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벨리타는 오웬이 제멋대로 결정한 자신을 매도하리라 예감했다. 그래도 어떡해. 너무 버거워서 견딜 수가 없는데.
스스로에게 혐오감이 들었다. 나이만 먹고 애처럼 구는 꼴이 같잖았고 오웬의 마음을 가볍게 여긴 제 행동이 이기적이었다.
벨리타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오웬이 상체를 일으켜 앉아 벨리타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화가 나는 듯도 하고 억장이 무너지는 듯도 하다. 야속하고 미웠다. 함께 이겨내자고 했는데. 같이 나아가자고 약속했는데.
오웬이 자신의 입술을 물었다가 놓았다. 처음 느껴 보는 감정들이 어지러워서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래서 기다려 달라고 한 거야? 시간을 달라고 했던 이유가 이거였어?”
“아니, 그런 이유가…….”
틀린 건 아니다. 오웬과 애정을 확인할 때부터 벨리타는 몸 주인에게 몸을 돌려줄 생각을 하고 있었다.
벨리타가 입을 다물자 오웬이 고개를 돌렸다. 끊어지는 숨을 뱉었다가 고개를 든다. 눈물을 참았다. 벨리타가 첫사랑이었다. 첫사랑은 아프고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우스갯소리를 그냥 넘기지 말았어야 했는데. 오웬이 이불을 움켜쥐었다.
오웬은 벨리타를 이해했다. 워낙 힘들어한 데다 주변인들도 잃었으니 달아날 생각을 할 법했다. 남의 몸을 빼앗았다고 죄책감도 가지고 있었던 벨리타다. 당연한 결정임을 알았다.
다만, 머리로 이해했다고 한들 감정은 다르다. 야속하고 밉다. 혼자만 알지 말고 자신에게도 이야기해 달라고 했던 벨리타의 말이 떠올랐다.
벨리타도 이런 기분이었을까. 자신도 모르게 자신과 관련된 미래를 계획하고 이용하는 상대를 알아챘을 때, 느끼는 감정이 이거였을까.
오웬은 넘실거리는 감정이 버거웠다. 언제나 철저히 의지대로 감정을 다룰 수 있었다. 이번엔 아니다. 진정하려고 해도 심장이 거세게 뛰어 어지러울 지경이다. 감정을 조종할 수 없다.
오웬이 침대에서 일어났다. 벨리타가 오웬의 옷자락을 쥐었다.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벨리타를 내려다보던 오웬은 벨리타의 손을 조심스럽게 떼어냈다.
“나중에 얘기해. 감정이 격해져서…… 대화하면 안 될 것 같아.”
“오웬, 널 상처 주려던 건…….”
“벨리타, 아니야. 너에게 화내고 싶지 않아. 내일 얘기하자.”
부드럽고 단호한 거절이었다. 속은 감정이 들끓는데 화를 낼 수 없었다.
오웬은 따라 상체를 일으킨 벨리타를 침대에 눕히고 이불을 덮어 주었다. 베개 위로 흩어져 만개한 머리카락을 쓸어내린 오웬이 이불을 가볍게 툭툭 두드렸다.
“잘 자, 벨리타.”
“……너도.”
태연하게 밤 인사를 나누고 벨리타의 방을 벗어났다. 문이 완전히 닫히자마자 오웬이 바닥에 주저앉았다. 손이 떨린다. 숨이 가쁘다. 그래도 잘 참았다. 벨리타의 앞에서 티를 내지 않았으니 충분하다.
오웬의 등과 머리가 문에 기대어졌다. 생각을 정리해야 한다. 다음 날 아침, 감정에 휘둘리지 않으려면 현재 상황을 분석하고 정리해야만 했다.
그런데 왜 화가 나지. 울면서 왜 그러냐고 화를 내고 매달렸다면 분명 감정에 휘말려 상처 주는 말을 했을 거고, 생각은 물론 정리되지 않았을 거다. 감정 상하지 않게 잘 대처했다고 자부한다. 그럼에도 후회가 밀려왔다. 다 이야기할 걸 그랬나. 그래 보았자 해결될 일도 아닌데.
오웬은 복잡한 자신의 마음속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이상하게 자꾸 눈물까지 난다.
“한잔하고 자야겠네.”
술에 의존하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술이라도 마시며 머릿속을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웬이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침실로 걸어갔다. 자꾸만 다리가 풀려 벽을 짚고 가야만 했다.
*
속이 시끄러워서 도통 잠을 잘 수 없으리라 생각했는데 그새 잠들었다. 꿈이다.
벨리타는 여태의 경험으로 딸과 이어질 수 있는 수단은 꿈뿐이라는 걸 알았다. 현실감 없이 몽롱한 상태에 의식은 또렷한 감각은 여러 번 느껴 보았다.
벨리타가 익숙하게 주위를 둘러봤다.
벨리타의 방.
꿈이 아니었나? 벨리타는 기이한 느낌이 들어 팔뚝을 문질렀다. 몸에 감각이 없었다.
침대에서 일어나 방을 훑어보았다. 미묘하게 다르다. 오싹하게 등줄기를 훑는 소름이 들어 본능적으로 침대로 돌아갔다.
벨리타의 몸이 침대에 누워 있다. 벨리타는 분명 침대를 벗어났음에도. 덜컥, 무서워졌다. 벨리타는 손을 들어 보았으나 손이 없었다.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하고 있음에도 없었다. 몸 주인이 돌아왔나? 그래서 쫓겨난 걸까?
이해할 수 없는 현 상황에 벨리타의 머리는 비상하게 돌아갔다. 순간, 침대에 누워 있던 벨리타가 눈을 떴다.
벨리타의 기억.
머릿속에 지표처럼 남아 있던 기억과는 다른, 생동감 넘치는 기억이다. 서늘한 눈, 지친 기색. 날카로운 분위기. 온전한 벨리타였다.
침대에서 벗어나지 않은 채 벨리타는 식사를 해결하고, 씻고, 옷을 갈아입었으며, 책을 읽었다. 야윈 팔과 언뜻 비치는 다리가 얼마나 침대 생활을 오래 했는지 짐작하게 했다.
옷핀이 살갗을 찌르면 예외 없이 하녀의 뺨을 내리치고, 식사가 입에 맞지 않으면 침대 아래로 내던졌다. 안쓰럽게 홀쭉한 얼굴로 악을 쓰며 화를 냈다.
그러다가도 몸을 움츠리고 고통을 호소했다. 아파서 예민하고 고통스러워서 화를 참지 못한다.
벨리타는 먼발치에서 죽은 듯이 벨리타를 눈에 담았다. 지금처럼 안정되기 전까지는 시도 때도 없이 힘들이 충돌했다고 했다.
벨리타는 아프지 않을 때 책을 읽었다. 마법 서적. 마법.
벨리타는 자신의 상태를 알고 있었다. 마력을 늘려 몸을 회복시키려고 노력했다. 현재의 벨리타가 오웬에게 마법을 배울 때 처음에만 헤매고 후에는 능숙했던 이유가, 오웬이 재능이 있다고 했던 이유가 있었다.
벨리타는 마법을 배웠다. 홀로 침대 위에서 독학해 사용하면 언제나 비명을 지르며 발작했다.
자라지 못한 몸이 감당할 수 없어 끝내 거세게 충돌하고 벨리타는 앓아 쓰러진다. 살고 싶어서, 아프고 싶지 않아서 노력하면 몸은 보란 듯이 고통으로 되돌려줬다. 테일러와 라빌에게 사랑받지 못했다는 결핍 때문에 삐뚤어진 벨리타는 몸 상태를 가족에게 말해 주지 않고 혼자 감내했다.
혼자서 지낸 시간이 부모와 보낸 시간보다 많아서. 벨리타는 남에게 기대지 못한 채 자라, 나아질 방법까지 홀로 연구했다.
그리고 포기. 죽는 게 나을 정도로 아파서 포기했다. 장기가 터져나가는 고통과 폐가 쪼그라들고 심장이 찢어지는 감각. 어린 나이의 아이가 받아내지 못할 극한의 고통.
벨리타는 시체처럼 침대에 누웠다. 멀리서 조용히 지켜보던 벨리타가 홀린 듯 침대에 누운 진짜 벨리타에게 다가갔다.
가짜 벨리타의 몸은 있지도 않은데, 본래의 벨리타에게 빨려 들어가는 감촉을 느꼈다. 본래의 벨리타를 밀어낸다. 밀어내고 싶지 않음에도 억지로 어린 벨리타를 몰아내 버렸다.
‘드디어.’
본래의 벨리타가 버석하게 말라비틀어진 입을 달싹거렸다. 육신을 빼앗기고 있음에도 기뻐했다. 사지를 찢는 고통에도 죽을 수 없었던 벨리타가 드디어 맞이할 수 있는 죽음을 반가워했다. 어떠한 반항도 없이 빼앗긴다.
몸을 빼앗는 벨리타에게 눌려 짓이겨지고 터져 소멸해 간다. 벨리타는 죽어 가는 벨리타가 부러웠다.
우악스럽게 몸을 빼앗고 점령했다. 본래의 벨리타는 육신만 남겨둔 채, 사라졌다. 온데간데없이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죽었다.
*
왜 이 기억을 이제야 봤지? 딸이 전해 준 기억일까. 글 너머의 세상, 현실에 닿을 수 없으니 벨리타로선 알지 못하는 일이었다. 주어진 기억과 상황에 맞추어 살아갈 뿐.
벨리타는 지독한 기억에서 깨어났음에도 눈을 뜰 수 없었다. 그러리라 생각했지만 역시 벨리타는 모든 일의 원흉이었다. 억지로 어린아이의 몸을 빼앗고 아이를 죽였다.
스스로 기뻐하며 목숨을 끊었지만, 벨리타가 빼앗은 게 맞았다. 아직도 억지로 어린 벨리타를 찍어 누르던 감각이 여실히 남아 있었다.
시발, 진짜 못해 먹겠네. 눈을 감은 채 읊조렸다.
현실에서의 벨리타는 누군가를 죽이지도, 억지로 몸을 빼앗지도, 범죄를 저지른 적도 없다. 지키려고 했지, 악의를 갖고 해치려고 한 적은 없었다.
난 왜 이렇게 변했을까. 벨리타는 자신을 휩쓰는 죄악감과 죄책감에 마른침을 삼켰다.
희열에 차서 몸을 빼앗으려던 벨리타. 무의식 저편의 벨리타는 그런 사람이었을까. 스스로가 역겹고 혐오스럽다.
목을 치고 올라오는 토악질에 입을 틀어막고 침대 끝으로 기어가 입을 열었다. 우욱, 토사물이 쏟아진다. 바닥을 뒤덮었다.
행복해지길 바란다고? 행복해지자고?
엿이나 까 잡수라 그래. 이러고 어떻게 행복해져? 내가 어떻게 행복할 수가 있어?
어린애 몸을 빼앗고 죽인 것으로도 모자라 불쌍하게 자란 아이를 죽게 했고, 인간성이 결여된 아이를 아들로 빗대어 보다가 사람을 죽이게 했다. 결혼만 하면 해방될 아이를 부추겨 파혼까지 하게 했다.
벨리타가 행복해질 자격이 있나? 감히 행복해져도 되나? 벨리타가 이불을 힘껏 그러쥐었다.
의도하지 않은 피해였지만 벨리타가 시작점이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모조리 망쳤다. 벨리타가 다 그르쳤다.
몸을 빼앗지만 않았어도 모두가 행복해질 수도 있었을 텐데. 벨리타가 소설을 제대로 읽고 모두가 행복해지는 길을 찾아줄 수도 있었다. 아니, 벨리타가 조금만 주위에 관심을 가졌더라면. 그랬다면.
소리 내어 울음이 터진다. 한이 가득한 오열이 방을 가득 메웠다. 비참하다. 이렇게 흘러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 원망스럽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스스로가 한탄스럽다.
이대로 무너져서 다시 일어나지 못하면 어떡하지. 울고 나서 털어내야 하는데 못 털어내면 어쩌지. 꼼짝없이 이곳에서 살아야 한다는 게 무섭다.
되돌려 받는 거다. 여태까지 무지함으로 벌인 일에 대한 죄를 받는 거였다. 다 벨리타의 문제라서, 벨리타가 잘못해서. 벨리타가 헐떡거리며 설움을 토했다.
벌컥, 문이 열린다. 묵직한 발걸음이 침대를 향해 빠르게 다가왔다. 발걸음의 주인이 웅크리고 구토를 쏟아내는 벨리타의 등을 토닥이고 토사물이 엉겨 붙은 머리카락을 치운다.
“벨리타, 왜 그래. 무슨 일이야. 어디 아파?”
“어흐윽, 윽……. 으윽…….”
“숨 쉬어, 벨리타. 괜찮아, 괜찮아…….”
침대 위에 널브러진 몸을 안고 끌어 올린다. 밤에 못다 한 이야기를 나누려고 찾아온 오웬이 벨리타의 이마에 손을 얹었다. 열은 나지 않았다. 아픈 기색은 없다.
울음소리도 제대로 뱉지 못해 앓는 벨리타를 품에 가득 끌어안고 다독였다. 옷과 침대에 토사물이 묻어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엉망인 입을 닦고 하얗게 질린 손을 맞잡았다.
“다 괜찮아질 거야. 응? 벨리타……. 울지 마.”
쉬이, 조용히 위로하는 잔잔하면서도 다급한 목소리가 벨리타의 귓전을 때렸다. 벨리타가 손을 뻗는다. 오웬은 맞잡은 손을 놓고 벨리타가 하는 대로 가만두었다. 마른 손이 오웬의 뺨을 감쌌다.
“……나 어떡해, 나 어쩌면 좋아? ……나…….”
오웬이 얌전히 볼을 내어주며 벨리타의 말에 귀 기울였다. 흐느낌 속에서 벨리타의 말이 어지럽게 쏟아졌다.
“나, 벨리타를 죽였어. 내가 죽였어…….”
얼굴을 더듬는 손을 피했다. 경악에 찬 오웬이 벨리타를 내려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