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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이 쓴 로판 소설에 빙의되어버렸다-101화 (101/150)
  • 101화.

    편한 삶을 살아왔다고 할 수 없는 짧은 인생이었지만 완전히 무너졌다. 아카데미도 졸업하지 못한 애송이일 뿐인 데이비드는 가장이 되어야 한다.

    가주의 부재로 쌓이는 서류들, 테일러의 부재를 알자마자 등 돌리는 사업가들, 삭막한 집안.

    데이비드는 버거웠다. 현재 상황도 어느 곳에 기댈 수도 없는 처지도 힘겨웠다.

    그간 살갑게 지내왔던 친구들도 가족을 잃거나 죽었다. 모두가 데이비드와 같은 처지였으며 더 깊은 구렁텅이에 빠졌다.

    데이비드의 나이는 고작 열여덟으로, 사업가와 영주의 노릇을 해내기에는 빠듯했다. 어른이 필요하다. 짐을 덜어 줄 어른이.

    방구석 바닥에 웅크리고 앉은 데이비드는 의지할 사람을 머릿속에서 간추렸다.

    벨리타뿐이다. 데이비드를 기만하고 농락한 가짜 벨리타밖에 없었다.

    기댈 곳 없는 처지에 화가 났고, 그리 악담을 퍼부어 치가 떨리게 혐오스러움에도 벨리타를 찾게 되는 스스로가 한심했다.

    이제 좀 행복해지나 했더니, 인생이 순탄하게 흐른다 했더니 바다 위를 표류하는 기분이었다. 잠잠하여 좀 살겠구나 싶으면 곧장 파도가 몰아쳐 허접한 뗏목이 뒤집어지고 버둥거리게 된다. 살기 위해 뗏목 끝자락이라도 쥐고 발버둥 치다가도 돌연 모두 놓아버리고 바다 깊이 잠식되고 싶어지는 기분.

    데이비드는 벨리타를 용서하지 못했다. 도저히 할 수 없었다. 타인의 험난한 역경보다 자신의 상처가 더 우선시되는 어린 나이였으니.

    결국은 덮쳐오는 자신의 역경이 버거워 타인의 발목을 붙들고 함께 심해 속으로 가라앉게 되는 것이다. 눈앞에 닥친 고난에 눈이 멀어서, 좁아진 시야가 전부라 착각하고 물귀신처럼 늘어진다.

    옳지 않다고 정의할 수는 없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다.

    혼자는 죽어도 싫었다. 가문이 위태로워지면 달아나라고 했던 라빌의 말이 지금에서야 이해가 갔다. 가문이 무너지는 것보다 아들의 고생이 더 싫었던 라빌의 권유였던 거다.

    닥쳐 보니 알겠다. 데이비드는 위태로웠고, 기댈 수 있으면 누구라도 좋았다. 누구라도.

    *

    마법 연습은 물 건너갔다. 힘에 부쳐 잠시 자고 일어났더니 저녁이었다.

    오웬이 이불을 목 끝까지 덮어 주어 땀을 흘리며 자던 벨리타가 넓게 트인 창을 멍하니 쳐다봤다. 오웬은 이미 침대를 떠나고 없었다.

    이불을 대충 두른 벨리타는 노을이 지기 시작하는 바닷가를 하염없이 눈에 담았다. 멍해 보이면서도 골똘히 생각하는 듯 보이기도 했다.

    “언제 일어났어?”

    간식거리를 들고 온 오웬이 문에 기대어 질문했다. 작은 테이블에 차와 디저트를 내려놓고 곧장 벨리타에게 다가와 끌어안는다. 뒤에서 튀어나온 오웬의 얼굴이 벨리타의 볼을 문댔다.

    벨리타의 고개가 오웬을 향해 돌아갔다. 쪽, 입을 맞추고 의자에 걸쳐진 벨리타의 얇은 외투를 마법으로 가져온 오웬이 살갑게 조잘거렸다.

    “너무 곤히 자고 있어서 못 깨웠어. 서운한 건 아니지? 곧 식사 시간이긴 하지만 간식도 좀 가져왔는데.”

    서툰 손길로 펑퍼짐한 외투를 입힌다. 벨리타는 멍하니 오웬의 손길에 따라 옷을 갖춰 입었다.

    “정말 서운한 거야? 미안해, 다음부터는 일어날 때까지 옆에 있을게.”

    “가야겠어.”

    응? 외투의 허리끈을 묶어 주던 오웬이 얼굴을 들었다. 마주 보는 벨리타의 얼굴 위로 흘러내린 머리카락 탓에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굳게 닫힌 입매가 표정을 겨우 유추하게 했다.

    오웬은 긴 머리카락을 넘겨주었다. 드러난 낯이 복잡하다. 가야겠다고 하면서도 결심이 서지 않는 듯 보였다. 가지 말라고 설득하면 정말 가지 않을 것처럼.

    마저 허리끈의 매듭을 묶은 오웬은 고개를 꺾어 벨리타의 입에 입술을 맞댔다.

    “그래.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

    말릴 생각 없다. 벨리타가 선택하면 결정에 따라 함께할 뿐이다. 평탄한 길과 험난한 길 중, 험난한 길을 골라도 길목을 깎아 평탄하게 만들어 줄 능력이 있었고, 어떤 길이라도 손을 잡고 함께 걸어가는 사랑을 하고 싶었다.

    무조건적인 신뢰와 이해를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연애. 낭떠러지더라도 둘이서 걷는다면 좋을 터였다.

    오웬은 헝클어진 벨리타의 머리를 손으로 빗어 정돈해 준 후, 산뜻하게 웃었다.

    “간식은 먹고 가자. 짐 챙겨 달라고 말해 두고 올게.”

    “……고마워.”

    “사랑한다고도 해 줘.”

    “아까 실컷 해 줬잖아.”

    침대에서 일어난 오웬이 앙탈을 부렸다. 으응, 그래도 해 줘.

    징그럽게 큰 남자가 장난 가득히 채근하자 벨리타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래, 그래, 사랑한다. 아주. 빨리 다녀오기나 해.”

    “응, 나도 사랑해.”

    말갛게 웃는 얼굴이 스물다섯의 청년이었다. 싱그럽고 찬란한 스물다섯.

    벨리타는 문득 스스로가 초라하게 느껴졌다. 창창한 청년의 앞길을 막은 게 아닐까, 몸 주인이 돌아오면 떠나야 할 텐데 오웬에게도 상처가 되지 않을까 두려워졌다.

    겉모습은 벨리타가 어릴지언정, 속내는 오십 후반의 중년. 벨리타의 욕심으로 잡아두어도 될까.

    온갖 부정이 말단에서부터 기어 올라와도 애정 가득히 담긴 단정한 눈이 괜찮다고 말해 주는 것 같아서. 벨리타는 생각 없이 바보처럼 오웬의 곁에 머무르고 싶은 욕구가 치솟았다.

    잠시만 기다리라는 말과 함께 오웬이 떠난 뒤 뻐근한 허리를 주먹으로 두드리며 일어선 벨리타가 식어 가는 찻주전자를 들었다. 마법으로 해치워도 될 텐데 부득불 손수 차를 내리던 오웬.

    시계까지 확인해가며 차를 우릴 때마다 심혈을 기울이곤 했다. 귀엽기도 하지.

    벨리타가 찻잔에 붉은 차를 따랐다. 향기가 짙다. 밀가루를 대충 치대어 만든 시장의 빵과 어울릴 차. 차를 고르는 데에도 정성을 들였겠지.

    벨리타에게 닿는 하나하나 전부 정성을 들인다. 그런 사람을 두고 멀리한다면 바보다. 벨리타는 살아온 세월로 짐작하건대, 자신에게 정성을 들여 주는 사람을 만나는 건 기적임을 알고 있었다.

    그러니 부정적인 생각이 들어도 놓지 못한다. 놓을 수 없다.

    버석한 빵을 씹었다. 퍽퍽하고 단맛도 없는 건조한 빵에 차를 곁들이니 썩 괜찮았다. 지는 노을을 등에 지고 느긋이 음미하는 이 순간을 잊지 못하리라. 다시 없을지도 모르는 이 소소한 행복에 눈가가 시큰했다.

    *

    몇 달 만에 오는 영지다. 넓고 거대한 저택은 벨리타의 귀환을 환영했다. 우르르 몰려나와 벨리타의 짐을 들어주고 안부를 물었다. 오웬과 며칠 평화롭게 지냈다고 그새 시끌벅적한 분위기가 어색하다.

    벨리타가 멀뚱히 서 있는 오웬의 팔을 잡아끌며 저택 안으로 들어섰다. 소란스러운 저택 내부를 본 벨리타가 인상을 찌푸린다.

    벨리타가 미쳤다는 핑계로 저택을 활보했을 때에도 정돈되고 차분한 분위기의 저택이었다. 데이비드의 편지에는 절절하게 벨리타를 찾는 내용만 있었으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짐작할 수 없었다.

    애절한 편지를 받아 직접 친히 행차해 주셨음에도 얼굴도 비치지 않는 데이비드가 괘씸해 쩌렁쩌렁하게 소리쳤다.

    “데이비드 이 새끼야, 안 나와?!”

    “아이고, 벨리타. 한 번만 봐주자. 참아 주자.”

    갑작스러운 벨리타의 분노에 놀란 오웬이 팔뚝을 붙들고 말리기 시작했다. 거대한 저택을 울리는 목소리가 우렁찼다.

    기껏 와 줬더니 코빼기도 안 보이는 건 어느 나라 똥 매너냐, 빨리 튀어나와라.

    이 정도 소리쳤으면 라빌이나 테일러가 내려올 법도 한데 얼굴도 내밀지 않았다.

    소란스러운 저택도, 머리카락도 보이지 않는 부모도 이상하다.

    꽤 오래 영지를 떠났어도 저택의 분위기와 라빌과 테일러의 애정을 기억한다.

    조슈아가 연 파티에 다녀왔을 때도 마중을 나와 있던 둘이다. 이리도 소리를 질러대는데 보이지 않을 리 없다.

    벨리타가 집사장을 노려보며 낮게 소리쳤다.

    “데이비드 데리고 와. 당장.”

    집사장이 부리나케 자리를 떠났다. 벨리타가 외투를 받아 주던 하녀에게 라빌과 테일러는 어디에 있느냐며 질문하자, 황궁 기사들이 갑자기 들이닥쳐 끌고 갔다고 답해 줬다.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이지. 황궁에서 라빌과 테일러를 데려갈 이유가 어디 있느냔 말이다.

    데이비드가 구구절절하게 눈물의 편지를 보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입술을 짓씹은 벨리타가 쩌렁쩌렁 소리쳤다.

    “데이비드, 빨리 안 와?! 당장 내려와!”

    쿠당탕, 급박한 발소리 끝에 데이비드가 구르듯이 계단을 내려왔다. 초췌한 몰골로 의지할 사람을 찾아 안도한다.

    데이비드가 난간을 잡고 뛰어 내려왔다.

    “너 뭐 하는 새끼야, 가족이 끌려갔는데 뭐 하고 있었어!”

    “……누님.”

    훌쩍 벨리타의 앞에 다가온 데이비드가 일그러진 미소를 지으며 눈물을 흘렸다. 벨리타의 옷소매를 잡고 늘어진다.

    “도와주십시오. 도와주세요. 누님…….”

    화는 끓는데 울면서 매달리는 꼴을 보니 욕을 할 수도 없었다. 말문이 막혔다. 묻고 싶은 말은 넘치는데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불안하다. 데이비드가 이렇게까지 힘겨워한 적이 있던가?

    혹시나 하는 불안감이 들어서 벨리타의 몸이 잘게 떨렸다. 오웬도 데이비드의 상태를 눈치채고 다가왔다.

    “후작님께서 무슨 죄라도 저지른 거야? 사형이라도 당하셨대?”

    “오웬, 주둥이.”

    “넵.”

    참 좋은 녀석인데 가끔가다 꼭 사람 화나게 만든다. 그 좋은 눈치로 사람 심기를 벅벅 긁어대는 오웬을 사납게 노려보았다.

    아니라는 걸 알지만, 막상 오웬의 말을 들으니 무서워진다. 벨리타가 초조하게 입술을 씹었다.

    오웬이 다리에 힘이 풀린 데이비드를 부축하자, 데이비드가 비틀거리며 벨리타의 소매를 움켜쥐었다. 동아줄이라도 잡는 것처럼 필사적인 모습에 벨리타는 데이비드의 손을 밀어낼 수 없었다.

    오웬의 팔에 몸을 기댄 데이비드가 횡설수설하며 말했다.

    “황궁에서, 편지가. 편지가 왔습니다.”

    황궁에서라면 잭슨일까. 혹은 라빌과 테일러를 잡아간 이유가 적혀 있을지도 모른다.

    벨리타가 데이비드의 어깨를 붙잡고 흔들었다. 데이비드의 머리가 이리저리 흔들렸다.

    “뭐라고 왔는데. 누구한테 왔어?”

    설마 정말로. 오웬의 말대로 큰일을 당한 거라면. 벨리타의 안색이 하얗게 질려갔다.

    다급하고 초조한 벨리타가 대답을 독촉하자, 데이비드가 주춤거리며 벨리타의 팔목을 잡고 저지했다. 머리가 너무 흔들려서 속이 울렁거렸다.

    “잭, 잭슨 황제 폐하한테서….”

    “황제? 폐하?”

    떠나 있는 동안 대체 무슨 일들이 벌어진 거지.

    황태자였던 잭슨이 갑자기 황제가 되었다고? 벨리타가 데이비드를 멍하게 보았다가 오웬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오웬이 시선을 피한다.

    “너도 알고 있었어?”

    오웬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벨리타가 데이비드를 놓고 뒤로 물러서서 미간을 짚었다. 정신이 하나도 없다. 너무 갑작스러운 정보들이라서 벌어진 사건에 끼워 맞추기 바쁘다.

    이온이 왔던 날, 의문의 편지가 도착한 것도.

    편지를 읽은 오웬이 당장 짐을 싸서 떠나자고 한 것도.

    식사 중에 오웬이 멀리 망명하자고 했던 이유도.

    라빌과 테일러가 황궁에 끌려간 사유까지 모두 아귀가 들어맞는다.

    벨리타만 몰랐다. 닥친 불행에 힘겨워서 돌아볼 여유도 없었거니와 어차피 떠날 곳에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지 궁금해하지 않았던 탓이었다.

    이제 이곳에 머물게 되었고, 가짜지만 부모인 사람들이 연루되었다.

    그래도 부모인데. 가짜였던 자신이어도 아껴 주었던 사람들이라서 벨리타는 가만히 있을 수 없어졌다.

    벨리타가 우는 데이비드의 눈가를 손등으로 투박하게 문질러 주곤 말했다.

    “잭슨이 끌고 간 거야?”

    데이비드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벨리타는 잭슨에게 묘한 분노가 치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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