내가 꺼림칙하지도 않아? 몸 주인을 죽이고 몸을 빼앗은 데다, 조슈아, 아니…… 로틀 남작도 죽게 내버려 두고. 잭슨이 사람들을 죽이게 방치하고……. 소르니도 결혼 못 하게 막아댔잖아. 테일러와 라빌까지 갇히게 만들고, 데이비드에게 상처까지 줬어. 그래도 아무렇지 않아?”
바라는 대답은 있었다. 자신이 잘못한 일들을 구구절절 나열하며 매도할 수밖에 없는 말을 했지만 원하는 답변은 정해져 있다.
매달린 벨리타의 눈가를 손가락으로 문지른 오웬이 짧게 손가락을 휘둘렀다. 벨리타와 이불, 옷과 바닥이 순식간에 말끔해졌다. 모든 게 다 깨끗해졌는데도 벨리타의 눈가는 엉망이어서, 오웬이 몇 번이고 부드럽게 눈물을 닦았다.
“그게 왜 네 탓이야?”
정말 이해가 안 간다는 말투였다. 그래, 이런 대답. 벨리타가 듣고 싶었던 대답이었다. 제 잘못인 걸 알고 있으면서도 자기 합리화를 위해 듣고자 했던 말.
벨리타는 눈을 뜰 수 없어 얼굴을 일그러트리고 흐느껴 울었다. 오웬이 등을 느릿하게 토닥거린다.
“네가 한 일은, 그 녀석들에게 다정함을 알게 해 준 일이야. 사람의 온기가 뭔지 배우게 했잖아. 죽고 다치게 된 건, 다 자기들 선택이지. 네가 한 게 아니야. 너도 알잖아.”
오웬은 벨리타가 듣고 싶어 하는 말들을 귀신같이 알아내 속삭이곤 했다. 오웬의 말이 맞다. 수많은 선택의 결과 끝에 나온 결말이었다.
벨리타는 간섭하지 않았고 다른 이들도 조금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었다. 잭슨과 조슈아, 소르니가 낸 결과는 벨리타의 탓이 아니었다. 인간성이 결여된 것도, 맹목적인 것도, 약삭빠르게 줄타기를 하는 것도 벨리타의 잘못이 아니다.
벨리타는 왜 자신의 탓이라 생각했는가?
답변이 생각나지 않았다. 벨리타는 자책한 이유를 명확히 짚어내지 못했다. 당연히 벨리타의 잘못이라고 생각했다. 시작점이 벨리타라서? 근래 감당하기 힘든 일만 거듭 반복되어서? 딸 소설의 이야기를 망가트려서?
벨리타가 혼란스러워하며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쳤다. 오웬이 눈을 가늘게 접어 웃으며 벨리타의 이마를 검지손가락으로 가볍게 밀어냈다. 벨리타의 고개가 뒤로 밀려났다가 제자리로 돌아왔다.
“넌 이상하게 자책하는 경향이 있어. 걱정도 많고 겁도 많지.”
말문이 막혔다. 남의 입에서 듣는 벨리타는 낯설기만 했다. 이상했다. 벨리타가 언제부터 자책하게 되었나? 걱정이 많았던가? 겁이 많나?
이미 꿈에서 쌓인 많은 정보 탓에 과부하가 온 것 같았다. 머리가 돌아가지 않는다. 그저 우동 사리처럼 퉁퉁 불어 있다. 제 기능이 되지 않는다.
오웬이 벨리타의 뺨을 쓸어내려 턱을 쥐었다.
“귀찮은 건 질색이라고 하면서도 부지런하기도 하고.”
“…….”
“왜 그럴까? 타고난 성격? 아니면 상황이 널 그렇게 만들었을까?”
와중에도 호기심으로 빛나는 오웬의 노란 눈이 집요하게 벨리타를 좇았다. 벨리타는 확답을 내릴 수 없었다. 정말 그렇게 타고났나? 자책하고 움츠러들고, 겁이 많으면서도 부지런한 벨리타는 날 때부터 그대로였나? 그렇게 살아야 했기 때문이 아니었던가.
남을 탓할 용기가 없어서 만만한 스스로에게 탓을 돌리고, 다치는 게 싫어 움츠러들었다. 배운 게 없고 아는 게 없어 겁이 많았다. 바삐 움직이지 않으면 자식을 굶겨야 했기에 닳은 몸을 쉴 틈 없이 움직였다. 그렇게 살아야 할 환경이었으니까.
벨리타가 멍하게 오웬을 바라보았다가 고개를 숙였다. 젊고 솜털이 보송한 몸.
값비싼 이불과 침대. 평범한 바지를 입은 굵은 남자의 다리. 새로운 환경. 돌아갈 수도 달아날 수도 없는 낯설지만, 현실에서도 여럿 겪어 보았던 상황. 벨리타가 이불을 가득 손에 쥐었다.
“사람들은 곧잘 자책해. 자기 때문에 다 망했다고, 자기가 멍청한 선택을 했다고.”
오웬의 손이 벨리타의 손 위에 겹쳐졌다. 묵직하게 감싸 쥔다.
“실상 본인은 그렇게 대단하지 않잖아. 어떤 선택을 해도 비슷한 결과였을걸. 자신의 선택이 그리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지도 않은데.”
오웬이 상체를 숙여 벨리타의 앞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벨리타가 눈을 느릿하게 끔뻑거렸다. 천천히 가까워진다.
“그러니까 자책할 필요 없어. 내 선택이 이 상황에 얼마나 큰 지분이 있겠어. 너도 마찬가지야. 벨리타, 넌 그 녀석들을 도와줬을 뿐이고 상황을 만든 건 그 녀석들인 거야. 네 잘못은 없어. 너도 알고 있잖아.”
입술이 닿는다. 말캉한 감촉이 여실하게 느껴졌다. 벨리타가 눈물을 그치고 훌쩍거리자, 오웬이 닿은 입술을 달싹거렸다.
쉬이, 괜찮아. 다 잘될 거야. 오웬이 하는 말을 다 이루어질 것 같아서. 벨리타는 눈을 감고 오웬의 헐렁한 셔츠를 쥐었다.
오웬이 벨리타의 입술 끝과 볼, 콧대에 몇 번이고 입을 맞췄다.
뒤로 점점 물러나는 벨리타의 등을 받치고 천천히 침대로 밀어 눕힌다. 이불이 잔뜩 구겨졌다. 쪽, 입술이 떨어지는 소리 끝에 오웬의 작은 웃음소리가 이어졌다.
“행복해지기로 했잖아, 우리.”
“……그랬지.”
침대 위로 흐트러진 벨리타를 내려다보던 오웬이 심술 맞게 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뒤에서 몰래 그런 엉큼하고 못된 계략을 꾸미고 있는 줄은 몰랐지만.”
“미안.”
“됐어, 밤새 마음고생하기는 했는데. 바로 해결되었으니까…….”
오웬의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벨리타의 울음이 또다시 터져 버린 탓이다. 롤러코스터였다. 기분이 한없이 침잠하다가 무감각해지고 이내 격해진다. 더 쏟아낼 감정도 없다 느낄 새면 그새 분개했고 서러웠다.
이렇게 미치는 걸까? 내가 미쳐가나? 오웬이 달래주어 나아진 기분이 급격히 곤두박질치며 슬퍼졌다.
이미 미쳤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다. 벨리타는 짧은 사이에 많은 일을 겪었고 상당한 수의 것들을 상실했다. 목표도 사라진 지금, 벨리타는 그저 바닥에 나뒹구는 낙엽과 다름없다.
오웬이 혀를 짧게 차고는 벨리타의 눈가를 가볍게 문질렀다. 하도 울어 눈 밑이 쓰렸다.
“많이 지쳤나 봐. 어떻게 괜찮겠어, 이해해.”
옷깃을 잡고 놔주지 않는다. 오웬은 셔츠가 늘어나는 게 아닐까 걱정이 되었다.
쪽, 벨리타의 입술과 입술 끝에 입맞춤을 퍼부은 오웬이 벨리타의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얹었다. 오웬의 코끝에 벨리타의 달달한 체향이 끼쳐왔다.
“나 어디 안 가. 너랑 있을 거야.”
“……응.”
“해야 할 일도 많잖아, 벨리타. 상단 일이라든가.”
맞다. 아침부터 너무 충격적이어서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벨리타가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맞닿아 있던 이마가 괴성을 내며 부딪쳤다.
정통으로 박치기를 당한 오웬이 침대에 드러누워 이마를 감싸 쥐고 앓는 소리를 냈다. 벨리타도 울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같이 앓는 소리를 냈다. 기가 막히는 하모니였다.
“돌이야? 벨리타, 너 머리 돌이지?”
“죽을래?”
침대에 드러누운 오웬이 벨리타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아냐, 전에도 느꼈는데 돌 맞는 것 같아. 바위 부딪히는 소리가 났어.”
“그럼 네 머리도 돌이냐?”
“아직 안 죽은 걸 보면 그런 듯해.”
미친 소리였다. 히히헤헤, 실없이 웃던 둘은 이내 길게 한숨을 토했다. 오웬이 미적거리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씻고 밥 먹으러 가자.”
“……그래.”
둘은 같이 침대에서 일어난 김에 함께 씻고 식당으로 내려갔다. 전보다 빈약한 상차림을 본 벨리타가 내보냈던 사람들을 다시 불러들여야겠다고 결심했다.
평범히 식사를 마무리하고 펑퍼짐하고 단출한 드레스를 입은 벨리타가 집무실에 앉았다. 라빌과 테일러를 보러 가려고 했는데, 황궁 첨탑에 갇혀 있는 터라 허락 없이 만날 수 없다고 했다.
그래서 벨리타는 하녀장에게 오늘 가서 후작 부부 면회를 신청하고, 저택의 사람들을 다시 모두 불러들이라고 지시했다.
하녀장은 고개를 숙이며 뒷걸음질로 사라졌다. 원래 저렇게 퇴장하던 사람이 아니었는데, 엘라가 가르쳐 줬나?
벨리타가 턱을 괴며 쌓인 서류로 시선을 돌렸다.
호기롭게 자신이 맡겠다고 했지만, 조슈아도 없는 판국에 도움을 구할 사람이 없었다. 이래서 사람이 배워야 하는데.
속으로 자조한 벨리타가 양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드르륵. 의자가 바닥에 끌리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든 벨리타가 은근슬쩍 옆에 앉은 오웬을 노려봤다. 오웬이 능청스럽게 어깨를 으쓱거렸다.
“도와줄게.”
됐다고 거절도 못 하겠다. 도움이 필요한 건 맞으니까. 고뇌에 빠지게 했던 서류를 슬쩍 내밀었다.
오웬이 서류를 받아 들고 천천히 읽었다. 깃털이 달린 펜을 든 오웬이 빈 종이를 꺼내 펜촉을 톡톡 두드렸다.
“어디가 어려워?”
“단어 뜻…….”
“알려줄게.”
자존심 상한다. 벨리타의 속내를 읽은 듯 오웬이 얄밉게 미소 지었다. 자존심을 세워 봤자 도움이 되지 않음을 알고 있는 벨리타는 군말 없이 오웬의 옆에 붙어 앉았다.
이해하지 못한 단어를 가리키자 오웬이 빈 종이에 받아 적고 뜻을 설명했다. 마법을 가르치는 건 개똥 같은데, 의외로 단어는 잘 가르쳤다. 벨리타가 오웬의 말에 집중했다.
“재미있어?”
“어?”
한창 귀 기울이며 서류를 해석해가던 벨리타가 소스라치게 놀라 오웬을 보았다. 오웬이 눈을 접어 살갑게 웃는다.
“재미있어 보여서.”
벨리타는 멍하게 서류와 오웬을 번갈아 보았다. 솔직히 재미있다. 뜻을 이해하니 읽는 것에 거슬림이 없고 속내도 쉽게 파악할 수 있다. 테일러의 부재로 인해 계약을 파기하려는 의도를 갖고 어려운 말로 돌려 말하는 서류에 어떠한 대답을 해야 하는지도 감이 잡혔다.
벨리타의 눈이 반짝거리는 걸 본 오웬이 턱을 괴었다.
“너 배우는 거 좋아하는구나.”
그런가? 벨리타가 펜을 들었다. 허공을 한참이나 바라보던 벨리타가 옅은 미소를 피워냈다.
“그런가 봐.”
벨리타는 자신이 배우는 걸 좋아한다는 점을 처음 알게 되었다. 경영에 재능이 있다는 것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