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순간이동이면 된다는 오웬을 무시하고 마차를 탔다. 황제가 되었을 테니 황제 궁에 있을 텐데 벨리타는 그 궁의 지리를 알지 못했다. 여기저기 쏘다니다가 의심을 받으면 피곤하다.
오랜만에 마차를 탔더니 속이 울렁거렸다. 옆에 앉은 오웬이 연신 등을 토닥토닥 두드렸고 곧장 황궁에 도착했다. 여전하다. 얼마나 지났냐마는, 그대로였다.
잭슨은 황태자이고, 소르니가 벨리타를 싫어하던 때와 달라진 게 없어서.
거북한 속내로 벨리타는 성문을 가로막는 기사들과 가볍게 입씨름을 했다. 노타가 먼발치에서 헐레벌떡 뛰어왔다.
“헉, 허억. 여기까지 어떻게……?”
“할 말 있어서 왔어요. 잭슨 있나요?”
뛰어오느라 헝클어진 머리를 정돈한 노타가 경계 가득한 낯으로 오웬을 흘겨봤다. 오웬이 가볍게 어깨를 으쓱거렸다.
“우리 저번에 만났잖아요. 폐하랑 각별한 사이인데, 폐하가 전해주지 않으시던가요?”
“예? 그, 런 말은 처음 듣는…….”
친구 없는 잭슨이 그럴 리 없다. 노타가 경계하며 뒷걸음질을 치자, 벨리타는 오웬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오웬이 장난스럽게 웃고는 벨리타의 어깨에 팔을 두른다.
“호위예요.”
“아, 네에……. 들어오시죠. 전하께서 얼마나 놀라셨는지 몰라요.”
벨리타가 찾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잭슨도 하던 일을 내팽개치고 응접실로 뛰어갔더랬다. 알현실은 벨리타와 가까이 있을 수 없어서 싫다나.
노타가 주절거리며 불필요한 이야기를 쏟아냈다. 오웬과 벨리타는 들은 체도 하지 않고 둘만의 이야기를 소곤댔다.
“네가 언제부터 내 호위였다고?”
“어제부터.”
“뭐?”
파텔 저택으로 돌아갔을 때, 늦은 밤 중 데이비드는 오웬을 불러냈다. 그때는 너무 화가 나서 경솔하게 행동했다고 사과하며 돈을 쥐여 줬다. 돈을 거절하려는 오웬의 손을 단단히 부여잡은 데이비드가 조용히 당부했다.
‘수도로 가면 제가 도울 수 없으니, 곁에서 지켜줄 사람이 필요합니다. 호위도, 하녀들도 있지만, 당신만큼 능률적이지 않습니다. 당신이 누님의 애인이어도 신분 차이 탓에 공적인 자리는 함께할 수 없을 겁니다. 그러니 호위로 고용하면, 황궁이든 사교 파티든 곁에 있을 수 있습니다. 매달 돈을 보내드리겠습니다.’
영혼은 남이어도 혈육이라는 건가. 아니, 피도 섞이지 않았으니 완전한 남남이다. 그럼에도 이리 신경 써 주는 건 데이비드가 벨리타를 가족으로 인정한 덕이다.
벨리타에게 이야기를 듣지 못했지만 데이비드의 말을 듣고 상황을 짐작했다. 둘의 사이는 가까워지지 못했고, 데이비드는 자신의 가족을 지키기 위해 마법사를 호위로 고용했다.
아마 벨리타가 데이비드를 밀어냈을 거다. 그게 아니라면 늦은 밤에 몰래 불러내서 부탁할 필요가 없으니까. 오웬은 손해 볼 거래가 아니어서 냉큼 수락했다.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알게 될 일이니 바쁜 벨리타에게 말하지 않았다. 데이비드와의 일을 전해 들은 벨리타가 오만상을 찌푸렸다.
“몰래 그럴 필요가 있어? 그리고 넌 왜 매번 말을 안 해? 너 혼자만 알지 말고 같이 좀 알자고.”
“다음부터 그럴게. 서운해?”
“됐거든.”
서운하다기보다 꺼림칙하다. 자신도 모르는 새, 오웬이 짜놓은 판에 휘둘리고 있다는 게.
벨리타가 팔뚝을 대충 문지르고 주위를 둘러봤다. 태자궁보다 훨씬 화려하고 서늘하다. 쥐 죽은 듯 고요하다. 이런 곳에서 사람이 살 수 있나.
노타가 가벼운 걸음으로 복도를 지나 응접실의 문을 열어줬다. 응접실도 깔끔하고 화려하다.
금과 보석이 덕지덕지 장식되어 있었다. 향기도 썩 좋았다. 벨리타가 성큼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큼지막한 손이 벨리타의 팔을 잡아챘다. 잭슨이 환하게 웃으며 벨리타를 끌어당겼다.
오웬이 한 걸음 응접실 안으로 발을 내딛자 잭슨이 오웬을 기세등등하게 노려봤다.
“네가 와도 될 자리가 아니다.”
“호위라서요.”
“불허한다.”
기 싸움한다. 벨리타는 벌써부터 피곤해지는 감각이 들어 오웬에게 나가라고 손짓했다.
오웬이 잭슨과 벨리타를 번갈아 보다가 눈썹을 휘었다. 날 쫓아내는 거냐며 우는 체를 하자 노타가 오웬을 말리며 복도로 끌어냈다. 잭슨도 호위를 두고 있지 않으니 벨리타 또한 호위를 둘 필요 없다며 오웬을 달랜다. 잉잉, 우는 체하는 오웬을 가리며 문이 닫혔다.
문이 닫히자마자 잭슨이 벨리타를 끌어안았다. 달아날 수 없게 단단히 부여잡고 고개를 숙여 볼을 기댄다.
벨리타가 잭슨의 가슴팍에 손을 얹었다. 녀석, 꽤. 짧은 감상을 속으로 남긴 벨리타가 잭슨을 밀어냈다. 잭슨이 쉽게 떨어져 줬다.
“의논하러 왔어. 이러지 마.”
“아, 네 부모 말하는 건가?”
잭슨을 지나쳐 소파에 털썩 앉은 벨리타가 다리를 꼬았다. 당연하게 잭슨이 옆에 바짝 붙어 앉았다. 벨리타가 몸을 뒤로 물려도 따라온다.
팔걸이까지 도달해 더는 물러날 곳이 없어지자 잭슨이 등받이와 팔걸이에 손을 얹고 벨리타를 가둔다. 위에서 아래로, 천천히 고개를 숙인다. 벨리타의 상체도 뒤로 기울어졌다.
“왜 이래?”
“보고 싶었다. 한 달이 일 년 같았어. 시간 맞춰 잘 왔군.”
드러난 어깨에 얼굴을 묻은 잭슨이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벨리타가 잭슨의 어깨를 밀었다. 요지부동이다.
“사형시킨다면서. 내가 너한테 요구할 건 뻔하잖아. 내 부모님을 살려줘.”
“……네 향이 나.”
“뭔 헛소리야.”
대답 없이 벨리타의 머리와 어깨에 코를 대어 향을 맡았다. 벨리타는 기분이 무척 나빴고 소름이 끼쳤다. 변태와 다름없는 행동에 벨리타가 잭슨의 머리채를 잡아 뒤로 꺾었다.
잭슨이 앓는 소리를 내며 어깨에서 얼굴을 떼어냈다.
“대답이나 해.”
“네가 나에게 줄 수 있는 걸 줘.”
줄 수 있는 거. 벨리타가 설명을 요구하는 낯을 했지만, 필요 없어졌다. 당연하게도 잭슨은 벨리타와의 결혼을 요구했다. 벨리타 부모의 목숨을 두고 거래를 하는 거다. 어쩜 이렇게 극단적일 수가 있는지.
잭슨은 기분이 좋다. 오래 보지 못했던 벨리타가 자신과의 결혼을 두고 거래를 하러 온 게 썩 마음에 들었다.
잭슨은 황제가 된 직후부터 벨리타를 찾으려고 애썼다. 오웬이 너무 꼭꼭 숨겨 두는 바람에 찾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올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었다. 계획은 어그러졌지만, 상황은 자신에게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다. 만족스럽다.
벨리타가 잭슨의 품에서 빠져나오려 주춤거렸다.
“꼭 결혼해야 성에 차겠어? 결혼이라고 영원하지 않아.”
잭슨은 서늘하게 식어가는 벨리타의 얼굴을 보며 기분 좋게 미소 지었다. 가두었던 팔을 거둬 여린 허리를 끌어안아 당겼다. 속절없이 끌려갔다.
“아니, 영원할 거다. 내가 그렇게 만들 거니까.”
집착은 질색이다. 벨리타가 잭슨의 팔을 뿌리치려고 발버둥 쳤지만 어림없었다.
“사랑 없는 결혼이 행복하겠어? 이런 식으로 잡아두면 좋을 게 없다는 거 너도 알잖아.”
라빌과 테일러를 살리기 위해서라면 당연히 수락해야 하는 불공평한 거래인 걸 알지만, 벨리타는 도구가 아니다. 물건도 아니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두고 다른 사람과 결혼이라니. 벨리타는 물론이고 잭슨마저 행복해질 수 없는 결말이다.
벨리타의 말에 잭슨이 인상을 찌푸렸다.
“누구와 똑같은 말을 하는군.”
“누구?”
“로틀 남작.”
로틀 남작이면 조슈아다. 하지만 조슈아가 왜? 잭슨과 무슨 인연이 있다고. 아닐 거라고 생각하지만.
벨리타는 설마, 하는 의심을 접어두고 잭슨에게 물었다. 잭슨이 벨리타의 볼에 입술을 문지르고 무릎에 앉혀놓았다. 일어나려고 버둥대는 어깨를 잡아 누르며 잭슨이 대답했다.
“날 설득해 줬지. 죽기 전에.”
“죽어? 누가.”
“로틀 남작이.”
“왜?”
하얗게 질리다 못해 창백해졌다. 찬찬히 벨리타의 표정 변화를 눈여겨보던 잭슨이 할 말을 고르는 듯 입을 다물었다.
입을 다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벨리타는 초조해졌다. 입술을 잘근잘근 물어뜯는 잇새로 손가락이 들어온다. 꾹, 입술을 누르고 뜯지 못하게 막았다. 잭슨이 벨리타의 입술을 손가락으로 지그시 누르다 고개를 들이밀었다.
고개를 돌리지 못하게 턱을 붙잡고 입술을 맞댔다. 짓누르는 손가락이 입술을 길게 쓸었다. 씹지 말라는 잭슨의 걱정에도 벨리타의 얼굴이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헛짓거리하지 말고 대답이나 해.”
미련이 남아 벨리타의 입술에서 손을 떼지 못했다. 잭슨은 가만히 벨리타를 들여다보다 살갑게 미소 지었다.
“로틀 남작이 황제의 자금줄이자 2황자의 세력이라 죽였다. 에르테를 살아서 도망가게 했으니 죽여야지.”
몰랐다. 전혀 몰랐다. 조슈아가 잭슨을 등지고 있었다는 게 당혹스러웠다. 엄연히 적이었다. 조슈아 홀로 적. 조금만 신경 썼더라면 조슈아의 죽음이나마 막을 수 있었을 거다. 설득할 수 있었을 거다.
잭슨에게라도 조슈아를 살려달라고 부탁할 수 있었을 텐데. 신경 쓰고 싶지 않아서 죽도록 내버려 뒀다. 이제 겨우 자기 삶을 살기 시작한 아이를.
벨리타가 무심코 팔목에 찬 팔찌를 눈에 담았다. 눈물이 쏟아졌다. 그리 아끼지 않던 아이인 줄 알았는데. 처음 만났던 등장인물이고, 웃는 얼굴이 사랑스럽던 아이였다. 이렇게 허무하게 죽을 인물이 아닐 텐데도.
거친 손이 벨리타의 눈가를 문질렀다. 오웬처럼 부드럽지도 다정하지도 않았다. 투박하고 난폭한 손길로 눈물을 닦아 준다.
잭슨이 거듭 손가락을 움직이다 양 볼을 움켜쥔다. 잭슨의 낯도 일그러진 채였다.
“울지 마. 겨우 그 녀석을 위해.”
“……와중에, 그러고 싶어?”
“운다면 날 위해 울어. 벨리타, 내가 황제의 자리에 오른 것도 널 위해서다.”
그게 어떻게 날 위해서야. 울음에 막힌 목 탓에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잭슨의 말이 핑계라는 걸 안다. 황태자의 자리가 위태로웠고, 견고히 하기 위해 2황자를 몰아냈으며, 후환이 없게 황제와 황후도 죽인 거다. 잭슨은 잭슨을 위해 황위에 올랐다.
하지만 정말 벨리타가 이유였다면.
속이 메스꺼워졌다. 엄습하는 불쾌한 감각을 떨칠 수 없었다.
혹시라도 정말 벨리타의 탓이라면. 벨리타가 소설과 다르게 제멋대로 굴었다가 이야기가 틀어져 이 사달이 났다면. 죽을 필요 없었던 사람이 벨리타 탓으로 해를 입은 거라면 벨리타는 어떻게 해야 하나.
죄책감이 비처럼 쏟아졌다. 성한 곳 없이 전부 젖어 질척하다.
목이 메어 울음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소설 속 캐릭터는 죽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전부 벨리타의 탓이라면 다르다. 다른 문제였다.
잭슨이 간헐적으로 크게 호흡하는 벨리타를 어색하게 다독이며 주머니에서 장신구를 꺼내 건넸다. 조슈아의 유품. 눈물에 젖어 흐린 시야로 연말 선물로 주었던 장신구를 보았다. 심장이 내려앉았다.
“로틀 남작이 전해달라더군.”
함께 전해달라던 유언은 전해주지 않았다. 구슬프게 우는 벨리타를 보는 와중에도 질투가 일었다. 그래도 유품까지는 전해주지 않았나. 그거면 됐다.
잭슨의 속내를 모르는 벨리타가 더듬거리며 장신구를 손에 쥐었다. 선물이 돌아왔다. 행복해지길 바라며 주었던 선물이. 핏물을 가득 묻혀 손안으로 돌아왔다. 억장이 무너졌다.
잭슨이 원망스럽다. 미웠다. 그런데도 은연중 아들이 겹쳐 보여서, 괜찮다고 해 버릴 것 같아 스스로가 무서워졌다. 거리를 둬야 했다.
언제부터 잭슨에게 너그러워졌지. 아니, 분명 한 달 전만 해도 괜찮았는데. 어쩌다가 이렇게 어긋났을까.
모든 게 벨리타의 잘못이었나. 벨리타가 가까워지는 잭슨의 손을 밀어내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