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테일러와 라빌이 끌려갔다. 잭슨은 워낙 극단적인 아이였고 어떠한 행동을 할지 모른다.
편지를 무시했으면 연민도 갖지 않고 훌쩍 떠날 수 있었을 거다. 아무도 모르는 곳에 오웬과 단둘이 단란하고 평화로운 삶을 영위했겠지. 하지만 도와달라는 어린아이를 내치고 떠날 정도로 벨리타는 매정하지 못했다. 매정하지 못해서.
“벨리타. 난 빠져 줄 테니까, 데이비드와 얘기해.”
오웬의 배려를 거절하지 못하고 고개나 끄덕였다. 조금만 더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이었으면 가능했을까. 피곤한 일에 엮지 말라고, 남남 아니냐고, 매달리는 아이를 뿌리치고 돌아설 수 있었을까. 함께 있으면 스스로를 갉아먹게 되는 걸 알면서도.
벨리타는 옷깃을 잡고 늘어지는 데이비드를 쳐내지 못하고 바라봤다. 아, 지친다.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피로했다.
벨리타가 엉망으로 울고 있는 데이비드의 손을 잡아 밀어냈다. 데이비드의 상황을 이해하지만 불쾌한 감정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벨리타는 성군이 아니었다.
“따라와. 무슨 상황인지 제대로 설명해.”
까칠한 말과 함께 벨리타가 등을 돌려 응접실로 향했다. 데이비드가 훌쩍거리며 뒤를 따라간다.
벨리타의 집이 아닌데도 몇 개월 지냈다고 구조가 익숙하다. 훌쩍 떠났던 겨울의 그때와 달라진 게 없다. 화려한 무늬의 커튼도, 튼튼한 나무 바닥도 모두 그때와 같았다. 겨울이 되기 전까지만 해도 돌아갈 수 있으리라 맹신하고 있었다. 터무니없게도 긍정적이었다.
멍청한 벨리타. 돌아갈 방법을 찾을 게 아니라 몸 주인을 되돌릴 방법을 찾았어야 했다.
벨리타가 응접실 소파에 앉자 곧장 차가 준비됐다. 공손히 찻잔을 내려놓는 하녀에게 찬물이나 가져와 달라고 하자 하녀는 고개를 숙이고 떠났다. 데이비드가 마주 앉는다.
비에 젖은 강아지 꼴이다. 아니, 생긴 게 고양이 같으니 고양이일까. 소매로 눈물을 투박하게 닦던 데이비드가 이내 소리 내어 울음을 터트렸다. 안도감이 들어 터진 울음이었다.
벨리타는 데이비드를 달랠 의지도 없이 다리를 꼬았다. 기다리다 못한 벨리타가 사건에 대해 채근하자 데이비드는 갈라진 목소리로 한 음절씩 겨우 말을 꺼냈다.
“황궁에서 황위 다툼이 있었…… 있었습니다. 황제, 황후를 죽이고…… 2황자의 세력까지 처형했습, 니다. 그 과정에서, 부모님이…….”
언제나 그랬듯 데이비드의 설명은 깔끔했다. 잭슨이 황제가 된 이유도 납득이 됐다.
오웬은 다 알고 있었다. 입 다물고 있었을 뿐. 데이비드까지 억지로 여행에 끌고 와 목숨을 부지하게 해 준 능구렁이 같은 자식.
어디까지 알고 예측하고 있었던 건지 모르겠다. 현실감 없는 상황에 화가 났고 어이가 없었으며 슬프기도 했다. 오웬에게 화는 나지 않았다. 그저 야속했다. 알고 있었다면 말이라도 해 주지.
말한다고 들을 상태가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래도 언질이라도 줬어야지. 물론 들었다면 죽든가, 하며 망명이나 하려고 했을 테지만.
벨리타가 신경질적으로 이마를 짚어 문질렀다.
“편지. 잭슨이 보낸 거 보여 줘.”
데이비드의 등장이 늦은 건 아마 편지를 챙기느라 그랬을 거다. 편지를 달라고 하자마자 곧장 주머니에서 구겨진 편지를 건네주었으니까.
벨리타가 편지를 읽었다. 잭슨의 필체로 적힌 글이었다.
[파텔 후작과 후작 부인은 감금된 상태다.
반역을 꾀했으니 사형을 시켜 마땅하나, 처우를 의논하고 싶군.
벨리타와의 의논을 원한다.]
그래서 데이비드가 도와달라고 매달렸던 거다.
부모를 살리고 싶다면 어디 달아날 생각 말고 수도로 돌아오라는 의미였다. 살려달라고 부탁하는 대신, 잭슨은 무엇을 요구할까. 아마 결혼이겠지. 잭슨이 내내 벨리타에게 원하던 것이니까.
풀어달라고, 죄를 아예 묻지 말아 달라고 해도 될까. 아마 불가능하겠지.
데이비드와 라빌이 언제까지 자리를 비우게 될지 모른다. 평생을 갇혀 벌을 받게 될 수도 있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벨리타는 성년이 되었고, 데이비드는 미성년이다. 가주의 자리를 물려받을 사람은 데이비드지만 벨리타가 빼앗을 수도 있다. 다른 귀족들도 벨리타가 가주가 되길 바랄 거다.
병을 앓다가 미쳐 버린 여자애가 가주가 되면 쉽게 찍어 누를 수 있을 테니까. 지금은 잭슨과 소르니, 조슈아의 애정을 받더라도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른다. 그들이 등을 돌리면 무력한 벨리타만 남게 된다.
모두가 벨리타를 가주에 앉히려 들겠지만 벨리타는 귀찮은 일은 하고 싶지 않았다. 데이비드에게 떠맡기자니, 데이비드는 아카데미도 수료해야 하고 가주의 자리까지 맡아야 한다.
벨리타가 할 수 있는 일은.
“아카데미를 졸업하면서도 가주는 할 수 있어?”
“……완전히 불가능한 건 아닙니다만…….”
하녀가 슬그머니 찬물을 놓고 떠났다. 벨리타는 냉큼 찬물을 들이켰다. 차가운 물이라도 마시니 기분이라도 가라앉는 착각이 들었다.
여전히 울고 있는 데이비드를 쏘아본 벨리타가 마저 찬물을 들이켜고 빈 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그럼 너 가주 해. 상단은 내가 맡을 테니까.”
“……예?”
“도와달라며. 설마 우리 사이에 위로를 바라거나 한 건 아니겠지?”
네가 끊은 인연이다, 라고 못을 박았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 한들 이미 망가진 관계였다. 벨리타가 엎드려 사과할 이유도 없다. 끊어낸 건 그쪽이고 끊어진 건 벨리타. 정이 들어 아쉽지만, 이 정도의 사이.
식기 시작한 찻물을 마시며 데이비드를 덤덤히 바라보았다. 멍한 얼굴의 데이비드가 코를 훌쩍거렸다.
“……하, 하하…….”
울다가 멍했다가 이내 웃고 만다. 허탈하게 헛웃음을 짓던 데이비드가 주먹을 꽉 쥐고 고개를 숙였다.
“……이런 사람이었지.”
나름 혼자 중얼거린다고 한 말이었겠지만 벨리타도 다 들었다. 초면부터 매정하게 굴었던 벨리타였으니 그리 상처가 되지는 않았다.
반쯤 비워진 찻잔을 내려놓았다. 데이비드가 입을 우물거리며 할 말을 고르는 듯 보였지만 벨리타의 말이 먼저였다.
“상단에 관한 서류는 나에게 넘겨. 넌 가주 일만 해. 수도에서 처리할 테니 거래처들에는 네가 연락 돌려 놓고.”
처박혀 있던 데이비드의 머리가 불쑥 솟았다. 놀란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벨리타가 무감한 낯으로 데이비드를 응시하자 몇 번이고 입을 달싹거리더니 겨우 말을 뱉었다.
“수도로 가십……니까?”
“그럼? 다시 보지 말자며. 잭슨이랑 거래도 해야 하니까. 게다가 너랑 나랑 한집에서 부대끼고 살 필요가 있어?”
“……수도까지 서류를 보내드리면 시간이 많이 지체될 텐데요…….”
“그러니까 연락 돌려놓으라고 하잖아. 이미 있는 서류는 챙겨서 갈 거고. 상단은 완전히 수도로 옮길 거야.”
상단이 수도에 가게를 놓고 있지만 파텔 영지에서 주로 거래가 이루어졌다. 관심은 없었지만, 종종 테일러가 보던 서류는 눈에 들어왔다. 슈퍼마켓과 그리 큰 차이도 없다. 여기저기서 수입하고 판매하는 것.
벨리타도 엄연히 사장 자리에 있었으니 그리 어렵진 않을 거다. 그리고 조슈아도 있어서 도움을 받으면 괜찮을 것 같았다.
마저 찻잔을 비워낸 벨리타가 용건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수도에 가서 잭슨에게 따지기는 해야겠고, 조슈아도 수도에 있으니 배움을 부탁해야 했다. 내일 아침에 곧장 떠나면 되겠다.
벨리타가 나름대로 계획을 세우며 발을 내딛자 데이비드가 황급히 소리쳤다.
“죄송합니다!”
우렁찬 목소리에 벨리타가 뒤를 돌았다. 눈물이 그렁그렁해서 주먹만 꾹 쥐고 있는 데이비드가 소파에서 일어나 벨리타에게 다가왔다.
“뭘?”
“심하게 말해서, 죄송합니다.”
“아니, 심한 거 아냐. 너도 네 입장이 있으니까.”
마음속에서 앓던 누나를 잃은 데이비드의 입장. 홀연히 남의 몸에 깃들어 버린 벨리타의 입장은 다르다. 그러니 잘잘못을 따지는 건 바보 같은 짓이다. 누구 하나 잘못한 게 없으니까.
극한의 상황이 거듭 닥쳐오면 감정이 모조리 깎여 나가 홀연해진다. 무감각해지게 된다. 텅 비어서 내어줄 수 없다. 마지막 분노는 라빌을 위해 갈려 나갔다.
데이비드의 사과를 받아주면 관계는 회복되고 데이비드는 의지해 올 거다. 피곤하다. 이미 스스로를 건사할 수 없는 처지인데 짐을 늘려 봤자다.
더 신경 쓸 일을 늘리고 싶지 않은 벨리타가 데이비드에게서 등을 돌렸다. 데이비드가 급히 벨리타의 치맛자락을 쥐었다. 벨리타는 당겨진 치마 탓에 인상을 찌푸리고 고개를 틀었다.
“왜? 사과할 거면 하지 마. 필요 없으니까.”
“그냥…… 받아주시면 안 됩니까?”
이전이었다면 받아주었겠지만. 벨리타는 자신도 모르게 입술 끝을 비틀어 올렸다. 환멸이 났다. 스스로가 지쳤다고 옹졸해진 심보가, 그리도 화를 냈으면서 필요에 의해 매달리는 데이비드가 짜증 났다. 데이비드가 붙잡지만 않았어도 안락하게…….
선택은 벨리타가 했고 원치 않았다면 오지 않을 수 있었다. 완전한 남 탓이었다.
제 잘못임에도 남을 탓하게 되는 역겨운 심보가 경멸스럽다.
벨리타가 데이비드의 손을 밀어냈다. 데이비드의 손이 허공을 쥐었다가 바닥으로 떨어진다.
위로해 줄 기력도 남지 않아서 벨리타는 가만히 데이비드를 보다가 마저 걸음을 내디뎠다. 뒤에서 울음소리가 들렸다. 문손잡이를 잡고 밀어내다 벨리타가 나지막하게 읊조렸다.
“나중에. 지금은 아니야. 나도 힘들어.”
시간이 지나면 데이비드에게 벨리타는 필요 없어질 거다. 후에도 벨리타가 필요하다고 한다면 벨리타가 남의 불행을 감당할 정도로 자신을 회복하게 되었을 때, 데이비드의 불행을 덜어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벨리타는 알겠다며 대답하는 데이비드를 뒤로하고 응접실을 떠났다.
*
온 김에 저택에 여러 마법을 걸어놓은 오웬이 짐을 들었다. 마차를 타고 가도 괜찮다는 벨리타의 만류에도 오웬은 싹싹하게 웃으며 고개를 젓고 벨리타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데이비드는 마중 나오지 않았다. 섭섭하지도 않다. 선을 그은 건 벨리타였고, 선을 넘지 못한 데이비드는 그어진 선 주위만 맴도는 게 고작이다. 주문을 읊기 전, 오웬이 장난스럽게 귓가에 속삭였다.
“나 이렇게 큰 저택 처음 봤어. 다음에 또 데려와 줘.”
“이 속물.”
“그래도 나 사랑하잖아.”
그건 맞지. 벨리타가 고개를 끄덕거리자 귀 언저리에 낮게 부스러지는 웃음이 흘렀다. 조곤조곤 낮고 간지러운 목소리로 영창한다. 이 목소리에 코 꿰여선.
마중 나와 준 사용인들이 손을 흔들어 줬다. 벨리타는 옅은 미소로 화답하며 빛과 함께 사라졌다. 뒤늦게 데이비드가 계단을 내려왔지만 그들은 이미 떠난 후였다.
*
수도 저택이다. 지긋지긋한 곳. 내심 다시 오고 싶지 않은 곳이다.
익숙하게 엘라를 찾던 벨리타가 입을 다물었다. 수도 저택의 인원을 최소로 줄여 놓고 모두 내보냈었다. 정신이 없다.
하녀들이 짐을 옮기고 상단의 서류들을 들어 집무실에 앉았다. 잭슨을 만나기 전에 정리를 조금 해두려던 차였다. 오웬이 기웃거리며 서류를 탐냈다.
“뭐, 왜. 안 보여 줄 거야.”
“우리 사이에 너무하네.”
결혼하면 보여 주려나. 작게 중얼거리는 말은 대놓고 벨리타 들으라는 뜻이다. 결혼하자고? 이 상황에?
벨리타가 눈을 가늘게 뜨고 오웬을 흘겨보자 능청스럽게 어깨만 으쓱거렸다. 벨리타가 고개를 저은 후 서류를 찬찬히 읽었다. 쉬우리라 생각했는데 만만하지 않다. 단어들은 어렵고 장황하게 적힌 글들은 속내를 감춘 구렁이였다.
음. 나중에 하자. 벨리타가 서류를 소리 나게 내려놨다. 딴청을 피우던 오웬이 화들짝 놀라 돌아본다.
“잭슨이랑 얘기부터 해야지.”
“와~ 나 구경할래.”
오웬이 해맑게 웃으며 벌떡 일어났다. 서류보다 더 급한 일을 처리하자고 생각한 벨리타가 문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하녀를 불러 세워 소리쳤다.
“마차 준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