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화.
에르테 본인은 이미 조슈아의 도움으로 달아났고, 에르테의 세력은 몰살했다. 후환을 남겨두지 않으려고 모조리 죽였다. 황궁에 남아 있는 황제의 측근, 에르테의 편은 모조리 목을 베어 황궁 앞에 늘어놓았다.
황좌에 앉은 잭슨이 알현실 앞에 무릎 꿇은 이들을 내려다보았다. 파텔 후작과 파텔 후작 부인. 긴장한 기색도 없이 죽음을 예감한 태도였다.
죽일 수밖에 없다. 반역을 꾀할 세력은 남겨두어서는 안 될 일이다. 잭슨이 턱을 괴고 오만하게 고개를 까딱였다.
“그러게 딸을 믿고 숨죽여 살았으면 좋았을 것을. 나는 이미 기회를 줬다.”
“…….”
조슈아를 통해 전했던 말은 확실히 기회였다. 잭슨은 스스로가 승리를 거머쥘 거라는 걸 너무도 잘 알고 있었고, 사랑하는 사람의 가족을 살해하고 싶지 않아 눈감아주겠다는 호의를 표시까지 했다. 듣지 않은 건 파텔 후작이었다.
테일러는 어떠한 대답도 하지 않고 눈을 내리깔았다. 잭슨이 손가락으로 턱을 두드렸다.
“후회하지 않나?”
“……하지 않습니다.”
후회하지 않는다고. 나는 아비의 눈에 한참 모자란 사윗감이었나 보군. 잭슨이 헛웃음을 지으며 다리를 꼬았다.
“후작, 너는 당연히 죽어야 마땅하다.”
테일러가 고개를 숙였다. 예감하고 있는 일이다. 사람의 목숨을 파리처럼 여기는 잔인한 황제가 살려 주리라는 기대조차 하지 않았다.
입을 다물고 괴고 있던 손을 뗀 잭슨이 뒷말을 이었다.
“다만 벨리타를 봐서… 유폐로 할까.”
테일러의 눈에 빛이 어렸다. 몰살을 예감했으나 일종의 희망을 엿보았다.
황궁 깊은 안쪽에 있는 감옥. 그곳은 높은 첨탑으로 된 건물이었고, 황족이나 귀족들의 죄를 벌할 때 사용하는 감옥이다. 열악하지만 대우는 나쁘지 않은 높은 신분을 가진 자를 위한 공간.
죽지만 않으면, 살아 있기만 하면 된다. 자식들을 두고 가기에는 너무 이른 시기인 걸 알았으니까.
테일러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를 본 잭슨이 무감한 낯으로 손가락을 휘적거렸다. 기사가 테일러를 끌고 알현실을 떠난다.
멀어지는 테일러에게 관심도 주지 않은 잭슨이 고개를 기울였다. 홀로 남은 라빌을 시야에 담았다. 덤덤하고 초연한 라빌이 고개를 숙였다.
“온전히 돌아갈 생각은 마라, 파텔 후작 부인. 황제가 될 그릇도 분간하지 못하는 눈과 네 남편의 그릇된 선택을 말리지 못한 혀와 손을 탓해라.”
“차라리 죽이십시오.”
온건하면서도 우직한 라빌의 시선에 잭슨이 입술을 비틀어 올렸다. 명백히 비웃음이 담겼다.
“난 내 부인이 될 사람의 어미를 죽일 만큼 매몰차지 않아.”
죽일 생각이었지만 살려 주니 된 거 아닌가. 잭슨은 뻔뻔하게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다.
단단하고 고지식한 파텔 후작 부인. 익히 들었지만, 생각보다 더 꺾이지 않는 사람이다.
벨리타도 라빌의 이런 면을 닮은 걸까.
“파텔 후작과 함께 유폐시켜라.”
잭슨이 턱을 괸 손을 들어 허공에 휘저었다. 고개를 숙인 기사들이 라빌을 강제로 일으켜 끌고 나간다. 닫힌 문을 바라보다 손가락으로 입가를 감쌌다. 웃음이 나온다.
틀어진 계획이지만 거래는 할 수 있을 거다. 벨리타라면 분명 응하리라.
잭슨이 황좌에서 일어나며 소리쳤다.
“나머지 죄인들은 모조리 목을 베라.”
처리해야 할 일은 쌓여 있고 시간은 없다. 집무실로 향하며 거추장스러운 황관을 벗어 손에 쥐었다.
*
“너는 스물다섯 먹은 애가 생선도 못 발라 먹어.”
“가시가 너무 많잖아.”
식탁에 놓인 생선구이는 처참했다. 아침 일찍 함께 손을 잡고 장을 보러 가서 사 온 생선은 형체도 남기지 못했다. 요리를 준비하려는 하녀들을 말리고 직접 구운 생선이었다.
급히 떠나오느라 챙기지 못했다고 생각했는데 엘라가 야무지게 김치와 된장, 간장과 고추장을 챙겨 줬다. 어쩐지 짐이 무겁더라 했다.
덕분에 아침상은 생선구이와 된장찌개, 나물무침이다. 항구가 있는 덕에 쌀도 쉽게 구할 수 있었다. 으레 먹던 쌀의 식감은 아니었으나 있는 게 어디던가.
벨리타는 산산조각 난 생선을 발라 자신의 밥그릇에 얹고 멀끔한 생선 살을 오웬의 밥 위에 얹었다. 오웬이 민망해하며 숟가락으로 밥을 퍼먹었다.
“오늘도 마법 연습 할까? 요즘 많이 좋아졌잖아.”
“마력이?”
“마력도 그렇고, 네 마음도 그렇고.”
데이비드가 폭언을 쏟아붓고 떠난 지 일주일이 지났다. 보지 않으면 나아지리라 생각했던 게 현실이 됐다.
벨리타가 살아온 현실과 동떨어졌지만, 누구도 벨리타를 모르는 곳에 있으니 외국에 나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오웬과 단둘이 단란하고 소박하게 하루를 시작하고 마감하는 생활도 즐거웠다. 현실도피라는 걸 어렴풋이 느끼고 있지만 악착같이 외면했다.
아침 식사를 마치면 함께 오웬이 내린 차를 마시며 가볍게 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소파에 앉아 마법 서적을 읽는 평화로운 일상. 점심을 먹고 함께 손을 잡은 채 바다를 거닐고 마법을 연습하는 하루 일과가 썩 달가웠다.
벨리타는 이곳에서 정착하여 살아도 좋으리라 생각했다. 오웬이 벨리타의 컵에 물을 따라 주며 미소 지었다.
“벨리타, 넌 마법에 재능이 좀 있는 것 같아. 서클만 더 쌓으면 바다를 가를지도 몰라.”
말도 안 되는 농담이다. 벨리타가 작게 웃으며 마저 생선 살을 발라 오웬의 숟가락 위에 얹었다.
오웬의 말대로 벨리타는 마법을 한 번 성공하고 나자 확실히 능숙해졌다. 세심한 컨트롤로 적은 마력을 나누어 효율적으로 사용할 줄 알았다.
괜히 으쓱해진 벨리타가 나물도 먹으라며 수북하게 쌓인 생선 살 위에 나물을 얹었다. 오웬이 한 입 크게 떠먹는다.
그릇을 다 비운 오웬이 식탁에 턱을 괴고 벨리타를 은근히 바라보았다. 일주일간 몸 상태도 좋아지고 밝아졌다. 이따금 찾아오는 우울은 어쩔 수 없다지만, 벨리타는 확실히 괜찮아지고 있다.
오웬은 지금쯤 황제가 된 잭슨이 제국을 휘젓고 있으리라 짐작했다. 이내 벨리타를 찾아 집어삼키고야 말겠지.
“벨리타.”
“응.”
“우리, 떠날까?”
밥그릇을 숟가락으로 싹싹 긁어 비운 벨리타가 물을 들이켰다. 입을 말끔히 비운 뒤 태연하게 말한다.
“어디로?”
예상은 했지만 깔끔하다 못해 군더더기 없는 대답이다. 오웬이 마법으로 식탁에 놓인 그릇들을 한 곳으로 몰아 놓으며 웃었다.
“어디든. 다른 곳으로 가자. 마법사가 많은 베르멜스 왕국은 어때?”
“멀어?”
“멀지.”
여행 일정을 계획하는 양, 간결한 대화였다. 벨리타는 편하고 살기 좋은 곳이면 어디든 상관없다고 했다. 제국 어디에도 미련을 두지 않은 듯 차분하고 덤덤한 태도였다.
모두가 벨리타를 좋아했지만 벨리타는 아니었던 걸까. 매정하다는 감상이 들기도 했지만 현명했다는 생각이 먼저였다. 떠날 사람이라고 선을 그어두었던 게 지금은 발목을 잡지 않게 되었으니까.
정에 휘둘려 이곳에 남겠다고 하는 것보다 나았다. 제국에 남게 된다면 분명 잭슨과 소르니, 그 외의 것들이 벨리타를 갉아먹을 거다.
식탁에 얹어진 작은 손을 덮어 쥐며 오웬이 살갑게 웃었다.
“빠른 시일 내로 준비해서 바로 떠나자. 며칠이면 충분할 거야.”
“그러자. 편한 대로 해.”
마주 미소 지은 벨리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당연하게 그릇을 치우려고 하는 벨리타를 막을 수 없었다. 수도에 있을 때는 익숙하게 손 하나 까딱하지 않으려 했으면서. 벨리타에 가려졌던 벨리타의 버릇이다.
오웬은 벨리타를 알아가는 과정이 몹시도 즐거웠다. 오웬도 따라 일어서 벨리타가 든 그릇을 빼앗아 들었다.
창문 너머로 데이비드를 태워 보냈던 마차가 돌아오는 게 보였다. 오웬은 마법으로 그릇들을 주방에 옮겨놓았다. 벨리타가 오웬을 돌아보았지만 이미 떠난 후였다.
예상한 미래가 정확히 맞아떨어질 때의 기분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데이비드는 벨리타를 놓지 못한다. 데이비드의 편지와 함께 마차가 돌아왔다. 다시는 보지 말자고 했으면서 영지로 와달라는 절절한 편지. 드문드문 잉크가 번진 자국이 있었다.
안 봐도 훤한 이야기다. 안타까운 건, 안타까운 일이고 벨리타가 돌아가는 건 다른 문제다. 겨우 회복하고 있는 벨리타를 다시 사지로 몰아넣는 건 내키지 않는다.
그래도 말은 해 봐야겠지. 오웬이 편지를 봉투에 다시 집어넣고 주방으로 돌아왔다. 벨리타는 하녀들을 물리고 직접 설거지를 하고 있었다. 하지 않아도 될 일을 굳이 만들어서 하는 건 버릇인가 잡념을 떨치기 위한 발악인가.
벨리타의 뒤에 선 오웬이 허리를 감싸 안았다.
“내가 할게. 좀 쉬어, 응?”
“아냐, 금방 해. 뭐하러 또 왔어.”
“보고 싶어서 왔지. 내가 한다니까.”
가볍게 투덕거렸다. 팔꿈치로 밀어내는 벨리타를 부둥켜안고 놓아주지 않는다. 오웬이 편지를 들어 벨리타의 눈앞에 들이밀었다. 허리를 쑤시던 팔꿈치가 움직임을 멈췄다.
젖은 손을 치마에 대강 닦은 벨리타가 편지를 받아 들었다. 편지 봉투를 열어 편지를 읽는다. 오웬이 벨리타의 볼에 연신 입술을 문질렀다.
“이거 뭐야?”
“편지.”
“누가 몰라. 걔가 왜 편지를 보내냐고.”
다시는 보지 말자면서. 얼마나 됐다고 절절하게 매달리나.
벨리타는 다 읽은 편지를 오웬에게 돌려줬다.
편지를 뒷주머니에 쑤셔 넣은 오웬이 벨리타의 볼에 자신의 볼을 기대 눌렀다. 말캉한 살이 눌린다. 벨리타가 마저 설거지를 이어 나갔다.
“어쩌고 싶어?”
“뭘 어쩌긴 어째. 난 안 가.”
“정말?”
대답이 없다. 선뜻 답할 수 없는 벨리타의 심정을 이해한다. 오웬은 벨리타를 채근하지 않기로 했다. 충분히 홀로 고민하여 결론을 내릴 현명한 사람이고, 어떠한 결정을 해도 응원하고 지지해 줄 자신이 있었다.
기댄 볼을 꾸욱 눌렀다가 고개를 틀어 입을 맞췄다. 감싸 안은 허리를 가볍게 토닥거렸다.
“편하게 생각해 벨리타. 뭘 해도 괜찮아.”
“……너 그러는 거 진짜 짜증 나.”
입술을 부루퉁하게 내민 벨리타가 설거지를 끝내자마자 등을 돌렸다. 순식간에 마주 보게 된 오웬의 멱살을 잡아끌어 입술을 맞댄다.
젖은 손이 축축하게 옷을 적셨지만 오웬은 상체를 숙여 벨리타의 등을 안았다. 쪽, 소리와 함께 떨어진 얼굴이 상기되어 있다. 혀로 자신의 입술을 쓸어낸 오웬이 장난스럽게 미소 지었다.
“너무 설레서 짜증 나?”
“조용히 해. 확 엎어트려 버릴까 보다.”
“난 좋아.”
거듭 볼과 입술, 콧대에 입을 맞춰대는 오웬이 벨리타의 등줄기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렸다.
벨리타가 눈썹을 찡그리며 웃었다. 멱살을 쥐었던 손이 오웬의 손목을 쥐고 당긴다. 얼굴을 들이대며 씨근덕거리는 벨리타가 기고만장하게 떠들었다.
“너 아주 죽었어.”
“죽여 줘.”
한 번을 져 주질 않는다. 드리워진 벨리타의 얼굴을 양손으로 감싸 쥔 오웬이 말갛게 웃는다. 벨리타의 상체가 기울어졌다.
*
이런 걸 바란 적 없다. 가주가 되고 싶다고 했지만 이렇게는 아니었다.
수도 저택에서 도착한 전서구의 내용은 충격적이었다.
유폐란다. 2황자를 지지했다는 이유로 황궁의 감옥에 갇혀 있다고.
데이비드는 공포와 다름없는 상황에 질려 악을 썼다. 열여덟이 된 데이비드는 어렸고, 가족의 상실을 받아들이기에 나약했다.
데이비드에게는 벨리타가 필요했다. 벨리타 외에는 없었다.
“……누님…….”
방구석에 웅크린 데이비드가 잔뜩 갈라지고 메마른 목소리로 벨리타를 찾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