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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이 쓴 로판 소설에 빙의되어버렸다-104화 (104/150)
  • 104화.

    눈물을 닦아 주고 뒤통수를 움켜쥔다. 잭슨의 얼굴이 드리워졌다. 물기에 젖은 눈가를 닦고 입을 맞춰댄다.

    벨리타는 자신의 감정을 깨달았다. 테일러와 라빌의 상황으로 컵에 아슬아슬하게 물이 차올랐는데, 조슈아의 죽음으로 컵에 물이 넘쳤다.

    흘러내리는 물은 어느새 파도가 되어 벨리타를 덮쳤다. 감각이 아득하다.

    왜 이렇게 됐지.

    애교 가득하게 안겨 스킨십을 해 오던 잭슨. 하나하나 사람을 대하는 법을 배우며 자라나던 아이. 검은 머리가 손에 가득 감겼을 때, 듬직한 몸으로 아이처럼 매달려 올 때. 무심코 아들이 자랐다면, 하고 아들과 겹쳐 보았다.

    오만이었다. 잭슨과 벨리타의 죽은 아들은 같지 않았고, 서로를 잃어버린 대상에 겹쳐 보았으니 괜찮다고 오판했다.

    아들에 관한 기억이 퇴색될까 봐 두렵다. 어느새 아들과 잭슨이 동일 선상에 놓이기 시작했고 아들의 자리를 침범했다. 아들을 잃고 싶지 않다.

    잭슨은 벨리타의 아이가 아니다. 역할을 빼앗는다. 빼앗긴다. 벨리타는 극한의 공포를 체감했다. 벗어나야 해. 벨리타가 망쳤다. 잭슨도 벨리타의 기억도 모조리 벨리타가 망쳤다.

    돌아간답시고 잭슨과 결혼하려고 들지 않았다면. 잭슨을 곁에 두지 않았다면 이런 일도 없었을 텐데. 애초에 등장인물과 만나지 않았더라면. 가만히 숨죽이고 몸 주인을 되돌릴 방법을 찾았다면 이렇게 잃을 필요도 없었다.

    벨리타가 장신구를 힘주어 쥐고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잭슨의 묵직한 손이 몸을 찍어 누르지만 벨리타는 버둥대며 거부했다.

    “놔! 너랑 결혼하고 싶은 생각 없어!”

    “가지 마. 체르핀 공녀와 파혼했다. 나와 혼인만 하면 돼.”

    그래, 전부 벨리타의 잘못이다. 성급하게 굴어서, 했던 행동들이 역풍으로 돌아왔다. 인과응보. 벨리타의 머릿속에 한 단어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잭슨이 벨리타에게 매달리리라 생각하지 못했나? 아니다. 충분히 예견했다. 그러길 바라기도 했다. 그렇다면 잭슨을 충분히 납득시키고 포기하게 했나? 못했다. 설득했지만 완전하지 못했고 잭슨이 어물쩍 넘어가 준 거다.

    벨리타가 행한 죄였다. 나비효과처럼 크게 돌아오는 결과. 숨이 막혔다. 이런 걸 바란 게 아니었다.

    결핍이 심한 잭슨이 언젠가 스스로 행복을 찾길 바랐다. 아이는 언제나 부모의 뜻대로 움직여 주지 않는다는 걸 충분히 알고 있으면서도. 무의식적으로 어머니의 사랑을 갈구하는 아이에게 아이를 잃은 벨리타가 홀려서. 벨리타도 모르게.

    무지하고 무신경한 호의의 결과. 허억, 거칠게 숨이 토해졌다.

    벨리타가 몸을 떨었다. 봄의 끝이었음에도 한기가 들었다.

    잭슨이 벨리타의 허리를 두르고 혼란에 빠진 얼굴을 감싸 쥐었다. 굳은살이 박인 두꺼운 손이 여린 살갗을 쓸어낸다.

    “넌…… 내가, 너에게서 내 어미를 빗대어 보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지. 어미는 내 결핍이고 그걸 네가 이용했다는 걸 알아. 상관없다.”

    모를 리 없다. 잭슨은 눈치가 빠르고 예리하다.

    벨리타는 어지러웠다. 끝없이 닥쳐오는 불행이 버겁게 짓누른다. 오웬과 함께 달아날걸. 데이비드에게 가지 말고 그냥 뒤도 돌아보지 말고 떠났어야 했다. 아무것도 모르고 여태 그랬듯 무지하게 행복을 찾을걸.

    대답 없는 벨리타를 찬찬히 들여다보는 보랏빛 눈이 섬뜩하게 빛난다.

    “네가 나에게서 누군가를 보고 있다는 거, 안다. 오히려 환영이야.”

    알고 있었다고. 알면서도 왜.

    “네가 누군가를 빗대어 보고 있으면 있을수록…… 넌 나를 곁에 두게 될 테니까. 그 사람과 비슷하길 원한다면 연기쯤은 얼마든지 해 줄 수 있어.”

    그렇게까지 하고 싶을까. 벨리타는 잭슨에게 자신의 존재가 얼마나 거대한지 실감했다. 자신을 포기할 정도의 집착과 애정. 감당할 수 없다. 정말로 빼앗긴다. 벨리타의 아들을, 묻어두었던 아들의 존재를. 소설 속 남자 주인공에게.

    내심 괜찮으리라 생각했었다. 서로를 상실한 대상 대신 보듬어가며 나아지길 바라기도 했었다.

    멍청하고 이기적인 벨리타. 스스로가 망친 꼴이 완벽하기 그지없다.

    “넌…… 그래도 좋아? 내가 그렇게나 좋아? 왜 그래, 왜…….”

    가쁜 숨을 몰아쉬며 벨리타가 잭슨을 밀어냈다. 손아귀에 쥔 장신구가 살갗에 파고든다. 욱신거렸음에도 무감했다. 현재 상황이 더 아프고 버거워서.

    “죄책감을 느끼나? 그걸 네가 가질 필요가 있나. 인간은 욕심을 내는 동물이야. 그걸 이뤄주겠다는데, 마다할 필요가 있는지? 나도 원하고, 너도 원하는데.”

    뱀처럼 유린한다.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어떠한 말도 나오지 않는다.

    잭슨이 낮게 깔린 목소리로 조곤조곤 속삭였다. 사과를 권하는 뱀이다. 먹고 나면 돌이킬 수 없는 나락으로 떨어지겠지.

    “벨리타, 생각하지 마. 머리를 비워. 네가 원하는 사람이 앞에 있잖나. 네가 찾던 그 사람이다. 너는 편하게 생각을 그만두고, 내 옆에 있으면 된다.”

    벨리타의 아들은 그런 말을 하지 않을 거다. 아들이 아니다. 아닌데도 달콤하게 유혹하고 구슬리는 말에 현혹되어 간다. 정말 그래도 좋지 않을까.

    벼랑까지 내몰린 벨리타는 자신을 밀어버리려는 손길마저 도움이라 착각했다. 너무 피곤하고 지쳐서, 현실에 두고 온 것들을 아직 놓지 못해서 홀려간다. 생각을 해서 괴로운 거니까.

    생각을.

    이게 정말 옳은가?

    벼락이 내리치는 감각이었다. 점점 몽롱하게 정신을 빼앗기는 와중에도 뒤통수를 얼얼하게 만들었다.

    벨리타는 이 상황이 옳지 않다는 걸 확실히 깨달았다. 그까짓 결혼이 뭐라고. 벨리타가 뭐라고.

    벨리타에겐 오웬이 있다. 혼인까지는 상상할 수 없지만, 연인으로서 더없이 행복하다. 잭슨이 끼어들 자리는 없다. 잭슨은 그저 아들의 대체품이었고, 이전에 했던 잘못으로 인해 밀어내지 못할 뿐이다.

    벨리타는 냉철해져야 했고 차분해야 했다. 사람은 언제나 선택의 순간에 놓이며 최선, 최고의 결정을 내려야 한다. 선택의 결과는 온전한 본인의 책임이다.

    벨리타는 이곳에서 최선이라고 생각한 최악의 선택을 했고 책임을 회피하려고 했다. 그럴수록 감당해야 할 결말은 무겁고 고통스럽다.

    익히 알고 있다. 이미 경험했다.

    다시 되풀이할 필요가 없었다. 벨리타는 손을 뻗어 잭슨의 입을 틀어막았다. 잭슨이 벨리타의 손을 잡아 내리려는 순간, 서늘하게 가라앉은 말이 상황을 주도했다.

    “싫어. 난 네가 널 갉아먹지 않았으면 좋겠어. 이건 네 행복이 아니야.”

    단호한 거절을 들은 잭슨이 헛웃음을 지었다.

    “내 행복을 네가 재단하는가? 난 내 행복을 알아. 내 행복은 네가 곁에 있어 주는 거다.”

    “내가 떠나버리면? 사람은 언제나 한결같지 않아. 널 위해서 살아. 네 행복은 내가 전부는 아니야.”

    “네가 왜 떠나? 안 돼. 날 두고 못 가.”

    떠나버리면 어찌할 거냐는 가정 섞인 한마디에 잭슨의 낯이 무너졌다. 안절부절못하면서 어미 잃은 아이처럼 안달 내며 입가에 얹어진 손을 붙잡았다. 힘 조절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혼이 빠져 벨리타의 손목을 힘껏 쥐었다.

    아프다. 벨리타는 맹목적인 아이에게 무슨 말을 해 주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이별이 두려워서 떠나지 못하게 붙잡고 있던 잭슨이 이별 후 다시 만나는 과정을 이해하는 것도 오래 걸렸다. 이해할 수 있었던 건, 벨리타가 다시 찾아와 주었기 때문이다.

    잭슨은 벨리타 때문에 살아간다. 넓은 방 안에 어떠한 가구도 들이지 않고 벨리타 하나, 단 하나만 들여놓았다. 오로지 벨리타만. 삶의 이유가 벨리타뿐이다.

    언제 살해당할지 모를 삶에서 마음속 방 안에 소중한 걸 들일 겨를이 없었을 거다. 좋아하는 것, 싫어하는 것, 아끼는 것을 알아갈 시기를 놓친 결과였다.

    알려 주고 싶었다. 벨리타는 도움을 주었을 뿐 삶을 바쳐도 될 구원자가 아니었고 스스로 훌쩍 성장하고 돌아보았을 때, 여러 소중한 것 중 작은 한 가지가 되길 바랐다. 그 정도의 위치를 원했다.

    언제든 사라져도 대체될 정도의. 이미 늦었을까.

    벨리타는 잭슨이 없어도 살 수 있다. 나름 소중한 것들이 여럿 있다. 가끔 괴상하지만 사랑스러운 엘라, 첫 친구 이온, 주접스러운 로엘린과 그의 아들 타린. 그리고 오웬. 인물이 아니어도 벨리타를 살게 하는 취미와 목표도 있었다.

    잭슨에게는 없다. 친구도, 연인도, 가족도, 취미와 아끼는 것조차. 텅 빈 곳에 벨리타만 채워 넣는다.

    안쓰럽고 안타깝다. 잘살았으면 좋겠는데. 거래로 이루어지는 관계가 아닌 진심을 다하는 관계를 만들어가면 좋겠다.

    벨리타가 잭슨의 손을 덮어 쥐었다. 우악스럽게 잡고 있던 잭슨의 힘이 풀린다. 잭슨이 울 것 같은 얼굴로 벨리타를 내려다봤다.

    “난 너 없으면 안 된다.”

    “아가……. 행복은 남이 주는 게 아니야. 너 스스로 찾아야지.”

    아가라니. 잭슨은 어렴풋이 벨리타가 겹쳐보는 상대가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어린 벨리타가 그럴 리 없겠지만.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이상하게도.

    “널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는 건 세상에 많아. 비싸고 맛있는 음식, 돈, 하다못해 잡초 사이에 자란 들꽃까지 널 살 수 있게 해 줄 거야.”

    “…….”

    “잭슨아. 아가야. 난 널 행복하게 해 줄 사람이 아니야. 도움을 주는 사람일 뿐이지. 넌 도움을 받아 더 넓은 세상을 보고 많은 걸 사랑할 자격이 있어.”

    이런 면을 사랑한다. 잭슨은 다정하게 자신을 염려하는 벨리타를 사랑했다. 그래서 놓지 못한다. 벨리타마저 사라지면 잭슨의 삶은 잿빛이다. 벨리타는 차분히 잭슨의 손을 토닥거렸다.

    “난……. 벨리타, 너 하나면 돼. 날 사랑하지 않아도 좋다고 했잖나. 그저 옆에만 있으라고.”

    “그럴 자격이 없어, 난.”

    벨리타는 벨리타가 아니었고, 이용만 당한 잭슨을 더 농락할 수 없다. 벨리타의 말에 반박하려는 잭슨을 보니 다짐이 섰다. 모든 걸 털어놓을 각오가 생겼다. 데이비드도, 오웬도 안다.

    데이비드처럼 욕을 하고 화를 내면 마음이라도 편할 것 같았다. 관계가 멀어지면 그도 나름 괜찮을 법하다.

    벨리타가 다른 사람이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잭슨도 마음이 바뀌지 않을까. 그가 제시한 거래도 다른 방향으로 이루어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

    벨리타가 잭슨의 손을 떼어냈다.

    “소르니도 불러와. 할 말이 있어.”

    *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를 상황을 감지한 오웬이 기를 쓰고 벨리타의 뒤에 섰다. 오웬은 어디 가서 굶어 죽지는 않겠다고 생각한 벨리타가 나란히 소파에 앉은 소르니와 잭슨을 보았다.

    너무 오랜만에 봐서 얼굴 다 잊을 뻔했다는 소르니를 어르고 달래 앉혀놓은 벨리타가 다리를 꼬았다. 모두가 침묵하고 있었다.

    벨리타는 이들의 반응을 감히 예상해 보며 헛기침을 하고 입을 열었다.

    “나, 사실 다른 사람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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