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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이 쓴 로판 소설에 빙의되어버렸다-99화 (99/150)
  • 99화.

    바닥에 몸을 처박고 우는 벨리타를 안아 올렸다. 흐물거리며 몸을 기대온다.

    오웬은 벨리타가 안쓰러웠다. 근래 힘든 일만 닥쳐왔으니 벼랑 끝까지 내몰려 아슬아슬한 수준이다. 오늘만 해도 이미 바다에 걸어 들어가지 않았나.

    오웬은 데이비드가 할 말을 짐작했다. 눈에 띄지 말라는 말을 했겠지. 떠나라고.

    그러지 않았으면 이미 벨리타를 데리고 떠났거나 이 저택에 남았을 거다. 제국의 끄트머리, 항구가 있는 캐브릿 영지는 수도와 한참 멀고 파텔 영지와도 한참이 멀다. 일반 마차를 타고 파텔 영지로 간다면 보름이 넘게 걸릴 거리다. 마법을 걸어 놓았으니 나흘이면 가겠지. 그 시간이면 잭슨은 모든 일을 끝마쳐 놓았을 거다.

    황제가 된 잭슨이 벨리타를 손에 넣으려고 할 거다. 벨리타를 찾지 못하게 숨겨야 한다. 이곳이면 충분하다. 여차하면 배를 타고 떠날 수도 있다.

    오웬은 가냘프게 몸을 떠는 벨리타를 품에 가득 끌어안고 달랬다. 아무도 없는 이곳이 벨리타에게 득이 될지도 모른다는 짐작이 들었다. 마법을 좋아하니 함께 마법을 연구하고 배우고, 바다를 거닐고 잔잔하게 살아가는 생활이 벨리타를 회복시킬 수 있을 것 같았다.

    떠난 데이비드가 돌아와도 벨리타를 보내주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벨리타가 행복해질 수 있다면 황제와 적이 되고 후작가와 척을 져도 괜찮았다.

    수도 마탑주의 아들, 평민이자 끊임없이 성장하는 마법사를 받아줄 왕국과 제국은 널렸다. 원한다면 홀연히 벨리타와 함께 떠나 새 삶을 살게 할 수 있다.

    오웬이 벨리타를 침대에 앉혔다.

    벨리타가 오웬의 품에 파고들며 서럽게 울었다. 긴 손가락이 둥근 뒷머리를 쓰다듬는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어. 괜찮아. 네 탓이 아니야. 데이비드도 화가 나서 더 심하게 말했을 거야. 걔는 아직 어리잖아.”

    셔츠가 젖어간다. 끼니라도 챙긴 게 다행이었다. 쓰러질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니까.

    오웬이 작은 어깨를 부둥켜안고 낮고 청아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네가 원한다면 데이비드 그 녀석한테 꿀밤이라도 쥐어박을게. 벨리타, 넌 최선을 다했고 그 녀석도 행복했어. 상황이 어쩔 수 없었던 것뿐이야. 다 괜찮아질 거야. 다 좋아질 거야. 괜찮아.”

    “……오웬.”

    응, 말해. 듣고 있어. 잔잔한 목소리가 다정하게 맴돈다. 비쩍 마른 손이 옷깃을 잡아 끌어당겼다. 울음에 갈라지고 부정확한 말이 어눌하게 쏟아졌다.

    “너뿐이야……. 나한테…… 너뿐이야…….”

    기쁘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들을 수 있는 최고의 찬사였다. 넓은 세상에 하나뿐이라는 말은 기쁠 수밖에 없었다.

    다만 내몰린 사람에게 듣고 싶지는 않았다. 행복에 겨워서 듣고 싶었던 말이다. 절박하게 기댈 곳을 찾는 거다. 홀로 감당할 수 없는 감정이 버거워서 의지할 사람을 갈망할 뿐.

    오웬은 당연하게 벨리타의 곁을 지킬 거고, 벨리타가 행복해지는 순간까지 함께할 예정이었다.

    천천히 옆으로 몸을 뉜 오웬이 함께 넘어간 벨리타를 끌어안고 등을 다독였다. 시트에 뻗어 나간 머리카락이 엉망이었다.

    숙인 벨리타의 머리에 입을 맞추고 옷깃을 쥔 벨리타의 손을 잡아끌어 입술을 문지른 오웬이 살갑게 웃었다.

    “왜 그런 생각을 해. 너한테는 요리도 있고, 취미도 있고, 마법도 있잖아. 나는 네가 슬퍼도 옆에 있을 거고, 행복해도 옆을 지킬 거야. 나는 언제나 네 편이야. 벨리타, 행복해지자. 우리 같이. 그러기로 했잖아.”

    잘 말했을까. 짧은 생이지만 뱉은 말에 후회해 본 적 없다. 걱정해 본 적도 없다. 벨리타가 상처받을까, 위로를 얻지 못할까, 걱정하며 말을 곱씹은 건 처음이다. 벨리타로 인해 성장하는 스스로가 신기했다.

    오웬이 벨리타의 양 볼을 감싸 문질렀다. 벨리타가 고개를 든다. 콧물까지 흐르는 얼굴마저 귀엽다. 오웬이 얼굴 곳곳에 입을 맞췄다.

    “잘할 수 있을 거야. 응?”

    “……응.”

    뽀뽀해 줘, 부은 얼굴로 입술을 내미는 벨리타가 사랑스러워 웃음을 터트린 오웬이 고개를 숙였다. 저녁노을이 꼭 벨리타의 머리와 같았다.

    *

    “영애를 위한다면, 파텔 후작가는 건드리지 마세요.”

    “내가 왜?”

    목과 신체가 분리된 황후의 황관이 조슈아의 무릎까지 굴러왔다. 피가 물든 금빛 머리카락은 축축하다. 죽음까지 멀지 않았다.

    끝을 감지한 몸은 공포에 떨고 숨은 가빠왔다. 질끈 묶인 손목은 밧줄에 쓸려 따가웠고, 억지로 힘에 눌린 무릎과 어깨는 욱신거렸다.

    포식자 앞에 놓인 초식동물, 먹이사슬의 하위에 놓인 조슈아는 황태자가 아닌 황제를 똑바로 쳐다봤다.

    “감당하실 수 있을까요?”

    “벨리타는 내가 감싸면 된다. 너 따위가 걱정할 일이 아니야.”

    오만방자한 대답이다. 벨리타를 탐하고 원한 나머지 그 외의 것을 보지 못하게 된 잭슨. 우습다. 이딴 것도 황제라니. 조슈아가 비웃었다.

    잭슨의 칼이 조슈아의 목덜미에 드리워졌다. 서늘한 기운이 목에 닿는 게 느껴졌다. 어차피 죽음을 각오했으니 두려운 건 없다. 잃을 것도 없다.

    조슈아가 비틀려 올라간 입매를 드러냈다.

    “죽지 못하는 영애가, 가족을 모두 잃어도 과연 살아 있을까요?”

    “말도 안 되는 궤변이군.”

    “잘 생각해 보세요. 억지로 갖는다고 한들, 영애가 전하께서 바라는 모습을 유지하실지.”

    잭슨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바라지 않는다. 잭슨이 원한 벨리타는 곧잘 화를 내고 다그치면서도 다정한 온기를 나누어주는 자유로운 벨리타였다.

    칼끝이 닿은 목에서 피가 옅게 흘러나온다. 조슈아는 알싸한 감각이 들어도 말을 멈추지 않았다.

    “파텔 후작이 돌아선 이유도 전하께서 영애를 함부로 대한 탓이잖아요. 어떤 아비가 딸을 다치게 하고 힘들게 하는 남자를 반기겠어요? 영애도 가족이 죽으면 전하를 전처럼 아껴 주실까요? 영식과 각별한 남매 사이에, 부모와도 친밀한 영애가 전하를 원망하지 않을 수 있나요? 전하께서는 영애의 원망을 들으며 살 수 있어요?”

    맞는 말인데 설득력이 있어서 괘씸하다. 잭슨이 칼을 거두었다. 박혀 있던 칼날이 떨어지자 피가 흘러내려 셔츠와 재킷을 적셨다. 확실히 일가족을 죽이면 편하게 벨리타를 손에 넣을 수 있지만 벨리타가 원하지 않겠지.

    잭슨은 신경질적으로 발로 황제의 머리를 걷어찼다. 황제의 머리가 벽에 부딪혀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전하. 파텔가는 손대지 말아 주세요. 이미 영애는 많이 아프잖아요. 한 달째 앓아누워 있잖아요. 가족까지 없으면 어떻게 버티겠어요.”

    조슈아가 할 수 있는 마지막 애원이었다. 죽음은 면치 못한다. 그러니 할 수 있는 일을 했다.

    근거 있는 설득에 납득한 잭슨이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계획이 어그러졌다. 무지한 상태로 가주가 된 벨리타를 삼켜 황후의 자리에 앉히려는 계획이.

    가주의 일을 감당하지 못하는 벨리타를 어르고 달래 곁에 두고 끝내 혼인하려고 했다.

    비열하고 비겁한 술수인 것도 안다. 이 방법밖에 없었다. 비틀어진 길밖에 몰랐다.

    벨리타가 곁에서 도와준 덕에 사람답게 살고 있지만 살아오며 쌓아 왔던 비인간적인 면모는 건재하다. 그따위 술수로 살아왔고 배워왔으며 견뎌왔다. 탐욕스럽게 집어삼키는 법밖에 모른다.

    밑바닥의 끝이라고 얕봤던 조슈아에게 일침을 들은 기분도 더러웠다.

    인정할 건 인정한다. 효율적인 방법이 아니었다는 걸. 잭슨이 고개를 끄덕이자 조슈아의 낯에 환한 기색이 어렸다.

    “좋은 조언이었군. 보답을 하나 해 주마. 네놈의 유언을 들어주지.”

    유언. 가족도 없고 긴밀한 친우도 없다. 기를 쓰고 일궈온 상단마저 죽은 황제를 위한 것이었다. 가진 게 없는 조슈아는 유언도 없었지만 딱 하나.

    “제 크라바트 장신구를, 영애에게 전해주세요. 제가 정말 많이 사랑했다고, 드디어 보답하게 되어 기쁘다고 전해주세요.”

    선물 받은 장신구. 잘 쓰고 있는 모습을 보여 주고 싶었는데. 마지막까지 간직하고 있다는 사실은 전해줄 수 있지 않을까.

    조슈아의 유언을 잠자코 듣던 잭슨이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면 됐다. 충분하다. 잭슨의 날카로운 칼이 높이 치솟았다. 허공을 매섭게 가르며 목을 긋는다. 날이 선 칼날이 깊이 파고들어 스치자 피가 솟구쳤다.

    바닥을 적시고 잭슨의 하체를 뒤덮는다. 조슈아는 눈을 감았다.

    저택에서 처음 만나 얼떨떨하게 마주 잡았던 손을 기억한다. 잠옷 바람으로 뛰쳐나와 선물을 안겨 주던 천진한 모습을 기억한다. 억지로 김치라는 걸 먹이고, 과거에 갇혀 웅크리던 나를 보듬어 주던 따스한 품을 기억한다.

    일부러 피하던 나를 위해 디저트를 선물하던 상냥함을 가슴에 묻었다. 테라스에서 벌겋게 얼은 얼굴로 따스한 구원을 해 주었던 벨리타를 새겼다.

    떠나지 말라고 울며 매달리던 날 내치지 않고 받아준 다정함. 폭력의 흔적이 남은 손을 안타까워하고 나서서 치료해 주려 애쓰던 온정. 보잘것없는 나에게 끝까지 곁을 내준 벨리타.

    선물로 받은 신발, 아직도 쓰지 못했어요. 닳을까 봐 무서워서 신을 수가 없었어요. 흉터조차 남지 않은 손을 보고 기뻐해 주던 미소를 잊지 못했어요. 파티에서 췄던 춤, 가까이 닿을 때마다 풍겼던 달큰한 향. 생기 넘치는 눈까지 남아 지워지지 않아요.

    함께 산을 오르던 그 날부터 내 인생에 빛이 들었어요. 황태자와 공녀, 차기 마탑주를 곁에 두면서도 하찮은 날 계속 챙겨 주고 곁을 내줬던 당신이 좋았어요.

    가진 게 없는 내가 당신을 원한다는 자체에 죄를 짓는 기분이 드는 순간마다, 당신이 나에게 미소를 지어 주고 날 봐줬죠. 그것만으로도 황홀해지고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 들었어요.

    날 좋아하지 않아도 좋아요. 불쌍히 여겨도 행복해요. 당신이 내 손을 잡아준 그 순간부터 난 당신의 신자이고 당신은 나의 신이자 구원자예요. 내가 영원히 모실 신.

    받은 건 이다지도 수두룩한데, 보답한 건 없어서. 내가 해 줄 수 있는 보답은 이것뿐이라서 미안해요. 당신을 지켜줄 수 있는 사람이 많아서 다행이죠. 은혜를 갚기에는 내가 너무 보잘것없어서, 황제에게 살려달라고 비는 것밖에 할 수 없었어요.

    부디 행복해지세요. 나에게 행복을 안겨 준 당신이 언제나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벨리타. 나 따위지만, 사랑하고 있어요. 앞으로도 그럴 거예요.

    내 사랑. 내가 평생 사랑할 신.

    고마워요.

    금발에 피가 번져 붉은빛을 띠었다. 단정히 묶은 머리카락은 바닥에 흩어지고 육체는 나동그라졌다.

    단정한 차림새의 조슈아가 갈라지는 신음을 읊조리다가 호흡을 멈췄다. 예리한 칼끝이 벌어진 목 아래에 놓인 장신구를 뜯어냈다. 보석이 화려하게 박힌 장신구가 바닥을 굴러 잭슨의 발아래에서 멈춘다.

    “황제와 황후의 곁에서 죽다니, 영광스러운 죽음이군.”

    짧은 감상을 남긴 잭슨이 조슈아의 피로 범벅이 된 장신구를 손에 쥐었다. 덕분에 더 좋은 길을 찾을 수 있었다.

    잭슨이 칼을 휘둘러 묻은 피를 털어내고 칼집에 집어넣었다. 엉망이 된 알현실을 훑어보고 대기하고 있는 길드원들과 기사들에게 소리쳤다.

    “에르테를 추적해라. 죽여도 상관없으니 목이라도 가져와. 그리고 에르테의 세력을 잡아들여.”

    파텔 후작도 데려와라. 잭슨이 시체 사이에 발을 내디디며 나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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