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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이 쓴 로판 소설에 빙의되어버렸다-105화 (105/150)

105화.

갑작스럽게 뱉어진 폭탄 발언에 오웬은 눈을 동그랗게 떴고, 잭슨과 소르니는 알아듣지 못했다. 급박한 상황일 때에만 입을 열기로 약속받은 탓에 오웬은 입을 꾹 다물고 벨리타를 쳐다봤다. 벨리타는 하나씩 사실을 털어놓았다.

“난 벨리타가 아니야. 다른 세상에서 왔어. 몸은 벨리타 파텔인데, 속은 오십 대 후반의 아줌마. 딸도 있고 죽은 아들도 있어. 내 딸이 너희보다 나이가 많고. 미쳤다는 소문도 내가 이 몸에 들어온 후라서 그래. 돌아가기 위해 별짓을 다했는데 실패했어.”

데이비드의 기운을 받아 깔끔하고 쌈박하게 설명했다. 우수수, 쏟아지는 폭탄 발언에 너무 놀라 멍한 건지, 아예 믿지를 않은 건지 모를 태연한 얼굴을 한 둘은 섣불리 입을 열지 않았다.

벨리타는 괜히 초조해졌다. 데이비드처럼 욕이라도 한 사발 들이부었으면 미안하다 사과하고 끝낼 텐데, 잭슨과 소르니는 아무 말 없었다.

확실히 벨리타는 지쳐 있었다. 이 이야기를 끝으로 차라리 관계가 끝나 버리면 편해지리라 생각했다. 기만했고 우롱했으니 화를 내도 마땅했다.

미리 사과의 말을 고르며 다리를 떨자 소르니가 조심스럽게 손을 들었다.

“왜.”

“그거, 빙의……인 거지?”

“그렇지. 그러니까 미안…….”

“난 상관없단다?”

뭣. 벨리타가 소르니를 보았다. 미안하게 됐다고 사과하고 끝내려고 했는데 상관없다니.

말 그대로 소르니는 태연했고 평온했다. 잭슨도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쾌변하고 난 후의 상쾌한 얼굴이었다.

벨리타는 너무 어이가 없어서 심장을 뱉을 뻔했다. 오웬은 이미 짐작한 듯 오만상을 찌푸리고 둘을 바라보았다.

“왜, 왜 상관이 없어. 여태까지 너희를 속였는데.”

당황한 벨리타가 성급히 말했다. 소르니는 우아한 손짓으로 제 앞에 놓인 찻잔을 치우고 비스킷을 들었다. 와작, 입안에서 바스러진다.

“이상하다고 생각은 했단다. 어린 여자애가 세상 다 산 것처럼 구니까.”

“먹으면서 말하지 마.”

“봐, 이런 면. 아주 고지식해선. 그런데 난 지금의 벨리타만 알잖니.”

시키는 대로 다 씹어 먹은 후에 입을 연 소르니가 벨리타를 가리켰다. 턱을 괴고 검지로 벨리타를 가리킨 소르니가 여유롭게 웃었다.

손가락 끝으로 벨리타의 실루엣을 따라 그리던 소르니가 양손으로 턱을 괴었다.

“그러니 이전의 벨리타는 나와 무관하단다. 별로 알고 싶지도 않아. 난 지금의 네가 좋으니까. 아, 나 백작 된 거 알고 있니?”

분명 좋은 의미인데도 숨이 막혔다. 적어도 잭슨은 화를 내지 않을까. 서운해하거나 야속해하지 않을까 싶어 벨리타가 잭슨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눈이 마주치자 잭슨이 말갛게 웃었다. 오웬과 소르니가 오만상을 찌푸렸다.

“돌아가지 않아서 기쁘다. 잘된 일이야.”

“이 쌍놈 새끼가.”

복장 터진다. 적어도 넌 화를 내야 하는 거 아니냐고. 명백히 가지고 논 꼴인데.

게다가 벨리타는 돌아가지 못해서 무척 괴로워했다. 그리 기뻐할 일이 아니었다.

벨리타가 뒷목을 잡자 오웬이 빠르게 벨리타의 뒷목을 주물러 주었다. 마법으로 냉찜질도 해 준다.

후, 짧게 한숨을 뱉은 벨리타가 침착을 되찾고 말을 이었다.

“난 널 가지고 논 것과 다름없어. 화나지도 않아?”

“이상하다고 생각은 했지. 의혹이 완전히 풀려서 개운하다. 그래, 날 빗대어 본 게 죽은 아들이었군.”

이 새끼는 주둥이에 필터링이라는 게 존재하질 않나?

벨리타는 다시 한번 뒷목을 잡았다. 맞는 말이긴 한데 너무 당당해서 화가 났다. 얼마나 마음 졸이고 괴로워했는데 저렇게 단번에 납득하고 가볍게 말하다니. 인간성이 자라지 못한 자의 말솜씨였다.

벨리타가 후, 거듭 여러 번 짧게 호흡을 뱉어내자 오웬이 어깨를 가볍게 토닥거렸다.

친밀해 보이는 오웬의 손길을 가늘게 뜬 눈으로 노려보던 잭슨이 툭, 말을 던졌다.

“어머니, 저 새끼가 손대는 거 싫어요. 나 쓰다듬어 주시면 안 됩니까?”

푸훕, 과자를 씹던 소르니가 입안의 내용물을 모조리 뱉었다. 벨리타도 할 말을 잃고 잭슨을 놀란 토끼 눈으로 쳐다봤다. 오웬마저 벨리타를 토닥이던 손길을 멈추고 잭슨을 보았다.

잭슨의 표정은 당당하고 뻔뻔했다. 당연한 말을 했다는 듯, 벨리타의 약점을 알았으니 야무지게 써먹어 주겠다는 낯이었다. 벨리타는 혈압이 올랐다.

“……이게 아닌가. 엄마, 나랑 결혼해요. 요즘 가족끼리 결혼이 유행이래요.”

“이거 미친 새끼 아니야?”

벨리타의 반응이 탐탁지 않자 잭슨이 짧게 고민하다가 뱉은 말이었다. 이를 들은 벨리타의 입에서 자신도 모르게 쌍욕이 토해졌다. 반사적으로 나왔다. 인간성이 아무리 없어도 그렇지, 저렇게 미친 사람처럼 굴 일인가.

벨리타가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고 앓는 소리를 냈다. 오웬이 서둘러 마법으로 냉찜질을 시전했다. 예상을 뛰어넘는 반응들이었다.

야심 찬 청혼에도 벨리타의 반응이 좋지 못하자 잭슨이 사나운 눈을 최대한 동그랗게 뜨고 불쌍한 체를 했다. 소르니가 두 번째로 과자를 뱉었다. 오웬의 표정이 썩어 들어갔다.

“엄마, 안아 줘요. 안아 주면 안 돼요?”

“어지간히 하세요……. 토할 것 같아요…….”

참다못한 소르니가 올라오는 토악질을 삼키며 입을 틀어막았다. 반대로 고개를 돌린 채 귀여운 것, 사랑스러운 것들을 억지로 떠올렸다. 소르니는 오늘 악몽을 꿀 것이다.

벨리타가 잭슨을 향해 쿠션을 던졌다. 잭슨이 재빠르게 쿠션을 낚아채 품에 안는다. 언제 여린 꽃사슴인 체했냐는 듯 당당하고 고압적인 태도로 팔을 뻗었다.

“이리 와, 벨리타. 네가 바라는 게 뭔지 모르겠군.”

벨리타는 수도에 발목이 묶였고 멀어지길 바랐던 두 사람은 벨리타에게 매달렸다.

“황명이다, 이리 와.”

벨리타에게 집착하는 잭슨은 황제가 되었다. 이 몸으로 살게 된 이상 다른 나라로 가더라도 끝까지 찾아내려고 할 거다. 어디로든 달아날 수 없다. 본래의 벨리타가 돌아오지 않는 한.

벨리타가 벨리타인 이상 잭슨은 끝까지 벨리타를 탐낼 거고, 소르니도 벨리타에게 매달릴 거다. 적어도 소르니는 인간성을 조금이라도 갖췄다.

제일 문제인 잭슨. 목표를 위해서라면 과정 따위 어떠하든 무관한 황제.

벨리타는 숨이 막히던 이유가 무엇인지 깨달았다. 벨리타가 이곳에 와서 무지하게 나누어주던 호의의 결과. 최소한의 온정으로 불러일으킨 최악의 상황. 달아날 길이 없다.

보호해 주던 라빌과 테일러는 갇혔고, 마음이라도 편하게 대할 수 있었던 데이비드는 멀어졌다. 엘라조차 이미 난장판이 된 가문에 다시 돌아올지 미지수였다.

이온은 먼 곳에 있고, 로엘린과 타린에게는 이 상황을 이야기해 줄 수 없다. 세상이 좁아진다. 조슈아가 있었더라면 분위기라도 나았을 텐데. 데이비드가 있었더라면 오웬과 함께 눈치 빠르게 대처했을 텐데.

벨리타가 스스로 거둔 불행이었다. 그저 수도에 갇혀 감내해야만 한다. 본래의 벨리타가 돌아와 주길 바라며 견뎌야 했다.

진짜 못 해 먹겠다. 벨리타가 작게 읊조렸다. 오웬이 차분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벨리타를 내려다봤다.

“결혼이고 자시고 안 할 거고, 내 아들 이용해서 날 붙잡을 생각 하지도 마. 진짜 역겨우니까. 소르니, 너도 쓸데없는 짓 하기만 해.”

짓씹는 듯 말을 쏟아낸 벨리타가 벌떡 일어났다. 잭슨과 소르니도 따라 일어난다.

성큼성큼 문 쪽으로 걸어가던 벨리타가 고개를 돌려 둘을 쏘아봤다. 둘은 벨리타의 얼굴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따라오지 마. 진짜 뒈지기 싫으면. 그리고 잭슨, 너. 나랑 연 끊고 싶으면 부모님 처형하든가. 내가 다른 나라 못 갈 것 같아? 세상은 넓고 숨을 곳은 많아.”

잭슨과의 관계에서 벨리타는 갑이다. 벨리타도 이제 충분히 인지했다. 이렇게 말해도 잭슨은 벨리타를 잃고 싶지 않아 하니까 결코 라빌과 테일러를 죽이지 못할 거다.

결혼? 엿이나 까 잡수라 그래. 온갖 비속어를 중얼거리며 문을 힘차게 연 벨리타가 문을 힘껏 닫았다. 오웬은 이미 벨리타의 뒤에 바짝 붙어 졸졸 따라 나간 뒤였다.

잭슨과 소르니는 멀거니 문을 바라보다가 네 잘못이네, 네가 그랬네, 하며 말다툼을 했다.

*

마차를 타고 돌아와도 멀미 한 번 하지 않았다. 이미 터질 대로 터진 분노는 멀미마저 잊게 했다. 상대 없는 분노였다.

어린아이들이 어수룩한 건 잘못이 아니다. 상황에 화가 났다. 어찌할 도리 없이 견뎌야만 하는 지금이 원통하고 답답해서 벨리타는 수도 저택으로 돌아오는 내내 쌍욕을 읊조렸다.

“왜 그러는지 알아, 벨리타. 오늘은 기분전환 하면서 쉴까?”

“에라이, 퍽이나 되겠다.”

바닥까지 가라앉은 분위기를 환기하고자 오웬이 살갑게 말을 꺼냈지만 거절당했다. 수도 저택에 들어서는 순간까지 벨리타는 무겁게 창 너머를 바라봤다.

어찌할까, 고민하던 오웬이 탄성을 뱉었다.

“우리 전에 내기하려던 거 있잖아. 그거 할까? 그림 내기.”

“갑자기?”

헛소리라며 일갈하려던 벨리타가 입을 닫았다. 내기. 이기면 소원을 들어주는 것. 오웬에게 본래의 벨리타가 돌아올 방법을 찾도록 도움을 청할 수 있다.

애인 관계까지 발전한 오웬에게 못 할 짓이지만 벨리타는 닳고 닳아 너덜거리는 종이 쪼가리였다. 오웬이 거절하면 베르를 찾아가자. 영혼에 관한 건 신전이 더 잘 알고 있을 테니까.

은근한 미소를 지은 벨리타가 고개를 끄덕이며 내기를 승낙했다. 오웬이 말갛게 웃으며 꼭 이겨 주겠다고 손을 마주 잡아 깍지를 꼈다.

그래, 어차피 본래의 벨리타가 돌아올 때까지만 즐기기로 했으니. 벨리타도 오웬의 손을 힘주어 잡았다.

가벼운 내기였지만 둘의 의지는 수도 저택의 인원들이 모여 구경할 정도로 타올랐다. 천으로 된 캔버스에 꽃을 그리기로 했다.

벨리타는 어색하게 붓을 잡았다. 앞에 놓인 장미와 여러 꽃이 복잡하게 장식되어 있었다. 저걸 어찌 따라 그리나, 걱정이 되었지만 오웬의 실력은 남 보여 줄 게 되지 못했으니 걱정은 되지 않았다.

오웬은 이미 열중해서 붓을 휘갈기고 있었다. 벨리타도 질 수 없다. 캔버스에 유화가 치덕치덕 묻는다. 벨리타는 올해 최대의 집중력을 발휘했다.

그리고 이겼다. 당연한 수순이었다. 오웬이 그린 정체조차 알아볼 수 없는 그림이 무엇인지 저택 내의 사람들은 눈이 빠져라 고민해야 했다.

어느 하녀가 용기를 내어 이 그림이 무얼 그린 거냐고 물어서야 정체를 파악할 수 있었다.

“벨리타인데……. 꽃보다 예쁘잖아.”

사람의 형체도 띠지 않은 그림이었다. 당연히 꽃인 줄 알았던 사람들은 그나마 꽃의 형태를 띤 벨리타의 그림에 투표했고, 벨리타가 승리를 거머쥐었다.

불경하게 생긴 그림을 본 벨리타가 오만상을 찌푸리며 쌍욕을 했다. 오웬은 눈물을 찔끔 흘렸다.

거창하게 벌인 일들을 대충 정리한 둘은 벨리타의 침실로 모였다. 나란히 침대에 누워 서로를 끌어안았다.

오웬은 고운 손으로 벨리타의 머리카락을 빗었고 한쪽 팔을 베개로 내어줬다. 오웬이 낮게 속삭였다.

“그래서, 소원은 여전히 술 얻어 마시는 거야?”

“아니.”

그럼? 다정한 목소리가 귓가에 흩어졌다. 꿀이라도 듬뿍 바른 듯 녹아 버릴 상냥함과 애정. 벨리타는 어물쩍 입을 열었다.

“몸 주인을 찾아줘.”

벨리타가 눈을 감았다. 차마 얼굴을 볼 수 없었다. 반응이 예상되어서 더욱 고개를 들 수 없다.

머리를 빗어 내리던 손이 일절 멈추고 머릿밑에 놓였던 팔이 빠져나간다. 오웬의 낮게 깔린 목소리가 소름 끼치게 뒤집혔다.

“무슨 말이야.”

예상한 반응. 벨리타는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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